도박자금 부족해 친구 돈 뺏기도
번 돈 술·담배 등 유흥으로 탕진
"스스로 깨닫게 해 행동변화 유도를
빚 문제도 부모가 갚아주기 지양을"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 내 게시된 '회복의 여정' 안내판.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계별 프로그램과 참여자들의 메모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조윤화 기자
청소년 도박의 위험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느끼는 도박 행위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돈보단 중독성에 있어서다. 자제력이 부족하다 보니 성인보다 더 충동적으로 도박 중독에 빠지는 성향이 강하다. 청소년들이 도박 범죄의 문을 다시 두드리지 않기 위해선 주변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지가 절실하다. '심리적 회복 공동체'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취재진이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를 찾아 그 '치유의 현장'을 직접 들여다봤다.
5일 저녁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를 찾은 청소년들이 자조모임을 갖고 있다.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 제공
수요일 저녁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를 찾은 청소년들이 도박중독 관련 자조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 제공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에 붙어있는 '시민참여형 범죄예방 프로그램-청년추진단 3기' 활동가들이 그린 도방범죄예방 포스터. 조윤화 기자
◆"수업중에도 베팅하는 상상만"
지난 5일 저녁 7시쯤, 도박 중독을 경험한 지역 내 청소년들의 일상 회복을 돕는 전문 기관인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를 찾았다. 들어서자 편한 복장의 학생 10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 근황을 묻고 있었다. 수요일인 이날은 도박을 끊었거나 끊기 위해 노력 중인 학생들이 매주 모여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는 '청소년 자조 모임'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5일 저녁, 대구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에서 최정환 상담사가 센터를 찾은 청소년과 개별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조윤화 기자
이날 청소년 자조모임이 끝난 뒤, 기자는 해당 모임에 참여했던 학생 두 명을 별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도박 중독의 무서움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지난 6월부터 센터에 다니고 있는 18살 김민석(가명)군은 중 2때 처음 도박에 손을 댔다. 친구가 온라인 도박을 하는 걸 보고 생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그 뒤로 1년 넘게 김 군은 용돈을 몽땅 도박 자금에 썼다. 돈이 떨어지면 친구의 돈을 뺏기도 했다.
김 군은 돈을 불리는 것보다 도박 행위 자체에 더 큰 재미를 느꼈단다. 그는 "바카라, 그래프게임, 소싸움, 스포츠 토토까지 안 해본 게 없다"며 "학교에서 수업할 때도 도박 생각밖에 안 났다. 계속 머릿속에서 베팅에 성공하는 그림만 그려졌다"고 했다.
온라인 도박 베팅을 통해 '큰 돈'을 만질 때도 많았다. 일례로 판돈 20만원으로 시작해 '10깡(10번 연속 최대 금액을 걸어 올인)'에 성공, 하루에 2천만원을 번 적도 있다고 했다. 놀란 기자의 표정에 그는 "도박하는 청소년들 중엔 그 정도 돈을 번 친구는 꽤 많다"며 "그렇게 따낸 돈은 술·담배, 빚 갚기, 숙소비 등으로 금세 사라진다"고 했다.
고교 1학년이 되자 김 군의 빚은 갈수록 불어났다. 도박을 하며 큰 돈을 번 친구들이 빌려줬고, 이들에게서 빌린 금액이 누적됐다. 김군은 "20살이라고 속이고 건설 일용직으로 일했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 실장으로 일한 적도 있다"며 "보이스피싱 등으로 돈을 벌까 고민도 했지만, 그것까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군은 부모 권유로 센터를 찾은 뒤부터 도박을 하지 않는다. 현재 일주일 용돈 7만원을 모두 빚갚는 데 쓰고 있단다. 남은 빚은 70만원 정도. 그는 "어머니가 제 1년치 통장 내역을 보고, 그간 용돈을 받는 즉시 도박사이트에 입금한 사실을 아셨을 때 많이 우셨다"며 "그 순간 '이제는 정말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터에서 꾸준히 상담받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온라인 도박사이트 회원가입 화면. 이름, 전화번호, 생년월일, 계좌번호 등만 입력하면 미성년자도 관계없이 가입이 가능하다. 온라인 도박사이트 화면 캡처
◆"빠져들수록 돈 감각이 사라져"
18세 전지훈(가명)군이 처음 도박에 발을 들인 건 지난해 3월.그는 "온라인도박을 하던 동네 아는 동생에게 5만원을 줬더니 그걸 25만원으로 불려서 가져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게 악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직접 온라인 도박을 했다. 이름·생년월일·전화번호·계좌번호만 입력하면 바로 사이트 가입이 가능했다. 한달 용돈 15만원, 주 3일 고깃집 서빙 아르바이트로 버는 70여만원까지 모두 도박 자금으로 썼다.
전 군은 "도박에 빠질수록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며 "대구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며 택시비 25만원을 지불하거나, 한정판 신발을 250만원에 구매하는 등 돈을 물 쓰듯 썼다"고 했다.
중독 증상이 깊어질수록 가족 간 갈등도 커졌다. 친구에게 빌린 도박 자금 10만원을 어머니가 대신 갚아주려 하자, 아버지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순간 부아가 치밀어오른 전 군은 홧김에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 일로 지난 6월 두 달간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전 군은 "입원 후 모든 도박 사이트 계정을 탈퇴하고 휴대전화도 폴더폰으로 바꿨다"며 "상담 선생님이 인형뽑기도 도박 성향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조차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입원 기간 동안 강제로 도박을 끊다보니 지금은 하고 싶은 욕구도 크게 사라졌단다. 다행으로 보였다. 매주 센터에 오는 게 귀찮긴 하지만, 중독을 끊는 데 도움이 되니 계속 다니고 있다는 전 군. 빨리 그가 건강하게 학업으로 복귀하길 기대해 본다.
◆상담사의 조언 "보호자 개입 필수"
센터에서 만난 최정환 상담사는 "오늘은 아이들이 한 주 동안 도박을 다시 했는지 점검하고, 충동이 올 때 어떻게 버텼는지 서로 경험을 나누며 조언을 주고받는 자리"라며 " 도박 이야기를 이 곳에선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서로의 얘기를 거울삼아 다시 중심을 잡는다"고 했다.
모인 학생들은 도박 행위와 별개로 다른 2차 문제도 안고 있었다. 일부 학생은 우울증·ADHD 등 정신과 치료를 병행했다. 어떤 학생은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돈을 뺏어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최 상담사는 "도박 중독에 빠진 아이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님 패물을 팔거나 중고 사기, 문서위조 등 2차 범죄로 번지기 쉽다. 특히 여성 청소년들의 경우, 성적 위험까지 노출될 수 있어 더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도 자조 모임이 열리는 이 작은 공간엔 '언제든 도박을 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희망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최 상담사는 "학생이 도박을 멈추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 결심을 먼저 지지해 주는 게 중요하다"며 "도박이 자신의 미래와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살펴보게 하고, 스스로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박 중독에 빠진 청소년들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상담사의 눈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도박 중독 치료에서 환경 통제는 절대적이다. 학생들의 도박 자금 출처를 모니터링해 신속차단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가 문제를 발견했다면 센터를 신속히 방문해 체계적으로 중독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빚 문제도 부모가 대신 갚기보다는 청소년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부연했다.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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