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한국에서 빼빼로 데이로 알려진 11월11일은 캐나다 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 참전용사 추모의 날) 공휴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이 1918년 11월11일이었기에 정해진 날짜인데 비단 1차 대전 뿐 아니라 한국전쟁 등 여러 전쟁에 캐나다를 대표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사람들, 재향군인 및 현역군인의 기억과 유산을 기리는 날이다. 오전에 열리는 큰 규모의 기념식을 비롯해 '리전'(Legion)이라 불리는 캐나다 왕립군인회 지부들에서 하루종일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H가 리전 행사에 같이 가겠냐고 해서 흔쾌히 나섰다. 운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2년 전부터, 이런 류의 외출에는 대부분 친구와 지인들이 라이드까지 해결해주는데 이번에도 H가 그 친구 L에게 부탁해주었다.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한번 만난 적은 있다는데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인 L과 도착 전 길묻는 전화통화에서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다. 리전에 도착하니 흰머리 가득한 멤버들이 음료수며 점심판매 메뉴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많은 한국인들의 귀에도 익숙할 'Scotland the Brave(용감한 스코틀랜드)'란 곡이 스코틀랜드 민속의상을 입은 연주자들의 백파이프 연주로 웅장하게 울려퍼지며 시작된 행사는, 시장 및 주요인사들의 인사말을 거쳐, 다양한 민속댄스 스쿨 학생들의 춤 공연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은 볼룸댄스까지, 엄숙한 행사에 사람들이 즐겁고 유쾌하게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오후엔 H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보드게임을 했다. 새로운 승부기술을 배우느라 집중했더니 한시간여 만에 "나 배고파" 소리가 절로 나왔다. H가 슬그머니 일어서며 "간단히 저녁 차릴테니 내 순서되면 알려줘"라고 했다. "어머, 밥 달라고 한 얘기 아니야. 그냥 앉아 있어." H는 "괜찮아"하며 몇 번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더니 20여분 만에 근사한 저녁상을 차려냈다. 뭔가 마음이 울컥해졌다. 어떻게 게임하다 슬그머니 가서 순식간에 이런 상을 차려내지? L이 말했다. "그러게, 니가 한 거라곤 배고프다는 한마디 뿐인데." 그러게. 아침에 니가 나 태워주러 온 것도 그렇고, 난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이 낯설고 물 선 도시에 와서 참 외롭고 힘들었는데 알고 보면 이렇게 큰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구나. 이런 게 기적이지.
연말 한국행 항공권을 원하는 날짜에 못 구해 도쿄 경유하는 노선으로 정하고 20년쯤 못 본 일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일본식 온센(Onsen, 온천)을 꼭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친구가 본인 동네로 와서 자기네 가족들과 함께 온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숙소도 위치 적당한 곳 알아봐 주겠다더니 조금이라도 도움되었으면 좋겠다며 본인 보유 포인트까지 써가며 최대한 할인된 가격으로 예약해주고.
'중년'이 되니, 어릴 때 꿈꾸던 삶을 떠올리면, 지금의 삶과 그 삶을 사는 내가, '별 볼일 없고 시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삶에도 이런 기적같은 순간들이 있으니 좀 시시한들 대수랴. 대구 계신 아빠는 홍시를 잘 드신다. 대봉감 한 상자 주문해드렸다. 홍시될 때까지 베란다에 내놓고 하나씩 꺼내 드시는 재미에 한동안 기쁘실 테고, 나 올때까지 너무 무르지 않도록 몇 개 남겨놓으려 애쓰시겠지. 죽을 때까지 가슴에 남을 건, 이 사람들, 그들과의 추억들 아니겠는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