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을사년의 두 판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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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26 06:00  |  수정 2025-11-25 19:09  |  발행일 2025-11-25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지난 11월 17일은 120년 전 을사늑약 체결일이다. 올해가 을사년이니, 2갑자 전 1905년이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이니 거꾸로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했다가 김영삼 정부 때 국가기념일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1갑자 전 1965년 6월에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졌으니, 이래저래 한국과 일본은 을사년과 인연이 깊다.


120년 전 을사년 이달,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은 대신(지금의 장관)으로 오르기 전까지 모두 판사를 겸하거나 거쳤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판사 겸임 전북관찰사,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4명 모두 평리원 재판장 또는 재판장 서리 노릇을 했다. 평리원은 고종이 1895년에 설립한 근대사법기관이다. 지금의 대법원 격이며 재판장은 대법원장인 셈이다. 이 중 권중현은 을사늑약에 서명했다. 이어 법부대신으로, 1907년 군부대신으로 의병을 진압하는 등 승승장구해 일본 정부의 욱일대수장과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같은 평리원 재판장 서리 출신이라도 5적과 달리 정반대의 길을 간 애국지사도 있다. 바로 구미 출신 구한말 독립운동의 큰별 왕산 허위 선생이다. 왕산은 매국노 권중현과 동갑내기(1854년생)다. 1904년 그해 둘 다 평리원 재판장을 잠시 역임했다. 이듬해 비서원승(대통령 비서실장)직을 맡았으나 을사년에 사직했다. 1907년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왕산은 전국의병 13도창의 총대장으로서 서울 진공작전을 펼치다 일제에 체포됐다. 1908년 권중현이 의병을 평정한 공로로 일본 왕실의 최고 훈장을 받던 해, 왕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20년이 지난 을사년 초, 문형배 판사를 비롯한 헌법재판소 판사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최근에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재판부 소속 두 판사가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12·3 내란 혐의 재판을 전담한 지귀연 판사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 재판을 맡은 이진관 판사다. 한 살 터울인 둘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법관이 됐다. 지난 20여년 동안 판사 생활과 판결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내란 혐의 재판장으로서의 품격과 처신, 역할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판사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서 장삼이사와 같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검사와 변호사 등 이미 법조계 인물 전반에 대한 기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지귀연 판사는 윤석열의 구속기간을 날짜 단위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함으로써 희대의 판결을 내린 법기술을 시전한 바 있다. 룸살롱 접대 의혹에다 예능 프로그램 사회자와 같은 가벼운 스타일로 재판을 진행하면서 법원과 법관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있다. 이에 비해 이진관 판사는 계엄 당일 대통령실 국무회의 CCTV 공개 후 특검에 한덕수를 내란 우두머리 방조자에서 내란 주요 임무 종사자로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다. 그의 엄숙하고 진중한 태도는 법정에서 확인된다. 이하상·권우현 같은 몰지각한 법꾸라지 변호사에 감치명령을 내려 법의 단호함과 준엄함을 보여줬다.


12·3 계엄 이후 국민들은 지금까지도 눈을 부릅뜨고 법정에서의 생중계를 주시하고 있다. 법관은 국민으로부터 사법권을 위임받은 신탁자이기에, 행정부나 입법부와 같이 선출된 권력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시대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두 판사가 왕산의 길을 갈지, 권중현의 길을 갈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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