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5> 우광훈의 '어린 음악대의 탄생-아동문학가 김성도 스토리 (경산)'
Story Memo
아동문학가 겸 동요 작곡가인 김성도는 1914년 경산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하양초등과 계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8·15 광복 이후 대구로 돌아와 계성고와 계명기독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교단에서 보냈다.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소질이 뛰어나 계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아동잡지 '별나라’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를 발표했다. 특히 1934년에 작사·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전 국민이 즐겨 부르는 동요가 됐다. 또 어린이들의 읽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 '안데르센전집’을 번역해 국내에 처음으로 안데르센 동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영남일보의 '김성도 스토리’는 그의 대표작인 '어린 음악대’를 작사·작곡하게 된 배경을 주요 모티브로 재구성했다.
● 도움말 : 아동문학가 하청호
1935년 경성(京城) 연희전문학교 교문 앞. 빛바랜 교복 차림의 한 사내가 벤치에 앉아 손에 든 편지를 읽고 있었다.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 연필로 꼭꼭 눌러 쓴 향서의 내용은 더없이 평이했다. 가족들의 일상에 관한 세세한 묘사와 더불어, 사내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소소한 질문들. 하지만 사내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사내의 머릿속은 어린 시절 동생들과 어울려 보리방아 찧던 일이며, 금호강변에서 멱 감던 일 등 그리운 옛 추억들로 가득했다.
나이는 스물 둘. 눈에 띌 만큼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아직 중학생이라 해도 될 만큼 앳돼 보였다. 사내 옆에는 다양한 종류의 문예지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1932년, 사내는 열아홉이란 나이에 주요한이 편집하는 잡지, '동광(東光)’이 주관한 전국아동문예콩쿠르에서 '우주의 빛’이란 시(詩)로 입선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동요 '강아지래요’가 ’신가정(新家庭)’이란 잡지에 연거푸 입선함으로써 아동문학을 향한 자신의 꿈을 맘껏 펼쳐나갈 수 있었다.
'나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리라….’
사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어린이’란 잡지를 펼쳐들었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소년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교문 쪽을 향해 달음질치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들은 잔디밭을 곧장 가로지르더니 광장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한껏 재잘거린 다음 양팔을 휘저으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봄날의 고양이처럼 서로의 뒤를 쫓고, 놀라 도망가고, 마구 뒤엉키는…. 소년들의 움직임은 더없이 역동적이었고 자유로웠다. 간간히 일본 순사의 탁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기모노를 걸친 여성들이 게다를 끌며 소년들의 옆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메마른 가로등 앞. 한 소년의 행동이 수상하였다. 소년은 여느 소년들과는 달리 상가(商街)가 시작되는 사루비아 화단 옆에 외로이 서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암막 위를 비추는 서치라이트처럼 강렬했고, 소년의 얼굴은 하얀 분을 잔뜩 칠한 가부키 배우처럼 더없이 희화적이었다.
소년은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자신의 주먹을 입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리고 나팔을 불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기기를 반복하였다. 지그시 감은 눈과 붉은 입술, 높푸른 하늘과 투명한 공기, 희고 가는 팔목과 조그마한 손. 그렇게 마임 형식으로 시작된 연주는 실연처럼 강렬한 가락과 리듬으로 변하여 사내의 귓속을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곱디고운 음(音)의 향연…. 그 소리는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사내는 밀려드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교문 앞 그늘에 모여 있는 소년들을 불렀다. 소년들은 사내의 부름에 잠시 쭈뼛쭈뼛 거리더니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귀염성 있는 이목구비에 검게 탄 피부는 더없이 건강해 보였다.
“쟤는 왜 저렇게 혼자 있는 거니?"
사내가 화단 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소년들은 겁에 잔뜩 질린 듯한 얼굴로 사내의 교복만을 힐끔힐끔 훔쳐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난 조선인이야. 너희들과 똑같은."
사내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으며 까까머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식민통치는 더욱 조직화되고, 제국의 폭압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순사복만 봐도 오줌을 지리던 아이들이 생겨날 지경이니, 교복에 겁을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너희들과 떨어져 노는 게 이상해서 물어보는 거야."
사내가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머금자, 그제야 소년들은 '저 아이의 아버지가 조선혁명군의 일원이었다는 것, 흥경성전투에서 그만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는 것, 그날 이후 저렇게 매일 군악대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까지 세세히 늘어놓았다.
'그랬구나….’
사내는 짐짓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소년에게로 돌렸다.
그림자 한점 없는 광장, 한가운데였다. 소년은 이번엔 어디서 주워 왔는지 둥근 차돌을 양손에 들고 탁탁 부딪히며 광장 한가운데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북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소년은 잠시 행진을 멈춘 다음 차돌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더니 다시 주먹손으로 나팔부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소년은 나팔수와 고수(鼓手)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갔다. 얼굴은 여전히 태양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고, 행인들의 시선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순간, 소년의 친구들이 소년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더니 소년 뒤에 일렬로 늘어섰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얼굴로 소년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보았는지 바이올린, 탬버린, 트럼펫, 심벌즈, 캐스터네츠, 플루트, 작은 북…. 소년의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소년의 기행(奇行)을 조롱하려는 것인지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들이 이뤄내는 화음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훌륭한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망국의 아픔 따윈 전혀 느낄 수 없는, 동심(童心)만이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광장의 축제요, 희망의 송가였다.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어른들은 아무도 소년악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린 제국의 황민들은 소년악단의 음악에 귀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다. 굴욕과 비관과 염세로 점철된 그들의 고단한 삶이 자신의 눈과 귀마저 멀게 한 것이다. 그렇게 소년들의 염원과 희망으로부터 단절된, 그들의 절망은 깊고도 어두웠다.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소통의 부재, 관심의 부재가 아니라 시선의 부재를 탓해야 했으리라.
잠시후 소년이 앞장서서 행진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친구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따따, 뚜뚜, 쿵작작, 피피리….
흥에 겨운 악단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순간, 사내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재빨리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메모장과 볼펜을 꺼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쿵작작 쿵작작 둥근 차돌로
쿵작작 쿵작작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끝낸 사내는 곧장 교내에 있는 피아노실로 달려가 자신의 시에 곡을 붙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학장인 백낙준 박사의 도움으로 작곡공부를 한터였다. 그렇게 곡이 완성되자, 사내는 인근 소학교로 자신의 노래가 담긴 악보를 인쇄해 돌렸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경성방송국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자신을 '이하윤’이라고 밝힌 남자는 사내가 작곡한 '어린 음악대’를 어린이 특집방송에 내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하윤이라면 경성에서는 꽤 알려진 방송인이자, 시인이요, 문학평론가였다.
“마지막 노랫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소"라고 이하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른이란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순간, 사내는 벅찬 감동에 사로잡혔다. 작가와 독자, 창작과 감상 사이에서 오는 공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열망이 담긴 언어가 결코 혼잣말이 아니었다는 것, 이 암울한 시대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불굴의 의지요 노래라는 것, 침묵과 순응조차 공감을 만나면 외침이, 아니 조그마한 함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광복을 향한 잰걸음은 언제 어디서나 진행 중이란 사실이었다.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 기획 : eride GyeongBuk동요 '어린 음악대’의 노랫말이 적혀 있는 김성도 노래비. 1988년 김성도를 기리기 위해 경산문학회가 그가 다녔던 하양초등학교에 세웠다. 1974년 대구청년회의소가 주관한 아동백일장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아 심사평을 하고 있는 김성도의 모습. (영남일보 DB)
201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