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3] 현풍 솔례마을 입향조 곽안방·충렬공 곽준·홍의장군 곽재우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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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8   |  발행일 2020-06-18 제12면   |  수정 2020-12-01
청백리·임진왜란 충신으로 '12정문' 현풍 곽씨 가문을 빛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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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곽안방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양서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45년 이후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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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위치한 예연서원은 망우당 곽재우와 충렬공 곽준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대구 달성군 현풍읍 솔례마을 입구에는 좀처럼 보기드문 규모의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있다. 충신 1명, 효자 8명, 열부 6명을 기린 12정문(旌門)이다. 한 가문에서 충(忠)·효(孝)·열(烈) 삼강(三綱)의 정신을 실천한 이가 15명이나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유교문화 사회에서 삼강은 최고의 덕목이었던 만큼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문삼강 12정문'을 배출한 가문은 바로 현풍 곽씨다. 시조 곽경(郭鏡)이 현풍에 터를 잡은 뒤 시대별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특히 솔례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곽안방(郭安邦)을 비롯해 충렬공 곽준(郭䞭),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우리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올곧은 정신은 수백년 세월을 관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 인물 3편'에서는 곽안방과 곽준, 곽재우의 삶에 대해 다룬다.

'조선 청백리 교과서' 곽안방
성품 곧고 강직한 달성의 대표 인물
해남 현감 시절에 선정 베풀어 명성

'일문삼강' 실천한 충렬공 곽준
친구 김면이 의병 일으키자 힘 보태
왜군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최후

'왜군을 노루 쫓듯' 망우당 곽재우
임진왜란 일어나자 곧바로 의병 활동
유격전 펼쳐 현풍·창녕 일대서 큰 승리


◆조선시대 청백리의 교과서

곽안방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멸실됐으나 성품이 곧고 강직한 청백리(淸白吏)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명환록(名宦錄)에 따르면 '청백하기가 빙옥(氷玉)같이 깨끗해 벼슬을 그만두고 필마행장(匹馬行裝)으로 돌아올 때는 나는 듯이 가벼웠다'고 한다.

곽안방의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자(字)는 여주(汝柱)다. 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낸 곽득종(郭得宗), 어머니는 나사선(羅斯善)의 딸 수성 나씨(壽城 羅氏)다.

그는 세종 말기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됐으며, 1455년(세조 1)에는 세조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녹선됐다.

무신인 곽안방은 외관직(外官職)에 있으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해남현감 시절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덕행이 높아 아전(衙前)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우러렀다고 한다. 여지승람 해남현(海南縣) 명환(名宦)에는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익산군수 시절에는 높은 성품을 인정받아 청백리에 오른다. 청백리는 관직 수행 능력은 물론 청렴·근검·도덕·경호·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그 시대 최고의 영예로 통했다.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익산군수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다. 당시 그는 자신의 종자(從者)가 관아의 자물쇠 하나를 허리춤에 찬 것을 보고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라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후한(後漢) 시대 양속(羊續)이 태수로 있을 때 한 벼슬아치가 생선을 선물하니, 그 생선을 처마에 매달아 놓아 이를 경계했다는 '현어(懸魚)'와 비유될 만한 일화다.

벼슬에서 물러난 곽안방은 달성 현풍 솔례마을에 입향한다. 제자백가를 관통하고 음양·지리의 서적에도 능통했던 그는 솔례마을에 거주하면서 '산수가 웅장하고 선명해 맑은 기운이 모였으니 영특한 자손이 반드시 많이 태어나리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 솔례마을 입구에는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이라 새겨진 문훈비가 자리 잡고 있다. 충·효를 대대로 가업으로 삼고, 청렴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는 곽안방의 가르침이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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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례마을 뒤편 언덕배기에 위치한 추보당. 동쪽 문 위에는 '청백가성', 서쪽 문 위에는 '충효세업'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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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서원 강당 오른편에 위치한 사당인 청백사에는 곽안방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충·효·열 '삼강'을 실천하다

곽안방이 솔례에 터를 잡으면서 예언했듯이 후손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됐다. 현손(玄孫)인 곽준도 그중 하나다. 곽준의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유가읍 가태리에 세워진 신도비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별났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주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특히 일체의 외물에 욕심이 없어 처자(妻子)가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태연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면서다. 친구인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힘을 보탰다. 이때 경상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곽준의 현명함과 군공(軍功)을 조정에 보고했고, 그는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에 임명됐다. 이듬해 병란과 심한 흉년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지만 곽준이 관할한 고을에서 만큼은 그 피해가 덜했다고 한다.

1594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한 그는 또 한 번 전쟁을 치른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황석산성(黃石山城) 방어에 나섰다. 당시 곽준의 상관이던 백사림(白士霖)은 산성을 둘로 나눠 험준한 북쪽은 자신이 맡고, 평지에 가까운 남쪽은 곽준이 지키도록 했다. 왜적들은 공략이 쉬운 남쪽부터 침공해 들어왔다. 군사 수와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 곽준과 부하들은 용감하게 맞서 방어해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아군은 왜군의 기습에 무너지고 말았다. 적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백사림이 도망치자 북쪽을 통해 다시 쳐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곽준은 끝까지 싸우다 죽기로 작정했다. 큰아들인 이상(履常)과 둘째아들 이후(履厚)도 아버지와 함께 남길 원했다. 이에 그는 "나는 직책이 있으니 마땅히 성을 사수를 해야 하나 너희는 피란하라"고 했으나 두 아들은 "아버님이 구국을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부친을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겠습니까"라며 호위하다 함께 참해(斬害)를 당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상의 부인 거창 신씨는 남편을 따라 성안에서 자결하고, 곽준의 딸도 그의 남편이 싸움터에서 전사하자 바로 목을 맸다. 이러한 순사(殉死)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는 정문을 지어 표창할 것을 명했다.

◆왜군을 노루 쫓듯 한 의병장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경남 의령군 유곡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그는 16세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인 김행(金行)의 딸과 혼인했다. 조식의 문인이기도 한 곽재우는 18세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병법서를 공부해 문무에 능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에는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 북경에 다녀왔는데 이때 가져온 비단이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됐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로 인해 파방(罷榜)됐다. 이듬해에는 아버지를 잃고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임진년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없이 행동에 나섰다. 그의 봉기는 호남·호서의 의병보다 한 달 정도 빠른 기병이었다.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갔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현풍·창녕 일대에서 잇따라 왜군을 격파해 왜군의 진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진주성·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다. 그가 구사한 전술은 유격전이었다. 위장·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해 무찔렀다.

당시 붉은색 전포(戰袍)를 휘날리며 수많은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곽재우를 가리켜 호성공신 이호민(李好閔)은 '왜군을 노루 쫓듯했다'고 칭송했다.

조정은 곽재우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다. 그는 유곡찰방·형조정랑을 거쳐 통정대부에 가자됐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경상우도 최대 격전지였던 진주의 목사로 임명됐다.

명나라 군대와 왜군 사이에 강화 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그는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에 기용됐으나 계모 허씨가 별세해 삼년상을 치르게 된다. 탈상한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됐지만 부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또다시 사직한다. 이후 그는 비슬산으로 들어가 수련 생활을 하며 벼슬에 나갔다가 물러나기를 거듭한다.

결국 그는 1617년 4월10일 6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사후 그의 사우에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1709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김봉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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