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를 찾아서] '영주 출신' 이배근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장 "내 아이 잘 키워도 옆집 아이 매 맞고 크면 결국 썩은 사과상자 사회"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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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22 07:46  |  수정 2023-02-22 08:11  |  발행일 2023-02-22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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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근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장은 방관하지 않고 신고율만 높여도 아동학대의 상당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최근 11세 이모군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아이의 온몸은 장기간 폭행으로 생긴 피멍으로 울긋불긋했다. 40대 계모는 평소 이군을 지속적으로 학대하고,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공분을 샀다. 이뿐 아니다. 빌라에 사흘간 방치된 채 숨진 A(2)군 사건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친모는 아이를 혼자 남겨둔 채 일을 하러 나가거나 유흥을 즐기러 외출하는 등 상습적으로 방임했다. 일명 '정인이법'으로 불리는 '아동학대범죄법 특례법 개정안'이 2021년 2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아동학대는 잊을 만하면 반복되고 있다. 영주 출신으로 우리나라 어린이 복지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배근 아동학대예방협회장은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최선의 방지책은 신고"라고 강조했다.

복지 패러다임 바꾼
국내 어린이 복지 산증인


서울시 공무원으로 사회 첫발
연세대 총장 추천 복지계 입문
고아원→어린이집 전환 이끌고
1980년대 시민단체 역량 커지자
사회복지관 중심의 정책 선도


아동학대 범죄
최고의 예방책은 신고


2021년 학대 신고 5만3천여건
사망 아동 40명 중 38%가 영아
"신고율만 높아도 상당수 방지
아동학대범죄 근절하지 못하면
함께 살아갈 미래 모두가 고통"

◆총장님 제안으로 복지 입문

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영주시 풍기 미곡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인접한 풍광 좋은 마을이었다. 서당의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영특했던 손주에게 일찌감치 서울행을 제안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생의 큰 꿈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시청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검은색 세단이 그의 앞에 섰다. 큰 체구와 근엄한 표정으로 학생의 존경을 받던 박대선 연세대 총장이었다. 총장님은 그에게 "이군, 요즘 뭐하며 지내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총장님은 내일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이 회장은 "그 시절 공무원은 지금처럼 위상이 높지 않았어요. 제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리자 제 마음을 아셨던지 총장님이 절 부른 것이었지요. 다음 날 찾아뵈었더니 네 성격과 사회복지 분야가 잘 맞을 것이라며 한 곳을 소개해 주셨죠"라고 말했다. 그는 1969년 박 총장의 추천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아동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CCF(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신)로 이직했다.

◆발품으로 바꾼 복지계

국민의 삶이 궁핍하고 팍팍하던 그 시절 전국에는 150개의 고아원이 있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전국의 고아원을 찾아가 지원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많게는 하루에 8번씩 차를 옮겨타며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이 회장은 "당시 미국 달러로 한 아이당 12불을 지원했는데, 이 돈이면 중학교 다니는 아이의 일 년 교육비였어요. 저는 아이들의 식단과 학습환경이 제대로 주어지는지 등을 살펴보는 일을 했는데, 그렇게 몇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복지계의 구조와 흐름, 나아갈 방향이 한눈에 보이더라고요"라고 회고했다.

몇 년 후 그는 전국에 흩어진 고아원을 어린이집으로 전환할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전쟁고아가 줄면서 더 이상 고아원의 역할이 필요치 않은 데다, 갈수록 늘어나는 맞벌이 부부를 위해 낮 동안 아이를 돌보아줄 어린이집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또 아이들이 고아원과 같은 집단시설보다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적합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린이집 전환에 앞장섰던 그는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또 한 번 복지 생태계 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지역사회의 조직화 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하는 복지패러다임을 주장한 것이다.

◆복지에 철학을 담다

1988년 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친 한국은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실상은 수천 명의 아동이 점심을 굶고 있었다. 한 초등학교에 실태조사를 나갔더니 2천100명의 재학생 중에서 800명이 결식아동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근처 빵공장에서 빵을 얻어와 결식아동에게 나눠준다고 자랑처럼 얘기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된 그는 곧바로 교장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820명의 아이가 빵을 맛있게 먹던가요. 아니 빵을 받을 아동은 어떤 기준에서 선정했나요. 빵을 나눠줄 때는 어떤 방식으로 나눠주나요?…" 가난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힌 아이들이 받을 상처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부작용을 우려한 질문이었다. 이 회장은 "아이들 중에는 굶으면 굶었지 그 빵을 먹고 싶지 않은 아이도 있었을 거예요. 교육자라면 아이가 받을 상처를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랐어요"라고 털어놨다.

아동학대예방 활동을 하면서 불편한 일은 이뿐 아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을 틀면 헐벗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국내외 어린이들을 내세운 구호단체의 광고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 회장은 "후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아동단체의 선택이겠지만 좀 더 아동의 입장이 되어 복지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선의 예방은 '신고'

1969년 아동복지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국내 아동복지의 중요한 순간을 지켜왔다. 가정폭력방지법·아동학대방지법·청소년헌장 개정 등 입법화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1988년에는 소파 방정환이 만든 어린이 헌장 수정작업의 간사장을 맡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개정하기도 했다. 미아 찾기·입양인 뿌리 찾기 등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받는 아동의 권리 보호를 위해 쉼 없이 노력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8월 '아동학대 연차보고서'를 발간했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아동학대 신고접수는 5만3천932건이며, 실제 판단사례는 3만7천605건이었다. 이는 전년도인 2020년보다 각각 27.6%와 21.7% 늘어난 수치다.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동도 40명이나 되었는데, 이 중 24개월 미만이 15명으로 전체의 37.5%를 차지했다. 이 땅의 소중한 생명들이 꽃을 피우기는커녕 싹도 내밀지 못하고 사라져간 것이다.

이 회장은 "사과상자에서 사과 하나가 썩기 시작하면 이내 다른 사과도 못 먹게 되는 것처럼 내 아이를 아무리 잘 기른다고 할지라도 옆집의 아이가 매를 맞고 성장하면 결과적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미래에 모두가 고통받을 것"이라며 "옆집의 아이라고 방관하지 않고 신고율만 높여도 아동학대의 상당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사진=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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