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를 찾아서] 봉화 출신의 '국민배우' 이성민 "난 영원한 대구 연극인…후배들과 함께 만드는 무대 꿈꿔"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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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09 08:41  |  수정 2023-08-09 08:42  |  발행일 2023-08-09 제25면

이성민2
봉화 출신으로 '국민 배우' 반열에 오른 이성민은 "대구 연극계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며 "후배들과 연극 얘기를 하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경북 봉화 출신의 배우 이성민에게 대구는 '제2의 고향'이다. 영남일보와 만난 그는 오랜만에 '대구'를 주제로 쉼 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구에서 보낸 치열했던 20대, 대구 연극판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그리고 대구를 떠나 서울에 둥지를 틀기까지의 과정 등을 담담히 풀어냈다. 어느새 그가 대구를 떠나온 지 20여 년. 그사이 푸르던 청춘은 5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고, 눈빛 형형했던 젊은 연극인은 '국민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배우 이성민은 "대구는 내가 연극의 길을 걷기 시작한 도시다. 내게 대구는 그 어떤 도시보다 마음이 쏠리는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본 킹콩·이소룡

그는 경북 봉화와 영주 사이에 있는 '도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서울·강원 등 전국을 떠돌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비로소 고향 봉화로 다시 돌아와 중·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그는 이후 대학을 진학하면서 다시 고향을 떠나 대구로 유학 왔다.

되돌아보면 그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준 것은 아버지였다. 자상하고 따뜻한 성정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영화 관람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당시 봉화에는 영화관이 없었지만 영주에는 2개의 극장이 있었다. 영화관의 VIP 고객이었던 아버지와 아들은 신작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킹콩' '이소룡' 등의 영화가 지금도 선명히 떠올라요."

배우 이성민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내게 '주말의 명화'를 꼭 보게 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시골아이가 접하기 어려웠던 문화를 일찌감치 체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정서적인 부분에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찌감치 아버지를 통해 영화를 몸에 체화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춥고 배고팠던 대구 연극판

그는 대구에서 연극활동을 하면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각종 연극제에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었다.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신인 연기상'을 받은 것은 물론 대구지역 배우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예인 '대구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했다. 또 전국의 실력파 연극인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는 등 연극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 연기자로 자리매김했지만 연극인의 삶은 항상 춥고 고달팠다. 이성민은 "그때는 개런티라는 말이 아예 없었다. 공연하고 막걸리 마시고, 혹시 삼겹살까지 사주면 고마웠던 그런 날들이었다. 그냥 연극이 좋았고,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던 날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구지역의 '객석과 무대'라는 극단에서 연극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함께 작업한 동료로는 대구시립극단 감독을 지낸 최주환·정철원 연출자 등이 있다. 이성민은 "내가 활동할 무렵에는 극단마다 추구하는 방향과 정체성, 보여주는 작품이 모두 달랐다. 서로의 색깔이 극명히 다르니 극단들이 교류하지 않고 자기네 극단에서만 활동하는 단점도 있었지만, 나름 치열한 연극정신이 살아있었던 시절이었던 듯하다"고 회고했다.


 신작 놓치지 않았던 무비 키드 
"새 영화 나오면 아버지 손잡고
봉화서 극장 있던 영주 달려가
주말의 명화도 꼭 보게 하셨죠
덕분에 시골서 접하기 힘든 문화
일찍 체화하며 연기활동 바탕 돼"

 배고팠지만 행복했던 대구 시절 
"그땐 개런티란 말이 아예 없고
연극 후 막걸리·삼겹살이 전부
더 큰 무대 갈증과 열정 차올라
3년만 버틸 각오로 대학로 진출
메이저리그서 내 연기가 통할지
막연한 두려움이 가장 힘들었죠"



◆'대구 vs 서울' 연극 풍토는

대구 연극계에서 이름을 알리던 30대 초반, 그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갈 결심을 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크게 부족함은 없었지만 미래가 불확실하고, 더 넓은 곳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갈증이 차올랐던 것. 마침 함께 작업한 서울지역의 연출자가 대학로 활동을 권유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3년만 해보자는 각오로 짐을 싸서 올라왔어요. 그즈음 대학로에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서울로 온 연극인이 꽤 많았는데, 다들 몇 개월 못 버티고 금세 내려갔지요. 어떻게든 3년은 버텨야 좀 덜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견뎌낸 것 같아요."

가족을 떠나 낯선 서울살이를 시작한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성민은 "경제적 궁핍, 가족과 떨어진 고독함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이성민이라는 배우는 메이드인 대구, 소위 말하는 지역, 지방산이었던 거다. 전국의 실력파 배우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 나의 연기, 내가 옳다고 생각해 왔던 방식이 과연 통할 것인지, 혹여라도 차별되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받지나 않을지 굉장히 긴장을 했던 것 같다. 결국엔 기우로 그쳤지만."

◆공전의 히트 '재벌집 막내아들'

방송계에서 그는 다작 배우로 유명하다. 최근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형사록2'를 성황리에 종영한 것을 비롯해 '더문' '대외비'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지난해 막을 내린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의 신들린 연기력에 힘입어 시청률 26.9%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가 연기한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인물은 누구일까.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형사록'의 김택록처럼 아무래도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은 캐릭터가 좀 더 애정이 간다"는 이성민은 "배우의 입장에서 캐릭터를 연기하고 사랑받는 재미도 크지만, 드라마가 종영한 뒤에는 미련 없이 떠나 보낸다. 그래야만 또 다른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잊지 않았다. 이성민은 "나를 대중에게 처음 각인시킨 작품이 '골든타임'이라는 메디컬 드라마다. 드라마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내게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한 번은 병원에서 MRI를 찍었는데 의사 선생이 결과를 얘기해 주면서 '다 아시겠지만…'이라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드라마 '미생'을 끝냈을 때는 '오과장', '재벌집'을 종영한 후에는 '진 회장'이라고 극 중 캐릭터와 나를 동일시해 불러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꾸는 연극인의 꿈

연기자 이성민이 꿈꾸는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신구·이순재·정동환 등 원로배우들의 이름을 하나둘 열거했다. 이성민은 "연기를 오래오래 하는 게 내 꿈이다. 신구 선생님, 이순재 선생님, 정동환 선생님이 지금도 한결같이 대학로 무대에 서는 것처럼 어쩌면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구연극협회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지금도 선후배 연극인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는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연극무대로 복귀하고 싶은 꿈도 언급했다. 이성민은 "늘 마음은 고향에 있다. 더 나이가 들어 후배들과 연극 얘기하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갖고 있다. 그곳이 대구가 될지, 영주가 될지, 서울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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