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안동문화회관의 시대가 있었다

  •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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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21 06:55  |  수정 2023-12-12 11:21  |  발행일 2023-11-21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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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옛 안동역 건너편에 안동문화회관이 있었다. 두봉 레나도 주교가 안동교구장 소임을 받고 와서 1973년 그분의 주도로 세운 건물이었다. 두봉 교구장은 안동에 제2의 성당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이 건물 신축비를 모았다. 당시 우리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그는 세계 각국의 원조를 받기로 했다. 오스트리아 전국가톨릭부인회 팜마 여사는 4년 동안 매년 2만달러씩을 보내주었다. 식비를 아끼며 굶어가며 모은 돈이었다. 독일에서 폐품을 팔아 모은 돈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훌쩍 넘겼으나 그 당시는 1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할 때였다.

"하느님의 재산을 많은 사람을 위해, 만민을 위해 써야 합니다."

두봉 주교는 봉헌식에서 이 공간은 극장도 발표회장도 영화관도 아니라면서 이 집에 많은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톨릭에서 마련한 공간이지만 종교적인 용도로만 쓰지 않고 그야말로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다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안동시 행정 체계 아래 변변한 문화 시설 하나 없던 시절에 그이의 기획은 획기적이었다.

박정희 유신 막바지, 1979년에 드디어 일이 터졌다. 교구 사제단이 영양군 청기면 감자 피해 현장을 답사한 것을 계기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터졌다. 정호경 신부가 구속되고 나라 전체가 살벌한 공안 분위기로 치달았다. 여기에 대응하는 가톨릭계의 움직임은 대부분 안동문화회관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경찰을 비롯한 공안기관은 이 공간을 뚫어지게 주시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안동문화회관은 가톨릭농민회와 정의구현사제단의 산실로 역할을 확대했다. 학생운동의 배경이었으며 해직교사들의 둥지였다.

1980년대 초 안동 지역 고교생 문학서클 행사가 안동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그때 처음 이 공간에 발을 들인 나는 1984년 방위병 복무 시절 뻔질나게 이곳을 드나들었다. 젊은 시인 정영상, 김용락의 소개로 영화를 보러 갔던 것이다. 거기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 봉화의 전우익 선생님을 자주 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찰리 채플린을 만났다. 전두환 군부 권력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채플린 영화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와르르 웃음을 선물하기도 했고 현실에 대응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는 엉겁결에 거기에 끼어들었지만 그 영화모임은 김용락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임 세바스찬 신부가 낡은 외제 밴에 영사기와 필름을 싣고 와서 틀면 그것을 다 함께 보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고 한다.

1984년 여름에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이 크게 수해를 입었다. 그해 가을 북한은 수해 구호 물자 명목으로 남쪽에 적지 않은 쌀을 내려보낸 적이 있다. 안동문화회관 일을 맡아 하시던 오일창 선생님 댁으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쌀과 남쪽의 쌀을 합쳐 밥을 지었으니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봉화에서 전우익 선생님이 배추를 솎아 오셨고, 농민회의 권종대 선생님, 분도서점의 이종원 선생님도 계셨다. 누군가 '통일밥'을 먹는 거라 했다. 통일도 이렇게 갑자기 오는 거라면서. 그 나지막한 집의 처마 아래를 비추던 햇살이 있었다. 안동 태화동성당 신대원 신부님의 말씀이 귓전에 아른거린다.

"안동문화회관이라는 공간이 피우던 뜨거운 불꽃이 있었지요."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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