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珍의 미니 에세이] 친정

  • 박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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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08 06:00  |  발행일 2025-08-07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여름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범들이 몰려왔다. 연년생 아들을 둔 딸이 식구들을 몰고 친정에 온 것이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하고, 장을 봐 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니 딸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다. 끝나고 나면 가까운 공원에 가서 바람이나 쏘이고, 맛난 것 먹고 오자고 한다.


안방으로 들어와 신문을 펼치는데 잠이 솔솔 밀려왔다. 이것저것 장만하느라 몸을 좀 설쳤더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이진숙 교육부장관 후보자가 제자 논문을 비문까지 베낀 기사를 읽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보니 집안이 정적에 싸여 있었다. 딸네 식구들마저 단잠에 빠진 것이었다. 침대방에서는 사위가 큰 대자로 누운 발치에 네 살짜리 손자가 고무줄처럼 감겨 있었다. 거실에는 딸이 고스라지게 잠들어 있는데, 가슴팍에 세 살짜리 손자가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온 식구가 늦잠인지 낮잠인지 한밤중이었다.


나는 도로 방으로 들어와 신문을 펼쳤다. 애들이 깰까 봐 화장실도 참았다. 젊은 시절 친정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가까이 살면서도 친정 가는 길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가슴 속에 그리움과 서러움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몸에 앞서 마음이 먼저 저만치 달려갔다.


늦은 밤까지 친정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은 통나무처럼 잠에 빠져들곤 했다. 누가 보면 잠도 못 자 본 사람 같았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해 본 사람 같았다. 여자에게 친정은 그런 곳이었다. 한없이 자고 싶고 끝없이 먹고 싶은, 눈물겨운, 그런 곳.


물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사위가 조심스럽게 문을 빼꼼 열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땡큐."


고양이 걸음으로 부엌에서 커피를 내린 모양인데 들어올 때는 첫째와 같이 들어왔다. 아빠가 깨니 저도 깬 모양이었다.


"아빠. 우유."


"알았어."


부엌에 다시 나가더니 이번에는 딸과 둘째까지 달고 왔다. 둘째 역시 엄마 따라 깬 모양이었다. 나는 둘째를 번쩍 안았다.


"잘 잤어?"


"엄마가 잤어요."


엄마가 먼저 잠들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첫째가 끼어들었다.


"아빠가 잤어요."


딸과 사위가 이중창을 했다.


"할머니가 잤어요."


우리는 한바탕 웃고, 외출 준비를 했다. 현관문을 잠그려다 뒤를 돌아보니, 집 안이 온통 이삿짐센터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삶의 한 모퉁이, 친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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