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우리 시대에 진보란 무엇일까? 자신의 욕망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인간이 존재계의 주인이라는 인권과 민주, 조화를 용납하지 않는 평등이 진보가 추구하는 길일까?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다. 진정한 부자는 최고의 부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이듯,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욕망으로 고통을 받지 않는 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인권과 민주도 역시 극복돼야 할 이념이다. 인간은 자연계의 주인이 아니다.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평등이란 분별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반독재 민주화가 진보의 최우선 지표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 자유와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다. 인간의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신과 우주 삼라만상의 동일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진보의 방법 또한 변화돼야 한다. 현대사에서 진보는 항상 투쟁과 갈등을 통해 정권과 자본에 대항했다. 투쟁과 갈등은 증오심을 중요한 에너지로 삼게 된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왕자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오심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진보의 방법은 투쟁과 갈등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교류, 즉 감동(感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 사회적 투쟁보다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두 가지 하늘이 있다고 했다. 그 한 가지는 '사람의 하늘(人之天)'이고 또 한 가지는 '하늘의 하늘(天之天)'이다. 사람의 하늘은 우리 각자가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재능이고, 하늘의 하늘은 모든 사람이 부여받은 도(道), 곧 자연이다. 장자 시대나 오늘날이나 우리는 하늘의 하늘보다는 사람의 하늘을 더 중요시한다. 어떻게든 빨리 아이의 재능을 발견해서 키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재능은 자칫 아이가 가진 하늘의 하늘을 해칠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해치게 된다. 장자는 "사람의 하늘을 열지 않고 하늘의 하늘을 열어야 한다. 하늘을 여는 자는 덕을 낳고, 사람을 여는 자는 삶을 해친다. 하늘을 싫어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 소홀하지 않으면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장자가 주장했듯 세속적인 공부로 재능을 닦아 하늘의 하늘을 깨달으려는 사람은 어리석음으로 가려진 인간이다. 세속적인 공부란 사람의 하늘인 세상에 쓰이는 재주를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 요즘 말로 하자면 소위 전문가에게 하늘의 하늘을 알려 주기는 매우 어렵다. 장자는 그 까닭을 '교육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자는 당시의 유가(儒家)를 비판하며 시경(詩經)과 예기(禮記)라는 무덤을 파헤쳐, 좋은 구절이 하나 있으면 마치 죽은 사람의 턱뼈를 부수고 입에 든 진주를 빼내 훔쳐 가는 것처럼 자신의 것으로 인용한다고 했다.
인공지능혁명은 기계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함으로써 인류의 오랜 소망인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통해 모든 인간을 인드라망과 같은 그물로 엮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된 하나임을 효과적으로 깨닫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에 의한 노동의 종말은 과도기적으로 줄어드는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 문명을 통해 획득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십분 활용한다면 기본소득을 통해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증대된 여가를 활용해 '노동으로서의 자아(ego)실현'이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자기(Self)실현'을 이뤄 자신 속에 있는 하늘의 하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활용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면 그들이 행복해질 것으로 믿었으나, 인간은 오히려 더 깊은 불행을 느끼고 있다.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한 자연 파괴는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친족성(親族性)이 있다'는 위대한 말을 남겼다. 즉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친척 관계로 서로 연관돼 있다는 말이다. 비단 생물체뿐만이 아니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은 인드라망의 그물로 조화롭게 연결돼 있다.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문명은 장자가 말한 하늘의 하늘을 발견하게 해 주는 교육으로 가능하다. 이제 현대 문명이 발견한 '나'라는 분리 독립된 개체를 넘어 모든 존재가 인드라망의 그물같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진보다.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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