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희 문화팀장
어린 시절,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방영하는 날인데 엄마가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참 싫었던 마음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 드라마를 잠시라도 보려고 낯선 곳의 한 가게 TV를 뚫어져라 쳐다봤던 기억도 또렷하다. 남존여비 사상을 가진 집안의 아들 대발이와 민주적인 집안의 딸 지은이가 결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변화를 그린 이 드라마는 당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평균시청률 59.6%(역대 1위)를 기록했다. 그때 그 꼬마는 "홍콩 영화나 일본 영화보다 한국 드라마가 훨씬 재미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대한민국 드라마 전성시대가 언젠가는 올 거야"라는 부푼 기대를 품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K문화 시대다. "문화로 대한민국이 이처럼 핫했던 적이 있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세계가 대한민국의 영화, 드라마, 뮤지컬, K팝에 주목하고 있다. K문화의 파고는 이제 클래식의 문턱마저 넘어서고 있다. 클래식 거장들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젊은 연주자들의 폭발적인 재능이 어우러지며, 최근 K클래식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쾌거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는 지난 5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코망되르)의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한국인 중에서는 2002년 김정옥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2011년 지휘자 정명훈에 이어 코망되르 문화예술공로훈장의 세 번째 수훈자가 됐다. 지휘자 정명훈은 세계적 권위의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차기 음악감독에 선임되는 쾌거를 이뤘다. 아시아인이 전세계 성악가에게 꿈의 무대로 꼽히는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맡는 것은 247년 극장 역사상 정명훈이 최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성진, 임윤찬 같은 젊은 거장들은 클래식을 '힙'한 문화로 탈바꿈시키며 대중들을 공연장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의 공연 티켓은 '피케팅'(피 튀기는 티켓팅)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으며 대중적 인기를 증명한다.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수상한 이들의 연주력과 무대 장악력에 K클래식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눈부신 K클래식의 쾌거 이면에 지역 공연계의 고단한 현실이 상존한다. '클래식 도시'를 자부하는 대구조차 예외는 아니다.
지역의 문화예술기관들은 유명 연주자 초청, 지역 예술인 무대 기회 제공과 해외 진출 지원 등을 통해 시민 문화향유권 향상과 지역 문화발전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공연을 꾸려갈 예산 지원이 부족하고 기업·기관들의 메세나도 서울에 집중돼 있다. 지역의 공연 기획자들은 재정적 어려움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있어야 하고 이러한 현실은 지역 문화생태계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구 문화예술계 내 각 주체의 소통 부재와 공론의 장 실종, 컨트롤타워 기능 미비, 그리고 문화계의 각종 카르텔과 자리싸움 역시 대구의 문화 활력을 저해하는 핵심적인 원인이다. 지역 문화예술기관 종사자들의 열정페이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것 또한 냉정한 현실이다.
대구의 유구한 음악적 전통을 잇고 건강한 지역 문화예술의 성장을 위해서는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안정적인 지원 시스템과 함께 행정기관의 강한 정책적 드라이브와 컨트롤타워 역할 회복, 기업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대표되는 제도적·사회적 지원 시스템이 절실하다. K클래식의 진정한 도약은 세계와 서울을 넘어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예술혼을 제대로 담아낼 때 가능하다.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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