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머물고 드라마가 흐르는 #포항_로그인④] 오래된 풍경 속 위로가 필요할 때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 박관영·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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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27 20:38  |  발행일 2026-05-28
100년전 일본인 거주지가 레트로 감성의 사람 냄새나는 골목길로

'동백꽃 필 무렵' 명장면 탄생 주무대

적산가옥 47채 밀집거리 핫플레이스로

인기 포토존 돌계단 '런온' 배경 등장

드라마속 따뜻한 이야기 품은 감성공간

구룡포 삼정·장길리와 장기읍성 눈길

구룡포 장안동 골목 안, 일본식 목조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겼고, 주민들은 16채를 포항시에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 자발적으로 등록문화재를 신청한 첫 사례다.

구룡포 장안동 골목 안, 일본식 목조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겼고, 주민들은 16채를 포항시에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 자발적으로 등록문화재를 신청한 첫 사례다.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 안에는 1910년에서 1930년대에 지은 일본식 목조 건물들이 이마를 마주대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반쯤 무너진 집, 새로 고친 집, 완전히 허물고 다시 지은 집, 원형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있었다. 유난히 많은 창과 낡은 비늘벽에는 목조가옥의 연약한 시간성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100여 년 전, 이곳은 '종로거리' 혹은 '선창가'로 불렸고 구룡포의 일본인들은 고기를 잡거나 식당, 술집, 옷가게 등을 운영하며 살았다. 한 세기가 긴박하게 흐르는 동안에도 이 골목에는 식당과 민박집, 술집과 다방들, 오토바이 수리점과 상호 없는 가겟집들이 뿌리를 섞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2019년, 이 거리로 동백이가 걸어들어왔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대한이 독립을 맞이했을 때 구룡포의 일본인들은 도망치듯 떠났고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은 재활용되거나 허물어지거나 더러는 오래 방치됐다. 시간이 흘러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과 복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만들어졌다. 당시 구룡포에는 50여 호의 일본풍 가옥이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가옥 16채를 포항시에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을 등록문화재로 신청한 사례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47채의 적산가옥이 밀집해 있는 거리를 중심으로 '일본인 가옥 거리'가 조성됐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는 2019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 무대인 옹산 게장 골목으로 등장한다. 여 주인공 동백(공효진)은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고, 첫사랑을 떠난 후 홀로 아들 필구(김강훈)를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이다. 그녀의 인생은 "모래밭 위 사과나무 같았다. 파도는 쉬지 않고 달려드는데 발밑에 움켜 쥘 흙도 팔을 뻗어 기댈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옹산으로 왔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는 곱지 않았다. 그런 동백에게 경찰 황용식(강하늘)이 다가왔다. '당신 잘났다, 최고다, 훌륭하다, 장하다!'는 우직한 응원과, 작전도 밀당도 없는 사랑으로. "내 걱정 해 주는 사람 하나가 막 내 세상을 바꿔요. 저 어떡해야 돼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동백의 집이자 가게였던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까멜리아는 지금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동백의 집이자 가게였던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까멜리아는 지금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식의 사랑은 동백의 세상을 바꿨다. 동백의 세상이 바뀌자 옹산 사람들도 변했다. 동백은 "이제 내 옆에 사람들이 돋아나고 그들과 뿌리를 섞었을 뿐인데 이토록 발밑이 단단해지다니. 이제야 곁에서 항상 꼼틀댔을 바닷바람, 모래알, 그리고 눈물 나게 예쁜 하늘이 보였다"고 말한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처와 사랑, 공동체의 연대와 치유를 촘촘히 그린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는 온기를 현실적으로 담아내며 오랫동안 기억되는 드라마로 자리 잡았다.


동백의 집이자 가게였던 까멜리아는 지금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가게 입구에서 다정한 용식이가 반긴다. '동백씨 들어와유!' 까멜리아에서는 누구나 동백씨와 용식씨가 된다. 내부에서 뒤쪽으로 난 문을 나서면 여러 동의 건물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책으로 가득한 용식이 서재, 히노끼탕과 동백폭포가 있는 용식이수영장, 셀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드라마사진관, 기념품 등을 파는 동백서점이 서로의 앞마당과 뒷마당을 공유하며 아기자기하게 이어진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당신이 이 공간에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 같다'는 위로가 전해진다.


구룡포 일대가 2007년 과메기특구지구로 지정되면서 함께 지어진 구룡포과메기문화관. 2017년 개관해 과메기 어원 및 유래, 기록, 산업 등에 대한 정보를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과메기문화관 내부 모습.

구룡포 일대가 2007년 과메기특구지구로 지정되면서 함께 지어진 구룡포과메기문화관. 2017년 개관해 과메기 어원 및 유래, 기록, 산업 등에 대한 정보를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과메기문화관 내부 모습.

구룡포과메기문화관.

구룡포과메기문화관.

특히 '동백꽃 필 무렵'의 포스터가 촬영된 돌계단은 지금도 차례를 기다리며 사진을 남기는 포토존이다. 이 계단은 드라마 '스프링 피버'의 두 주인공인 재규와 봄이 키스를 한 곳이기도 하다. 드라마 '런온'에서는 힘겨운 하루를 끝낸 오미주(신세경)는 이 계단에 앉아 병째 소주를 마셨다. 그때 기선겸(임시완)이 다가와 잔과 과메기를 건넨다. "고생했어요. 이런 말 저런 말 다 전달하느라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구요. 나도 남 일이니까 이렇게 한번 말해봤어요." "근데, 나 왜 갑자기 다 할 수 있을 거 같지? 원래는 안 되는 건데, 다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선겸의 위로 아닌 위로 속에서 미주는 힘을 얻었다.


계단 위 언덕에 오르면 구룡포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1백여 년 전 이 언덕에는 신사가 있었고 계단 양편의 돌기둥에는 신사를 세우는 데 일조한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그 돌기둥에는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언덕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아홉 마리 전설의 용과 함께 호국 영령을 기리는 충혼탑과 구룡포 어민의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당이 바다를 감싼 융성한 항구를 지키고 있다. 동백이는 말한다. "나 서 있는데서 이렇게 발을 딱 붙이고 찬찬히 둘러보면, 봐봐. 천지가 꽃밭이지. 이번 생이 나한테는 기적 같아."


구룡포 해수욕장 윗마을인 삼정리에는 바위섬 관풍대가 있다.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고, 주민들은 삼정섬이라 부른다.

구룡포 해수욕장 윗마을인 삼정리에는 바위섬 관풍대가 있다.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고, 주민들은 삼정섬이라 부른다.

◆구룡포의 바다 삼정리와 장길리


구룡포 해수욕장 바로 윗마을인 삼정리는 구룡포 특산물인 과메기 덕장으로 이름나 있다. 마을에는 소나무 울창한 바위섬 하나가 있는데, 주민들은 삼정섬이라 부르고 옛 사람들은 관풍대(觀風臺)라 불렀다.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는 바위섬이다. 섬으로 건너가는 관풍교는 동백이의 아들 필구와 종렬(김지석)이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필구는 종렬이 친아빠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왜 엄마를 혼자 뒀어요? 그게 치사하잖아요. 아빠란 말이 나오는 것도 싫었어요. 아빠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 엄마가 우니까요. 나는 만화도 다 못보고 노래도 다 못 불렀어요. 아저씨는 엄마를 백번도 넘게 울렸어요. 그러니까 원래부터 아빠 별로였어요." 담담한 필구의 말에 종렬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오래된 시멘트 다리는 지금 푸른 무지개다리로 변했다.


구룡포읍의 남쪽 마을인 장길리는 큼지막한 낚시 공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바다 위로 170m 뻗어나가 있는 보릿돌교다. 보릿돌은 과거 미역이 풍성했던 바위로 보릿고개 시절에도 이곳만 오면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2024년 1월에 종영한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를 촬영했다. 드라마는 씨름선수 김백두(장윤동)와 소싯적 골목대장이자 백두의 첫사랑 오유경(이주명)이 다시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로맨틱 코미디와 미스터리 장르가 결합돼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 작품이다. 주저하던 청춘들이 다시 걷기 시작하는 장면이 바로 장길리 보릿돌교에서 탄생했다. "여기 미련 두지 말고 서울 가가지고 하던 거 마저 하라고. 내야 뭐 솔직히 니가 여 남아있으면 그게 훨씬 낫지. 근데 나는 니가 한평생 하고 싶었던 거 뭔지 알고 있다 아이가." 백두는 대신 경기를 꼭 보러 오라고 했다. 꼭 장사가 되겠다고.


장기읍성 성곽에 오르면 넓은 들과 장기천과 신창리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역사적으로는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최근에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장기읍성 성곽에 오르면 넓은 들과 장기천과 신창리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역사적으로는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최근에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장기읍성과 신창리 바다


장기면은 포항의 남쪽 끝이다. 경주의 동쪽 외곽지대라 신라 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현종 때 왜적과 여진족의 해안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았고, 조선 세종 때에는 돌을 쌓아 더욱 튼튼히 했다. 성곽에 오르면 장기면의 넓은 들과 바다로 향하는 장기천, 그리고 신창리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기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신창리 바닷가에는 일출암이 우뚝 서 있다. 옛날부터 생수가 솟는다 해 날물치 혹은 생수암(生水岩)이라 불렀던 바위다. 육당 최남선은 이곳에서의 일출을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는데 지금도 일출암은 해돋이 명소다.


일출암 곁 신창리 해변은 드라마 '스프링 피버'에서 재규와 봄의 비밀 데이트 장소였다. 어둔 새벽부터 아침이 환히 밝아오도록 데이트를 즐기다 체육관 식구들에게 들킬 뻔 했지만 담요 안에 쏘옥 숨어 위기 모면했던 곳이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게 사랑이라, 두 사람의 연애는 곧 들키고 만다. "온 동네에 소문 다 났다는데 어때요. 오늘 우리 실컷 웃고, 미친 듯이 즐겁게, 마음껏 기뻐하면서, 그동안 못 갔던 곳, 가고 싶었던 곳, 당당하게 다 가 봐요. 네?" "가 보입시다!" 매일 아침 '웃지 말기, 즐겁지 말기, 기쁘지 말기'를 다짐했던 봄은 변했다. 재규와 봄이 당당하게 향한 곳이 장기읍성이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성곽 길을 걸었다. 성벽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푸르른 날이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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