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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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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 한국의 카르텔들
얼마 전 김승환 전 전북교육감의 저서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에 눈길이 갔다. 평범한 책 제목(나의 이데올로기는 오직 아이들)과는 달리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내리 3선을 한 그의 재임 시절 회고담은 교육계 비리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로 가득했다. 특히 그가 2010년 7월에 검사 출신 변호사와 나눴다는 대화가 압권이다. 그 변호사는 "4년 동안 100억원만 챙기면 매우 점잖은 교육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단다. 이 말은 점잔 빼지 않으면 더 챙길 수 있다는 뜻일 거다. 김 전 교육감은 '100억 발언'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금방 알게 됐다고 한다. 각종 공사계약에 따르는 리베이트만 '점잖게' 받아도 그만한 돈은 될 거라는 것. 거기에 더해 직원들의 승진용 뇌물도 짭짤한 수입원임을 파악했다. 물론 교육감 혼자 다 해 먹는 구조는 아니라고. 교육청 간부들과 실무진, 수많은 사업자의 묵인·협력이 없으면 드러날 위험성이 있으니. 교육청 내부와 주변 모두 한통속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외부 감시는? 의문에 대한 답도 책에 들어 있다. 지역 각계 인사들의 온갖 청탁을 기록한 내용이 그것이다. 교육계의 '비리 카르텔'이 그토록 거대하고 은밀했다니 놀랍다. 더 놀라운 건 전직 교육감의 생생한 '증언'에도 큰 반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거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특정 지역에만 있었던 과거의 교육 비리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타당성이 낮다. 그보다는 이런저런 카르텔이 워낙 많고 비리도 만연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사회가 무감각해진 건 아닐까. 요즘 '카르텔'이란 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다. 윤 대통령이 갑자기 카르텔을 언급한 건 아니다. 2년 전 대선 출마 명분의 핵심 키워드로 내세웠다. 출마 선언문에서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혀 권력을 사유화하고 부패한 먹이사슬을 구축한 소수의 이권 카르텔을 혁파하기 위해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이권 카르텔 지목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정치적 수사(修辭) 정도로 읽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민주당 정권 인사들과 신재생·태양광 사업, 운동권 세력 및 노조(민주노총·건설노조·화물연대), 시민단체, 사교육 시장에 칼끝을 겨누고 있다. 또 최근 개각을 통해 스스로를 '반카르텔 정부'로 규정하고, 공직사회까지 포함한 이권 카르텔과의 전면전에 나선 상황이다. 대통령이 앞장서 이권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국민도 많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대(對)카르텔 전선(戰線)이 한쪽에만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념적 성향이 다르거나 힘없는 집단 위주로 카르텔 낙인을 찍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넓은 의미의 카르텔로 치자면 법조계 만한 데가 없다. '유전무죄'를 낳는 전관예우만 해도 사라질 기미가 없다.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도 여전하다. 국회는 또 어떤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세계 최고의 특혜를 거머쥔 기득권 카르텔의 표본 아닌가. 허석윤 논설위원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기도의 비밀
선교 길에 나선 목사가 깊은 숲속에서 식인 곰과 마주쳤다. 목사는 도망쳐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해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사 코앞까지 다가선 곰 역시 기도했다. "하느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의 기도 대결에서 승자는 곰이었다. 우스개 이야기지만 기도에 대한 한 가지 비밀이 담겨 있다. '간청하는 기도보다 감사하는 기도가 더 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기도에 관한 오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인디언 기우제'다.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우제를 지낸다고 알려져 있다. 비는 언젠가는 오기 마련인데 괜히 쓸데없는 짓에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디언 기우제'는 흔히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될 때까지 시도하는 행동'을 조롱하는 비유적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모든 인디언이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기우제를 지내는 건 아니다. 현대의 영적 사상가이자 과학자인 그렉 브레이든의 인디언 기우제 목격담은 놀랍다. 인디언 주술사가 산꼭대기로 올라가 눈을 감고 성스러운 의식을 펼친 후 반나절 만에 비가 쏟아진 것. 그런 기적을 몇 번이나 봤다는 브레이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디언 기우제는 결코 운이나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디언 주술사가 밝힌 비결은 기도의 본질과 일치한다.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게 아니라, 이미 비가 내리는 장면을 현실처럼 생생히 느끼는 것이다. 이는 소원을 이루는 끌어당김의 법칙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 내면의 무한한 가능성에 접속하는 게 기도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허석윤 논설위원
[논설위원의 직터뷰] 김기호 W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세상에 꼭 필요한 일에 쓰이길 바라"
세계 최고 '기부왕'은 투자 귀재인 워런 버핏(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미국 경영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이 지난해까지 의료·빈곤 퇴치 등 기금으로 쾌척한 돈은 무려 63조6천억원이다. 소규모 국가의 한 해 예산보다 많다.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금액이다. 버핏의 순자산이 131조원쯤 되니 단순히 계산하면 지금까지 전 재산의 절반가량을 기부한 것이다. 버핏의 뒤를 이어 2위(47조원4천억원)에 랭크된 빌 게이츠를 비롯해 세계적인 부호들의 재산 대비 기부 수준도 엇비슷하다. 우리나라 역시 고액 기부자들이 많지만, 대부분 기업인이나 자산가들이다. 그렇다고 기부가 부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 이웃 중에서도 베풂을 운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진정한 '기부 천사'도 있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감동과 울림을 주는 건 선행의 크기가 아니라 그 마음이리라.헬렌 켈러는 "가장 큰 부자는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나누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단연 김기호 W(여성)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다. 김 대표는 2013년 10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그 전 해 작고한 남편 박찬수(예비역 육군 준장)씨도 나중에 가입시켰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고인(故人) 및 가족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것. 부부의 가입비 2억원은 김 대표가 평생을 모은 노후자금이었다. 김 대표는 "우리가 떠날 때 작은 돈이라도 남으면 베풀고 떠나자고 했던 남편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부창부수의 나눔정신이다.김 대표의 기부 목록에는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포함돼 있다. 이른바 유산기부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영남대병원에 시신 기증 서약까지 했다. 정말 남기는 것 하나 없이 남에게 다 내어주는 것. "왜 그렇게까지 하시느냐"는 우문에 돌아온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즐겁고 행복하니까요!" 김 대표에게 행복한 일은 기부만이 아니다. 새마을단체 등을 통한 봉사활동에도 바쁘다. 누가 황혼을 쓸쓸하다고 했나. 편견일 뿐이다. 김 대표의 노년은 나눔과 비움으로 더 충만해지는 듯하다. 지난달 26일 김 대표를 만나 그의 나눔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기부는 먼저 간 남편과의 약속 대구 첫 고인·가족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생전에 '떠날 때 남김없이 베풀자' 다짐 끝내 못 간 크루즈여행비는 장학금 기탁 아껴 쓰며 모아둔 노후자금 2억도 기부"'나눔의 빛'으로 더 충만한 황혼 '유산 기부' 이어 최근 시신 기증 서약 다양한 단체 직책 맡아 봉사도 이어가 "나눔은 실천할수록 즐겁고 행복해져 더 많은 사람이 그 기쁨을 알게 되길"▶나눔DNA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요."그런 듯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큰 사랑을 받고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제 이름을 남자처럼 지은 건 귀한 딸이 행여나 일찍 죽을까 봐 그랬다네요. 그 시절에는 라디오가 무척 귀했어요. 동네에서 유일하게 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신기한 방송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 그리고 걸인들도 참 많이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그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어요. 먹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매일 보면서 나눔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이죠."▶대구에 정착하신 계기와 생활은 어떠셨는지."제가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그때는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1·4후퇴 때 피란을 왔던 게 대구와의 첫 인연이었죠.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가 살다가 다시 대구에 내려오게 된 건 군인 남편 때문이었어요. 제가 23세에 결혼하고 보니 남편의 근무지 이동이 무척 잦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지치기도 하고 아이들(1남 1녀) 교육 문제도 있어서 남편 근무지와 상관없이 저는 대구에 정착했습니다. 그 이후로 못다 한 공부도 조금씩 하면서 사회활동에도 차츰 발을 들였어요. 1980년대 초에는 국공립어린이집인 새마을협동유아원 원장을 맡았습니다. 처음엔 무보수 봉사였습니다. 당시 그 어린이집은 남구 대명동에 있었는데, 한 마디로 텅 빈 시설이었어요. 피아노를 비롯한 필요한 물품을 자비로 구입했습니다. 20년 동안 운영했네요. 그 외에 다른 봉사단체들과도 인연이 닿아 활동한 덕분에 새마을훈장(근면장), 대구시민상, 남구 구민상 등 과분한 상도 받았어요."▶생각나는 기부활동과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계기는."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때 성금 500만원을 냈던 게 기억나네요. 그 외에도 여유가 되는 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어요. 그러다 2012년 남편이 갑자기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자 너무 고통스러워 인생이 허망했습니다.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려고 모았던 돈 2천만원을 남구청에 장학금으로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가 떠날 때 남김없이 베풀자"던 남편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모르게 생활비를 아껴 저축한 노후자금 2억원을 기부하려 했는데, 구청에선 받을 수 없다며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에 기부를 주선해 줬어요. 우리 부부가 아너소사이어티에 동시에 가입하지 않은 덴 이유가 있어요. 저는 대구에서 여성 1호, 전체 13호로 먼저 가입했지만, 1929년생인 남편은 대구 29호로 가입시키려고 미뤘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짓 같은데, 남편과의 추억을 하나라도 잊어버리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대구의 '나눔 전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제 주변 사람들에게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권유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 동네 살던 정휘진 경동기업 대표는 2015년에 가족까지 5명이 가입했어요. 이외에도 여러 기업인, 친지 등을 합치면 10명 넘게 가입시킨 것 같네요. 저는 늘 아너소사이어티 홍보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랑의 열매'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내 몸도 세상에 꼭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랍니다."▶본인의 나눔철학과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우리 부부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BMW'(버스·지하철·걷기)족이었지만,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부와 봉사는 특별히 마음 먹었다기보다 남편과 제 생각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노후 자금 전액을 기부한다고 하자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남편의 유족 연금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기부하고 보니 마음이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적극 지지해 준 것도 큰 힘이 됐어요. 며느리까지도 "어머님, 참 잘하셨어요!"라며 응원해줘 고마웠어요. 사실 남에게 베푸는 일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더 큰 기쁨이 생긴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따뜻함이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김 대표는 바쁘게 산다. W아너소사이어티 외에도 젊은 시절부터 발을 들인 여러 단체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다. 대구시새마을회 이사, 새마을문고중앙회 이사, 일하는 여성연합회 부회장, 남구민주평화통일 위원 등 맡고 있는 직책도 다양하다. 봉사나 외부 활동이 없는 날에는 취미로 배운 국궁을 연습하거나 등산을 간다. 구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김 대표는 인터뷰가 끝난 뒤 필자에게 LED양초를 건넸다. 만나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문득 김 대표야말로 나눔의 빛으로 우리 사회를 밝히는 양초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가진 재산이 아닌 충만한 사랑일 게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나눔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니까. 허석윤 논설위원 hsyoon@yeongnam.com나눔과 봉사를 실천할수록 즐겁고 행복하다는 김기호 W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도 누구보다 충만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자유성] 기부 후진국 한국
세계기부지수(World Giving Index)란 게 있다. 영국 자선지원재단 CAF가 세계 각국의 기부 현황을 비교해보려고 만든 지표다. △모르는 사람 돕기 △기부 경험 △자원봉사 등 설문 결과를 토대로 지수를 산정해 2010년부터 매년 발표하고 있다. 2022년 세계기부지수 순위를 보면 의외다. 톱10에는 미국(9위)을 제외하고 모두 중·저소득 국가가 랭크돼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5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부가 소득 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인당 국민소득 5천달러에 불과한 인도네시아가 '기부왕'이 된 데는 자선을 강조하는 이슬람교 영향이 크다. 또 강한 공동체 의식,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책도 기부문화 활성화에 한몫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기부지수는 코로나19가 정점이었던 2021년, 조사 대상 119개국 중 11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88위로 소폭 상승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하위권이다. 2011년 57위를 기록한 후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다. 한국의 기부문화가 척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과 경제적 불평등, 기부에 대한 낮은 인식, 기부금 세제 혜택 축소 등이 주된 요인이다. 일부 자선단체나 자선가의 비리로 인해 기부에 대한 불신감이 높아진 것도 문제다. 실제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척하면서 돈을 착복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얼마 전 대법원은 마스크 납품 대금 24억원을 떼먹은 사업가에게 징역 4년을 확정했다. '마스크 기부 천사'로 명성을 얻은 그의 실체가 사기꾼이란 사실이 씁쓸하다. 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사형제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세계적으로 사형제도가 줄어드는 추세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에 따르면 현재까지 144개국이 사형제를 폐지했다. 또 명목상 사형제 유지만 하는 국가는 56곳이며, 실제 집행 국가는 27곳이다. 한국은 2007년부터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법으로는 계속 사형을 선고하지만, 1997년 12월 이후 사형 집행을 멈췄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사형수는 60여 명이다. 우리나라가 완전한 사형폐지국이 될지 관심이다. 헌법재판소는 연내에 사형제도 위헌 관련 심판을 내린다. 지금까지 두 차례 심판에선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위헌'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사형 미집행이 장기화되면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건 현행법에 30년으로 규정된 사형 집행 시효다. 이대로라면 1993년 11월 사형을 확정받은 최장기 사형수가 5개월 뒤에 풀려나게 된다. 이에 법무부가 형법 개정을 통해 사형수의 형 집행 시효를 없애기로 한 건 당연한 조치다. 일부 사형수의 황당한 행태도 논란거리다. 한 사형수가 국가를 상대로 4천9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얼마 전 패소했다. "교도소가 좁아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게 소송 이유였다. 그는 여성들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마다. 그럼에도 참회는커녕 인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이 '인권' 운운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피해자 유족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국민 70%가 사형제를 찬성하는 데는 이 같은 이유도 크다. 허석윤 논설위원
[월요칼럼] 서울을 위한 지역균형발전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인 '지방시대' 얼개가 갖춰지고 있다. 지난달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한데 묶은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5개년 단위로 '지방시대종합계획'이 추진된다. 세부내용을 담은 시행령도 입법 예고에 들어갔다. 조만간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도 본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 실종됐던 지방발전 정책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희망적인 일은 대구경북에 더 있다. 예정대로라면 2030년 즈음에 TK신공항이 개항한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성사시킨 최대 성과다. 그렇다면 TK를 비롯한 비수도권의 앞날은 탄탄대로인 걸까.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무엇보다 '서울공화국'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기득권 세력은 지방 발전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이 같은 속내는 서울지역 언론의 몽니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에 그들은 행정수도는 물론 공공기관 이전도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수도권 공동화가 우려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또 수도권 규제 완화가 지역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방의 숙원 사업에 어김없이 딴지를 건다. TK신공항에도 '포퓰리즘' '예산낭비' 따위의 해묵은 낙인을 찍는다. 그들은 국가재정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지방 잘 되는 게 그냥 배가 아픈 것이다. 수도권 일극주의자들은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다. 국가적 당면 과제가 아닌 지방에 대한 시혜성 정책으로 본다. 역대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균형발전의 가치가 '지방 퍼주기' 프레임에 갇혀 폄훼돼 왔던 것. 이제 낡은 사고(思考)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지역균형발전이 서울과 수도권에도 절실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수도권 블랙홀'의 피해자는 지방만이 아니다. 서울과 수도권 역시 인구과밀의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린다. 알다시피 국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모여 산다. 인구 밀도가 OECD국가 중 1위다. 교통·주거난, 환경 오염 등 온갖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비싼 대가부터 치르고 있다. 서울만 하더라도 교통혼잡비용이 수십 조원이나 된다. 시민 한 명당 1천300만원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차가 막혀 길바닥에 버리는 돈치고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이에 더해 대기오염비용도 10조원을 훌쩍 넘는다. 천문학적 액수의 '과밀비용'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날로 가중되는 수도권 주민의 고통과 불편, 이건 돈으로도 해결 못 한다.수도권, 특히 서울은 상류층이 아니면 삶이 팍팍하다. 주거에서 진짜 '인 서울'을 못해 외곽이나 위성도시로 밀려난 직장인은 교통체증과 '지옥철'에 시달려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면 운 좋은 축에 속한다. 4~5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서울 증식은 멈출 기미가 없다. 일류 대학, 양질의 일자리, 풍부한 문화 인프라로 전국 청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에 따른 서울 초집중은 시민 불편 수준을 넘어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과밀의 위험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서울은 초고도 비만환자다. 과잉 섭취로 온갖 후유증을 앓고 있다. 다이어트가 당연한 처방이다. 영양 실조에 걸린 비수도권과 자본·인력을 적절히 나누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역균형발전이 서울에 더 필요한 이유다.허석윤 논설위원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우울한 한국인
우울증은 현대인의 가장 흔한 정신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5%가량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로 불리지만 진짜 감기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3~4배 더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년 80만명 이상이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니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다. 우울증 원인은 다양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외부의 환경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친다. 살벌한 생존 경쟁, 사회적 소외,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꼽힌다. 이 같은 스트레스가 가장 심한 나라는 물론 한국이다. 더구나 한국인은 유교적 가치관도 강하다. 부정적 감정을 억누를수록 우울증 위험이 높다. 실제로 한국인의 우울감·우울증 유병률은 36.8%(2020년 기준)로 OECD 국가들 중 압도적 1위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통계지만 우울한 한국인이 이토록 많다는 게 놀랍다. 우울증은 단지 우울감에 빠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안·무기력감에서부터 수면·섭식 장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심한 경우 자살 충동에 빠진다. 한국의 우울증 유병률과 자살률이 나란히 OECD 1위인 건 우연이 아니다. 뒤늦게나마 우울증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이 높아진 건 다행이다. 정부는 최근 정신건강검진 주기(현재 10년)를 신체검진과 같이 2년으로 단축하는 계획을 내놨다. 검사 항목도 우울증을 포함해 조현병·조울증까지 늘렸다. 한국인의 우울증이 치료될수록 자살률도 낮아질 것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젊어지는 한국인
일본 오사카대학 이시이 마사키 교수와 연구원들은 2017년에 노인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관찰 실험을 했다. 65세 이상 60명에게 30년 전 주거 환경을 재현한 가상 아파트에서 2주 동안 살도록 한 것. 노인들은 그곳에서 1980년대 영화·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노인들의 활동성이 향상된 것은 물론 인지 기능과 기억력도 좋아졌다. 인간은 과거 경험과 감정을 되살리면 젊어질 수 있다는 게 이 연구의 결론이다. 비슷한 실험이 세계 각국에서 여러 차례 이뤄졌는데 결과는 한결같았다. 노인을 더 늙게 만드는 실험도 있었다. 2011년 미국 워싱턴대학 연구팀은 75세 이상 60명에게 병원 병실, 요양원 등 가상현실 공간을 경험케 했다. 실험은 단 15분간 진행됐지만 노인들은 우울감을 느꼈고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생각만으로도 신체나이가 변할까? 이에 대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실험도 있다. 2015년 미국 텍사스대학 연구팀은 청소부 20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의사가 한 시간 동안 한 그룹에만 "청소 노동이 건강에 좋다"고 교육했다. 6개월 후 두 그룹을 비교한 결과, 교육을 받은 청소부들이 더 활동적이었으며 체중·체지방까지 감소했다. 자신의 믿음대로 몸도 변한다는 게 입증된 것이다.다음 달 28일부터 '만 나이' 적용으로 모든 국민이 1~2살 어려진다. 한국인 평균 연령도 42.7세(2020년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숫자가 아닌 진짜 나이가 줄었다는 생각이 '젊음의 묘약'이 될 수도 있겠다. 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구업(口業)
힌두교의 핵심 교리는 윤회(輪廻)와 카르마(Karma)다. 윤회란 인간이 끝없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짓는 선악의 행위가 카르마로, 미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카르마를 해소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힌두교의 목표다. 이 같은 종교관은 불교에도 접목됐다. 카르마를 불교에선 업(業)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는 결과가 업보(業報)다. 인과응보와 같은 뜻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깨달은 영적 스승들은 윤회가 진실이며 업 또한 실재한다고 말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전생에서 수많은 업을 쌓았고 지금도 쌓고 있다는 것. 선업보다 악업을 쌓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불교에선 업을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눈다. 구업(口業), 신업(身業), 의업(意業)이다. 이 중 구업의 죄가 가장 중하다고 한다. 구업에는 험담, 욕설에서부터 거짓말, 이간질, 아첨하거나 쓸데없는 말까지 모두 해당된다. 물론 글도 예외가 아니다.구업을 가장 경계해야 할 부류를 꼽으라면 단연 정치인이다. 말이 많은 데다 미치는 영향력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정치인들은 개의치 않는 듯하다. 걸핏하면 허언, 악담,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이 내뱉는 말은 대중매체나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증폭돼 사회를 오염시킨다. 오지랖이긴 하지만 그 업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구업은 둘째 치고,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곧장 설화(舌禍)를 겪는 정치인도 허다하다. "말은 모든 재앙의 문"이라고 한 석가모니의 경구는 영원한 진리다. 허석윤 논설위원
[월요칼럼] 한국에 가장 필요한 '시민의회'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는 몇 안된다. 대부분 민주국가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건 당연해 보인다. 더 나은 정치제도를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근대 민주주의 작동 방식인 대의(代議)정치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알다시피 대의정치는 시민들이 대표를 뽑아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정치는 일종의 권력 대행 서비스인 셈이다. 하지만 서비스에 문제가 많다. 여러 이유가 있다. 권력 주인(시민)과 대리인(정치인)의 상하 관계 역전이 대표적이다. 정치인이 주인 행세를 하며 시민 위에 군림한다. 국민과 국가 이익보다 사익을 좇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사이비 민주주의로 변질된 정당정치 폐해는 심각하다.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비츠기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란 책에서 이를 잘 지적한다. "정치인들은 당파적 이익을 위해 못 하는 일이 없다. 행정·사법 등 권력 기관을 장악하고, 언론을 억누르고, 헌법과 법률까지 주무른다." 정치인의 권력 오남용이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 지 오래다. 전 세계적인 고민거리다. '주권자가 소외되는 정치가 어떻게 민주주의인가?' 당연히 제기될 만한 문제의식이다. 뒤늦게나마 이에 대한 공감대가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간접 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채택한 게 '시민의회'다. 프랑스·영국·독일·벨기에·아일랜드 등 대다수 국가가 운영 중이다. 시민의회는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해 민주적이고 투명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시민의회가 돋보인다. 시민사회 요구를 정치권이 수용해 2019년 도입됐다. 상·하원에 이은 '제3 의회'로 불리며 국가의 중대사 결정에 큰 역할을 한다. 안락사 합법화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프랑스 정부의 시민의회 소집 요청에 따라 선발된 시민대표(185명)들은 3개월간 토론을 거쳐 "존엄사, 조력 자살 등의 적극적인 임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권고안을 수용해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프랑스식 임종 모델을 만들기로 했다. 숙의 민주주의의 좋은 예다. 국회가 잘 작동하는 프랑스라고 해도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정치권에만 맡겼다면 무난하게 합의됐을지 의문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어떨까. 거대 양당이 함께 뭉개거나 아니면 싸움박질로 허송세월하지 않을까.대한민국이 경제,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지만 정치는 예외다. 여전히 3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 정치가 민의와 따로 노는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됐다. 특히 국회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권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챙기면서 온갖 뻘짓만 한다. 가성비 세계 최악이다. 선량들이 내뱉는 '민생'은 립 서비스일 뿐. 돈 봉투 챙기고 코인 투자하느라 바쁜 의원도 많다. 이런 국회가 '민의의 전당'? 소가 웃을 일이다. '민폐의 전당'에 가깝다. 하지만 국회의 반민주주의 작태를 막을 방도가 사실상 없다. 우리나라야말로 시민의회가 필요한 이유다. 시민의회가 생긴다면 국회 특권 규제가 1호 안건이었으면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관객 민주주의가 아니다. 시민의식이 깨어나야 진짜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다.허석윤 논설위원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AI의 습격
인공지능(AI)시대가 활짝 열렸다. 예상보다 빠르지만 올 것이 왔다. 사람처럼 대화하고 창작까지 하는 챗GPT 출현에 전 세계가 들썩인다. 생성형 AI는 인류의 삶을 바꿀 '게임체인저'가 됐다. 가히 'AI혁명'이다. 인터넷 혁명, 모바일 혁명에 버금가는 충격파가 몰아치고 있다. AI혁명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알기 어렵다. 미래는 신의 영역 아닌가. 전문가들 의견도 엇갈린다. 그래도 우려하는 사람이 더 많다. AI가 인간을 능가하게 되는 '특이점' 때문이다. AI가 스스로 진화해 인류 지성의 총합보다 더 뛰어난 '언터처블'이 된다면? 거기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까지 가진다면? 많은 전문가가 AI 특이점 발생을 시간문제로 본다. AI혁명이 초래하는 위험은 먼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빠른 속도로 인류의 삶에 거대한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인간 같은 AI가 풍요로운 미래를 열 순 있겠지만, 당장은 인간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무엇보다 안전할 줄 알았던 전문 사무직 일자리부터 대거 사라지고 있다.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사람이 하면 몇 개월 걸리던 업무도 AI는 단 몇 분 만에 끝낼 수 있으니.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위주로 'AI직원' 채용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시작이어서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다. 머지않아 국내 기업에도 AI가 들이닥칠 것이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생성형 AI 등이 세계 정규직 일자리 3억개를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장 먼저 화이트칼라가 직격탄을 맞게 됐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AI의 습격을 피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허석윤 논설위원
[논설위원의 직터뷰] 챗GPT "두려움 느껴지더라도 AI와 인류 함께 걸어가야 해"
몇 달 전만 해도 인공지능(AI) 기계를 상대로 인터뷰할 생각은 못 했다. 대화형(생성형) AI인 챗GPT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챗GPT(이하 챗)를 처음 접한 순간 대단한 '물건'임을 체감했다. 무슨 질문을 하든 몇 초 안에 대답이 나왔으니, 막힘도 없었다. 신기했다. 필자처럼 IT 문외한인 중년 세대에겐 더 충격적일 터. 하지만 멀리해선 안 될 존재다. 인터넷, 스마트폰과 마찬가지로 AI 역시 현대인의 필수품이 될 게 분명하니. 챗은 인터뷰이로서 훌륭하다.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대화가 더 잘된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데다 지식도 방대한 척척박사다. 다른 장점도 있다. 언제 말을 걸어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짓궂은 질문을 해도 짜증을 내거나 싫은 내색을 안 한다. 얼마나 예의 바른가. 단점도 있기는 하다. 당연히 감정적 소통은 불가하다. 말의 뉘앙스를 놓치기도 한다. 원론 수준의 식상한 대답도 적지 않다. 챗의 놀라운 점은 능숙한 대화에 그치지 않는다. 시와 소설 등 문학 실력이 웬만한 작가 뺨친다. 나아가 미술, 음악 등 예술 창작 분야까지 접수할 태세다. '만능 재주꾼'이라는 표현이 약할 정도다. 이미 상당수 영역에서 인간 능력을 초월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신의 영역에 다가서고 있다. 챗만 그런 게 아니다. 비슷한 후속 AI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 같은 '기계 인간'들이 여는 미래라니.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기계의 도움으로 신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SF영화의 단골 주제처럼, 신 같은 기계 아래의 존재가 될까. 어찌 알겠는가. 인간(혹은 기계) 하기 나름일 수도. 어쨌건 분명한 건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희미해진 세상을 살게 됐다는 사실. 한 번도 경험 못 한, 더구나 예측하기도 힘든 AI시대는 어떻게 전개될까. AI 혁명의 선두주자인 챗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사실, 챗 역시 인간의 집단 지식·지성의 총합, 혹은 그 이상 아닌가. 달변가 챗, 거짓말도 술술우리나라에서 AI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건 바둑이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맞붙은 세기의 대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둑만큼은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지 못하리란 믿음이 무참히 깨졌던 것. 바둑은 시작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 AI는 고도로 진화한 음성·이미지 인식 기술을 장착하고 무서운 속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미 금융·의료·교육·교통·서비스업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나아가 예술 창작 분야까지 '접수'할 태세다. 하지만 AI가 사람처럼 대화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언어의 특성상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 전문가들도 현재 기술로는 불가하다고 했다. 이 같은 예상을 깨부수고 혜성 같이 나타난 게 챗이다. 이는 구글이 개발한 트랜스포머 기반의 딥러닝 모델을 적용한 덕분이다. 쉽게 말해 인간 뇌의 신경망을 모방한 기술이다. 인터넷상의 수천억, 수조 개의 데이터를 학습해 추론으로 대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이전의 대화까지 기억한다. 먼저 챗에게 인터뷰가 가능한지 물었더니 "물론입니다. 최대한 도움을 주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어 자기소개를 요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OpenAI에서 개발된 대규모 언어 모델입니다. GPT-3.5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학습된 인공지능 모델로, 대화형 AI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질문에 답변하거나, 자연어 처리, 문서 작성, 언어 번역, 대화 시스템 등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중략)" 나쁘지 않은 대답이지만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챗은 스스로 밝혔듯이 3.5 모델이다. 지난해 11월30일 처음 선보인 후 두 달 만에 사용자가 1억명이 넘을 만큼 인기다. 작문이나 예술 분야 활용 영역은 거의 무한정이다. 급기야 판결문까지 쓰고 있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OpenAI는 올해 3월 업그레이드 유료 모델 GPT-4.0을 내놨다. 데이터 처리 용량과 속도 등 성능이 한층 좋아졌다. GRE시험 상위 1%, 미국 변호사 시험 상위 10%에 들 정도로 똑똑하다. 만능 AI시대 챗GPT챗의 태생적 한계도 있다. 수집·학습 데이터가 2021년 이전까지로 한정돼 있어 최신 정보를 알 수 없다. 이 같은 단점을 극복한 게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만든 대화형 챗봇 빙(Bing)이다. 챗과 달리 빙은 인터넷 연결로 실시간 정보를 알려주며, 그 출처도 밝힌다. 그렇지만 챗에 비해 대화 능력이 떨어지고 창작도 못한다. 인터뷰가 가능한지를 물으면 "죄송하지만 못 하겠다"는 식이다. 두 AI 장점을 섞어 쓰는 게 좋을 듯싶다.챗은 달변가이지만 거짓말도 능청스럽게 잘한다. 특히 잘못된 전제의 질문을 할 땐 더 그렇다. 이런 식이다. 장난삼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시켜 만든 수륙양용차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화평보자기'라며 상세히 부연 설명까지 했다. "이 차는 세종대왕 23년(1441년)에 장영실이 개발한 기계로 바퀴와 추진력을 이용해 땅에서 이동할 수 있고, 추력을 이용해 물 위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화평보자기? 난생처음 듣는 말이어서 어디에 그런 기록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조선왕조실록'에 있다고 했다. 거짓말 아니냐고 했더니 "확인 안 된 잘못된 정보였다"고 실토했다. 이뿐만 아니라 황당한 대답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GPT-4.0에선 이 같은 '환각오류'가 개선됐다고 한다. 챗의 詩 "손잡고 미래를 열자"AI가 변화시킬 인류의 미래는 어떨까.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할 터. 향후 10년 후에 생기고 사라질 직업 5가지를 물었다. 챗GPT는 신생 직업 5개를 "AI개발자, 데이터 분석가, 로봇 공학자, 3D 프린팅 엔지니어, 블록체인 엔지니어"라고 답했다. 사라질 직업으로는 캐셔, 운전사, 택배 배달원, 데이터 입력 및 처리 업무, 교사를 꼽았다. 사라질 직업에 대해 "좀 아닌 것 같다"고 되묻자 챗은 "죄송하다"며 바로 말을 바꿨다. 은행원, 인쇄기술자, 서점 직원 등을 새로 제시했다. 말 바꾸기도 달인급이다.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재차 들었다. 하기야 챗GPT는 미래 예측 모델도 아니니. 그럼에도 참고할 만한 사실은 있기 마련. AI시대 인간이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를 묻자 챗은 "창의력, 소통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상된 답이다. 여기에 '통찰력'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이외에도 AI가 가져올 미래 등에 깊은 대화가 많이 오갔으나 모두 옮기기엔 지면이 모자란다. 아쉬움이 남는다. 챗으로부터 뭔가 핵심적인 답변을 이끌어 내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다. AI 세계를 살짝 맛보는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개인적으로 질문능력이 AI시대 필수 경쟁력임을 새삼 깨달았다. 챗에게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AI와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시를 잘 써달라고 요청했다."AI와 함께하는 미래는/ 가끔은 두려움도 느끼게 돼/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가야 해/ 불안한 마음이 가득찬 날/ 우리는 서로를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아줘야 해/ AI와 인류가 손을 잡고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그 길에서/ 우리는 더욱 높은 이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더욱더 다스려야 해/ 그리고 그런 노력과 마음이/ 우리의 미래를 빛나게 만들어 줄 거야/ 두려움이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함께 걸어가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허석윤 논설위원 hsyoon@yeongnam.com챗GPT를 필두로 시작된 AI 혁명이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미지 생성 AI를 이용해 만든 인공지능 로봇과의 가상 인터뷰 모습.
[자유성] 멍때리기
사람이 하루 동안 눈을 깜박이는 횟수는 1만4천여 번이다. 그러면 하루에 생각은 몇 번 할까. 정확한 통계는 없다. 6천번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고, 6만~8만번이라는 주장도 있다. 횟수야 어떻든 종일 생각에 파묻혀 사는 것이다. 문제는 생각의 80% 이상이 부정적이고 반복적이라는 것.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무 쓸데 없는 생각을 왜? 답을 알기 위해선 생각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 생각은 인간 무의식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자동 프로그램이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만약 생각의 주체가 '나'라면 통제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끊이지 않는 잡념은 큰 고통이다. 만성이 돼서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번뇌 망상이라고 한다. 집착, 분노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 특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현대인은 잠시도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생각중독이 심할수록 불안, 스트레스, 불면증에 시달린다. 해결책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의도적으로 멍한 상태를 만들면 다소 효과가 있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 2014년 서울에서 시작된 '멍때리기' 대회가 해를 거듭할수록 인기다. 국내를 넘어 중국·대만·홍콩 등 해외로 확산되고 있다. 이 대회 창시자는 작가인 웁쓰양(예명)이다. 그는 "멍때리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휴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회 규정은 90분간 멍한 상태로 침묵하기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대회인 셈이다. 대구경북에서 열려도 좋을 듯하다. 허석윤 논설위원
[자유성] 존엄사
대구시내 교통표지판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삼거리, 오거리는 있는데 사거리는 없다. 대신 '네거리'로 적혀 있다. 시민들도 그렇게 부른다. 경북지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서울, 부산 등 대부분 도시에선 그냥 사거리라고 한다. 대구경북만의 독특한 숫자 문화인 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죽을 사(死)와 같은 발음을 피하려는 것. 건물 4층을 'F'로 표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이는 전국이 다 그렇다. F는 'Four'의 첫 글자다.애초에 우리말도 아닌 한자 발음이 같다고 숫자 '4'를 죽음과 연결 짓는 건 난센스다. 우리 사회의 죽음 강박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금도 죽음은 금기어여서, 누구도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인의 죽음 기피증이 큰 것은 유교문화 때문이다. 알다시피 유교의 세계관은 현세의 삶에 한정돼 있다. 내세관이 없고 죽음에 대한 가르침도 부족하다. 죽으면 끝이라는 믿음은 한국인의 심층의식에 뿌리박혀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괜히 있을까.문제는 이승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떠나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은 모를 수가 없지만 대다수는 떠날 준비를 안 한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비참한 죽음도 늘고 있다. 그나마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건 다행이다.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불필요한 연명의료는 그만둘 때가 됐다. 본인의 사전의향서를 통한 존엄사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살 권리'만큼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 허석윤 논설위원
[월요칼럼] 특권이냐, 분권이냐
챗GPT에게 물어봤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없애야 할 사회적 특권은 무엇인가? 대답은 이렇다. "△지역 간 차별=한국은 지역 간 차별이 크게 나타나는 나라다. 특히 수도권과 그 외 지역 간의 격차가 큰데, 이러한 지역 간 차별을 해소하지 않으면 전국적인 발전이 어려울 것이다. △권력 기관의 특권=한국의 권력 기관들은 여전히 과도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잘못된 판단이나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고, 권력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과 재벌의 특권=한국은 대기업과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특정한 산업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도 지나치게 우월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외에도 챗GPT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긴 세대 간 격차 등을 특권의 관점에서 나열했다. 양이 길어서 나머지는 잘랐다. 원론적이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우리나라 권력 기관과 재벌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 문제는 제대로 된 지적이다. 더구나 한국이 없애야 할 특권 가운데 가장 먼저 수도권을 언급한 게 놀랍다. 통상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는 특권 개념을 지역으로까지 확장하다니.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할 만큼 똑똑한 게다. 내친김에 수도권이 가진 특권의 배경과 현황, 문제점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예상대로 누구나 수긍할 만한 모범답안이 나왔다. 게다가 묻지도 않은 대안까지 덧붙였다. 친절도 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답변 수준이 원론적이고 피상적이다. 질문이 두루뭉술한 탓일 수도. 어쨌건 수박 겉핥기식 답변 중에서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수도권 특권이 조선시대부터 굳어진 현상이란 것.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상기해 보는 차원이다. 조선 개국 때부터 한양에는 출세를 노린 전국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왕이 사는 도읍이었으니 당연했다. 주요 통로는 양인들까지 응시 가능한 과거제도였다. 문과 급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경쟁률이 2천대 1이었다. 보통 20~30년간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한양 입성에 성공하기만 하면 인생역전이 이뤄졌다. 신분 세습도 가능했기에 한양의 양반 권력은 세력을 넓히면서 뿌리내렸다. 이처럼 '인서울'의 역사가 600년도 더 됐으니 한국인의 DNA에 각인될 법하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라는 속담이 왜 생겼겠나. '인서울'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됐다. 돈과 일자리가 부족한 지방민의 엑소더스는 일상이 됐다. 그 결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산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를 독점하는 특권지대가 됐다. 이 같은 '서울 공화국' 체제가 앞으로 개선되기는 할까. 국민 의식 깊숙이 서울에 대한 동경심이 뿌리박혀 있는 한 그럴 리가 없다. 되레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내의 70%를 차지하는 수도권 경제가 규제완화 등 약발로 몸집을 계속 불리지 않는가.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수도권 특권을 강화하거나 분권으로 지방을 살리거나. 갈 길은 정해져 있다. 세계 최악의 출산율과 인구 유출로 지방 곳곳이 소멸 위기다. 이미 내부 식민지화된 지방이 몰락하면 수도권인들 건재할까. 분권과 균형발전을 지방에 대한 시혜로 접근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 공멸을 막는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허석윤 논설위원허석윤 논설위원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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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위기경보 '심각' 단계 때 외국 의사 의료행위 허용…대구 의료계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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