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에고(EGO) 게임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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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5 06:59  |  수정 2024-03-25 07:00  |  발행일 2024-03-25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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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윤 논설위원

에고(EGO)는 '나'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현대에서도 '자아(自我)' 개념으로 통용되지만 국어사전의 풀이는 좀 난해하다. "철학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반응·체험·사고·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라고 규정돼 있다. 축약하자면 에고란 모든 외부 대상과 자신만의 개별성을 구분 짓는 인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에고는 몇 가지 특성을 띤다. 동일시와 분리감이 대표적이다. 동일시는 자신의 몸과 소유물(이름·직업·재산·지위 등)이 곧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란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분리감을 느낀다. 동일시가 강할수록 분리감도 커진다. 인간이 외로움과 소외감에 쉽게 빠지는 이유다.

에고의 어두운 측면은 이게 다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끊임없는 결핍감이다. 고대 불교에서는 이를 '두카(dukkha)'라고 했다. 삶의 근원적인 불만족과 고통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인간의 모든 부정성은 공포와 불만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를 띠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해친다. 그런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최악이 집단 학살극이다. 과거 캄보디아 독재자 폴 포트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국민 약 200만명을 살해했다. 특히 안경 쓴 사람들을 죄다 죽였다.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지식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600만명을 학살한 히틀러 같은 빌런도 마찬가지다. 탐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 에고의 광기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에고는 인류 공통의 문제다.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단지 정도 차이는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장착돼 있다. 숙명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극적인 순간이 아니라면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남에게 약점이 될만한 에고를 숨기고 사회생활에 적합한 심리적 가면을 쓰고 있다. 인격·개성을 뜻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원이 '페르소나(persona·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인 이유다. 일찌감치 셰익스피어도 "인생은 연극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서 인격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에고는 물질만능주의와 생존경쟁이 심할수록 힘을 얻는다. 현대사회가 에고의 전성시대인 건 필연적이다. 에고의 또 다른 속성 중 하나는 '내가 무조건 옳고 가장 잘났다'이다. 대개는 이 같은 속내를 감추지만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정치인이 그렇다. 그들은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자신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다. 지배욕과 권력욕은 더 강하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을 채워줄 '높은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피 튀기는 자리싸움이 벌어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선거를 민주주의 꽃이라고 한다. 듣기 좋은 레토릭이다. 설사 진짜 꽃이라고 쳐도 너무 상했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일부라는 전제를 달지만) 정치 협잡꾼들의 저질 에고게임이 점입가경이다. 선거가 거짓과 꼼수, 막말, 위선, 배신의 경연장이 되고 있다. 하다못해 감옥에 있어야 할 범죄자들까지 설치며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해도 너무한 야바위 선거판이다. 유권자가 정신 똑바로 차리는 수밖에 없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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