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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41)] 이영규, 대구 연극 부흥의 주역…제작과정 자료화 노력도
대구시립극단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이영규(1948~2006)는 대구 연극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다. 1970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응모해 입상했다. 대구 연극계와의 인연은 1985년부터다. 극단 '우리무대'의 공연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의 연출을 맡으면서다. 1986년에는 극단 우리무대 대표를 역임했으며, 1991년에는 극단 일봉을 창단해 대표를 맡았다. 이후 다양한 무대를 연출하며 대구 연극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초대 예술감독 선임1998년 대구시립극단이 창단한다. 인천·경기도·서울·부산시립극단에 이어 전국에서 다섯 번째 시립극단이었다. 이영규는 그해 8월 '초대 예술감독'으로 선임된다. 당시 그는 "지역 연극인들의 재교육과 신인 발굴로 시립극단이 이른 시일 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향토작가의 작품을 과감히 무대에 올릴 예정"이라며 포부를 밝혔다.이영규는 예술감독에 선임된 후 시립극단의 '정체성'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배우 선발' '출연료 지급' 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배우 선발'은 '오디션'을 당연시했다. 오디션에서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을 경우 민간 연극계를 돌아다니며 직접 캐스팅을 하기도 했다.'출연료'는 당시 민간극단에서 상상할 수 없던 수준으로 책정했고, 출연료 지급을 위한 계약서 작성 등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연료를 지급할 때는단순히 '선후배 순서'가 아닌 '배역 비중'에 따라 수준을 달리했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배우들도 나타났다. 선후배 구도를 무시하는 방식이라며 중도하차를 하는 배우가 속출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특히 이영규는 '스태프'를 중시했다. 스태프도 계약서를 반드시 작성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또 배우들에게 연극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스태프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작품에 참여하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모든 작품의 제작과정 및 공연 등을 자료화하는 데 노력했다.◆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 '무지개'대구시립극단이 창단되던 해에 가장 큰 고민은 '창단일' 확정이었다. 적절한 날짜를 고민하던 중 시립극단의 첫 작품을 올리는 날짜를 창단일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으게 된다.이영규는 창단공연 작품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창단공연은 시립극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고전 명작보다는 지역작가의 작품을 올리기로 결정한다. 선택된 작품은 향토작가 이만택씨의 희곡 '무지개'였다. 당시 이영규는 '무지개'를 창단공연작으로 선정하며 지역작가의 작품을 올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향토연극계의 저변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대구 시민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을 통해 대구시립극단 정체성을 확립하길 원했다.이영규는 창단기념공연을 앞두고 당시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반 극단의 공연과는 다른 '프로'의 냄새가 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작품 배경의 경우 영양군 일월산 일대에 남아있는 화전민촌을 카메라에 담아 제작했으며, 대사는 대구 인근 사투리를 사용해 지역 정서에 맞췄다"고 작품을 설명했다.창단기념공연은 1998년 12월4일부터 5일까지 양일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으며, 총 4회에 걸쳐 관객과 만났다. 예술감독 겸 연출에는 이영규, 작곡은 장명화가 맡았고 이송희·이동학·손현주·손성호·이경자 등이 출연했다.연극 '무지개'는 경상도의 어느 화전민 '부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문명 세계를 등지고 감자·옥수수로 연명하며 자연인으로 생활하는 마을 사람들의 애욕과 갈등을 그렸다. 20년 동안 징용 간 아들을 기다리는 월산댁, 두메산골의 적막함에 몸부림치며 도시로 나가고 싶은 태식, 그런 태식을 사랑하는 이뿐이, 대도시에서 온 염세주의자 백운 선생 등이 등장한다. 해당 공연은 이들의 사랑과 야망, 좌절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장엄한 드라마로 평가받았다.◆주요 연출·감독 작품 '우리 읍내' '감사관' '민중의 적' 등이영규는 창단공연으로 향토성이 짙은 '지역작가' 작품을 올린 후 민간극단에서 제작하기 힘든 규모의 대형 작품을 기획했다. 또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쉽고 재미있는 작품을 선정하기도 했다.손턴 와일더 원작의 '우리읍내(Our Town)'는 시립극단의 제2회 정기공연작이다. 이영규는 규모가 큰 작품을 제작해 대구 연극의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우리 읍내는 1999년 4월8일부터 10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랐다. 작품의 원작은 기독교 문화가 바탕인 미국 중서부 도시를 배경으로한다. 그러나 이영규는 대구 인근 화원읍으로 작품 배경을 설정해 지역색을 높였다. 공연은 의사와 우체국장 집안의 아들과 딸의 성장과 사랑, 결혼과 죽음을 통해 인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이영규는 내레이터가 등장하는 서사극 형식으로 작품을 풀어냈다. 또 그림자 연극, 마임 요소 등 다양한 표현 기법도 선보였다.시립극단의 제3회 정기공연인 '감사관'은 대중성을 고려해 선택한 작품이다. 앞선 공연인 '무지개'와 '우리 읍내'가 대중성이 부족해 관객들의 호응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해 해당 작품을 선정했다. 또 시립극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객원 연출(김삼일)을 초빙해 제작했다. 공연은 1999년 10월8일부터 9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랐다. 당시 작품 제목을 검찰관으로 할 것인지 감사관으로 할 것인지 여러 의견이 오가기도 했다. 작품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 고골의 대표작이다. 지방의 작은 마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 러시아 중앙정부를 풍자하고 있다. 김종대·채치민·손성호·최주한·이경자 등 30여 명의 시립극단의 배우들이 출연해 코믹하고 풍자적인 연기를 선보였다.2001년 9월28일부터 29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시립극단의 제7회 정기공연인 '민중의 적'은 현실주의 연극의 진수를 보여 준 작품이다. 작품은 환경오염·집단 이기주의·집단 따돌림 등 문제를 다룬 헨리 입센의 사회극이다. 이영규는 "극 구성이 탄탄하고 반전이 많아 작품성과 재미를 두루 갖췄다"면서 작품 선택 이유를 밝혔다. '민중의 적'은 온천개발지역의 오염실태를 폭로하려는 한 의사와 개발 이익을 챙기려고 이를 저지하려는 지역주민들 간의 대립 문제를 다뤘다. 이영규는 헨리 입센이 노르웨이 작가인 점을 고려해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전통음악을 응용한 역동적인 음악을 통해 무대를 꾸몄다. 이외에도 '황태자의 첫사랑' '타이피스트들' '허생' 등의 작품을 연출·감독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참고자료=대구시립극단 20년사, 대구시립극단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 '무지개' 공연 모습. 대구시립극단 제2회 정기공연 '우리 읍내(Our Town)' 공연 모습. 이영규 예술감독이 연출한 대구시립극단 제7회 정기공연 '민중의 적' 모습.
2023.01.12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40)] 이명희, 37세에 김소희 문하 들어…판소리 이수 무형문화재
'판소리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한 소리꾼이 있다. 모정(慕汀) 이명희(1946~2019) 명창이다. 그는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전라도 명창들이 주로 차지했던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늦은 나이에 판소리를 다시 시작했던 이명희는 대통령상 수상 후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음에도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판소리연구소뿐만 아니라 지역 대학에 출강하며 대구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써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인 소리꾼을 여럿 배출했다.◆스승 김소희 명창과 만남경북 상주 출신인 이명희는 1946년 12월27일 아버지 이차경과 어머니 이일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과수원을 운영하던 재력가이자 지역 유지였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 오랜 기간 집을 비웠다. 이명희의 어머니는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이명희를 데리고 대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명희는 대구에서 수창국민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언니가 경영하던 요정에서 지냈다. 당시 그가 지내던 이모 집에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예인들의 출입이 잦아 전통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 시기 대구에선 여성국극단의 공연도 많이 열렸는데, 이명희는 어린 시절 이런 공연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춤과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야금을 타던 이명희의 어머니는 대구에 머물던 시절, 당시 유명한 대금·해금 산조의 명인 한범수를 만난다. 한범수와의 만남은 훗날 이명희가 스승 김소희 선생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이명희는 14세 때 서울 종로3가에 있는 한국정악원으로 오게 된다. 한국정악원은 한국 최초의 사립 음악교육기관으로 당대 유명 예술인을 대거 배출했다. 인근에는 유명한 국악인이 모여 살았고 김소희, 박녹주, 박귀희 등 명창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한범수는 당시 한국정악원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이명희는 잔심부름을 맡으면서 틈틈이 공부했다. 이명희는 원옥화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박녹주와 박귀희에게 춤과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이때 그의 영원한 스승이 된 만정(晩汀) 김소희(1917~1995)로부터 판소리도 배우게 됐다.◆전라도를 떠들썩하게 한 경상도 소리꾼이명희가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 오른 건 1962년 '춘향전'이다. 196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열린 '배비장전'에서 통인 역을 맡아 연기했다. 창극 공연 외에도 크고 작은 행사에 따라다녔다. 이명희는 힘든 작업과 여성 국악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으로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왔다. 국악과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1976년 29세에 정춘덕과 결혼했다. 이명희는 당시 시집에서 지내면서 농사일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고부간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심하게 꾸중을 들었던 어느 날, 이명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불현듯 김소희 선생이 떠올랐다. 이후 아이 둘을 데리고 집을 나와 여인숙에서 지내다 파출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무작정 부잣집을 찾아갔다. 당시 찾아갔던 집이 진영건설 사장 집이었는데, 이때 성실함을 인정받아 공사장 현장 식당을 운영하게 됐다. 음식 솜씨가 좋아 이때 제법 돈을 모으면서 이명희는 기회가 닿으면 소리를 다시 하기로 했던 계획을 차츰 실행에 옮긴다. TV에서 스승이었던 김소희가 제자들과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본 이명희는 '내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 선생님 옆에 있을 건데'라며 부러워하자 이를 본 남편은 이명희에게 가야금을 선물했다. 이후 이명희는 다시 소리를 배우기 위해 37세에 김소희 문하에 들어간다. 이때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로 인정받게 된다.다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 7년 만인 1990년 이명희는 국악인이 선망하는 꿈의 무대인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을 불러 이 상을 받았는데, 전라도 소리꾼의 전유물이었던 대통령상을 받자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됐다. 대회 이후 "도대체 이명희가 누구냐"며 그를 찾는 곳이 많았고, 이명희는 정·재계 등 각종 모임에 초청되다 보니 일주일 동안 집에 못 올 정도였다.이명희의 대통령상 수상은 대구 문화계에서도 이슈였다. 1992년 당시 지역 문화재 위원들은 서둘러 그를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로 지정한다. 당시 대구에서 지속적인 판소리 전승이 이뤄지지 않아 문화재 지정이 논란이 되긴 했다. 하지만 판소리의 문화적 가치, 과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판소리 중흥이 이뤄졌음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소리 보급·후진 양성에도 기여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명희는 전국 각지에서 초청 공연, 각종 대회 심사를 하며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크게 얻었다. 1985년 이명희 판소리 연구소 문을 연 이후 청소년 판소리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판소리 보급에 힘썼는데, 대구시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이 또한 탄력을 받는다. 대통령상 수상을 기념해 청도에는 청소년 판소리 전수소를 마련했고, 영남지역인 성주·구미·포항·부산·울산·김해 등에 영남판소리보존회 지부를 개설했다.이명희는 판소리 보급과 후진 양성 규모를 키우고자 2001년 <사>영남판소리보존회를 설립했다. 영남판소리보존회는 영남 지역에서 전승하고 있는 판소리 동편제의 전수보급과 해외문화교류사업 등을 통한 전통예술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의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대구에서도 '기생점고' '성춘향' '갑순이 시집가는 날' 등 창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그는 국악 인재 발굴을 위한 대회를 여는 데도 주력했다. 대표적인 대회는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현 달구벌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로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다. 당시 국악경연대회가 성인 중심이었던 점을 아쉬워했던 스승 김소희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이명희는 스승의 도움을 받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 1994년 제1회 대회를 열었다.2005년부터 2014년까지 이명희는 대구국악협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국악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노력했다. 그의 임기 동안 지역 국악계의 숙원이었던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최고상을 대통령상으로 격상시켰다. 전임 협회장과 협회 회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가 이를 현실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이명희의 제자이자 딸인 정정미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은 "문화재청에서 국가 문화재로 전환을 하라고 연락이 온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굉장히 좋아하시다가 며칠 생각하시더니 안 한다고 하셨다. 국가 문화재가 되더라도 대구에 계셔도 됐는데, 당시에는 대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오직 한마음은 영남의 판소리를 내가 여기서 지키면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겠다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참고자료=영남의 소리꾼 모정 이명희(영남판소리보존회)공동기획 : 대구광역시1963년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배비장전'에 출연한 이명희. 제자와 한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명희(오른쪽) 명창.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후 이어령(왼쪽) 문화부 장관, 손주항 국회의원과 기념촬영을 한 이명희(가운데) 명창. 2018년 영남일보 인터뷰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이명희(왼쪽 둘째) 명창.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이명희 명창. 영남판소리보존회 제공
2022.11.10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9)] 김익달, 학생 잡지 '학원' 펴내…포성 속에도 희망 전파
1952년 피란지 대구,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란 속에서 천막교실은 열렸고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배움을 이어나갔다. 변변찮은 교과서 하나 없었다. 주위는 절망과 죽음, 이산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당시 36세의 청년 출판업자 김익달(金益達)은 '청소년을 키우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중·고생 잡지 '학원(學園)'이다. 당시 청소년에게 배움과 즐거움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실천이었다. 특히 '학원'은 훗날 '학원세대'란 칭호를 얻은 유일한 잡지가 된다. 전란의 피폐함 속에서 학생들에게 배움의 뜰을 마련한 잡지 학원이 창간된 곳이 바로 대구 삼덕동이었고, 그 중심에 출판계 대부(代父)로 불린 김익달이 있었다.◆전란 속에서 '배움의 뜰'을 열다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익달(1916~1985)은 국내 출판계 1세대로 꼽힌다.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상업과를 2년 수료한 그는 1945년 대양출판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출판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전쟁의 포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전란 속에 피란 온 어떤 출판업자도 감히 인쇄기를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익달은 1952년 10월 대구 삼덕동 29에 임시로 지은 판잣집 사무실에서 새로 만들 잡지의 창간사를 써 내려갔다. "시대의 요구에 응하여 본사는 이에 중학생 종합잡지 '학원'을 간행한다. 본디 '학원'은 글자 그대로 배움의 뜰이 되어야 할 줄 안다. 우리의 장래가 모두 학생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말하는 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을 위한 이렇다 할 잡지가 없는 것이 또한 오늘의 기막힌 실정이다. 여기서 본사는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하며 본지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뜻하는 바는 중학생들을 위한 참된 교양과 올바른 취미의 앙양이다. 불행한 이 나라 학생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본디의 뜻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이 이상 더 고마운 일이 없을 줄로 생각한다."1952년 11월 마침내 '학원'이 창간됐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김익달(金益達), 인쇄인은 하영오(河英吾), 인쇄소는 경화(京和)인쇄소, 발행처는 대구 삼덕동 29 대양(大洋)출판사였다. 당시 대양출판사의 본사는 부산이었지만 피란지 대구 삼덕동에 마련한 임시 사무실이 실질적인 본사였다. 판형은 A5판, 총 114면이었으며 가격은 4천원이었다. 창간호의 표지는 컬러였다. 소년과 소녀가 방안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창밖에는 가을 단풍이 붉다. 이는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컬러 인쇄로 한국 출판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된다. '학원' 창간 이후 대양출판사는 '학원사(學園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학원세대'학원'은 '참된 교양과 올바른 취미의 앙양'이라는 김익달의 창간사에서 보듯 청소년 교양과 오락을 동시에 추구했다. 창간호에는 프랑스 화가 밀레의 '장작 패는 사나이'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었고, 사진화보, 박목월과 조병화 등의 시, 마해송의 수필, 정비석이 짓고 백낙종이 삽화를 그린 '홍길동전', 김용환의 연재만화 '코주부 삼국지', 셰익스피어의 전기 등이 실렸다. 또한 지식 정보 교육을 위한 '학습 취미 강좌'에서는 '사회생활' '과학' '영어' '수학' 에 대한 지상 강의가 이어졌다. 연재물 중에 정비석의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는 단연 인기였다. 학생들은 넓고 넓은 중원을 배경으로 파란만장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학원'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학생들은 매월 학원이 발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당시 '학원'을 읽지 않으면 학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독자층도 두터워졌다.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군인과 부인들까지 독자로 확보해 인기를 모았다. 한때 10만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학생들은 '학원'을 보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그들은 얼굴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학원'을 통해 소통하며 성장했다. 1950~60년대 학원을 탐독하고, 학원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자라난 그 시대의 청소년들을 '학원 세대'라 부른다. 그들은 이후 19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문화 세력'으로 성장했다. ◆학원장학회와 학원문학상창간호의 한 페이지는 '학원 장학생 모집' 공고가 차지한다. 김익달은 학창 시절 뼈저리게 가난했다. 그는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참 도움의 방법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나눔이 곧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무게를 덜어주는 일을 그는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통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학원장학생은 가난한 살림에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중학생들을 전국 각지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시험으로 가려 뽑았다. 뽑힌 장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의 학비 전액을 지원했다. 김익달의 학원장학회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인재의 씨앗'을 심는 것을 그는 숙명처럼 여겼다. 장학 사업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코 중단하지 않았고 그가 출판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 끝까지 지킨 것이 학원장학회 사업이었다. '학원'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학원 문학상'의 제정이다. '학원문학상'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신이 직면한 현실적인 억압을 문학작품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예비문학도들의 텃밭이었다. 또 전문적인 문학교육의 장이자 문학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대한 독자의 욕망을 충족해 준 '실천의 장(場)'이었다. 1954년 1월호에 '제1회 학원문학상'이 발표됐다. 응모작은 2천여 편이었다. 심사위원으로는 정비석,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서정주, 김동리, 최인욱, 김용호, 조병화, 장만영 등이 참여했다. 학원문학상은 1967년 11회까지 계속되면서 이제하, 유경환, 황동규, 정공채 등 시인 84명을 비롯해 송기숙, 유현종, 이청준, 김주영, 김원일, 최인호, 황석영 등 소설가 44명, 기타 평론·아동문학·희곡 부분에서 20여 명을 배출해 냈다. 이들은 '학원문단파'로 불리며 한국문학의 중추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휴전이 되면서 학원사는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학원'은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다 1979년 9월호를 내고 종간하고 말았다.평생을 출판업에 헌신한 학원 김익달은 1985년 11월2일,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학원장학생 출신인 박범진(제14대·제15대 국회의원)은 회고한다. "능력은 겸손에서 돋보이며, 실천은 과묵에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 생애를 통해 보여 준 김익달 선생. 그의 생애 그 자체가, 바른길이 없는 이 시대에 바른 정신의 모범으로 남아 우리를 반성하게 만든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참조=윤상일 저 '학원 김익달 평전'(지상사)공동기획 : 대구광역시6·25전쟁 당시 대구 삼덕동에서 창간된 중고생 잡지 학원의 창간호. 창간호 표지는 컬러 인쇄를 했는데 한국 출판역사에서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중고생 잡지 학원 창간사. 학원 창간 때부터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장편만화 '코주부 삼국지'는 가장 인기 있는 코너였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중고생 잡지 학원의 발행정보란. 발행처인 대양출판사의 주소가 대구시 삼덕동 29로 적혀있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2022.10.04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8)] 대구 추상회화 선구자 장석수, 30여년 후학양성 매진…1957년 전후 구상→추상주의 변화…드리핑·타시즘 혼용하며 급진적 기법 실험
장석수(1921~1976)는 추상미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반을 다지고 성장을 이끌어온 화가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의 유화과를 졸업한 장 화백은 1946년 대구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한 이래 몇몇 학교를 거친 뒤 1963년 대구대학(현 영남대)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직을 맡아 작고한 1976년까지 총 30년간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그는 '역동적인 실험가' '예술적 성향이 짙은 화가'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중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익수 영남대 조형대학 명예교수는 '내가 만난 장석수, 나의 스승 장석수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선생은 멋있는 예술가셨고, 그 자유로움으로 공직 생활보다는 창작하는 삶에 에너지를 쏟으시는 모습이 후배, 제자들에게 의욕을 북돋웠다고 생각된다"고 썼다.고(故) 정점식 화백은 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던 '고(故) 장석수 유작전에 부치는 글'을 통해 "1차대전이나 2차대전 또는 정치적인 압력 밑에 누르고 있던 울분이 앵포르멜(Informel)이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동기를 마련했지만 우리들은 6·25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겪어야만 했다. 일찍이 이들 물결 속으로 뛰어든 사람이 장석수"라면서 "종래의 미술이 미적대상으로서 우리들의 삶의 여백을 수놓아 온 소위 풍월을 읊는 예술이었지만, 장석수의 회화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불안과 의문을 푸는 도장으로서의 그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장석수의 삶장석수는 1921년 경북 영일군 지행면(현 포항 남구 장기면)에서 4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름답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부친은 천석꾼 소리를 들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에 장기초를 거쳐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로 진학했다가 2년 만에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교토에 있는 동산중(東山中)에 편입해 1940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 우에노에 있던 태평양미술학교의 유화과에 입학한다.귀국 후에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는 한편 1944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1년여간 지행면 서기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아 그만뒀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1일부로 대구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했고, 이후 대륜중, 사대부고 등에서 근무하다 1954년 6월 신명여고로 자리를 옮겼다.첫 개인전을 가진 것은 1955년 4월. 대구 미국문화관(USIS) 화랑에서 개최된 전시에서는 '남매' 등 20여 점의 유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가 끝나자 같은 달 연이어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가졌다.이후 1958년 신명여고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직을 끝내고 대구대학(현 영남대) 강사가 된다. 1963년에는 대구대학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직을 맡았고 작고할 때까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1966년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 1970년 대구공보관 화랑에서 '제4회 개인전', 1972년 대구백화점 전시장에서 '제5회 개인전'을 거쳐 1974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인 '제6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76년 2월 평소 앓던 두통 치료차 내원해 검진한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받고 3개월여 투병 후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장석수의 작품세계장석수 화백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작업 시기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눠놓는 두 차례의 현격한 양식 변화가 있었다.첫 번째는 인물이나 자연을 모티브로 한 구상작품에서 1957년을 전후해 추상표현주의에 이른다. 1955년 무렵부터 진행되어온 추상 의지의 실천이 유화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이 1958년 '사정(射程)'과 1959년의 '단절'로, 이미 본격적인 비대상회화의 실현에 이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유화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연관을 맺고 있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이 주요하게 적용되고 있지만 일부 작품의 화면 표현 곳곳에는 얼룩과 번짐 등 물감의 우연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타시즘의 기법'도 혼용됐다. 그 당시의 작가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새로운 자유 의식의 실천방식이었을 것으로 평가된다.그 후 장석수는 약 10년간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미술의 실험적인 작업에 진력했다. 그의 앵포르멜 회화는 당시 다른 추상 작가들과 달리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 추상인 비정형 회화를 실천했다.그러나 두 번째 대변화가 1970년대 접어들면서 나타난다. 앵포르멜 경향의 작업에 심취했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 그의 캔버스에 다시 회화적 이미지의 구성과 구상적인 화면이 등장하는 것.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가 확대되거나 연장된 양식으로 가지 않고 구성적 표현으로 복귀했다는 데서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면 추상작업 기간 몰입했던 자신의 내면적 지향에서 벗어나 외부의 사물과 자연에 시선을 돌리는 과정에 느끼는 여러 가지 희열과 기쁨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면서 "장석수는 언제나 내적 요구에 따라 양식은 변화될 수 있는 것임을 자주 시사한 바 있다. 또한 동서양화 양식의 융합을 시도한 작가의 태도를 칭찬하기도 한 바, 그 자신도 다양한 양식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장석수는 내적 필연성을 항상 강조했고 양식에 관한 한 매우 열린 태도를 취했다.1953년 대구에서 열린 최덕휴의 개인전 평에서 "양식이 테마를 선택할 경우와 반대로 테마가 양식을 결정할 경우 어느 쪽이든, 하나의 작품이 실현되기 전에 작가의 흉중에 결합되어 작용한 意想(의상)이 곧 작품 행동이 되는 주요 포인트"라고 했다. 1965년 정점식 작가와 한 지상 대담에서는 "경북화단에서 자연주의 계통이 발전되지 않는 것은 그릇(容器)에만 얽매이는 까닭이다. 앞으로 그릇 자체를 찌그러뜨릴 수 있는 '내용'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김 미술평론가는 "어떤 내적 감정의 표현 충동이 그의 예술 태도 전체를 관류하는 특징"이라면서 "선생의 예술세계를 내내 이끌어 온 일관된 예술적 지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문제에 대한 강렬한 표현 충동이었다고 요약될 것"이라고 평했다.글=박주희기자 jh@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사진=봉산문화회관 제공참조=김영동의 '장석수 선생의 삶과 작품활동'(예술담론 웹진 '대문' 게재), 김영동의 '장석수 선생의 작품세계'(대구문화예술회관 장석수전 게재)장석수의 '무제', 1966, 유족 소장장석수 작, 제목 및 연도 미상, 유족 소장
2022.08.29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7) ] 북춤 전승에 온 힘 김수배, 6·25전쟁으로 해체된 비산농악대 재창단 후 각종 대회서 수상…1986년 '날뫼북춤 예능보유 1호' 지정
김수배(1927~2006)는 '날뫼북춤 예능보유자 제1호'이다. 19세 되던 해 그는 대구 서구 비산동에 정착한다. 당시 마을 농악대인 비산농악대에 들어가 활동한다. 이후 6·25 전쟁으로 해체된 비산농악대를 재창단했다. 또 서구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돼 온 북춤인 '날뫼북춤' 보존에 힘을 쏟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날뫼북춤 원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비산농악을 모체로 하는 천왕메기 춤을 개발해 전통의 맥을 이어가게 했다.◆'비산농악대' 입단, 6·25 이후 재창단김수배는 1927년 7월26일 경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리동에서 김현주와 석두내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벌어지는 풍물패들의 놀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풍물놀이를 익혔다. 김수배가 처음으로 북채를 잡은 건 16세 무렵이다. 당시 마을 어른들이 논을 매고 난 후 돌아오면서 북을 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면서다.이후 1945년 김수배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했다. 가족들이 자리 잡은 곳은 달성공원 옆 비산동이었다. 그곳에는 상쇠인 최봉수, 종쇠인 임문구 등 젊은이들이 농악을 하고 있었다. 김수배는 이곳에서 동네농악대인 비산농악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당시 마을 곳곳에는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 농악대가 있었다. 대부분 장구와 북을 치는 정도로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이었지만, 비산농악대는 전문적으로 농악을 하는 유일한 단체였다.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수배는 형과 함께 입대한다. 전쟁 동안 그는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던 중 중부 전선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박격포탄에 양쪽 팔을 크게 다친다. 육군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때의 상처는 평생 통증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다.김수배는 전쟁이 끝난 후 해체된 비산농악대 재창단에 나선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풍물꾼들이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김수배는 해체된 농악을 재건하기 위해 비산동을 비롯한 평리동, 내당동, 대신동, 원대동 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았다. 계장 이소명, 상쇠 최봉수, 종쇠 임문구, 북잡이 김수배 등 20여 명을 중심으로 비산농악대가 재창단하게 된다. 비산농악대는 대구의 동부시장, 서문시장, 북부시장 등을 비롯해 시장 개장식에 초청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60년대에는 전국 곳곳에서 농악경연대회가 열렸다. 이때 비산농악대는 주요 행사를 다니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2년 9월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단체상, 1967년 7월에는 '울산공업단지축제' 특상, 1970년 10월에는 '전국농악경연대회' 1등 등을 차지하며 입지를 다졌다.◆'날뫼북춤' 발굴과 '천왕메기' 개발김수배는 '날뫼북춤' 발굴에 힘을 쏟았다. 날뫼북춤은 비산농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춤이다. 고을 의원이 부임하던 원고개에서 마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원님을 맞이한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또 날뫼북춤은 특이하게 '북'만을 가지고 추는 북춤이다. 한 사람이 추는 독무와 여럿이서 추는 군무로 나뉜다. 연행과정은 덩더꿍이, 자반득,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 순으로 구성된다. 모두 흰옷에 녹색 조끼를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춤을 춘다. 날뫼북춤은 1983년 10월 개최된 '제24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처음 출연해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1984년 7월에는 대구시로부터 '지방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다. 2년 뒤인 1986년 12월 김수배는 대구시로부터 '날뫼북춤 예능보유자 제1호'로 지정받는다. 이후 날뫼북춤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축하 공연', 1992년 '제 73회 전국체육대회' 등 다양한 행사에서 빛을 발한다. 또 1995년에는 '중국 청도 맥주축제', 1997년에는 '일본 히로시마 꽃축제' 등 해외 축제에도 초청돼 주목을 받았다.날뫼북춤 발굴과 더불어 김수배는 '천왕메기'를 개발하는 데도 노력했다. 김수배는 어린 시절 고향 청도에서 정월 보름을 전후해 천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비산동에서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당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비산농악에 천왕메기를 접목하게 된다. 그는 지역의 어르신 등을 찾아다니면서 천왕메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천왕메기의 행사 과정은 대내림, 제사관 선출, 사당 앞까지 가면서 질굿하기, 사당문 앞에서 문굿을 벌임, 고사 지내며 축문읽기, 천왕메기, 판굿으로 이어진다.1984년 9월 그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천왕메기로 참여한다. 1988년 10월에 참여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한다. 천왕메기는 이후 1989년 6월에는 대구시로부터 '지방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받는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참고문헌: 임언미의 '대구, 찬란한 예술의 기억', 유대안의 '날아온 산, 사람들 그리고 날뫼북춤', 대구 서구청 문화관광공동기획 : 대구광역시'날뫼북춤 예능보유자 제1호' 김수배. 단원들에게 날뫼북춤을 전수하고 있는 김수배.
2022.08.16
윤종곤 날뫼북춤 보존회 회장 "스승님 인생 자체가 '춤'…그 흥에 주변 모두 도취"
"춤이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누가 연습을 한다고 장단을 치면 바로 북을 메고 어깨춤을 추시곤 하셨어요. 그 춤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흥에 도취가 될 정도였습니다."김수배 선생의 제자이자 날뫼북춤 보존회 회장인 윤종곤〈사진〉씨는 자신의 스승에 대해 '인생 자체가 춤인 분'이라고 설명했다.윤 회장은 "초등학생 시절 풍물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던 중 풍물 소리에 이끌려 들어가 보니 학생들이 풍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비산농악날뫼북춤 단원들이 와서 강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면서 "담임 선생님을 따라간 원고개시장에서 김수배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저의 본가 등을 물으신 뒤, 비산농악날뫼북춤 단원이 돼 무료로 배우라고 하신 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아들·딸 보다 함께한 시간이 더 많다 보니 나를 선생님의 아들로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덧붙였다.그는 스승 김수배를 '제자들에게 다정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윤 회장은 "선생님은 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는데, 가정보다 비산농악 날뫼북춤을 더 소중히 여기시기도 했다"면서 "지금도 공연을 하다가 힘이 들 때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또 윤 회장은 김수배 선생에게 '예술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비산농악 날뫼북춤의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시다. 나에게는 '예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면서 "하물며 꽹과리까지 소리로 지도해주셨으니 나의 예술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신 분이다"고 설명했다.마지막으로 그는 "김수배 선생님의 뒤를 이어 날뫼북춤 전승과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쓸 계획"이라면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다양한 공연을 해서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6) 윤복진] 북으로 간 동요시인…어린이 놀이문화 그린 詩 두각…방정환 추천으로 등단·작곡가 박태준과 동요집 발표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가사만 들어도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동요 '옥수수 하모니카'의 원래 작사자는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시인인 윤복진(1907~1991)이다. 그가 월북하면서 금지곡이 되었는데, 홍난파기념사업회가 아동문학가 윤석중에게 부탁해 개사한 것이다. 윤복진은 일제 강점기 주요 일간지나 아동 잡지에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했던 동요시인이다. 당시 어린이라면 '윤복진'이라는 이름을 모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윤복진은 식민지 시대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대구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월북 후 윤복진의 이름은 잊혔지만, 그의 창작활동은 북한에서도 이어졌다. ◆어린이잡지, 일간지에 동요시 발표윤복진은 1907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사립희원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 대구사립계성학교(현 계성고)를 졸업했다. 그는 계성학교에 입학하면서 김문집(문학평론가), 이인성(화가) 등과 함께 소년단체인 '대구소년회'의 소년 단원으로 활동한다. 1924년 윤복진은 윤석중이 만든 '기쁨사'에 동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대구에서 '등대사'를 창립해 '등대'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그는 1925년 '어린이'를 통해 문단으로 나온다. 이 시기 '어린이' 외에도 '신소년' '새벗' '아이생활' 등 많은 어린이 잡지가 발행됐고, 잡지 독자투고란에는 독자의 작품을 모집해 우수작을 발표했다. 윤복진은 '어린이'에 방정환의 추천을 받아 작품 '별따러 가세'가 입선 동요로 뽑히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다음 해인 1926년에도 '종달새' '바닷가에서' '각씨님' 등의 동요가 '어린이'를 통해 발표됐다. 당시 계급주의적인 문학작품이 유행했는데, 윤복진의 작품은 결이 달랐다. 그가 쓴 동요시는 동요작곡가인 박태준·홍난파·정순철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진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윤복진의 작품을 비롯한 우리 노래들이 동요 프로그램을 통해 전해졌다. 그는 '신소년' '별나라'와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도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29년 발간된 홍난파의 '조선동요 100곡집'에는 '하모니카' '고향하늘' '바닷가에서' 등 윤복진의 작품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윤복진은 1949년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을 냈다.그는 194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아동문학의 당면과제-민족문학 재건의 핵심'을 비롯해 아동문학에 대한 평론도 썼다. '음악평론' 1936년 4월호에 낸 '헝가리 음악과 작곡가'와 1937년 1월 '기독교보' 제6권 제1호에 낸 '음악의 기원' 등 음악과 관련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윤복진과 가까웠던 예술인으로는 작곡가 박태준과 화가 이인성이 있다. 그는 박태준과 함께 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이 둘의 사이는 각별했는데, 박태준은 윤복진이 졸업한 대구계성학교의 음악 교사였고 윤복진이 다니던 남성정 교회(옛 제일교회) 성가대 리더이기도 했다. 박태준은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이라는 동요집을 대구 무영당서점을 통해 발간했다. 1939년에도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한 동요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했는데, 표지는 이인성의 판화로 장식했다. 이인성이 그린 그림에 윤복진이 동요를 쓴 '동시화전'이 무영당 백화점에서 열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천진한 동심의 세계윤복진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동심'과 '서정'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정형시로, 글자를 맞추기 위해 의성·의태어를 많이 사용했다. 윤복진이 쓴 동요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주먹으로 나팔을 불고, 텃밭과 꽃밭이 있는 마당에서 숨바꼭질하는, 뛰어노느라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꼬옥꼬옥 숨어라./ 꼬옥꼬옥 숨어라.// 텃밭에는 안 된다,/ 상추 씨앗 밟는다,// 꽃밭에도 안 된다,/ 꽃모종을 밟는다,// 울타리도 안 된다,/ 호박순을 밟는다."('숨바꼭질')동심에 천착했던 윤복진도 1930년 전후 유행했던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문학 운동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의 색채는 이전과는 다르다.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스무하루 밤'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스무하루 이 밤은 월급 타는 밤/ 실 뽑는 어머니가 월급 타는 밤// 자장자장 아가도 잠들지 않고/ 논두렁 공장 길에 밤은 깊은데// 이달 품삯 모자라 눈물지우나/ 저 달이 넘어가도 아니 오실까."('스무하루 밤')해방 이후 윤복진은 서정과 동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좀 더 발을 들인 듯하다. 그는 좌익 계열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해 아동문학부 사무장을 지내고,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북도지부 부위원장단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이때 영향 때문이었을까. 윤복진은 6·25 전쟁 때 월북했다. 북한에 간 이후 그의 활동이나 삶의 행적은 2002년 발간한 '조선문학'에 김청일이 쓴 '동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에서 엿볼 수 있다. 윤복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다룬 이 글에 따르면, 윤복진은 '동요 할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북한 문단에서도 동요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52년 새 교과서 편찬사업이 진행되면서 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돼, 인민학교 1학년용 음악 교재에 실린 동요 '새 조선의 꽃봉오리'를 쓰기도 했다. 1980년 동요동시집 '시냇물'을 출판하는 등 윤복진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창작 활동을 놓지 않았다.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참고자료=원종찬 평론집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창비), 북으로 간 동요시인, 윤복진(최윤정), 대구 지역 아동문학 연구(류덕제), 대구문학관 근대작가 특별전 '아동문학가 윤복진을 아시나요?' 팸플릿1930년 '중중 때때중' 출판을 기념해 무영당에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부터), 작곡가 박태준과 기념촬영을 한 윤복진. 대구 무영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와 윤복진. 서양화가 이인성이 표지를 그린 윤복진과 박태준의 동요곡집 '물새발자욱'.
2022.08.01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5) 하대응] 대구음악가協 초대회장 등 맡으며 지역음악계 중심에 서…'진달래꽃''못잊어' 등 다수 가곡 발표
못 잊어時: 김소월曲: 하대응못 잊어 못 잊어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못 잊어 못 잊어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료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료사노라면 사노라면잊힐 날 잊힐 날 있으리다못 잊어 못 잊어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못 잊어도 못 잊어도더러는 더러는 잊히오리다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어쩌면 생각이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소월이 1923년에 쓴 시 '못 잊어'다. 그해 개벽 5월호에 발표된 이 시의 원제는 '못 잊도록 생각나겠지요'였다. 1925년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에 '못 잊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실렸고, 이후 전 국민의 애송시가 됐다.이 시가 처음 발표된 지 21년 뒤인 1954년 11월, 효성여대(지금의 대구카톨릭대) 교수였던 작곡가 하대응은 집 근처 호숫가를 거닐다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다. 그가 거닐던 '주변 따라 산책길이 있고 길옆에 자그마한 숲이 있어 누구나 시 한 수 정도는 읊조려 볼 만큼 예쁜 호수'가 바로 대구의 수성못이다. #1. 6·25 전쟁 일어나면서 대구와 첫 인연1914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하대응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상준 선생으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지금의 동경음악대학인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가창(歌唱) 선생이 음성이 좋다고 권유해서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936년 제5회 전일본(全日本)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했고, 동경에서 열린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비롯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의 주역을 맡기도 했다.귀국 후에는 서울 부민관에서 첫 독창회를 열었다. 이후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39년부터 1952년까지는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지휘했다. 당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와 합창 지휘를 겸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편곡 능력을 갖춰 독보적인 존재로 주목 받았다.하대응이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다. 당시 그는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이끌고 군가 보급과 군 사기진작을 위해 종군했다. 대구에서 결성된 육군종군작가단에서 활동했다.전쟁 중에 대구 남산여고 음악 교사를 지냈고, 1954년 효성여대에 음악과가 신설되면서 교수로 부임해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55년에는 대구음악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1959년에는 경북 예술단체총연합회를 발족했다. 1962년 초대 한국음악가협회 경북 지부장, 대구 방송관현악단 창립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구 음악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진달래꽃' '못잊어' '초혼' '나그네'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다. 1963년 '하대응 가곡집 I', 1973년 '하대응 가곡집 II'를 발표했다. 1965년 경북문화상, 1975년 향토음악 공로상, 1978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1983년 5월 29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별세했고, 그해 9월 5일 효성여대 강당에서 추모음악회를 열렸다.#2. 자주 찾던 수성못 거닐다 곡 떠올라 하대응이 소월의 시 '못잊어'에 곡을 붙이게 된 계기는 수성못을 산책하면서다. 효성여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당시 하대응은 학교가 있는 대봉동 근처에 살았다. 수성못은 집과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수시로 찾아 산책하곤 했다.1954년 11월 초겨울 어느 날 밤, 하대응은 고향 홍천과 휴전 이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자신도 모르게 집을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수성못을 찾아 한참을 거닐기 시작했다. 달무리가 고요히 지는 밤,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잔잔히 밀려드는 수성못의 물결은 하대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풍경은 그리움이 되어 무리 지어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소월의 시 '못 잊어'에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달무리 지는 밤, 귓가를 스치는 조용한 바람 소리와 잔잔히 밀려드는 수성못 물결은 소월의 시가 풍기는 시골의 풍정(風情)과 애수(哀愁)를 내 가슴에 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1976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평소 소월의 시를 즐겨 암송하던 하대응에게 '못 잊어'는 그날 자신의 심정과 애수(哀愁)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이때까지 하대응은 소월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대응은 그의 대표작인 '못 잊어'를 비롯해 '산' '진달래꽃' '먼 후일' '초혼' '접동새' '가는 길' '구름' '봄비' 등 소월의 시에 붙인 곡이 10여 편에 달한다."소월을 만나 본 적도 없고 그의 일생에 대해서 남달리 많이 알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집을 손에 잡고 있으면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요. 광복 전에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와 삼수갑산에 다녀온 적이 있어 더욱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고, 시가 풍기는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경향신문 1976년 5월29일자 인터뷰에서)"그날 수성못을 거닐며 소월의 시 '못 잊어'를 흥얼거리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장 악보에 멜로디를 옮겨 적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국민 가곡 '못 잊어'다.특히 하대응은 곡을 붙이면서 같은 단어를 두 번 또는 네 번씩 반복하며 느린 템포로 부드러운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반복이 많아지면서 소월 시의 간결한 리듬의 맛은 달라졌다.서정과 평온을 함께 안겨주던 수성못은 하대응의 기억 한 켠에 자리 잡은 그리움의 원천이었고 추억의 공간이었다.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가곡집 사진제공=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임우상·박말순 기증자료공동기획 : 대구광역시'하대응 가곡집 I'(1963년·왼쪽 위)과 '하대응 가곡집 II'(1973년)하대응이 가곡 '못 잊어'를 작곡하게 된 배경이 실린 1976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2022.07.14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4) 김우조] 독학으로 판화 개척…서진달 선생 만나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하고 졸업후 대구경북 돌며 미술교사로 재직
현대사의 가장 거친 시대 속에서 독학으로 판화 장르에 도전한 김우조의 길은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요즘은 판화가 실용가능한 미술의 한 분야로 인정을 받지만 60여 년 전 선생이 처음 판화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회화에 비해 늘 한 수 아래로 취급됐다. 또 제대로 기법을 배울 만한 스승이나 선배가 없던 시절, 선생은 독학으로 판화를 개척해 냈다.비싼 물감 값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형편 탓에 선택한 목판화였지만, 그는 판화가 가진 '민중적 가치'를 깨쳤고 판화를 찍는 과정에서 판화가 가진 특유의 미학을 깨달았다. 그는 "판화작업을 하면서 늘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판화의 길에 정신적 지주는 팔만대장경의 불화였다. 또한 조형의 기초를 가르친 서진달 선생이 있었기에 그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장르의 판화작품들을 비롯해 수많은 유작을 남겨두고 2010년 12월31일 타계했다.◆계성중 시절 서진달 선생 만나…조선미술전람회 입선 후 교사로 재직김우조는 1923년 달성군 옥포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손재주가 많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를 만지고 다듬는 일에 익숙했고 그림을 곧잘 그렸다. 화원초 등을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으로 진학해 당시 5년제 중등 과정을 다녔다. 계성중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전문 미술교사가 없다가 계성고 5학년이 되던 해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첫 미술 교사로 부임해 온 서진달 선생을 만나 그에게 배운 내용을 자신의 작업의 기초로 삼고 예술관을 형성했다. 서진달 선생은 1941~42년 계성중 미술 교사로 짧게 재직했다. 이 시기 김우조, 백태호, 추연근, 서복섭(서동진의 아들) 등이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한 해 후배로 김창락, 변종하 등이 있었다. 서진달 선생은 김우조가 친구 추연근을 그린 작품 '책을 읽는 소년'을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하게 했다. 그 경력으로 김우조는 졸업 후인 1943년에 첫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교직 생활을 이어갔다.첫 부임지는 청도군 송서초등(현 풍각초등)으로 발령을 받았고 재직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이듬해인 1946년 포항중 강사로 전보돼 이후부터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는데 1950~60년대 대부분은 대구의 근무지서 보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일부를 다시 왜관·구미 등 경북 각지를 돌며 교편생활을 했다.◆판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유화 물감 값이 아까워서선생이 판화를 시작한 것은 1950년대다. 1959년부터 판화작품을 제작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69년 '한국판화협회' 주최로 '항성화랑'에서 개최된 '현대판화10년전'에 출품하는 등 판화가로서의 존재를 알렸다.선생은 판화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유화를 그렸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유화물감을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유화 물감값도 아까웠다. 유화는 한 작품밖에 없지만 판화는 여러 작품을 남길 수 있고 보관도 간편했다. 어릴 때부터 칼로 나무 만지는 것을 좋아했기에 나무판에 모양을 새기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지와 먹만으로도 판화를 찍을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색이 필요하면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도 됐다.그렇지만 당시 어느 누구도 판화를 정식으로 시도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선생은 학교 때 수업 들으면서 익혔던 지식만을 바탕으로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판화기법 관련 서적을 밤새워 읽으면서 판화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조금씩 기술을 익혀나가고 습작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더 강한 확신이 필요했던 차에 청도 풍각초등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동료 교사가 보여준 대장경판을 찍은 불화 한 점을 봤던 기억이 났다.◆그의 정신적 지주는 팔만대장경의 불화김우조는 대구의 문화잡지 월간 '대구문화' 2001년 6월호에 기고한 '나의 삶, 나의 예술'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1960년대 어느 날, 친구 두 사람과 해인사로 향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던 날, 해인사를 찾은 것은 팔만대장경의 판목을 보기 위해서였다. 판화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스승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팔만대장경이라는 판화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대장경 중에서 그림이 새겨진 판목을 한번 보고 싶었다. 청도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덕에 팔만대장경 판화에 경문을 새긴 것 이외에도 그림을 새긴 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젊은 스님을 설득한 끝에 경각 한 편에 그림만 새겨놓은 판목이 있는 곳으로 나 한 사람만 들어가게 허락을 받았다.그때 손으로 만져 본 해인사 판목을 보고 선조들의 예술적 안목에 놀랐고 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스승이요, 내가 판화를 계속해 온 이유다.선생은 이 글에서 "목판화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좋은 재료가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좋은 재료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칠이 좋은 합판을 구해 작업했다. 먹은 송연을 쓰고 종이는 시중에 파는 한지, 조각도는 철 펜을 거꾸로 쪼아서 갈아쓰며 우산살을 갈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판화에 대한 철학… "판화는 찍히는 맛이 있어야"김우조는 1940년대에서 1950년대 말에 이르는 동안 향토화단을 이끌어온 황토회와 대구화우회의 주도적 멤버였다. 선생의 작품 활동은 대부분 판화 제작으로 일관해 왔으며 1960년대 그는 독자적인 예술관을 형성했다.학교에서도 판화교육과 보급에 힘썼으며, 1988년 정년퇴직을 하고 난 뒤에는 대구 봉덕동에서 홀로 연구실(화실)을 운영하며 작업에 일념했다. 선생의 작품은 주로 인물이나 골목 풍경 같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인물들은 선생이 포항과 구미 등지로 학교로 출퇴근할 당시 기차에서 만난 인물들이 많다. 말년에는 한층 자유로워진 표현기법들의 실험이 드러난 추상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선생은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토속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달성군 옥포에서 화원까지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계성중 졸업 후 부임한 학교도 거의 지방에 있었다. 통근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배명학 화백의 조언을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작업을 했다고 했다. "판화는 찍히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는 판화에 대한 그의 철학이기도 했다.박주희기자 jh@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참조=임언미의 '우리 것' 탐구에서 판화를 만나다(월간 대구문화 2010년 2월호), 김우조의 '나의 삶, 나의 예술'(월간 대구문화 2001년 6월호), 임언미의 '격동기, 예술로 세상과 호흡한 그들을 만나다(월간 대구문화 2018년 11월호), 김영동(미술평론가)의 '독학으로 판화 장르에 도전-김우조의 생애와 작품세계'김우조 '뒷골목 풍경'(목판화, 1977)김우조 '50년대 회상'김우조 '낙동강'
2022.06.13
김분선 대구시립무용단 수석단원 "교수님, 자연의 모든 소재 작품 접목…긴 투병 생활에도 춤 놓지 않아"
"교수님은 엄마 같은 존재였습니다. 혼자 밥 드시는 걸 싫어해서 제자들과 밥도 자주 먹고 항상 편안하게 대해주셨어요."지난 18일 만난 김소라 교수의 제자 김분선 대구시립무용단 수석 단원은 자신의 스승을 '엄마' 같았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김 수석 단원은 "교수님의 20주년 공연인 '못 마루 풍경'을 준비할 때 연습을 끝내고 학생들끼리 술 한잔을 했던 적이 있었다"면서 "당시 선배들이 후배들을 이끌고 오전 4~5시쯤 김소라 교수님 집으로 총출동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교수님이 제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제자 한 명씩 공연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이나 하소연을 다 들어주시고 함께 잠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했다.그는 김소라 교수는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수석 단원은 "교수님이 자연을 무척 좋아했다. 자연에 있는 모든 소재가 작품이 됐다. 작품 제목에도 자연이 많이 들어갔다"면서 "또 몸동작을 할 때 가슴을 이용해서 춤을 추라는 이야기도 자주 해주셨다"고 했다.김 수석 단원은 김소라 교수에게 춤은 인생 자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수님이 바라보는 인생 자체가 무용이었다. 긴 투병 생활을 할 때에도 항상 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면서 "병석에서 제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근래 교수님의 추모 공연을 할 기회가 생겼었는데,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서 무산된 게 가장 아쉽다. 언젠가는 교수님을 위한 추모 공연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대구가톨릭대 교수 시절의 김소라(왼쪽)와 그의 제자 김분선 대구시립무용단 수석단원.
2022.05.23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3) 김소라] 대구 무용 활성화 기여...매년 작품발표회 열며 韓 대표 현대무용가로 이름 알려…코파나스상·교육자상 등 수상
김소라(1957~2010)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긴 현대무용가다. 그는 이화여대 무용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뉴욕 마사그램 스쿨, 페리댄스 센터, 뤼지재즈센터에서 수학했다. 이후 2002년에는 파리 에꼴 피터코스 스튜디오, 하모닉에서 현대 무용을 연구했다. 또 1983년부터 2010년까지는 대구가톨릭대 무용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소라 댄스앙상블' '시리우스' 등 무용 단체를 만들어 대구지역 무용 활성화에도 기여했다.◆남성 무용가 '김상규'와 무용가 '최원경'의 딸김소라는 대구 1세대 남성 무용가이자 한국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김상규'와 원로 무용가 '최원경'의 딸로 태어났다. 김소라의 아버지 김상규는 현대무용의 개념을 정립하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펼친 무용가다. 또 전국 최초의 국공립현대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창단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어머니 최원경은 김상규와의 인연으로 춤을 시작했다.김소라는 2003년 3월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에는 춤이 멋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춤 때문에 매일 늦게 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친척 집을 전전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무용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멋진 파일럿이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면서 "고1 때쯤 한 번도 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대학 진학을 무용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 부모님에게 받은 피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최원경은 딸 김소라의 재능에 대해 "춤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음악에 맞춰 춤추는 딸의 모습에 놀랐고 무엇보다 기발한 몸짓이 많았다"고 했다. 어머니 최원경의 전폭적인 후원은 김소라를 무용가로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혼 후 육아 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최원경은 딸을 가르치기 위해 안동에서 처음으로 현대무용학원을 열었다. 이후 김소라의 공연 때마다 의상 디자인, 무용 연출 등을 도맡아 적극적으로 딸을 도왔다.김소라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작품도 다수 발표했다. 1992년 12월에는 '사모곡'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또 2000년에는 '못 마루 풍경'을 발표해 어머니에게 헌정했다. 못 마루 풍경은 예술가의 꿈을 가진 한 아이(김소라)가 엄마(최원경)와 함께 못가로 소풍을 나갔다 못 마루 풍경 그림을 완성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소라는 작품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의 이야기를 표현했다.◆매년 발표회 등 활발했던 작품 활동1980년대는 '한국 춤의 르네상스'로 불렸다. 김소라는 매년 작품발표회를 여는 등 꾸준한 활동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무용가로 이름을 알렸다.김소라의 첫 발표회는 서울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열렸다. 이날 선보인 작품은 '연' '저문날 허공에서' 등이다. 김소라 특유의 감각과 테크닉이 잘 녹아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故) 김영태 평론가는 "좋은 토양과 알맞은 온도에서 잘 피어난 아름다운 난처럼 모든 조화가 잘 이뤄진 휼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1990년대에도 김소라의 작품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그의 대표 안무작은 '적멸의 새'(1990), '클로드 볼링에 의한 무브먼트 환타지'(1990), '세 개의 나'(1992), '밤기차'(1992), '타악을 위한 움직임의 변주'(1992), '사모곡'(1992·1993), '첼로 트리오에 의한 다섯 개의 춤'(1993), '적색시대'(1995), '일곱 빛깔의 념'(1998), '사계'(1998), '희생'(1999) 등이다.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며 그는 대구가톨릭대 무용과 전임 교수가 된다. 이후 '소라댄스앙상블' '시리우스' 등 제자들로 구성된 동문 단체를 결성한다. 지방에서 교육과 창작을 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도 서울 등 중앙무대와 활발히 교류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2000년대도 김소라의 작품활동은 계속됐다. 대표작으로는 '겨울새'(2000), '못 마루 풍경'(2000), '하늘춤'(2001), '리듬을 타고'(2001), '봄바람에 안긴 한반도'(2003), '파장'(2003), '여정'(2004) 등이 있다. 정순영 무용평론가는 "못 마루 풍경은 담담한 파스텔 컬러 그림 같은 춤이었다"면서 "김소라는 교수직에 안주하지 않고 나다움의 심상적 작품을 발표하면서 출연까지 한 현역 춤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춤을 항시 주목하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이러한 성과들을 인정받아 김소라는 1992년 금복문화재단의 '금복문화예술상', 2000년 한국현대무용협회 '코파나스상' 등을 수상했다. 또 2007년에는 한국현대무용협회의 '무용교육자상'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2010년 8월1일 지병 악화로 53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2011년에는 대구가톨릭대에서 현대 무용 분야의 연구 및 작품활동, 각종 자문 및 평가 활동 등 현대무용 활성화와 무용 예술에 크게 기여한 그에게 '국무총리 표창'을 추서해 업적을 기렸다. ▨참고문헌: 대구춤 60년사, 대구문화재단 웹진 '대문'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2000년 '못 마루 풍경'에 출연한 김소라. 못 마루 풍경은 '담담한 파스텔 컬러 그림 같은 춤'이라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영남일보 DB1980년대 김소라의 공연 모습. 김소라는 매년 작품발표회를 열며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알렸다.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2) 권태호] 시민에 노래보급 힘쓴 '노래 전도사'...전국 각지서 200여회 독창회
안동 출신인 음악가 권태호(1903~1972)는 광복 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서양 음악의 씨를 뿌렸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일본과 평양에서 성악 활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주로 작곡에 전념했다. 권태호는 음악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시민들을 위한 노래 보급에 힘쓴 음악 교육가이기도 했다. 정확하게 집계된 통계는 없지만, 남아있는 공연 기록에 따르면 권태호는 200여 회의 독창회를 열었고, 100여 곡을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일본 오가며 독창회 열어권태호는 1903년 9월16일 안동군 법석골 17번지(현 화성동 17번지)에서 아버지 권중한, 어머니 김귀행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아버지를 따라 안동예배당(현 안동교회)에 갔다가 처음으로 풍금 소리를 듣고 음악에 빠지게 된다. 그는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이후 안동예배당 반주자, 찬양대 지휘도 맡으면서 음악적 재능을 드러낸다.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권태호는 16세부터 안동우편국(현 삼산동우체국)에서 통신수로 일했다. 1923년 청송에서 윤옥선과 결혼하고 1년 후 음악의 꿈을 펼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동경(도쿄)에서 신문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며,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야간속성반을 졸업했다. 1927년 그는 일본니혼음악학교 본과 성악부에 응시해 한국인으로서 최초 합격한다. 그는 그해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당시 일본에서 초연인 '합창교향곡'에 테너 솔로로 무대에 오른다. 그해 가을에는 '히비야 음악회'에 한국인 최초로 독창으로 출연한다.권태호는 2학년 재학 중인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한국에서 독창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1928년 7월14일에는 대구제일심상소학교(현 중앙초등) 대강당에서 대구 최초의 독창회를 열었다. 이 독창회는 대구계성합창대 주최로 열렸고, 당시 계성학교 교사로 있던 박태준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2부로 나눠 12곡을 연주했다. 공연에선 계성학교에 재학 중인 권태호의 동생 권태희가 테너 독창을 했고, 유회우가 바이올린 독주, 견신희가 출연한 것으로 확인된다.권태호는 그해 9월14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도 독창회를 연다. 이 독창회는 박태준의 작곡발표회로, 박태준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고, 안익태를 비롯한 서울지역 활동 음악가들이 찬조 출연했다. 1929년에는 안동, 군산, 원산에서 독창회를 열었다.이듬해 니혼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평양으로 와 숭실전문학교에 출강했다. 1931년에는 광성고보로 자리를 옮긴다. 권태호는 전국 각지에서 독창회를 통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다 1933년 작곡한 동요 '눈.꽃.새'를 일간지에 발표한다. 1933~1934년 봉천·무순·용정 등 만주지역에서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1936년 10월26일 평양에서 평양음악협회가 발족하는데, 권태호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938년 가을 평양음악연구소를 세워 음악에 뜻이 있는 이들을 모집했다. 1939년 권태호는 다시 일본으로 간다. 그해 가을학기부터 모교인 니혼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수직을 지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다.◆광복 후 대구 정착해 음악활동 전개광복 이후 권태호는 대구에 자리 잡는다. 그는 1946년 문을 연 경주예술학원 설립에 동참하고 이듬해 대구 대명동의 한 적산가옥에 '대구음악학원'을 개설해 음악이론과 발성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듬해 대구음악학원은 인근 6연대 반란사건 여파로 군에 강제 접수되어 문을 닫게 된다.대구로 온 후 권태호의 활동은 작곡에 집중된다. 이때쯤 그는 '일터로 일터로' '기역니은 배우세' '누에를 치세'를 비롯해 이응창 아동문학가가 작사한 '대구 능금 노래'를 작곡했다. 권태호가 작곡한 가장 유명한 곡은 '나리 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봄 나들이'다. 이외에 '밀양의 노래' '경북도민의 노래' '대구시민행진곡' '경주찬가'와 삼덕국교, 인지국교, 대봉국교, 대구여중, 신라중학, 안동중학, 안동농고, 대구고, 능인고, 경명여고 등의 교가도 작곡했다.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맞아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 중 새 나라의 기상을 드러내는 곡을 한데 묶어 출판하고자 했다.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에 맞춰 작곡집을 내려 했으나 이때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문교부와 농림부 관계자를 설득했고, 그 결과 그해 9월 '국민가요집'이 출판됐다.권태호는 '국민가요집' 발간을 추진하던 시기 서울을 자주 갔는데, 이때 명동 일대 음악다방도 틈틈이 찾아갔다. 당시 권태호를 만났던 작곡가 나운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선생은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과 더불어 기인이었으며, 명동 일대를 누비셨던 애주가였다. 그러나 그가 돌체나 동방문화살롱에서 음악을 들으실 때는 그렇게도 진지할 수가 없었다. 음악에 심취해 마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경건한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은 그 옛날에 독일가곡을 전공하고, 일본 동경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수없이 독창회를 여셨지만 특히 곡 해석이 뛰어나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세계일보 1992년 11월23일자 칼럼)국민가요집 발간 이후 1950년부터 권태호는 국방부 정훈국 전문위원이 되어 군가를 작곡하게 된다. '무찌르자 오랑캐' '포문은 열렸다' '전선 500리' '보병의 노래' 등이 그가 작곡한 군가다.6·25 전쟁 중 권태호는 대구 북성로에 있는 백조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보기 드문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음향시설이 잘 갖춰진 르네상스 다방에도 자주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권태호는 대구에 피란 차 온 예술인들과 어울렸다. 평양에서 술친구로 어울렸던 양주동 시인을 비롯해 시인 변영로·구상·조지훈, 아동문학가 마해송, 소설가 김팔봉·장덕조, 동양화가 이상범 등이다.1956년 권태호는 제1회 경북문화상 음악 부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돼 그동안 대구에서 펼쳐온 음악 활동을 인정받기도 했다. 1958년 여름에는 경주에서 생애 마지막 독창회를 이틀간 열었다.◆대구로 돌아와 국민가요합창단 출범1959년 권태호는 대구로 진학한 셋째 아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다시 대구로 왔다. 광복 직후 대구에서 머물고, 통영(1952년), 경주(1954년)를 거쳐 7년 만에 대구로 온 것이다.이때 그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보급하기 위해 합창단을 구상한다. 1959년 9월28일 대구효성국민학교 음악실에서 16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국민가요합창단이 출범한다. 이후 1961년 봄에는 국민가요합창단의 활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대구 대봉동의 한 양옥건물을 임대해 '권태호음악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연습공간을 마련했다. 국민가요합창단은 1963년 6월28일 대구시와 재건국민운동경북지부, 대구 시내 각 일간신문사 후원으로 KG홀에서 창립음악회를 열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1964년 국민가요합창단은 해단하고, 권태호음악연구소도 문을 닫는다.1967년 권태호는 광복 후 대부분 기간을 머물렀던 대구를 떠나 장남이 사는 서울로 간다. 1970년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동부동 198번지 양옥을 임대하고 피아노도 빌려, 권태호음악연구소를 마련한다. 이후 예안읍 선양리에 있는 한옥으로 이사해 지내다 1972년 2월29일 세상을 떠났다.어린 시절 예배당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전경화 영남일보 기자는 1974년 한국문학사가 발간한 '여기자 20년'에서 권태호를 이렇게 기억했다."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십수년. 이 '메기의 추억'을 언제나 애창하셨고 이 노래를 둘러싼 에피소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각해보면 선생은 격동기의 이 겨레와 함께 애환의 생애를 사셨다. 노래와 인생. 선생은 돈이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일생 동안 그렇게 돈을 멀리하고 낭만을 뿌리신 순수한 분도 드물 것이다."▨참고=음악가 권태호(창조와지식), 음악창의도시 대구(영남대 출판부), 소천 권태호 음악관 홈페이지, 한국음악문헌학회 음악문헌학 2010년 1권 중 '권태호, 독일 예술가곡의 파종자'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1963년 6월28일 열린 국민가요합창단 창립음악회. 1936년 11월10일 평양음악협회 회원과 함께한 권태호(맨 뒷줄 오른쪽 셋째). 안동예배당에서 풍금 앞에 앉아 있는 권태호(당시 15세)의 모습.
2022.05.09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1) 마해송] 어린이 인권위해 헌신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
'열한 살쯤 되는 애가 얼어죽었드래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중략) 내가 셋방 사는 마루 아래라도 빌려주었으면 그 애는 얼어죽지 않았으리라. (중략) 다음 대(代)를 얼어 죽이고 굶어 죽이고. (중략) 교육도 못받는 차대(次代) 다수양성(多數養成)해서 어떠한 민족의 장래가 있겠는가. 한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백 사람을 구할 수 있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1953년 2월11일자 영남일보에는 '다음 代를 어떻게?'라는 제목의 시사칼럼이 실렸다. 전쟁통에 얼어 죽은 한 아이를 다룬 내용으로 당시의 참혹한 현실과 정책을 꼬집은 글이었다. 무엇보다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작가의 심정이 행간마다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글을 쓴 작가는 마해송이다. 그는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작가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특히 마해송은 1957년 제정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며 한평생 어린이 인권운동에 힘을 쏟았다. 6·25전쟁 때는 영남일보와 인연을 맺고 작품활동을 이어갔다.◆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마해송은 1905년 1월8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1919년 9월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지만 3·1운동 이후였던 당시는 동맹휴학이 잦았다. 마해송은 그때마다 고향으로 자주 내려갔다. 이때 기차 안에서 4살 연상의 '순'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일제에 맞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끝내 중앙고보를 중퇴한 마해송은 보성고보에 전학하지만 다시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하고 만다. 결국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인 1922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한다.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홍난파 등과 도쿄 유학생 극단 동우회를 조직해 희곡과 동극을 발표하기 시작한다.그의 연인 '순'과는 입학 무렵 일본에서 다시 만났지만 '순' 남편의 등장과 '철권단의 투고'로 '순'은 중국으로 떠나고 만다. 마해송 역시 고향으로 끌려와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연애 사건으로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 그는 연금생활에 큰 불만을 갖는다. 이때 마해송은 '어린이를 철부지로만 생각하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동화로 쓰게 된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이다.마해송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쓴 '아름다운 새벽'에서 '왕의 폭력에 의해서 사랑이 끊기었고, 사랑이 끊기었기 때문에 빛을 잃었으나, 한 번 죽은 다음 바다 속에서 사랑이 되살매 잃었던 빛을 도로 찾고, 꽃도 새로운 생명을 찾았다는 뜻'으로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썼다고 고백했다. 또 '아버지의 꾸중으로 지금 집에 박혀 있으나 사랑은 끝내는 이길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어른은 언제까지나 어린이를 소견 없는 철부지로만 생각하지만, 어린이도 사람이며 생각도 지각도 있으니 사람 대접을 하라는 울부짖음은 문 밖에도 못 나가고 갇혀 있을 때의 애절한 기원'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가 겪은 애절한 울부짖음은 소년운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된다.'바위나리와 아기별'은 1923년 '샛별'지에 발표되었지만, 1926년 방정환의 '어린이'지에 다시 발표되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억압하는 세력과 어른의 완고함을 왕의 폭력에 비유해 쓴 동화로 마해송의 현실 풍자적 동화문학의 출발점이다. 환상적 탐미성(眈美性)이 강한 작품이면서 순정적인 내용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 줘 우리나라 창작동화의 선구적 전형(典型)을 꼽힌다. '바위나리와 아기별'발표 후 마해송은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동시에 색동회에 가입해 어린이를 위한 문화운동을 계속하며 '어린이'지에 수많은 동화를 발표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 '어머님의 선물' '장님과 코끼리' '두꺼비의 배' '소년특사' 등이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해송은 일본에서 술에 빠져 살다 끝내 폐병에 걸려 요양을 하게 된다(1928∼29년). 퇴원 후 도쿄에서 발행되는 '문예춘추'의 초대 편집장과 선전부장을 지내다 1930년 발행 부수 10만을 넘는 잡지사를 운영하며 일본 문화계를 주름잡는다. 이때 조선 예술상을 마련해 우리 나라의 문인들을 돕기도 했다.1931년 8월 그는 '어린이'지에 '토끼와 원숭이'를 발표하고 1933년에 다시 연재하다 3회 치 원고를 압수당하고 만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을 비난한 동화의 스토리 때문이었다. 1934년에는 마해송의 첫 창작 동화집 '해송 동화집'이 개벽사에서 출간된다. 이후 1937년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의 서양무용가 박외선을 만나 결혼한다. 이 때까지 일본에서 줄곧 잡지사를 운영하던 그는 1944년 6월 도쿄에 폭격이 심해지자 가족을 서둘러 귀국시키고 자신은 1945년 1월에 귀국한다.광복 후에도 마해송은 사회성과 주제의식이 강한 동화를 집필한다. 1946년 '토끼와 원숭이'를 재집필해 완성했고, 1948년 1월에는 '떡배 단배'를 '자유신문'에 연재한다. 자유당 집권 때에는 장편동화 '모래알 고금'을 통해 사회 부조리와 혼란스러운 모습을 비판했고, '꽃씨와 눈사람'을 통해서는 부정부패가 극도에 이른 정권이 무너질 것을 은근히 보여 주기도 했다. 마해송은 동화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고발한 아동문학가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세태를 풍자하며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총 7권의 동화집과 다수의 동요, 수필, 소설 등을 남겼다. 1966년 11월6일 9시55분 뇌일혈로 사망한 그는 경기도 양주군 금곡 가톨릭 묘지에 안장됐다.◆6·25전쟁과 대구살이마해송은 대구와 인연이 깊다. 6·25전쟁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대구에 피란보따리를 풀었다. 대구 중구 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건너편 책방이 딸린 집에 세를 얻었다. 단칸방이었다. 작가와 아내, 3남매 그렇게 다섯 식구가 누우면 꽉 들어찼던 방이었다. 아침은커녕 점심도 못 먹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마해송은 공군종군문인단(일명 창공구락부) 단장으로 활동하며 전선의 참상을 기록했다. 특히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구상과 돈독한 사이였다. 영남일보는 당시 마해송을 위해 신문사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그곳에 전용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신문사에 수시로 드나들며 신문지면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1951년 1월4일자 영남일보에 게재된 수필 '大邱辛卯(대구신묘)', 53년 2월9·10일자에 상·하편으로 실린 '外國文化輸入(외국문화수입)',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53년 2월11일자), '화가 정점식'(53년 6월16일자) 등이 대표적이다.수필 '大邱辛卯'는 피란지 대구에서 첫 새해를 맞은 감회를 옮긴 작품으로, 그는 이 글에서 '우리를 해치려는 무리를 무찔러 없애 버려서 겨레와 자손이 해를 받을 염려 없도록 해놓아야 그것이 진실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마해송은 대구 시절 엄격할 정도로 청빈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대구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피란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마종기)이 주인집에 온 신문을 먼저 보고는 다시 넣어둘 생각을 잊은 채 그만 셋방 툇마루에 던져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해송은 아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좁은 방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니는 것을 따라다니며 가릴 바 없이 무지하게 때렸다. 죽어라고 때렸다'(마해송의 수필 '너를 때리고' 중에서). 마해송은 아무리 사소한 신문이지만 남의 것에 손을 댄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것은 준엄한 꾸지람이었다.▨참고 : 이기영의 마해송의 삶과 문학.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공동기획 : 대구광역시마해송이 1953년 2월11일자 영남일보에 쓴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2022.04.18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0) 정점식] 독자적 화풍으로 한국 추상미술 개척…계명대서 후학양성 힘쓰며 대구 화단 이끌어
극재(克哉).'이길 수 있을까'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겨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극재는 '한국 추상화의 1세대' 정점식(1917~2009) 선생이 직접 지은 호다. 2003년 계명대 특강에서 극재는 이 호와 관련해 "화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직업이다. 예술가로서 더 나은 경지를 향한 전진은 천형(天刑)과 같다.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하고. 예술가는 '이겨낸다'는 자기 확신과 '이길 수 있을까'하는 갈등 사이에서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대구 화풍에서 추상회화 개척극재는 구상미술 위주의 1940~50년대 대구 화풍에서 추상회화를 개척한 작가다. 또 오랜 세월 대구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며 지역 화단을 이끌었다. 화가로서의 이름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 화단으로 진출할 때도 줄곧 지역 화단을 지켰다.극재는 계성중·고 교사를 거쳐 1964년부터 계명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정년퇴임한 1983년 이후에도 2001년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계명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이름 붙인 극재미술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그는 대구뿐만 아니라 한국 추상회화에 미친 영향이 컸다.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09년 작고하던 해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어려운 시절마다 그를 지탱한 건 독서극재는 1917년 7월20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대구로 나온 극재는 예닐곱 살 무렵 약전골목에서 한의사를 하던 고모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운다.극재가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33년 대성학원 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약전골목에서 화가들을 접하면서 특히 김용조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을 향한 동경이 구체화된다. 1936년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신문인 '조선민보'가 대구에서 주최한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에 들면서 공적으로 재능을 인정받게 된다.어려운 시절마다 극재를 지탱한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인격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그를 성숙시켰고 좋은 친구였다.독서로 다른 세계를 접할수록 새로운 예술과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증이 커졌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이듬해인 1938년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로 유학을 간다. 당시 일본에는 큐비즘과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유입됐는데 그도 그런 경향에 관심을 쏟았다.태평양전쟁이 터졌던 1941년 귀국했다가 삼촌이 살고 있던 북만주 하얼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넓은 황야를 보면서 시대적 고뇌와 무의식을 캔버스에 표현했고 이따금 하얼빈 거리의 이국적인 풍물을 스케치했다. 이곳에서 미술계의 유명인사였던 일본인 쓰다 세이슈와 만난다. 그는 극재의 작품세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스승 같은 존재였다. 쓰다와의 인연 속에서 극재는 자신의 예술 속에 움트고 있던 새로운 사조들, 즉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와도 맥락이 닿는 정서들을 깨닫고 논리적으로 심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된다.광복 후 다시 돌아온 대구의 서양화단에는 자연주의 경향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극재의 작품은 이런 경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6·25전쟁으로 인해 수도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인들이 대구로 피란 오게 되고, 그들과 수시로 만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1953년 대구미문화원에서 열린 첫 개인전 때는 마해송, 박두진 등의 문인이 그의 화풍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에 유념극재의 작품에는 환원적이고 구축적인 화면과 서체적 충동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극재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기존의 평가는 그가 한국 현대미술의 진행 과정에 있어 '초기 추상 화가'였다는 것이다.1950년 당시 제도권 미술의 정점이었던 국전의 '구상' 중심적인 경직성과 시대착오적인 경향에 대항해 발족한 '모던아트협회'의 주축 멤버였으며, 한국 추상화의 발로에 서 있는 지성파 작가로 거론된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 기점을 1957년 무렵으로 잡고 있다. 그 해에 서울에서 중견작가들로 구성된 모던아트협회가 창립됐기 때문이다. 모던아트협회는 표현주의, 입체주의를 초월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전위 회화운동이다. 극재는 2회 전시 이후에 참여했다. 모던아트협회 회원들의 작품은 대체로 구성주의적 추상을 지향해 그 뒤에 오는 앵포르멜 회화운동과 1960년대의 구상회화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이중희 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장은 "우리나라 추상 미술사에서 정점식의 위상은 크게 두 가지 주목할 가치가 있다"면서 "첫째는 광복 후 30년 동안 국전 전성기 속에서 특히 초기 50년대 완전히 사실적인 화풍이 지배했음에도 대구라는 지역을 넘어 한국 추상화 1세대로 예술활동을 펼쳤다는 점이고, 둘째로 한국 추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편승하거나 그들과 추상화의 역사적 궤도를 함께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 개척으로 일관한 창작 자세를 가진 점"이라고 치켜세웠다.(한국 1세대 추상화가 정점식의 도전정신 중)극재는 교육을 통해 작가로서의 태도 배양에 각별히 힘을 기울였으며, 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에 유념했다. 신채기 계명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는 저서에서 "극재에게는 모더니즘 형식주의 논리가 그다지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을 유념했다"고 평했다.또한 그림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이름 높았다. 특히 그의 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여든을 훌쩍 넘겨 아흔을 바라보던 때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고, 생애 동안 예술관과 삶의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네 권의 에세이집을 묶어냈다.극재의 삶과 예술을 담은 '극재의 예술혼에 취하다'의 저자 김남희 박사는 "이른바 '섬(島)의 미술'이라고 했듯 극재는 서울의 바깥에서 섬처럼 우뚝했다. 평생 미술교육에 힘쓰며 대구 현대 미술과 문화예술의 토양을 살찌웠고 스스로 추상화의 주인이 됐다"면서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찾아 서체 충동과 환원성이라는 이질적인 조형 세계를 하나로 숙성시키며 마침내 '극재'했다"고 했다. ▨참고 : 김남희의 '극재의 예술혼에 취하다', 임언미의 '대구, 찬란한 예술의 기억' ▨사진출처 : 대구미술관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공동기획 대구광역시정점식 '무제'정점식 '형상'극재가 별세하기 3년 전인 2006년 자택 베란다 창문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연출한 사진이다. 이때에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였다. 〈대구시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2022.03.14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9) 박남옥]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출산 보름만에 아이 업고 영화 '미망인' 제작 나서…전통적 여성상 깬 섬세한 작품으로 평가
박남옥(1923~2017)은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그는 흑백영화 '미망인'을 촬영했다. 미망인은 박남옥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미망인 촬영 당시 갓 태어난 딸을 업고 촬영장에 나와 큐 사인을 외치기도 하는 등 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박남옥은 1923년 경북 경산시 하양에서 박태섭과 이두리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태섭이 대장간과 잡화 도매상을 운영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4세 때는 영천으로 이사와 성장했다. 8세 때는 대구 동인동에 거주했다. 이후 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 달성공원 근처로 이사했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연극·영화배우 이름을 외우는 등 영화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로 가기로 했으나 밀항선이 좌초되는 바람에 일본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박남옥의 작품 미망인은 1997년 4월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됐다. 이는 오랜 세월 영화계에서 잊혀 있던 그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재조명된 계기가 됐다. 또 2001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이 촬영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투포환 선수, 기자, 국방부 촬영대, 그림책 출판 등 다양한 활동박남옥은 재능 있는 육상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경북여학교 1학년 때 육상부에 들어갔다. 당시 전국체전에 참가해 높이뛰기에서 4등을 하기도 했다. 2학년부터는 투포환 선수로 전국체전에 참가해 3회 연속 한국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촉망받는 육상 선수였지만 그는 대학 원서 접수 당시 일본 도쿄 우에노미술 학교(현 도쿄미술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당시 경북여학교는 내량여고사(현 나라여자대학) 외에는 일본 대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가정과에 진학했지만 중퇴하게 된다.1943년 말 대구로 내려온 박남옥은 지인의 소개로 '대구일일신문'에 입사했다.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한국 영화 '갈매기', 독일 영화 '지배자' 등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면서 박남옥은 신문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우리나라 역사와 우리말 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철자법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신문사를 그만둔 그는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박남옥은 친구 남편의 소개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서울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게 된다. 촬영소에서는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후반 작업,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6)의 스크립터, 뉴스 촬영 등을 담당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에 있었던 경북도청에 '국방부 촬영대'가 만들어진다. 이때 그는 '국방부 촬영대'에 들어가 전쟁 뉴스 등을 찍었다. 1953년에는 대구에서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한다. 결혼 후 생계를 위해 어린이 그림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미망인' 촬영…한국 최초 여성감독 데뷔1954년 6월 박남옥은 딸 이경주를 출산했다. 아이를 낳은 후 사흘 만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갈 정도로 영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출산 보름 만에 영화 미망인 제작에 나섰다. 당시 여성 감독에게 손을 내미는 투자자가 없자 둘째 언니로부터 지원받은 380만원을 가지고 제작에 나서게 된다. 미망인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이유이다.미망인은 16㎜ 흑백영화다. 시나리오는 남편 이보라가 작성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민자, 이택균이 맡았다. 주요 스태프들은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망인은 6·25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갈등을 그렸다. 당시 여성의 시각으로 전쟁미망인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망인은 섬세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전통적 여성의 틀을 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망인 제작은 쉽지 않았다. 그는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직접 스태프들 밥을 해서 먹이는 일도 많았다. 또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촬영장에 딸을 업고 영화를 찍기도 했다.영화 촬영과 편집을 끝낸 후 녹음 과정에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1955년 1월 초 녹음실로부터 여자가 만든 작품을 연초부터 녹음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1월 중순쯤 되어서야 힘들게 미망인 녹음을 할 수 있었다.박남옥은 회고록을 통해 "미망인 제작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면서 "그동안 영화 동지들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영화 완성본을 보던 날을 이야기했다.1955년 미망인은 중앙극장에 개봉했다. 그러나 단 4일 만에 내려지게 되면서 흥행에는 실패했다. 또 전국 몇몇 지역의 배급권은 팔리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함께 일했던 스태프에게 필름 한 벌을 주고 영화 상영에 손을 뗐다.◆'동아출판사' 관리사 근무, '씨네마 팬' 영화잡지 발간영화 미망인 흥행 실패와 이혼까지 겹쳐 힘들었던 박남옥은 1957년 동아출판사에 입사했다. 동아출판사는 둘째 언니네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동아출판사 관리과에서 근무했다. 제본과에서 나오는 책, 참고서 등을 관리하고 서점 등에 발송하는 일을 담당했다. 1959년에는 '씨네마 팬'이라는 영화잡지를 발간했다. 1960년 4월 '제7회 아시아 영화제'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그는 일본 배우 도시로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주다가 찍힌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1965년에는 청와대로부터 동아출판사에 인쇄물 제작 요청이 들어왔다. '붕정 칠만리' '미국 순방기' '동남아 순방기' 등 대통령 순방 사진을 책으로 만들어내게 됐다. 당시 박남옥은 육영수 여사 용 책을 직접 점검하고 출고하는 담당을 맡기도 했다.1980년 말 박남옥은 23년간 근무하던 동아출판사를 그만두고 유학 중인 딸을 따라 미국이민을 떠났다. 이후 2017년 4월8일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그의 딸 이경주는 박남옥 회고록을 통해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영화 미망인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면서 "그것이 어디쯤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 장을 영영 떠났다"고 설명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참고문헌 및 사진출처: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공동기획 : 대구광역시박남옥 감독과 딸 이경주.영화 '미망인' 촬영 현장. 미망인은 16㎜ 흑백영화로 박남옥이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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