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2) 권태호] 시민에 노래보급 힘쓴 '노래 전도사'...전국 각지서 200여회 독창회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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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9   |  발행일 2022-05-09 제20면   |  수정 2022-05-09 08:11
광복 후 대구음악학원 개설해 이론·발성법 가르쳐
'봄 나들이' '대구시민행진곡' '경북도민의 노래' 등 100여곡 작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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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인 음악가 권태호(1903~1972)는 광복 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서양 음악의 씨를 뿌렸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일본과 평양에서 성악 활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주로 작곡에 전념했다. 권태호는 음악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시민들을 위한 노래 보급에 힘쓴 음악 교육가이기도 했다. 정확하게 집계된 통계는 없지만, 남아있는 공연 기록에 따르면 권태호는 200여 회의 독창회를 열었고, 100여 곡을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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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28일 열린 국민가요합창단 창립음악회. <월간 대구문화 제공>

◆한국·일본 오가며 독창회 열어

권태호는 1903년 9월16일 안동군 법석골 17번지(현 화성동 17번지)에서 아버지 권중한, 어머니 김귀행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아버지를 따라 안동예배당(현 안동교회)에 갔다가 처음으로 풍금 소리를 듣고 음악에 빠지게 된다. 그는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이후 안동예배당 반주자, 찬양대 지휘도 맡으면서 음악적 재능을 드러낸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권태호는 16세부터 안동우편국(현 삼산동우체국)에서 통신수로 일했다. 1923년 청송에서 윤옥선과 결혼하고 1년 후 음악의 꿈을 펼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동경(도쿄)에서 신문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며,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야간속성반을 졸업했다. 1927년 그는 일본니혼음악학교 본과 성악부에 응시해 한국인으로서 최초 합격한다. 그는 그해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당시 일본에서 초연인 '합창교향곡'에 테너 솔로로 무대에 오른다. 그해 가을에는 '히비야 음악회'에 한국인 최초로 독창으로 출연한다.

권태호는 2학년 재학 중인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한국에서 독창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1928년 7월14일에는 대구제일심상소학교(현 중앙초등) 대강당에서 대구 최초의 독창회를 열었다. 이 독창회는 대구계성합창대 주최로 열렸고, 당시 계성학교 교사로 있던 박태준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2부로 나눠 12곡을 연주했다. 공연에선 계성학교에 재학 중인 권태호의 동생 권태희가 테너 독창을 했고, 유회우가 바이올린 독주, 견신희가 출연한 것으로 확인된다.

권태호는 그해 9월14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도 독창회를 연다. 이 독창회는 박태준의 작곡발표회로, 박태준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고, 안익태를 비롯한 서울지역 활동 음악가들이 찬조 출연했다. 1929년에는 안동, 군산, 원산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듬해 니혼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평양으로 와 숭실전문학교에 출강했다. 1931년에는 광성고보로 자리를 옮긴다. 권태호는 전국 각지에서 독창회를 통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다 1933년 작곡한 동요 '눈.꽃.새'를 일간지에 발표한다. 1933~1934년 봉천·무순·용정 등 만주지역에서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1936년 10월26일 평양에서 평양음악협회가 발족하는데, 권태호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938년 가을 평양음악연구소를 세워 음악에 뜻이 있는 이들을 모집했다. 1939년 권태호는 다시 일본으로 간다. 그해 가을학기부터 모교인 니혼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수직을 지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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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1월10일 평양음악협회 회원과 함께한 권태호(맨 뒷줄 오른쪽 셋째). <소천 권태호 음악관 제공>

◆광복 후 대구 정착해 음악활동 전개

광복 이후 권태호는 대구에 자리 잡는다. 그는 1946년 문을 연 경주예술학원 설립에 동참하고 이듬해 대구 대명동의 한 적산가옥에 '대구음악학원'을 개설해 음악이론과 발성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듬해 대구음악학원은 인근 6연대 반란사건 여파로 군에 강제 접수되어 문을 닫게 된다.

대구로 온 후 권태호의 활동은 작곡에 집중된다. 이때쯤 그는 '일터로 일터로' '기역니은 배우세' '누에를 치세'를 비롯해 이응창 아동문학가가 작사한 '대구 능금 노래'를 작곡했다. 권태호가 작곡한 가장 유명한 곡은 '나리 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봄 나들이'다. 이외에 '밀양의 노래' '경북도민의 노래' '대구시민행진곡' '경주찬가'와 삼덕국교, 인지국교, 대봉국교, 대구여중, 신라중학, 안동중학, 안동농고, 대구고, 능인고, 경명여고 등의 교가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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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예배당에서 풍금 앞에 앉아 있는 권태호(당시 15세)의 모습. <소천 권태호 음악관 제공>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맞아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 중 새 나라의 기상을 드러내는 곡을 한데 묶어 출판하고자 했다.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에 맞춰 작곡집을 내려 했으나 이때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문교부와 농림부 관계자를 설득했고, 그 결과 그해 9월 '국민가요집'이 출판됐다.

권태호는 '국민가요집' 발간을 추진하던 시기 서울을 자주 갔는데, 이때 명동 일대 음악다방도 틈틈이 찾아갔다. 당시 권태호를 만났던 작곡가 나운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선생은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과 더불어 기인이었으며, 명동 일대를 누비셨던 애주가였다. 그러나 그가 돌체나 동방문화살롱에서 음악을 들으실 때는 그렇게도 진지할 수가 없었다. 음악에 심취해 마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경건한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은 그 옛날에 독일가곡을 전공하고, 일본 동경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수없이 독창회를 여셨지만 특히 곡 해석이 뛰어나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세계일보 1992년 11월23일자 칼럼)

국민가요집 발간 이후 1950년부터 권태호는 국방부 정훈국 전문위원이 되어 군가를 작곡하게 된다. '무찌르자 오랑캐' '포문은 열렸다' '전선 500리' '보병의 노래' 등이 그가 작곡한 군가다.

6·25 전쟁 중 권태호는 대구 북성로에 있는 백조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보기 드문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음향시설이 잘 갖춰진 르네상스 다방에도 자주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권태호는 대구에 피란 차 온 예술인들과 어울렸다. 평양에서 술친구로 어울렸던 양주동 시인을 비롯해 시인 변영로·구상·조지훈, 아동문학가 마해송, 소설가 김팔봉·장덕조, 동양화가 이상범 등이다.

1956년 권태호는 제1회 경북문화상 음악 부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돼 그동안 대구에서 펼쳐온 음악 활동을 인정받기도 했다. 1958년 여름에는 경주에서 생애 마지막 독창회를 이틀간 열었다.

◆대구로 돌아와 국민가요합창단 출범

1959년 권태호는 대구로 진학한 셋째 아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다시 대구로 왔다. 광복 직후 대구에서 머물고, 통영(1952년), 경주(1954년)를 거쳐 7년 만에 대구로 온 것이다.

이때 그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보급하기 위해 합창단을 구상한다. 1959년 9월28일 대구효성국민학교 음악실에서 16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국민가요합창단이 출범한다. 이후 1961년 봄에는 국민가요합창단의 활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대구 대봉동의 한 양옥건물을 임대해 '권태호음악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연습공간을 마련했다. 국민가요합창단은 1963년 6월28일 대구시와 재건국민운동경북지부, 대구 시내 각 일간신문사 후원으로 KG홀에서 창립음악회를 열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1964년 국민가요합창단은 해단하고, 권태호음악연구소도 문을 닫는다.

1967년 권태호는 광복 후 대부분 기간을 머물렀던 대구를 떠나 장남이 사는 서울로 간다. 1970년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동부동 198번지 양옥을 임대하고 피아노도 빌려, 권태호음악연구소를 마련한다. 이후 예안읍 선양리에 있는 한옥으로 이사해 지내다 1972년 2월29일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예배당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전경화 영남일보 기자는 1974년 한국문학사가 발간한 '여기자 20년'에서 권태호를 이렇게 기억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십수년. 이 '메기의 추억'을 언제나 애창하셨고 이 노래를 둘러싼 에피소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각해보면 선생은 격동기의 이 겨레와 함께 애환의 생애를 사셨다. 노래와 인생. 선생은 돈이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일생 동안 그렇게 돈을 멀리하고 낭만을 뿌리신 순수한 분도 드물 것이다."

▨참고=음악가 권태호(창조와지식), 음악창의도시 대구(영남대 출판부), 소천 권태호 음악관 홈페이지, 한국음악문헌학회 음악문헌학 2010년 1권 중 '권태호, 독일 예술가곡의 파종자'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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