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9) 박남옥]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출산 보름만에 아이 업고 영화 '미망인' 제작 나서…전통적 여성상 깬 섬세한 작품으로 평가

  • 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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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2-28   |  발행일 2022-02-28 제20면   |  수정 2022-02-28 08:21
학창시절 투포환 선수로 전국체전 韓 신기록 세워…6·25전쟁 직후 경북도청 '국방부 촬영대'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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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1923~2017)은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그는 흑백영화 '미망인'을 촬영했다. 미망인은 박남옥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미망인 촬영 당시 갓 태어난 딸을 업고 촬영장에 나와 큐 사인을 외치기도 하는 등 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박남옥은 1923년 경북 경산시 하양에서 박태섭과 이두리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태섭이 대장간과 잡화 도매상을 운영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4세 때는 영천으로 이사와 성장했다. 8세 때는 대구 동인동에 거주했다. 이후 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 달성공원 근처로 이사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연극·영화배우 이름을 외우는 등 영화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로 가기로 했으나 밀항선이 좌초되는 바람에 일본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박남옥의 작품 미망인은 1997년 4월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됐다. 이는 오랜 세월 영화계에서 잊혀 있던 그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재조명된 계기가 됐다. 또 2001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이 촬영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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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 감독과 딸 이경주.

◆투포환 선수, 기자, 국방부 촬영대, 그림책 출판 등 다양한 활동

박남옥은 재능 있는 육상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경북여학교 1학년 때 육상부에 들어갔다. 당시 전국체전에 참가해 높이뛰기에서 4등을 하기도 했다. 2학년부터는 투포환 선수로 전국체전에 참가해 3회 연속 한국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촉망받는 육상 선수였지만 그는 대학 원서 접수 당시 일본 도쿄 우에노미술 학교(현 도쿄미술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당시 경북여학교는 내량여고사(현 나라여자대학) 외에는 일본 대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가정과에 진학했지만 중퇴하게 된다.

1943년 말 대구로 내려온 박남옥은 지인의 소개로 '대구일일신문'에 입사했다.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한국 영화 '갈매기', 독일 영화 '지배자' 등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면서 박남옥은 신문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우리나라 역사와 우리말 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철자법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신문사를 그만둔 그는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박남옥은 친구 남편의 소개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서울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게 된다. 촬영소에서는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후반 작업,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6)의 스크립터, 뉴스 촬영 등을 담당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에 있었던 경북도청에 '국방부 촬영대'가 만들어진다. 이때 그는 '국방부 촬영대'에 들어가 전쟁 뉴스 등을 찍었다. 1953년에는 대구에서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한다. 결혼 후 생계를 위해 어린이 그림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미망인' 촬영…한국 최초 여성감독 데뷔

1954년 6월 박남옥은 딸 이경주를 출산했다. 아이를 낳은 후 사흘 만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갈 정도로 영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출산 보름 만에 영화 미망인 제작에 나섰다. 당시 여성 감독에게 손을 내미는 투자자가 없자 둘째 언니로부터 지원받은 380만원을 가지고 제작에 나서게 된다. 미망인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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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망인' 촬영 현장. 미망인은 16㎜ 흑백영화로 박남옥이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미망인은 16㎜ 흑백영화다. 시나리오는 남편 이보라가 작성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민자, 이택균이 맡았다. 주요 스태프들은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망인은 6·25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갈등을 그렸다. 당시 여성의 시각으로 전쟁미망인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망인은 섬세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전통적 여성의 틀을 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망인 제작은 쉽지 않았다. 그는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직접 스태프들 밥을 해서 먹이는 일도 많았다. 또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촬영장에 딸을 업고 영화를 찍기도 했다.

영화 촬영과 편집을 끝낸 후 녹음 과정에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1955년 1월 초 녹음실로부터 여자가 만든 작품을 연초부터 녹음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1월 중순쯤 되어서야 힘들게 미망인 녹음을 할 수 있었다.

박남옥은 회고록을 통해 "미망인 제작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면서 "그동안 영화 동지들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영화 완성본을 보던 날을 이야기했다.

1955년 미망인은 중앙극장에 개봉했다. 그러나 단 4일 만에 내려지게 되면서 흥행에는 실패했다. 또 전국 몇몇 지역의 배급권은 팔리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함께 일했던 스태프에게 필름 한 벌을 주고 영화 상영에 손을 뗐다.

◆'동아출판사' 관리사 근무, '씨네마 팬' 영화잡지 발간

영화 미망인 흥행 실패와 이혼까지 겹쳐 힘들었던 박남옥은 1957년 동아출판사에 입사했다. 동아출판사는 둘째 언니네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동아출판사 관리과에서 근무했다. 제본과에서 나오는 책, 참고서 등을 관리하고 서점 등에 발송하는 일을 담당했다.

1959년에는 '씨네마 팬'이라는 영화잡지를 발간했다. 1960년 4월 '제7회 아시아 영화제'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그는 일본 배우 도시로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주다가 찍힌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청와대로부터 동아출판사에 인쇄물 제작 요청이 들어왔다. '붕정 칠만리' '미국 순방기' '동남아 순방기' 등 대통령 순방 사진을 책으로 만들어내게 됐다. 당시 박남옥은 육영수 여사 용 책을 직접 점검하고 출고하는 담당을 맡기도 했다.

1980년 말 박남옥은 23년간 근무하던 동아출판사를 그만두고 유학 중인 딸을 따라 미국이민을 떠났다. 이후 2017년 4월8일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의 딸 이경주는 박남옥 회고록을 통해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영화 미망인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면서 "그것이 어디쯤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 장을 영영 떠났다"고 설명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참고문헌 및 사진출처: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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