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0) 정점식] 독자적 화풍으로 한국 추상미술 개척…계명대서 후학양성 힘쓰며 대구 화단 이끌어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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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14   |  발행일 2022-03-14 제20면   |  수정 2022-03-27 15:15
"작업과정 끊임없는 갈등…예술가로서 더 나은 경지를 향한 전진은 天刑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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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克哉).

'이길 수 있을까'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겨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극재는 '한국 추상화의 1세대' 정점식(1917~2009) 선생이 직접 지은 호다. 2003년 계명대 특강에서 극재는 이 호와 관련해 "화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직업이다. 예술가로서 더 나은 경지를 향한 전진은 천형(天刑)과 같다.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하고. 예술가는 '이겨낸다'는 자기 확신과 '이길 수 있을까'하는 갈등 사이에서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 화풍에서 추상회화 개척

극재는 구상미술 위주의 1940~50년대 대구 화풍에서 추상회화를 개척한 작가다. 또 오랜 세월 대구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며 지역 화단을 이끌었다. 화가로서의 이름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 화단으로 진출할 때도 줄곧 지역 화단을 지켰다.

극재는 계성중·고 교사를 거쳐 1964년부터 계명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정년퇴임한 1983년 이후에도 2001년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계명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이름 붙인 극재미술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

그는 대구뿐만 아니라 한국 추상회화에 미친 영향이 컸다.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09년 작고하던 해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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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식 '무제'

◆어려운 시절마다 그를 지탱한 건 독서

극재는 1917년 7월20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대구로 나온 극재는 예닐곱 살 무렵 약전골목에서 한의사를 하던 고모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운다.

극재가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33년 대성학원 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약전골목에서 화가들을 접하면서 특히 김용조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을 향한 동경이 구체화된다. 1936년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신문인 '조선민보'가 대구에서 주최한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에 들면서 공적으로 재능을 인정받게 된다.

어려운 시절마다 극재를 지탱한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인격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그를 성숙시켰고 좋은 친구였다.

독서로 다른 세계를 접할수록 새로운 예술과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증이 커졌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이듬해인 1938년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로 유학을 간다. 당시 일본에는 큐비즘과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유입됐는데 그도 그런 경향에 관심을 쏟았다.

태평양전쟁이 터졌던 1941년 귀국했다가 삼촌이 살고 있던 북만주 하얼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넓은 황야를 보면서 시대적 고뇌와 무의식을 캔버스에 표현했고 이따금 하얼빈 거리의 이국적인 풍물을 스케치했다. 이곳에서 미술계의 유명인사였던 일본인 쓰다 세이슈와 만난다. 그는 극재의 작품세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스승 같은 존재였다. 쓰다와의 인연 속에서 극재는 자신의 예술 속에 움트고 있던 새로운 사조들, 즉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와도 맥락이 닿는 정서들을 깨닫고 논리적으로 심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된다.

광복 후 다시 돌아온 대구의 서양화단에는 자연주의 경향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극재의 작품은 이런 경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6·25전쟁으로 인해 수도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인들이 대구로 피란 오게 되고, 그들과 수시로 만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1953년 대구미문화원에서 열린 첫 개인전 때는 마해송, 박두진 등의 문인이 그의 화풍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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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식 '형상'

◆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에 유념

극재의 작품에는 환원적이고 구축적인 화면과 서체적 충동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극재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기존의 평가는 그가 한국 현대미술의 진행 과정에 있어 '초기 추상 화가'였다는 것이다.

1950년 당시 제도권 미술의 정점이었던 국전의 '구상' 중심적인 경직성과 시대착오적인 경향에 대항해 발족한 '모던아트협회'의 주축 멤버였으며, 한국 추상화의 발로에 서 있는 지성파 작가로 거론된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 기점을 1957년 무렵으로 잡고 있다. 그 해에 서울에서 중견작가들로 구성된 모던아트협회가 창립됐기 때문이다. 모던아트협회는 표현주의, 입체주의를 초월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전위 회화운동이다. 극재는 2회 전시 이후에 참여했다. 모던아트협회 회원들의 작품은 대체로 구성주의적 추상을 지향해 그 뒤에 오는 앵포르멜 회화운동과 1960년대의 구상회화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이중희 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장은 "우리나라 추상 미술사에서 정점식의 위상은 크게 두 가지 주목할 가치가 있다"면서 "첫째는 광복 후 30년 동안 국전 전성기 속에서 특히 초기 50년대 완전히 사실적인 화풍이 지배했음에도 대구라는 지역을 넘어 한국 추상화 1세대로 예술활동을 펼쳤다는 점이고, 둘째로 한국 추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편승하거나 그들과 추상화의 역사적 궤도를 함께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 개척으로 일관한 창작 자세를 가진 점"이라고 치켜세웠다.(한국 1세대 추상화가 정점식의 도전정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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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가 별세하기 3년 전인 2006년 자택 베란다 창문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연출한 사진이다. 이때에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였다. 〈대구시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극재는 교육을 통해 작가로서의 태도 배양에 각별히 힘을 기울였으며, 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에 유념했다. 신채기 계명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는 저서에서 "극재에게는 모더니즘 형식주의 논리가 그다지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형식의 문제보다 '예술의 기본'을 유념했다"고 평했다.

또한 그림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이름 높았다. 특히 그의 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여든을 훌쩍 넘겨 아흔을 바라보던 때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고, 생애 동안 예술관과 삶의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네 권의 에세이집을 묶어냈다.

극재의 삶과 예술을 담은 '극재의 예술혼에 취하다'의 저자 김남희 박사는 "이른바 '섬(島)의 미술'이라고 했듯 극재는 서울의 바깥에서 섬처럼 우뚝했다. 평생 미술교육에 힘쓰며 대구 현대 미술과 문화예술의 토양을 살찌웠고 스스로 추상화의 주인이 됐다"면서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찾아 서체 충동과 환원성이라는 이질적인 조형 세계를 하나로 숙성시키며 마침내 '극재'했다"고 했다.

▨참고 : 김남희의 '극재의 예술혼에 취하다', 임언미의 '대구, 찬란한 예술의 기억' ▨사진출처 : 대구미술관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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