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1) 마해송] 어린이 인권위해 헌신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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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18   |  발행일 2022-04-18 제20면   |  수정 2022-04-18 07:57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 집필…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초안도 만들어
한국전쟁 때 영남일보와 인연…공군종군문인단장으로 전쟁의 참상 신문에 기록

마해송1

'열한 살쯤 되는 애가 얼어죽었드래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중략) 내가 셋방 사는 마루 아래라도 빌려주었으면 그 애는 얼어죽지 않았으리라. (중략) 다음 대(代)를 얼어 죽이고 굶어 죽이고. (중략) 교육도 못받는 차대(次代) 다수양성(多數養成)해서 어떠한 민족의 장래가 있겠는가. 한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백 사람을 구할 수 있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1953년 2월11일자 영남일보에는 '다음 代를 어떻게?'라는 제목의 시사칼럼이 실렸다. 전쟁통에 얼어 죽은 한 아이를 다룬 내용으로 당시의 참혹한 현실과 정책을 꼬집은 글이었다. 무엇보다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작가의 심정이 행간마다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글을 쓴 작가는 마해송이다. 그는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작가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특히 마해송은 1957년 제정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며 한평생 어린이 인권운동에 힘을 쏟았다. 6·25전쟁 때는 영남일보와 인연을 맺고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

마해송은 1905년 1월8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1919년 9월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지만 3·1운동 이후였던 당시는 동맹휴학이 잦았다. 마해송은 그때마다 고향으로 자주 내려갔다. 이때 기차 안에서 4살 연상의 '순'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일제에 맞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끝내 중앙고보를 중퇴한 마해송은 보성고보에 전학하지만 다시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하고 만다. 결국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인 1922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한다.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홍난파 등과 도쿄 유학생 극단 동우회를 조직해 희곡과 동극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순'과는 입학 무렵 일본에서 다시 만났지만 '순' 남편의 등장과 '철권단의 투고'로 '순'은 중국으로 떠나고 만다. 마해송 역시 고향으로 끌려와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연애 사건으로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 그는 연금생활에 큰 불만을 갖는다. 이때 마해송은 '어린이를 철부지로만 생각하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동화로 쓰게 된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이다.

마해송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쓴 '아름다운 새벽'에서 '왕의 폭력에 의해서 사랑이 끊기었고, 사랑이 끊기었기 때문에 빛을 잃었으나, 한 번 죽은 다음 바다 속에서 사랑이 되살매 잃었던 빛을 도로 찾고, 꽃도 새로운 생명을 찾았다는 뜻'으로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썼다고 고백했다. 또 '아버지의 꾸중으로 지금 집에 박혀 있으나 사랑은 끝내는 이길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어른은 언제까지나 어린이를 소견 없는 철부지로만 생각하지만, 어린이도 사람이며 생각도 지각도 있으니 사람 대접을 하라는 울부짖음은 문 밖에도 못 나가고 갇혀 있을 때의 애절한 기원'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가 겪은 애절한 울부짖음은 소년운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된다.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1923년 '샛별'지에 발표되었지만, 1926년 방정환의 '어린이'지에 다시 발표되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억압하는 세력과 어른의 완고함을 왕의 폭력에 비유해 쓴 동화로 마해송의 현실 풍자적 동화문학의 출발점이다. 환상적 탐미성(眈美性)이 강한 작품이면서 순정적인 내용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 줘 우리나라 창작동화의 선구적 전형(典型)을 꼽힌다.

'바위나리와 아기별'발표 후 마해송은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동시에 색동회에 가입해 어린이를 위한 문화운동을 계속하며 '어린이'지에 수많은 동화를 발표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 '어머님의 선물' '장님과 코끼리' '두꺼비의 배' '소년특사' 등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해송은 일본에서 술에 빠져 살다 끝내 폐병에 걸려 요양을 하게 된다(1928∼29년). 퇴원 후 도쿄에서 발행되는 '문예춘추'의 초대 편집장과 선전부장을 지내다 1930년 발행 부수 10만을 넘는 잡지사를 운영하며 일본 문화계를 주름잡는다. 이때 조선 예술상을 마련해 우리 나라의 문인들을 돕기도 했다.

1931년 8월 그는 '어린이'지에 '토끼와 원숭이'를 발표하고 1933년에 다시 연재하다 3회 치 원고를 압수당하고 만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을 비난한 동화의 스토리 때문이었다.

마해송_다음대
마해송이 1953년 2월11일자 영남일보에 쓴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1934년에는 마해송의 첫 창작 동화집 '해송 동화집'이 개벽사에서 출간된다. 이후 1937년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의 서양무용가 박외선을 만나 결혼한다. 이 때까지 일본에서 줄곧 잡지사를 운영하던 그는 1944년 6월 도쿄에 폭격이 심해지자 가족을 서둘러 귀국시키고 자신은 1945년 1월에 귀국한다.

광복 후에도 마해송은 사회성과 주제의식이 강한 동화를 집필한다. 1946년 '토끼와 원숭이'를 재집필해 완성했고, 1948년 1월에는 '떡배 단배'를 '자유신문'에 연재한다.

자유당 집권 때에는 장편동화 '모래알 고금'을 통해 사회 부조리와 혼란스러운 모습을 비판했고, '꽃씨와 눈사람'을 통해서는 부정부패가 극도에 이른 정권이 무너질 것을 은근히 보여 주기도 했다.

마해송은 동화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고발한 아동문학가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세태를 풍자하며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총 7권의 동화집과 다수의 동요, 수필, 소설 등을 남겼다. 1966년 11월6일 9시55분 뇌일혈로 사망한 그는 경기도 양주군 금곡 가톨릭 묘지에 안장됐다.

◆6·25전쟁과 대구살이

마해송은 대구와 인연이 깊다. 6·25전쟁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대구에 피란보따리를 풀었다. 대구 중구 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건너편 책방이 딸린 집에 세를 얻었다. 단칸방이었다. 작가와 아내, 3남매 그렇게 다섯 식구가 누우면 꽉 들어찼던 방이었다. 아침은커녕 점심도 못 먹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마해송은 공군종군문인단(일명 창공구락부) 단장으로 활동하며 전선의 참상을 기록했다. 특히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구상과 돈독한 사이였다. 영남일보는 당시 마해송을 위해 신문사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그곳에 전용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신문사에 수시로 드나들며 신문지면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1년 1월4일자 영남일보에 게재된 수필 '大邱辛卯(대구신묘)', 53년 2월9·10일자에 상·하편으로 실린 '外國文化輸入(외국문화수입)',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53년 2월11일자), '화가 정점식'(53년 6월16일자) 등이 대표적이다.

수필 '大邱辛卯'는 피란지 대구에서 첫 새해를 맞은 감회를 옮긴 작품으로, 그는 이 글에서 '우리를 해치려는 무리를 무찔러 없애 버려서 겨레와 자손이 해를 받을 염려 없도록 해놓아야 그것이 진실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해송은 대구 시절 엄격할 정도로 청빈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대구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피란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마종기)이 주인집에 온 신문을 먼저 보고는 다시 넣어둘 생각을 잊은 채 그만 셋방 툇마루에 던져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해송은 아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좁은 방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니는 것을 따라다니며 가릴 바 없이 무지하게 때렸다. 죽어라고 때렸다'(마해송의 수필 '너를 때리고' 중에서). 마해송은 아무리 사소한 신문이지만 남의 것에 손을 댄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것은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참고 : 이기영의 마해송의 삶과 문학.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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