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8)] 대구 추상회화 선구자 장석수, 30여년 후학양성 매진…1957년 전후 구상→추상주의 변화…드리핑·타시즘 혼용하며 급진적 기법 실험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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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29   |  발행일 2022-08-29 제22면   |  수정 2022-08-29 08:02
1970년대 들어 구상회화로 복귀…표현의 내적 필연성 강조하고 양식에 열린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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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수(1921~1976)는 추상미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반을 다지고 성장을 이끌어온 화가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의 유화과를 졸업한 장 화백은 1946년 대구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한 이래 몇몇 학교를 거친 뒤 1963년 대구대학(현 영남대)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직을 맡아 작고한 1976년까지 총 30년간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동적인 실험가' '예술적 성향이 짙은 화가'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익수 영남대 조형대학 명예교수는 '내가 만난 장석수, 나의 스승 장석수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선생은 멋있는 예술가셨고, 그 자유로움으로 공직 생활보다는 창작하는 삶에 에너지를 쏟으시는 모습이 후배, 제자들에게 의욕을 북돋웠다고 생각된다"고 썼다.

고(故) 정점식 화백은 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던 '고(故) 장석수 유작전에 부치는 글'을 통해 "1차대전이나 2차대전 또는 정치적인 압력 밑에 누르고 있던 울분이 앵포르멜(Informel)이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동기를 마련했지만 우리들은 6·25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겪어야만 했다. 일찍이 이들 물결 속으로 뛰어든 사람이 장석수"라면서 "종래의 미술이 미적대상으로서 우리들의 삶의 여백을 수놓아 온 소위 풍월을 읊는 예술이었지만, 장석수의 회화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불안과 의문을 푸는 도장으로서의 그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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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수의 '무제', 1966, 유족 소장

◆장석수의 삶

장석수는 1921년 경북 영일군 지행면(현 포항 남구 장기면)에서 4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름답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부친은 천석꾼 소리를 들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에 장기초를 거쳐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로 진학했다가 2년 만에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교토에 있는 동산중(東山中)에 편입해 1940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 우에노에 있던 태평양미술학교의 유화과에 입학한다.

귀국 후에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는 한편 1944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1년여간 지행면 서기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아 그만뒀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1일부로 대구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했고, 이후 대륜중, 사대부고 등에서 근무하다 1954년 6월 신명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첫 개인전을 가진 것은 1955년 4월. 대구 미국문화관(USIS) 화랑에서 개최된 전시에서는 '남매' 등 20여 점의 유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가 끝나자 같은 달 연이어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1958년 신명여고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직을 끝내고 대구대학(현 영남대) 강사가 된다. 1963년에는 대구대학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직을 맡았고 작고할 때까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1966년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 1970년 대구공보관 화랑에서 '제4회 개인전', 1972년 대구백화점 전시장에서 '제5회 개인전'을 거쳐 1974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인 '제6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76년 2월 평소 앓던 두통 치료차 내원해 검진한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받고 3개월여 투병 후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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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수 작, 제목 및 연도 미상, 유족 소장

◆장석수의 작품세계

장석수 화백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작업 시기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눠놓는 두 차례의 현격한 양식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인물이나 자연을 모티브로 한 구상작품에서 1957년을 전후해 추상표현주의에 이른다. 1955년 무렵부터 진행되어온 추상 의지의 실천이 유화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이 1958년 '사정(射程)'과 1959년의 '단절'로, 이미 본격적인 비대상회화의 실현에 이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유화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연관을 맺고 있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이 주요하게 적용되고 있지만 일부 작품의 화면 표현 곳곳에는 얼룩과 번짐 등 물감의 우연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타시즘의 기법'도 혼용됐다. 그 당시의 작가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새로운 자유 의식의 실천방식이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 후 장석수는 약 10년간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미술의 실험적인 작업에 진력했다. 그의 앵포르멜 회화는 당시 다른 추상 작가들과 달리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 추상인 비정형 회화를 실천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변화가 1970년대 접어들면서 나타난다. 앵포르멜 경향의 작업에 심취했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 그의 캔버스에 다시 회화적 이미지의 구성과 구상적인 화면이 등장하는 것.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가 확대되거나 연장된 양식으로 가지 않고 구성적 표현으로 복귀했다는 데서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면 추상작업 기간 몰입했던 자신의 내면적 지향에서 벗어나 외부의 사물과 자연에 시선을 돌리는 과정에 느끼는 여러 가지 희열과 기쁨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면서 "장석수는 언제나 내적 요구에 따라 양식은 변화될 수 있는 것임을 자주 시사한 바 있다. 또한 동서양화 양식의 융합을 시도한 작가의 태도를 칭찬하기도 한 바, 그 자신도 다양한 양식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장석수는 내적 필연성을 항상 강조했고 양식에 관한 한 매우 열린 태도를 취했다.

1953년 대구에서 열린 최덕휴의 개인전 평에서 "양식이 테마를 선택할 경우와 반대로 테마가 양식을 결정할 경우 어느 쪽이든, 하나의 작품이 실현되기 전에 작가의 흉중에 결합되어 작용한 意想(의상)이 곧 작품 행동이 되는 주요 포인트"라고 했다. 1965년 정점식 작가와 한 지상 대담에서는 "경북화단에서 자연주의 계통이 발전되지 않는 것은 그릇(容器)에만 얽매이는 까닭이다. 앞으로 그릇 자체를 찌그러뜨릴 수 있는 '내용'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 미술평론가는 "어떤 내적 감정의 표현 충동이 그의 예술 태도 전체를 관류하는 특징"이라면서 "선생의 예술세계를 내내 이끌어 온 일관된 예술적 지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문제에 대한 강렬한 표현 충동이었다고 요약될 것"이라고 평했다.

글=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사진=봉산문화회관 제공

참조=김영동의 '장석수 선생의 삶과 작품활동'(예술담론 웹진 '대문' 게재), 김영동의 '장석수 선생의 작품세계'(대구문화예술회관 장석수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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