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일 논설실장
길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다. 차가 울렁이고 타이어에 진흙 뭍는 느낌이 감지된다. 한여름 태양 아래인데도 약간 으시시 하기까지 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는 안내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대구에서 청도 가는 길 끝자락인 달성군 가창면 산삼리 봉화산 자락에 '한국속 캐나다'로 불리는 에메랄드 빛 비밀호수가 있다는 뉴스에 궁금증이 솟아 찾아 나선 길이다.
안내대로 차를 주차하고 눈을 돌리니 '야하~' 하고 탄성이 나왔다. 금요일 평일인데도 적지 않게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흥분된 기색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저런 호수가...". 호수는 여느 저수지에서는 목격하기 불가능한 청아한 빛깔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물 위로 우뚝 섰다. 실제로 깎아지른 암벽이다. 수심 29m 경고문과 임시 철조망이 호수 접근을 통제한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녹슨 작업장들이 있다. 여긴 원래 채석장이었다. 시뻘근 녹물 컨베이어 벨트에 인부 막사까지.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랄까. 옆 사람들이 말한다. "명소가 되겠다. 카페라도 차리면..."
며칠 전 세미나에 참석했다. 경북문화관광공사(대표 김남일) 산업유산 취진위 회의다. 전국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왔다. 경북도는 오래 전부터 한국 근대화 루트(route)와 그 흔적들을 산업유산으로 지정하고 보존한다. 예를 들면 문경의 쌍용양회다. UN 개발원조를 받아 1957년 지어진 국내 최초의 내륙 시멘트 공장이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한국을 재건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그 산업 현장은 이제 역사탐방 관광코스가 됐다. 국가등록문화재이기도 한 영주의 풍국 정미소도 2013년 경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1940년대 시설이 그대로 보존됐다. 예천군 용궁합동양조장, 문경시 산양양조장, 경주시 노당기와, 의성의 성광성냥 공장도 마찬가지다. 특히 상주의 허씨 비단직물은 5대째 명주실 비단을 제작해 온 역사의 터전이다.
경북은 산업 유산이 널려 있다, 구미 포항 등지의 공장지대는 세월이 흐르면 유산이 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포항제철소 포스코의 제1고로는 원형이 보존된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라고 한다.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견인차였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실상 낙동강의 기적이라 해도 무방하다는게 이날 세미나 참석자의 발언이었다.
내가 물어봤다. '대구에도 산업 유산이 많다. 아니 앞으로 많을 것이다. 코오롱 공장 부지는 아파트 촌으로 사라졌지만 대구연초제조창은 논란 끝에 일부가 대구예술발전소로 거듭났다. 혹시 앞으로 세계 최대인 대구 염색공단도 옮긴다면 우리가 산업유산으로 보존해야 하나요?'
답이 돌아왔다. '해외를 보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도 공영 차고지에 새롭게 들어섰다. 세계 각국은 공장을 보존하고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카페로 미술관으로 변신시킨다. 일본의 군함도도 그런 취지다. 서울 경복궁 옆 국군 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 본관 건물은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로 탈바꿈했다. 우리가 가치(價値)를 어느 쪽에 둘지에 달려 있는 사안이다'
그러고 보니 대구는 허문게 많았다. 주로 아파트로 보상받았다. 개인적으로 고속철이 생기면서 신천의 아치형 철교가 철거된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가창의 비밀 호수는 어떻게 될까. 중금속 오염 호수로 판명나 묻어져 버릴까. 녹슨 컨베이어는 고철로 처리할까. 난 왠지 그곳을 스쳐간 땀과 피의 노동자들 흔적이 아른거린다. 그건 서사(敍事)다. 역사는 보존하면서 이뤄진다.
청도가는 끝길, 가창 산속
절벽이 품은 비밀호수
폐채석장의 그로테스크
대구경북 근대화 루트
산업현장은 서사로 남아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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