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2025년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 집중 호우가 이어졌다. 폭염 주의보가 연일 발효되었고, 열대야도 우리를 힘들게 했다. 땀을 흘리며 여름을 견디다 보니, 자연스레 옛 어르신들이 부채질하며 더위를 달래던 모습이 떠올랐다. 부채질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당시 여름 풍경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부채는, 여름날을 견디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부채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유서 깊은 도구다. 부채는 단순히 바람만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부채를 문인의 품격을 드러내는 소품으로 사용했고, 부채에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고받았다. 현재는 전통 혼례나 공연, 제례 등에서 소품으로 활용되거나 예술 작품, 판촉물로 쓰인다.
전기가 보급되면서 더위를 식히는 역할은 부채에서 선풍기로 넘어갔다. 선풍기는 1882년 미국에서 처음 발명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경성을 중심으로 호텔이나 부유층 가정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내 기업이 선풍기를 대량 생산해 일반 가정에 보급한 것은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다. 전기 모터가 날개를 돌려 바람을 만들어내는 선풍기는 안정성을 강화하고 소형화하며, 무소음·무날개 등으로 진화해 여름이면 없어서는 안 될 가전(家電)으로 자리매김했다. 노후 선풍기의 모터 과열로 화재가 발생하거나 장시간 사용으로 인한 건강 문제가 생기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합리적인 냉방 기기로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선풍기의 뒤를 이어 냉방 기기의 대표주자가 된 에어컨은 1902년 미국 윌리스 캐리어가 현대식 공기 조절 시스템을 발명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 주한미군 기지나 외국인 전용 호텔 등 일부 시설에 설치되었고, 1979년 우리 기업이 최초로 가정용 창문형 에어컨을 생산했다. 1980년대부터 아파트 단지 증가와 생활 수준 향상으로 점차 가정에도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국내 기업들이 다양한 제품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인 대중화가 이뤄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공기 청정, 제습, 스마트 기능 등을 결합한 시스템 에어컨이 보편화되면서 여름철 필수 가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에어컨은 편리한 만큼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냉매로 사용되는 프레온가스나 HFC 등은 온실가스를 배출해 지구 온난화를 재촉한다. 실외기로 내보낸 열은 인구 밀집 지역의 열섬 현상을 키운다. 가정마다 사용하는 에어컨은 전력 소비를 급격히 늘려 여름철 전력 피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터를 제때 청소하지 않으면 세균과 곰팡이, 먼지가 실내로 다시 퍼져 공기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장시간 에어컨 바람을 쐬면 체온 조절 기능이 약해져 두통, 근육통, 소화불량, 피로감 등 냉방병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편리함의 이면에 있는 문제를 알고 나면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몸과 마음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편리함에만 익숙해지면, 불편을 감내하는 힘이 사라진다. 더위도 일정 범위에서는 견디는 것이 좋다. 더울 때는 땀을 흘리며 몸이 더위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따뜻한 기운이 질병 예방에 도움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체온이 1℃만 떨어져도 면역력이 30%나 약해진다고 한다. 지나친 냉방은 몸의 균형을 무너뜨려 건강은 물론 지구에도 해롭다. 부채와 선풍기를 함께 쓰고, 에어컨은 꼭 필요한 때에만 적정 온도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건강과 지구의 미래는 작은 실천에서 크게 달라진다. 건강도 지키고 지구도 지키는 일, 기억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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