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만진 소설가
1933년 9월19일 조선축구협회가 결성됐다. 초대 회장에 박승빈이 취임했다. 박승빈은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했던 한글 연구자이기도 했다. 판사였던 그의 한글사랑 정신이 놀랍다. 두산백과는 박승빈을 "잡지 '신청년'을 발간하는 한편, 여러 편의 고전을 출판하는 등 대중 계몽에 힘쓰면서 언론의 힘으로 일본과 투쟁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어학' 등이 있다"라고 소개한다.
법률가 박승빈이 한글 연구와 사회 활동에 맹렬한 정열을 불태우고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까지 맡은 점은 이상정을 생각나게 한다. 이상정은 흔히 중국군 장군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기억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그를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기억한다. 나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이상정은 놀라운 이색 면모도 보여준다. 그는 대구 서양화 화단을 개척한 화가였고, 서각 전문가이기도 했다. 중국 망명 전에는 계성학교 등에서 도화(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미술연구소 벽동사를 차리기도 했다.
또 이상정은 1922년 '개벽'을 통해 등단한 대구 최초의 현대 시조시인이었다. 1925년 그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떠났다. 남대문역에서 기차에 오르면서 착잡한 감회를 시조로 남겼다. '남대문역에서'를 읽어본다.
"이 속에 타는 불은 저 님은 모르시고/ 서운히 가는 뒷모습 애석히 눈에 박혀/ 이따금 샘솟는 눈물 걷잡을 줄 없애라" 남대문역은 지금의 서울역이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길을 이상정은 지금 떠나려 하고 있다.
이상정의 시조는 1640년 일흔 넘은 고령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라고 노래한 김상헌을 연상시킨다. 1925년 당시 이상정은 29세였다. 이상정은 그날 이래 20년 이상 조국땅을 밟지 못했고, 독립 후에도 교민 보호를 위해 상해에 머물렀다. 1947년 8월27일 어머니 별세 소식에 부랴부랴 귀국했지만 두 달 뒤인 10월27일 뇌일혈로 타계했다.
그의 '망향가' 일부를 다시 읽어본다. "아름다운 삼천리 정든 내 고향/ 예로부터 내려온 조선의 터를/ 속절없이 버리고 떠나왔노니/ 몽매에도 잊으랴 그리웁구나/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 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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