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엘리엇과 을지문덕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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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26 06:00  |  발행일 2025-09-25
정만진 소설가

정만진 소설가

이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우러름을 받는다. 흔히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 공자를 세계 4대 '성'인으로 손꼽고, 충무공 이순신을 '성'웅으로 받드는 것을 보면 시'선'보다는 시'성'이 더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인물로 여겨진다.


물론 두보 시에도 단순 서정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봄밤의 좋은 비(春夜喜雨)'도 그중 한 편이다. "좋은 비 때를 알아/ 봄을 맞아 내리는구나/ (중략)/ 이른 아침 붉게 젖은 땅을 보니/ 금관성에는 꽃이 활짝 피었겠구나".


1888년 9월26일 미국 태생 영국 시인 엘리엇이 태어났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노래했다.


'황무지'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폐해진 인간사회의 황폐를 담은 불후의 명시로 평가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28일 시작해 1918년 11월11일 끝났다. 즉 '황무지'의 4월은 개전 시기도 종전 시기도 아니다. '황무지'의 4월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 4월, 1916년 4월, 1917년 4월, 1918년 4월 중 어느 4월을 특칭하지는 않는다.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의 어여쁨으로 가득차야 할 '춘야희우'의 봄이 죽음으로 검게 뒤덮인 참상을 비판하고 있을 따름이다.


'황무지'의 4월 이미지를 당나라 동방규는 시 '소군원(昭君怨)'에서 "오랑캐 땅은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라고 노래했다. 한문으로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인데, 우리나라에도 거의 고사성어처럼 굳어져 '춘래불사춘'이라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다. 일반 서정시에는 주인공이 없지만 '춘래불사춘'은 배경 서사를 가지고 있다. 왕소군은 본디 중국 왕실의 궁녀였다. 그런데 흉노와의 화친 정책에 동원되어 북방 오랑캐 왕에게 첩으로 보내졌다. '춘래불사춘' 다섯 글자에는 왕소군의 원통이 배어 있다.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종교 신봉자들이 무참한 살상을 계속하고 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與隋將于仲文詩)'를 통해 "전쟁에 이겨 쌓은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라고 꾸짖은 을지문덕 장군의 충고도 아랑곳없다.


경북 성주 한개마을이 낳은 독립운동가 이승희 선생은 "자국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국가주의나 종족을 먼저 생각하는 종족주의는 이기적 갈등과 투쟁을 불러올 뿐"이라고 지적했다. 말만이 아니라 진정한 '지구촌'은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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