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쓰임에 대하여

  • 김보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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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01 06:00  |  발행일 2025-09-30
김보라 작가

김보라 작가

모든 것에는 각자의 쓰임이 있다. 어릴 때 동화책을 읽으면 사람에게 먹히고 싶지 않아 진열장 너머로 도망 다니는 메론빵, 연필 자국을 지울 때마다 점점 닳아가는 몸을 보며 슬퍼하는 지우개 등 쓰임과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왜 슬퍼하는 걸까? 본래의 쓰임을 다하고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메론빵은 사람에게 맛있게 먹히는 것이 자신의 쓰임, 지우개는 연필 자국을 깨끗하게 지우는 것이 자신의 쓰임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동화책 속 메론빵도 지우개도 슬프지 않았다.


최근 7명의 작가님과 '앙코르: 악기들, 다시 노래하다'라는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버려진 악기를 재활용하여 미술, 연극, 음악 작가님들이 각자의 작품을 만들었고 나는 도입 부분의 글 전시를 맡았다. 전시에 사용된 악기는 바이올린, 첼로, 우쿨렐레, 기타, 피아노, 하프 등 다양했다. 감사하게도 전시 소식을 들은 중구재활용센터와 행복한 가게에서 기부를 해주셨고, 특별하게도 수명이 다한 자신의 악기를 직접 들고 온 청년도 있었다.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악기들이 작업실 구석에 옹기종기 모였다. 때마침 어릴 때 보았던 동화책이 떠올랐고, 나는 그것에서 착안하여 자신의 쓰임을 다한 바이올린의 유언을 남겼다. 현이 끊어지고 나무가 삭아버린 바이올린의 마지막이 얼마나 찬란하고 행복했는지를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바이올린의 유언을 쓰면서 나는 꼭 바이올린이 된 것만 같았다. 이탈리아산 가문비나무, 그리스산 단풍나무, 인도산 흑단으로 만들어진 나는 장인의 작업실에서 수만 번의 조각칼을 견디며 바이올린이 되었고, 훗날 대한민국의 한 악기점 가장 높은 곳에 전시되어 앳된 청년과 친구가 된 것이라고.


작업실에 직접 찾아온 청년은 바이올린을 들고 활짝 웃는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그날 고맙다는 청년의 인사를 들은 것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악기를 여태껏 품고 있던 청년의 다정함을 바이올린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소리 낼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제 쓰임을 다한 바이올린은 청년의 품에서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본래의 쓰임을 다한 모든 것이 꼭 찬란한 마지막을 맞았으면 한다. 물론 본래의 쓰임을 다하지 못한 것들까지도 기쁘게 포용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다만 물건의 쓰임이 단순명료하듯 사람의 쓰임도 그러하면 좋겠다. 자신의 쓰임에 대해 너무 많이 고민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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