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각각(時時刻刻)] 국가보다 진영이 먼저인 나라
한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서유럽이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좌우 정치와 포퓰리즘이 한몫했다. 영국 역시 브렉시트 과정에서 진영의 덫을 경험했다. 보수당은 '국민주권'을, 노동당은 '유럽연대'를 내세웠지만, 논리보다 감정이 앞섰고, 진실보다 구호가 강했다. 결과는 진영 간 분열이었다. 영국은 EU 경제공동체를 떠났지만, 분열된 사회 속에 실업과 경제 불안만이 남았다.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승리'가 사실상 국가적 고립의 시작이었음을 영국은 뼈저리게 확인했다.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다. 극우당인 국민연합은 '엘리트의 오만과 국민의 분노'를 자극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들은 불평등과 이민문제를 얘기했고, 유럽의 관료주의를 비난하며 '국민의 자존'을 외쳤지만, 그 구호 아래 사회적 갈등은 더욱 깊어갔다. 거리의 '노란 조끼' 시위는 극단화된 분노의 상징이 되었다. 사회적 분열과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인해 마크롱 정부는 위기에 직면했고, 정치의 품격과 국가의 통합력은 그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영국은 '합리의 정치'를, 프랑스는 '공화국의 가치'를 되찾고자 애쓰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정치가 진영의 언어로 국민을 선동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퇴보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문화의 문제다. 한국 정치 역시 그 길을 가는 것은 아닌가. 다수당의 힘으로 삼권분립의 정신을 위협하고, 정당 내부 특정 정치인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선동성 집회가 만연한 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문화다. 집회정치가 국민이나 당원을 하나로 통합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는 기술이 되어버렸다. 이념의 다양성과 토론문화는 사라지고, 극좌와 극우의 목소리만 들린다. 양극단이 상대방을 '국가의 적이나 정당의 배신자'로 낙인찍는 모습이 꼬리가 몸통을 뒤흔드는 형국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하다. 진영을 앞세우고 국가는 뒷전이다. 바른말 하는 정치인은 점점 더 사라지고 눈치 보는 정치만 남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합리보다 진영의 논리를 앞세우고, 정책보다 현금지원확대, 기본소득 등 포퓰리즘의 구호를 더 높이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는 보편소득, 세금감면이 포퓰리즘의 상징으로 비판받았다. 타협 없는 극단의 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세상을 흑백으로 나눈다.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애국자와 내란세력 등 단순명료한 이분화의 언어는 정치의 본질인 설득과 타협을 밀어낸다. 합리적 토론과 논쟁은 사라지고, 대립과 감정의 결집만 남는 것이다. 시민들은 정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진영에 충성한다. 현금성 지원확대 등 포퓰리즘은 이런 환경에서 가장 빠르게 자란다. 표를 얻기 위해 정치인은 현실을 왜곡하여 세금과 복지를 동시에 늘리겠다는 모순된 약속을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와 재정은 흔들리고, 미래 세대의 부담만 가중된다. 민주주의의 힘은 다양성의 공존에서 나오지, 진영의 독점에서 나오지 않는다. 건강한 정치는 상대를 설득하는 언어를 쓰고, 퇴행하는 정치는 상대를 모욕하는 언어를 쓴다. 지금의 한국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국가보다 진영이 먼저인 정치가 계속된다면, 우리도 결국 서유럽이 걸어간 위기의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렵다. 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202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