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 광복회 부회장. 광복회 제공.

백범 장손자 김진 광복회 부회장. 임소희 광복회 홍보팀장 제공.

백범 장손자 김진 광복회 부회장. 광복회 제공.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김구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 광복회 부회장은 어릴 때부터 늘상 '김구의 손자'라고 불리우며 살아왔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성장한 지금, 그는 "할아버지가 말한 '문화의 힘'은 거창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라며 "존엄·품격·신뢰를 바탕으로 한 문화의 힘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1949년, 김 부회장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집안 곳곳에서 그 큰 존재감을 체감하며 자랐다. 거실 벽에는 '백범일지'와 휘호가 걸려 있었다. 가족들 간 대화 속에는 자연스럽게 김구 선생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김구의 손자'라는 시선을 일찍 받아들였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유학 시절에도, 이후 기업에서 근무할 때도 그 꼬리표는 항상 따라다녔다. 김 부회장은 "일찍 마음을 정했다. 자부심은 남이 달아주는 훈장이 아니라 내가 지는 책임이고, 부담은 피할 짐이 아니라 나를 곧게 세우는 기둥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김구의 손자'라는 이름이 자랑스러웠던 순간도 떠올렸다. 그는 "청소년들과 현장에서 독립운동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공공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겠다'고 말하면 가장 뿌듯하다"며 "그럴 때는 손자라는 이름이 부담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반면 역사와 보훈 문제가 정치진영의 언어로 소모될 때는 그 무게가 크게 느껴졌다. 그는 "그럴수록 말을 아끼고 '사실과 원칙'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래도 한 번도 '손자'라는 이름을 방패로 내세우거나 핑계로 물러선 적은 없다. 존경과 예우는 강요로 얻는 게 아니라, 봉사와 언행으로 힘들게 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부회장은 할아버지를 "민족밖에 모르던 우직한 촌부"라고 표현했다. 그는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할아버지는 계산보다는 원칙을, 말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셨다. 나라의 중심을 부강만이 아니라 문화와 인격의 힘에 두셨다. 그 단순하고 단단한 일관성을 '우직함'이라 표현했다. 일단 방향을 정하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었다. 민족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 앞에 모든 것을 맞추신 분이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그런 정신이 그에게도 배어진 것일까. 사회적 논의가 감정적인 말싸움으로 흐를 때, 역사 왜곡이 사실처럼 퍼질 때, 보훈 사각지대에서 유족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라고. 김 부회장은 "그럴때마다 속도를 한 박자 멈추고, 목소리 톤도 낮추며 상대 입장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게된다"며 "유머와 배려로 긴장을 풀고, 혹시 제가 놓친 게 있을지 돌아보겠다는 말을 꺼내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김 부회장은 대구경북 시도민에게도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영남은 국채보상운동의 대구,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이 있는 안동, 2·28 학생민주운동의 숨결이 남아 있는 교정들, 곳곳의 만세운동 현장을 품은 땅"이라며 "자강과 연대의 역사가 지역 자부심을 넘어 오늘의 시민 역량으로 다시 살아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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