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창간 76주년 사람과 지역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x
이창호 기자
전체기사
[자유성] 플랜 75
오는 7일 국내 개봉되는 일본 영화 한 편이 머릿속을 무겁게 한다. 제목은 '플랜 75'(하야카와 치에 감독). 인터넷 검색을 통해 미리 시놉시스를 살펴봤다. 충격적이다. 영화의 배경은 초고령화 문제가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진 가까운 미래의 일본 사회다. 영화 속에서 일본 정부는 '플랜 75'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75세 이상의 국민이 죽음을 선택할 경우 정부가 준비금 10만엔을 비롯해 상담·장례 서비스까지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즉 '75세 안락사법'이다. 초고령화시대 노인복지 재정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사회 전반에 노인 혐오 분위기가 퍼지자 고령 인구 감소를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다. 주인공인 독거 할머니 미치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다 해고를 당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살기가 어려운 처지다. 재취업에 실패해 결국 밥까지 굶게 된 그가 '플랜 75' 신청서를 쓰게 된다는 스토리다.이 영화는 사회의 열외(列外)가 돼 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죽음을 권하는 사회'가 결코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경고다.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존귀함보다 효율성을 더 중시하는 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하지만 2022년 일본에서 개봉된 뒤 현지의 반응은 섬뜩하다. 일부 젊은 층 관객은 "플랜 75가 더는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초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일 수도 있다"고 했다.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을 때는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라는 영화 속 대사가 상념에 잠기게 한다. 이 영화가 일본만의 이야기일까. 역시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둔 대한민국에도 가볍지 않게 다가오는 주제다. 국내 관객의 반응은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이창호 논설위원
[월요칼럼]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스포츠가 감동을 주는 것은 혜성 같은 플레이어의 등장과 활약만도 아니다. 정점에 있던 스타들의 아름다운 은퇴도 있어서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존경했다는 미국 프로야구(MLB)의 '레전드' 루 게릭(1903~1941). 1939년 여름 어느 날, 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코끝 찡한 은퇴 선언을 한다. 그때 나이 36세, 훗날 '루게릭병'으로 불린 근위축성 측색경화증 진단을 받고 나서다. 그는 "원치 않은 '중단'이지만 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행운아다. 후회스럽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중들은 기립 박수로 쾌유를 기원했다. 은퇴 연설 2년 후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선수 시절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그늘에 가렸지만 MLB 역사에선 루스보다 더 존경받은 그였다. 얘기한 김에 사례 하나 더. 대한민국 축구 팬으로서 한때 아쉬웠던 순간이 있었다. 2014년 박지성의 은퇴였다. 축구 선수로서는 아직 뛸만한 나이(33세)의 은퇴에 무척 섭섭했던 기억이 있다. 정작 그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팬들의 사랑에 힘입어 영광과 행복을 누렸다"며 팬들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미련 없이 떠날 때를 알았기 때문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아는 게 중요하다. 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용갑(국민의힘 상임고문)씨가 떠오른다. 자칭 '원조 보수'로서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그런 그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정계 은퇴를 선언해 화제를 모았었다. "3선이면 국회의원에게 환갑이다. 박수칠 때 떠난다. 난 이제 자유인이다." 껄껄껄 웃으며 밝힌 은퇴의 변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가히 '은퇴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작금 우리 정치판에서 물러날 때를 아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찾아보기가 드물다. 너도나도 '선수(選數) 쌓기'에 안달이다. '이 좋은 걸 왜 그만둬'다. 종합선물세트 같은 특권·특혜에 맛 들인 탓이리라. 입법 활동도, 지역구 관리도 그저 면피 수준으로만 하면 되고. 선수를 쌓을수록 타성에 빠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총선을 앞둔 일부 초선 의원의 용퇴도 이런 정치 문화에 염증을 느낀 탓도 있을 게다.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훈현 국수(國手)는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나한테 안 맞으면 그만이다. 안 맞는 옷 벗고 돌아오니 이제 살겠다"고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여의도는 비상식이 득세하는 세계였던 것이다.모든 다선 의원을 '노욕(老慾)의 화신'으로 폄훼할 뜻은 없다. 다선의 관록이 국사를 논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데 효과적일 때가 많다. 지역구 발전에도 플러스가 될 수 있다. 다만 4선, 5선을 하고도 성에 차지 않는 듯 '묻지마 다선'을 기도하는 건 옳지 않다. 더욱이 국회에서 존재감도 없었고, 시쳇말로 '농땡이'까지 쳤다면 말이다. 제22대 총선이 6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아름다운 퇴장'을 기대하기엔 촉박한 시간이다. 다선 의원들은 공천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버틸 모양새다. 하지만 표심(票心)의 기본 속성은 '변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인 물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지금 물러나는 게 대표팀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결정이다." 박지성의 은퇴 변이다. 누가 봐도 용퇴가 필요한 정치인이 있다면 곱씹어 볼 만하다. 참, 김용갑 전 의원 말마따나 '3선이면 환갑'이라 했는데, '요즘 환갑은 청춘'이라며 항변할 수는 있겠다.이창호 논설위원이창호 논설위원
[논설위원의 직터뷰]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홍규 신부 "24세때 조선 파견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의 삶 韓·佛에 알리고 싶어"
옛 일제강점기 때 대구 유스티노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 유스티노캠퍼스) 학장을 지낸 '엄택기(嚴宅基·1873~1952)'라는 신부가 있었다. 한국인이 아니다. 프랑스인 '에밀 타케(Emile Taquet)' 신부다. 1897년 24세 때 사제가 된 뒤 조선에 파견돼 사목 활동을 펼친 선교사다. 그는 제주도에 최초로 감귤나무를 심은 것은 물론 우리나라 왕벚나무 서식지를 발견해 유럽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한 이다. 그때가 1908년 4월이었다.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에서 자생하고 있던 왕벚나무였다. 왕벚나무 원산지가 조선임을 알린 역사적인 일이다. 나흘 전인 지난 27일은 타케 신부가 79세 나이로 대구에서 선종(善終)한 지 72주기 된 날이었다. 이런 타케 신부의 삶을 고집스럽게 연구해 온 신부가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원로사제인 정홍규(69·에밀 타케 식물연구소 이사장) 신부다. 그가 최근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대건인쇄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그를 만나 타케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대구와의 인연은 어떠했는지, 나아가 왕벚나무를 비롯한 '식물 주권'이 왜 중요한지를 들어 봤다. ▶앞서'에밀 타케의 선물'(2019년)·'식물십자군'(2022년)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이번엔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인데요.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해 주신다면."책을 만들면서 타케 신부의 편지글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이분이 20대 때 조선에 와서 무려 54년간 계셨어요. 선종 때까지 단 한 번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죠. '매일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이하 생략·1932년 타케 신부가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이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시(詩)나 노래 속에 담긴 그 어떤 그리움보다 더 절절한 그리움을 타케 신부가 품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아울러 그가 조선으로 오기까지 3개월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심정을 담은 선상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타케의 이런 삶을 신부의 증증 조카인 테디 또리옹(28·프랑스 고서 보관소 사서)씨가 연구해 논문으로 낸 내용 등을 엮어 이 책에 담았습니다. 자기 선조가 100년도 훨씬 전 한국에서 왕벚나무도 발견했고, 신학교 학장도 했으니…. 또리옹씨 논문은 일종의 '가문의 영광'에 대한 오마주이지요.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이런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었죠."▶타케 신부의 삶, 특히 식물 채집의 궤적을 좇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2014년, 대구 남산동 한 주민이 제보를 해 왔어요. 그분 얘기는 '타케 신부가 1920~30년쯤 천주교 대구대교구 안에 왕벚나무를 심었는데, 한때 태풍으로 죽어가던 나무를 자기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뿌려 줘 살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순간 호기심이 생겼죠. 교구청에서 수년간 근무한 제가 타케 신부 묘가 교구청 성직자 묘역에 있고, 왕벚나무도 교구청 내 고택 옆에 심어져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분과 왕벚나무의 스토리는 전혀 알지 못했죠.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타케의 삶이 한 번도 조명된 적이 없었어요. 왕벚나무 스토리에 대한 무지(無知), 심지어 교구청 왕벚나무를 일본 '사쿠라'로 치부하기까지 했으니…. 그런 뼈아픈 반성에서 '타케'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타케 신부가 왕벚나무를 대구에 심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타케 신부는 조선에 와 순회 사목을 하다 1922년 대구로 오게 됩니다. 앞서 13년간 제주도에서 펼친 식물 채집의 추억을 잊지 못해 남산동에 왕벚나무·당광나무 등을 심었던 것 같아요. 나이테를 조사해 타케 신부가 대구에 있은 연도와 비교해 보니 그가 심은 게 확실하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1964년 대구대교구청 화재로 그분과 관련된 사료가 모두 소실됐어요. 불만 안 났다면 좀 더 디테일한 스토리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제주도에 최초 감귤나무 심고한라산 왕벚나무 서식지 발견유럽 학계에 처음 보고하기도54년간 사목 활동, 고국땅 못 가""1920~30년쯤 대구대교구청 안왕벚나무 심은 얘기 전해 들어""佛 고향마을에 왕벚나무 심어타케신부 묘 모신 대구대교구와유럽인 생태 관광 연결됐으면"▶알면 알수록 타케의 삶이 흥미롭습니다. 앞선 제주도에서의 식물 채집 스토리를 짚어 주시겠습니까."타케 신부는 원래 식물학에 조예가 전혀 없었어요. 발령받아 온 제주도, 막상 먹고살 일이 없었던 거예요. 선교할 때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궁리 끝에 시작한 게 감귤 나무 심기였죠. 그게 오늘날 제주 감귤 산업의 출발점이 됐죠. 아울러 당시 세계적으로 식물 채집이 유행처럼 번졌어요. 때마침 제주도에 온 선배 신부인 포리로부터 식물 채집 노하우를 전수받았죠. 당시엔 식물 묘목(또는 씨앗)을 유럽에 보내면 돈을 벌 수 있었어요. 그 돈으로 성당 터도 사고 선교 사업에 쓴 것이죠.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서 식물을 채집해 전 세계에 보낸 것만도 2만여 종, 학명에 '타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만 해도 125종에 이릅니다. 그만큼 세계 식물학사에서 공로가 큰 분입니다."▶여전히 벚나무 원조 논쟁이 있습니다. "타케 신부가 1912년 독일 학계에 보고할 땐 우리 왕벚나무는 일본 왕벚나무인 사쿠라(소메이요시노)의 변종으로 신고됐어요. 타케가 변종으로 신고한 게 아니라 독일에서 감정을 그렇게 해버렸지 뭡니까. 앞서 1901년 일본 사쿠라가 독일 학회에 먼저 신고되는 바람에 사쿠라를 원조로 판단한 것이죠. 아직도 학명은 '프루누스 예도엔시스마쓰무라(Prunus yedoensis Matsumura)'로 돼 있습니다. 학명은 수정이 안 된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죠."▶몇 해 전 한국과 일본의 왕벚나무는 별개라는 유전체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일본에만 좋은 일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일본에 유출됐습니다. 또 그 식물 학명에 버젓이 일본 이름이 달려 있어요. 왕벚나무도 그 가운데 하나고요. 원산지는 하늘 두 쪽 나도 제주도입니다. 일본 소메이요시노는 재배종인 반면 우리 왕벚나무는 엄연한 자생종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식물학계도 소메이요시노 원산지를 물으면 '연구 중'이라는 궁색한 답만 해요."▶경주에 토종 'K-왕벚나무'를 심었다고 들었습니다. "5년 전쯤 경주 남산동에 200그루를 심었죠. 지금 제법 컸습니다. 더 심어야 합니다. 진해 벚꽃축제가 유명하잖아요. 거기 나무 100%가 일본산 소메이요시노입니다. 경주 김유신로에 있는 벚나무도 소메이요시노이고. 소메이요시노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래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이도 많이 들었으니 이젠 바꿀 때가 됐습니다. 이참에 병충해에 강하고 아름다운 토종 왕벚나무를 키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K-나무'를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식물 주권'을 지키는 길입니다."▶'K-나무' 한류(韓流)를 기대해 봄 직합니다. "이미 일본은 사쿠라를 미국 워싱턴에, 프랑스 파리에 심어 놨어요. 우리도 왕벚나무를 에밀 타케의 프랑스 고향 마을에 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제주도 상징인 돌하르방도 함께 설치해 놓으면 금상첨화고요. 우리만의 방식으로 '지구의 아름다움'에 기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아울러 대구에서도 타케 신부의 묘가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를 프랑스 등 유럽인의 생태 관광으로 연결하면 좋을 것 같아요. 타케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사실도 프랑스인에겐 흥미로운 스토리가 된다는 것이죠. 관계 당국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입니다."정 신부는 지난 30여 년간 환경·생태운동, 대안학교 운영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펼쳐 왔다. 2019년 대구가톨릭대 사회적경제대학원장을 끝으로 은퇴해 경주에서 원로사제로 지내고 있다. 그는 "원로 사제가 되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더 빠르게 살지 말고, 더 느리게 살면서 최선의 목표를 위해 내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보자'였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미션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회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는 시쳇말로 '하고집이' 신부님이다. 그 열정이 아름답다. 일흔을 앞둔 연세에도 늘 소년 같은 표정을 짓는다. 비결이 뭘까. 아마 '세상과 소통하려는 호기심'이 아닐까. 정 신부와 대화를 나누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정홍규 신부가 영남일보 편집국에서 에밀 타케 신부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 신부는 "타케 신부 스토리는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정홍규 신부가 최근 펴낸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 표지.
[자유성] 얼음물 입수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축구 국가대표 조규성(덴마크 미트윌란 )이 한겨울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장면이 소개됐다. 그는 "일주일 두 차례 건강 유지를 위해 얼음물에 입수한다"고 했다. 실제 적잖은 운동 선수들이 근육 회복 등 체력 관리를 위해 얼음물 목욕을 즐기고 있다. 이른바 '극저온 치료법'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얼음물 목욕은 지방 연소는 물론 체내 염증 감소, 면역력 강화, 운동 능력 개선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세계적 보디빌더인 크리스 범스테드도 일주일 3~4차례 아침에 일어난 뒤 얼음물 입수를 하고 있다. 그는 "얼음물에 뛰어들면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심리적 효과도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정신력 강화를 위해 얼음물 입수를 하는 운동 선수도 많았다. 과거 우리나라 프로야구단에선 우승이나 탈꼴찌를 위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동계훈련에서 얼음물 입수를 빼놓지 않았다. 한때 태평양 돌핀스를 이끈 김성근 감독의 일화는 유명하다. 1989년 오대산 전지훈련에서 선수 전원에 강제로 얼음물 입수를 시켰다. 효험을 본 것인지 같은 해 시즌, 태평양은 사상 첫 3위에 올랐다. 올해 71세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얼음물에 입수했다. 십자가 모양의 얼음물 수영장에 입수해 성호를 그으며 세 차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러시아 정교회 연례 의식에 따른 것이다. 해마다 어김없이 행해왔다. 러시아 언론에선 고령으로 종종 건강 이상설에 휩싸이는 푸틴의 건재를 과시하는 행위로 포장해 보도한다. 정교회에 따르면 얼음물 입수가 건강 도모는 물론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가 얼음물에 뛰어들면서 '전쟁을 일으킨 죄'를 생각했을까.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베켄바워
분데스리가(Bundesliga). 독일 프로축구 1부 리그를 일컫는다. 1970~80년대 일요일 낮 국내 안방극장에 분데스리가 경기가 녹화 중계된 적이 있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외국 프로축구였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프로축구의 선두주자였다. 지금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잉글랜드)를 비롯해 프리메라리가(스페인)·세리에A리그(이탈리아)도 분데스리가의 위상엔 미치지 못했다. '카이저(황제)'로 불린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한지 뮐러·파울 브라이트너·위르겐 그라보브스키·베른트 횔첸바인 등 유명 선수의 이름이 아직도 귀에 익어 있다. 그 기라성 같은 리그에 대한민국의 차범근도 뛰었으니 국내 축구팬들의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차범근은 몇 해 전 인터뷰에서 "독일에서의 선수 생활은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었다. 정말 기계처럼 뛰었다"고 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분데스리가에서 훌륭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 지금의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이 칭송을 받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겠나.분데스리가는 한때 침체를 거듭해 잉글랜드는 물론 스페인·이탈리아 리그에도 밀리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아직 옛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전통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분데스리가는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여기엔 은퇴 후 지도자·행정가로 변신한 베켄바워의 역할이 지대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베켄바워에 대한 추모 열기가 축구팬 사이에서 식지 않고 있다. 그는 생전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했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요즘 시대에 곱씹어 볼 만한 그의 명언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월요칼럼] 푸른 용의 해, '리얼 개천용'을 기대하며
'○○○군은 고되게 청소부 일을 하시며 자식을 키워온 어머님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했다. ○군의 어머니는 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군 등 3남매를 키웠다.' 1980년대 대입 학력고사(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수험생 얘기를 담은 신문 기사 중 일부다. 그랬다. 그 시절 전국 수석은 '스토리'가 있었다. 이른바 '개천용(개천에서 용 난다)'의 인간승리극이었다. '하면 된다'라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작금은 어떠한가.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대입 수능 기사 헤드라인이 사라진 지 오래다. 경상도 말로 '이바구가 안되는' 까닭이다. 가슴 뭉클한 전국 수석 스토리가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수능의 유일한 만점 학생과 표준점수 전국 1등 학생은 같은 입시학원 출신이었다. 서울 강남의 유명 재수 종합학원이다. '족집게 문제'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학원비(월 300만원)와 기숙사비(월 150만원)를 합치면 월 45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아닌 '통장에서 용 난다'임을 실감케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옛 어록이 떠오른다. 그는 "모두가 용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래놓고선 자신의 아들·딸은 특목고에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딸은 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을 필기시험 한 번 안 치르게 해서 합격시켰다. '정의주의자(正義主義者)'로 여겨져 온 그의 표리부동에 많은 젊은이가 분노했다. 문득, 그에게 묻고 싶다. 여론에 떠밀려 사과는 했지만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를. 푸른 용의 해,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펼쳐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판(版) '개천용'을 꿈꾸는 지망생이 줄을 잇는다. 개중 일부는 오랫동안 중앙에서 한자리하다 때맞춰 고향을 찾아 표심을 얻으려는 이들이다. 선거 명함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개천도 아닌데 개천이라며 서민의 환심을 사려 한다. 난센스다. 공천이 여의치 않으면 십중팔구 뒤도 안 보고 다시 돌아갈 이들일 게다. 귀감이 될만한 '개천용' 정치인도 없지 않다. 포항 출신인 김미애(부산 해운대을·국민의힘) 국회의원이다. 명문 포항여고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형편에 학업을 접고 방직공장에 취업했다. 3교대로 쉴 새 없는 가운데서도 부설학교에 다녔다. 29세 때 야간 법대에 들어가 34세 때 당당히 사법시험을 패스했다. 10년간 국선변호만 762건을 맡는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해 애써온 이력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지난달, 35년 만에 포항여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고향 포항에 대한 애정도 남다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정치가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한 예라 하겠다.모든 '개천용'을 신뢰하진 않는다. 체득해 온 경험칙이 있지 않은가. '개천용'이 되고 나면 '딴 사람'으로 돌변한 이들 말이다. 강준만 교수는 과거 저서에서 "개천용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개천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데 앞장서 왔다"고까지 일갈했다. 일견 공감이 간다. 막대기만 꽂아도 된다는 대구·경북 총선, 그 오명에서 벗어나려면 '스토리'가 넘쳐나야 한다. '인간극장'급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역과의 신뢰·의리를 지켜나갈 품성을 갖춘 '리얼(real) 개천용'이 나와야 한다. 선거가 빛이 나고 축제로 승화하는 길이다. 우리 유권자가 '옥석'을 가릴 눈을 키워야 할 때다. 이창호 논설위원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아날로그' 일본
과거 취재차 일본에 들렀을 때다. 첨단 경제대국의 일본인들이 카드보다 현금을 애용하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신칸센 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승객 상당수는 현금으로 열차표를 구입하고 있었다. 받은 현금을 절도있게 세는 역무원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가이드 얘기로는 요금 수납원 중엔 명문 도쿄대 출신도 있다고 한다. 그 일부는 지폐와 동전을 세는 데 매력을 느껴 역무원 직업을 택한 '오타쿠(특정 취미에 빠진 사람)'라고 한다.한국에선 사라지고 있는 도장(圖章)도 일본에선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관공서·기업에선 아직도 본인 확인 때 전자서명 대신 서류에 직접 도장을 찍어 제출한다. '날인(捺印)이 돼 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예의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립 초·중학교에서 아직도 팩스를 사용하는 곳이 95.9%에 이르렀다. 교육당국이 비효율성을 이유로 2025년엔 모든 학교에서 팩스와 도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왜 이토록 '아날로그'를 고집할까. 일본인 특유의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 정서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금 선호의 경우 지진 등 잦은 자연재해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날로그 문화와 관련해 현지에선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근데 바쁘고 삭막한 디지털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게 그리 반성해야 할 일인가. 외려 그런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지진 피해를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일본을 지탱해 온 저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낙서 古今
옛 초중고 시절 학교 화장실은 으레 낙서(落書)로 도배됐다. 음담(淫談)·음화(淫畵)는 물론, 담임교사에 대한 뒷담화까지. 소사(小使) 아저씨가 낙서를 지우면 며칠도 안 돼 또 다른 낙서가 등장했다. 권위주의적 교육 풍토에 억눌린 욕구의 분출이었으리라. 그래서 학교 화장실은 학생들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작금 직장의 엄숙한 회의 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종이에 낙서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상사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낙서질은 고금(古今)에 걸쳐 밀폐된 곳이나 공개된 곳을 가리지 않고 행해져 온 인류의 습관이다. 심리전문가들은 인간의 낙서를 본능에 가까운 행위로도 보고 있다.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도 낙서가 발견됐었다. 피라미드 돌을 날랐던 인부들의 솔직한 얘기가 담겨 있다. '일은 혹사당하는데, 임금은 쥐꼬리' '공사 조장과 다퉈서 속상하다' '어제 과음으로 땡땡이쳤다'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고대인의 소소한 일상이 흥미롭다. 피라미드 낙서 중엔 이곳을 여행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것도 있고, 수에즈 운하를 완성한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것도 있다. 문화재 낙서 행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청나라로 떠난 조선의 사신들이 현지 유물에 낙서를 해 국가적 망신을 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최근 서울 경복궁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이들이 처벌을 받게 됐다. 범행을 사주한 자가 10대 낙서범에게 "월 1천만원을 줄 수 있다"며 취업 제안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누구든 정 낙서를 하고 싶으면 개인 물건에 하라.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셀럽의 군 입대
군사대국 미국에선 과거 징병제(徵兵制·현재는 폐지)가 있었다. 독립전쟁 때부터 남북전쟁, 제 1·2차 세계대전을 거쳐 1973년까지 실시됐다. 전쟁이 끝난 뒤엔 모병제로 바뀌었다가 다시 전쟁이 나면 부활하곤 했다. 전쟁의 변곡점에선 '셀럽(문화·스포츠계 유명 스타)'의 군 입대가 애국심 고취에 한몫을 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타격왕 테드 윌리엄스(1918~2002·보스턴 레드삭스)는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도 군대 밥을 먹었다. 1958년 육군에 입대한 그는 다른 병사와 똑같이 군사교육을 받고 기갑병으로 복무했다. 입대 초 군 윗선으로부터 '문선대(문화선전대)' 보직을 제의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우리나라 셀럽들의 군 입대도 뉴스를 몰고 다녔다. 가수 남진은 1969년 해병 2여단 청룡부대 용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3년간 복무를 마친 뒤 귀국해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호를 얻으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라이벌 나훈아는 1973년 공군에 입대해 군악병으로 일했다. 그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신병교육대로 떠나자 열성 팬들은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기도 했다.글로벌 K팝 그룹 '방탄소년단'의 지민과 정국이 최근 육군 현역으로 입대함에 따라 멤버 7명 전원이 병역 의무를 이행 중이다. 정국은 입대 전 "군대는 남자라면 당연히 갔다 와야 한다"고 했다. 2025년 6월이면 그들 모두 병역 의무를 마치게 된다. 다시 완전체가 되는 날, 그들의 음악이 또 어떤 감동을 전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오렌지 카드
'오해(誤解)는 인생의 일부요, 오심(誤審)은 경기의 일부다.' 당하는 쪽에선 분하겠지만 뭐 어쩌겠나, 때론 세상사 너그럽게 보아 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평정심(平靜心)을 갖기란 쉽지 않다. 축구 예다. 대한민국은 32년 만에 본선에 오른 멕시코 월드컵(1986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자주 우리의 발목을 잡은 나라는 이스라엘(지금은 유럽축구연맹 소속)이었다. 1977년 텔아비브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한국 대(對) 이스라엘전은 오심의 레전드로 전해진다. 한국이 눈 뜨고 코 베였다. 차범근의 절묘한 크로스를 김진국이 받아 다이렉트 슛을 시전했다. 공은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명백한 골인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주심의 최종 선언은 '노골'. 이튿날 이스라엘 신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골이었으나 심판이 외면했다'고 썼다.축구 심판도 사람이기에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번의 결정적 오심이 해당 선수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옐로 카드만 해도 충분한 걸 오심에 의해 레드 카드 판정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나.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최근 옐로 카드와 레드 카드의 중간 징계인 이른바 '오렌지 카드'를 이르면 24~25시즌부터 EPL 등에서 시범 운영하기로 했다. 핸드볼·아이스하키와 같은 '일시 퇴장' 제도다. 옐로 카드를 가볍게 여겨 의도적 반칙을 일삼는 행위를 막기 위함이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만큼 축구 심판들이 '오심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월요칼럼] 장관의 셀카 서비스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 선수의 '팬 서비스'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전력 질주' 사건은 아직도 회자된다. 과거 LA 다저스 시절 때다. 기다리던 팬들을 외면한 채 눈썹이 휘날리게 달아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동료 투수 커쇼가 일일이 사인을 해주는 모습과 대비됐으니 팬들의 실망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로선 다소 억울한 구석이 있었다. 실내 훈련에 늦어 사인을 해줄 시간이 없었단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뭇매를 맞을 만했다. 그는 "상처받은 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이승엽 감독(두산 베어스)도 한동안 구설에 올랐다. 선수 시절 "사인을 많이 하다 보면 희소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해 된통 욕을 먹었다. 훗날 그는 "팬들과의 스킨십에 더 노력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사인 희소성' 발언은 오랫동안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어디 프로 스포츠 선수들뿐이랴.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선거 땐 유권자에게 감언(甘言)을 쏟아낸다. 되고 나면 180도 바뀐다. 안중에 유권자는 없다. 공천장을 쥐어줄 권력자만 있다. 유권자를 하늘처럼 받들겠다던 선거 때 다짐은 온데간데없다. 시쳇말로 '개나 줘버려라'는 식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 대구경북 국회의원의 '유권자 무시'는 정평이 났다. 막대기만 꽂아도 금배지를 달았으니 오죽했겠는가. 지지자는 물론 지역구 사무실 관계자의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지역구에 잘 내려 오지도 않았고, 주변 지인에게 대충 관리를 맡길 정도로 무관심했다. 유권자 서비스가 '빵점'이었던 시절이다. 프로 스포츠 선수는 팬 고마운 줄을, 정치인은 유권자 귀한 줄을 알아야 한다.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팬에겐 응당 감사 표현을 해야 하고, 자신을 다급하게 찾는 유권자에겐 진심을 다해 사정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시간과 돈을 들여 경기장을 찾은 팬을 향한, 자신을 믿고 뽑아준 유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오랜 세월 구단(선수)이 보여준 팬들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과 성적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응원해 준 팬심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결과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대구에서 보여준 이른바 '셀카(셀프카메라) 서비스'가 인구에 회자됐다. 한 장관은 "기다리는 시민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며 예매한 기차표를 취소하고 시민들과 3시간이나 사진 촬영을 했다. 한 장관을 보니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가 오버랩된다. 그는 내한 때마다 과하다 싶을 만큼 팬 서비스에 열성이다. 팬들에겐 항상 "You completed me(여러분이 나를 완성했다)"고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다. 한 장관의 '셀카 서비스'를 놓고 곱지 않은 시각이 있다. '무슨 연예인 팬 미팅이냐'는 비판이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직자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경고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있을까. 국민 소중한 줄 모르고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정치인을 무수히 목도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한 장관이 보여주는 탈권위주의적 자세는 신선하고 따뜻하다. 자동차 문 열어주는 의전 없애고 우산도 직접 들고 다니는, 무례한 국회의원엔 거침없이 할 말 하고 국민에겐 없는 시간도 만들어 셀카 찍어주는 모습 말이다. 정치적 속내를 차치하고 그의 '국민 프렌들리 마인드'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다.이창호 논설위원 이창호 논설위원
[논설위원의 직터뷰] 서원만 화가 "성당 스케치화가 사회에 온기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하기 전만 해도 그와 일면식이 있는 줄 몰랐다. 수소문 끝에 만난 인터뷰이는 대구에서 활동 중인 중견 서양화가 서원만(63·대건인쇄출판사 대표)씨다. 보자마자 낯이 익었다. 30여 년 전 문화부 기자 초년병 때였다. 대중음악을 맡아 대구 동아문화센터를 출입했다. 당시 문화센터에 있던 그와는 몇 차례 눈인사만 나눈 게 전부였다. 기자의 취재원은 아니었다. 그가 문화센터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있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알게 됐다. 아무튼 서로는 얼굴을 기억했다. 반가운 해후다. 서 화백은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천주교대구대교구 주간 소식지인 '대구주보' 표지에 성당 스케치화를 연재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나자고 했다. 붓 잡은 지 37년째…개인전도 13차례젊은 시절 큐레이터로 미술관 5곳 총괄신문 삽화 연재까지 눈코뜰새 없는 시간신부님 제의에 信者 사명감으로 시작천주교대구대교구 '대구주보' 표지에2021년부터 매주 성당 스케치화 연재매달 네 작품 함께 그리며 밤샘 일쑤내년 2월 대구경북 183곳 모습 '대미'이후엔 공소순례하며 모두 담을 계획▶주관적 느낌을 토해낸다는 추상화가가 팩트가 생명인 풍경 스케치화에 빠져 있습니다. "얼핏 별개처럼 보여도 추상화와 스케치화는 밀접한 관계이지요. 다양한 풍경에서 받은 색의 느낌이나 빛, 선(線)을 추상화에 녹여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스케치화를 그릴 때 여러 색과 빛, 소리를 접하잖아요. 그 재료들,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뜻이죠. 10년 전쯤인가, 누가 제 스케치화를 보더니만 '스케치화에 승부를 걸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순간 '이거다' 했죠. 작품을 모았죠. 내친김에 첫 채색 스케치화전을 열었습니다.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작품도 잘 팔렸고요. 그 뒤론 작품 가격도 좀 낮췄습니다. '화가 서원만'을 좀 더 널리 알릴 요량이었죠."▶스케치화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다른 어느 그림보다 감상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죠. 소통(공감대 형성)이 빠르다는 게 스케치화의 가장 큰 힘인 것 같아요."▶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성당 스케치화'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고요. 서 화백의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어쩌다 그리게 됐는지. "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있는 최성준 신부님이 제의해 주셨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예전부터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온 터였죠. 두말 않고 시작했습니다. 2021년 1월1일부터 매주 연재해 오고 있죠. 내년 2월이면 대구경북지역 성당 183곳을 모두 그리게 됩니다. 이젠 사명감까지 들어요. 가톨릭사를 넘어 대구경북 역사에도 오래도록 남겨질 그림을 그린다는…."▶성당 스케치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요. "신자는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편안한 마음'을 안겨주려 합니다. '인생의 쉼터'와 같은 느낌을 선물하고 싶은…. 그렇다고 과장하지는 않아요. 스케치화의 생명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되 감동을 전하는 것 아니겠어요."▶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성당 그림을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성당 스케치화는 사진을 토대로 그립니다. 사진을 최대한 많이 수집해야 해요. 해당 성당의 히스토리도 숙지해야 하고, 성당에 대한 사제·신자들의 생각도 미리 파악해 놓고요. 한 성당을 그리는 데 최소 한 달가량 걸립니다. 사실 그림 채색은 어렵지 않아요. 어떤 느낌을 담아내야 할지가 늘 고민이죠. 사진과 그림은 엄연히 다른데, 사진 속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뽑아내는 일,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을 제 동선(動線) 가까이에 놓아둡니다. 일주일 정도 뚫어지게 쳐다봐요. 밥 먹다가도, 화장실 볼일 보러 가다가도. 스스로 '오케이'라는 판단이 들 때까지 째려 봅니다. 그러고 나서 볼펜으로 다시 스케치합니다. 채색한 뒤에도 또 1~2주는 그림과 '신경전'을 벌여야 해요.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최종 영감이 떠오릅니다. 매주 연재를 위해선 한 달에 네 작품을 함께 그려야 해요. 다른 화가도 마찬가지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찢어 버립니다. 밤샘 작업도 일쑤이고요." ▶가장 인상에 남는 성당 풍경을 꼽으라면."단연코 칠곡 가실성당이지요. 지어진 지 128년 된 곳입니다. 여름이면 성당을 휘감는 울창한 숲이 끝내줘요.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 성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잖습니까. 그런 추억을 안겨다 주는 성당이랄까요. 어머니 품과도 같은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이 성당은 '대한민국 3대 아름다운 성당'에 포함돼 있기도 해요."▶성당 말고 사찰 등 다른 풍경 스케치화는 그리지 않나요."뜻맞는 미술 친구들과 함께 종종 스케치 여행을 떠납니다. 동화사·파계사 등 명승지 절도 자주 들릅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사찰 본전도 그리고 주변 숲도 그리지요. 훗날 대구경북 사찰 순례 스케치화에도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서 화백은 영남대 미대에서 공부했다. 붓을 잡은 지 올해로 37년째다. 199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3차례 열었다. 지난 7~8월엔 '서원만 스케치 이야기' 전을 열었다. 해외 전시회 50여 차례, 국내 그룹전만도 3천여 차례 출품했다. 지난해엔 '아름다운 대구 스케치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대구가톨릭미술가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추상미술 동인 단체인 신조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모친이 이화여대 미대를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 영향을 많이 받았겠습니다. "DNA야 확실히 물려받았겠죠. 근데 제가 미술하는 걸 제일 말린 분이 어머니였죠. 집안 웃대 어른 가운데 화가가 계셨는데, 재산 다 털어먹고 마흔도 안 돼 요절하셨대요. 비극적인 가족사 때문에 반대한 것이죠. 어릴 때 용돈을 모아 물감·스케치북을 몰래 사서 숨겨 놨어요. 근데 모친이 용케도 찾아내 변소 통에 버렸지 뭡니까.(웃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잖아요. 결국 사고(미대 입학)를 치자 별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아버지가 출장 다녀오는 길에 물감을 사다 주셨어요. 이왕 미대 들어간 거 성공하라는 뜻이었겠죠."▶1990년대 영남일보 등 지역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고요."동아문화센터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있을 때죠. 자그마치 5곳의 미술관 업무를 총괄했어요. 거기에다 신문 연재 소설 삽화까지 그렸으니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그땐 e메일도 없던 시절이었죠. 매일 식전 댓바람부터 신문사에 들러 삽화를 마감하느라 혼을 뺐어요.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땐 신문 삽화 마감 시간, 지금은 성당 스케치화 마감 시간과의 싸움이네요. '마감'은 제 인생에서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님도 늘 겪겠지만 '마감 스트레스' 솔직히 울고 싶어요.(웃음)"▶성당 스케치화 연재를 마치고 난 뒤엔."공소(公所)라는 게 있어요. 본당보다는 작은,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이죠. 에너지를 충전한 뒤 공소를 순례하며 그려볼 생각입니다. 그러면 대구경북지역 천주교 관련 건물을 모두 기록하게 되는 셈이죠."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성당 스케치화 작품이 사회에 온기를 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전시회 등을 통해서 말이죠. 아울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 성당을 위해서도 쓰이면 좋겠어요. 저작권은 제게 있지만, 성당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공익적 활용을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서원만 화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성당 스케치화'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 성당을 그리는 데 한 달가량 공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박지현기자 lozpjh@yeongnam.com
[자유성] JFK
1992년 5월 개봉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 당시 영화 담당 기자로 대구시내 개봉관에서 본 기억이 있다. 2시간50분의 러닝타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흥미진진했다. 당초 같은 해 3월 개봉 예정이었지만 연기됐었다. 이와 관련해 '정치적 외압'이 있었다는 미확인 루머도 나돌았다.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한 정보기관에 의해 제지됐다는 설이다. 그만큼 'JFK'는 민감한 주제를 다뤘다. 존 F 케네디 제 35대 미국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그렸다. 영화는 시종일관 케네디 암살 배후를 쫓는다. 실제, 사건 직후 리 하비 오즈월드를 붙잡은 것 외엔 뭐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었다. 오즈월드 또한 잭 루비에 의해 살해됐다. 영화 속 주인공인 뉴올리언스 지방검사 짐 개리슨(케빈 코스트너 분)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직감하고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개리슨은 "케네디 죽음의 이면에 거대한 커넥션(방산기업·정보기관)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치밀한 계획 살인이라는 것이다.지난 22일은 케네디 암살 60주년이 된 날이었다. 케네디에 대한 미국인의 정서는 여전히 애틋하고 절절하다. 사건의 진실에 대한 관심도 꺼지지 않고 있다. '오즈월드 단독 범행'에 수긍하는 미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케네디가(家)는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정치 명문가다. 이런 가운데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총격 피살) 전 상원의원의 아들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내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주목받고 있다. 그가 바이든과 트럼프의 호적수로 부상할지, 나아가 비명에 간 삼촌과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어려우니까 도전한다"
제 35대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1917~1963)에겐 '열등감'이 하나 있었다. 숙명의 라이벌 소련이 '우주 탐사'에서 번번이 앞섰던 일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했다. 1961년엔 인류 첫 유인 우주선인 보스토크 1호가 우주 비행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다. 우주선에 탔던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본 뒤 "지구는 푸른색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미국을 향한 무력시위와 다름없었다. 더욱이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한 해였으니 미국으로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는 속이 타들어 갔다. 더 이상 구경꾼만 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1962년 9월12일. 케네디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라이스대학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문샷 스피치(Moonshot speech)'로 통하는 달 탐사 계획 발표였다. 연단에 오른 케네디는 두 주먹을 쥐고 열변을 토했다. "우린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7년 후, 미국은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를 '고요의 바다(달 표면)'에 내려 앉혔다. 우주 강국 소련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순간이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최근 "대구에서 이준석·유승민 바람은 전혀 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는 "말씀이 정확하다. 어려운 도전"이라면서도 "어려워서 도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어려우니까 도전하겠다"고 답했다. 케네디 연설 워딩이 오버랩된다. 내년 총선에서 바람이 불지 안 불지는 지켜 볼 일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자유성] 훌리거니즘
'축구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영국에선 과거 한때 '축구는 속물'이라는 폄훼가 있었다. 마거릿 대처(1925~2013) 총리는 축구라면 질색을 했다. 축구를 사회적 병폐, 축구 팬을 벌레처럼 여겼다. '훌리거니즘(Hooliganism·축구장 안팎에서 훌리건들이 벌이는 집단적 폭력 행위)'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1982)을 핑계로 "월드컵 참가를 재고하면 좋겠다"고까지 했을까. 기회만 되면 훌리건을 손보려 했다. 마침내 구실을 찾았다. 영국 축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힐스보로 참사'(1989)였다. 리버풀 대(對) 노팅엄 포레스트전이 열린 힐스보로 축구장에서 94명의 관중이 깔려 숨진 것. 명백한 인재(人災)인데도 정부가 훌리건 탓으로 몰고가 국민적 저항을 사기도 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영국에선 훌리거니즘이 다소 숙졌지만 아직까지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훌리건(Hooligan)이란 말은 19세기 말 런던에 있었던 아일랜드인 폭력배 '패트릭 훌리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에서도 훌리건은 여전히 골칫덩이다. 잊힐 만하면 사고를 친다. 지난달 30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축구 훌리건 난동이 있었다. 원정팀 리옹이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훌리건들은 리옹 팀 버스에 돌과 맥주병을 마구 던졌다. 경기는 취소됐고, 파비오 그로소 리옹 감독은 큰 부상을 입었다. 그로소 감독은 "자칫 비극이 될 수도 있었다.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되길 바란다"며 일단 훌리건들을 용서했다. 이런 대인배(大人輩)가 또 있을까.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그는 관용의 언어로 응수했다. 이창호 논설위원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경북대 '내년도 의대 모집정원' 학칙개정안, 법제심의위·학장회의 통과
"더 미루기 힘들어"…계명대·영남대 의대, 13일부터 임상실습 수업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원숭이띠 5월 8일 ( 음 4월 1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