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경주APEC 만찬 건배주는 무엇일지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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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2-17  |  수정 2025-02-17 08:50  |  발행일 2025-02-17 제23면

[월요칼럼] 경주APEC 만찬 건배주는 무엇일지
이창호 경북본사 본부장

남미의 페루와 칠레는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접해 있다. 이웃사촌은 언감생심, 오랜 앙숙지간이다. 우리로 치면 일본과의 '가깝고도 먼 이웃'쯤 된다.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두 나라는 지하 자원을 둘러싼 무력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페루는 잉카제국의 적통임을 자부해 왔다. 반면 칠레는 백인이 주를 이룬다. 페루는 그런 칠레를 우리 경상도 말로 '알로 봤다'. 양국은 사사건건 자존심 싸움이다. 개중 재밌는 건 두 나라의 국민주(酒)인 '피스코(Pisco·포도즙을 증류해 만드는 일종의 브랜디)'를 둘러싼 원조 논쟁이다. 과거 칠레가 '피스코의 날'이란 걸 제정했다. 그러자 페루는 "가당치도 않다"며 발끈했다. 서로 문헌 기록을 들이밀며 자국이 원산지라고 맞섰다. 페루는 2008년 제16차 리마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에게 피스코로 만든 칵테일을 대접했다. 피스코의 원산지가 페루임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APEC을 비롯한 국제회의에서 내놓는 만찬주(건배주·후식주)는 단순히 목을 축이기 위한 음료가 아니다. 개최국의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감초 같은 존재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땐 전통주인 '천년약속'이 공식 만찬 건배주로 쓰였다. 상황버섯을 발효해 만든 술이다. 누룩이나 효모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독특한 제조 방식이 각국 정상의 관심을 모았다.

나라마다 시그니처 만찬주가 있다. 프랑스에선 자국을 찾는 귀빈에게 '돔 페리뇽'과 같은 고급 샴페인을 대접한다. 일본에선 준마이(쌀로만 만든 술) 다이긴죠(50% 이하 정미율)급 프리미엄 '사케'를 쓴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마오타이주'를 국빈 환영회 때 내놓곤 했다. 1972년 미·중 정상 만찬 때도 마오쩌둥은 마오타이주로 닉슨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오는 가을이면 대한민국 경북의 술도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다. 경주 APEC 정상회의 식탁에 오를 만찬주가 각국 정상과 글로벌 CEO들의 눈과 혀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경북도는 경주지역 전통주를 중심으로 추천 목록을 짜고 있다. 특히 건배주는 순한 술(알코올 농도 12~14%)이어야 한다. 경북의 '얼굴 술'격인 안동소주는 알코올 도수 문제로 건배주엔 맞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경주 APEC에서 '술 걱정'은 마시라. 경북엔 고장마다 세계 어느나라 술에도 꿇리지 않는 명주(銘酒)가 즐비하다. 경주의 교동법주를 비롯해 안동소주(안동)·과하주(김천)·감와인(청도)·사과와인(의성)·오미자 막걸리(문경)·초화주(영양)·대추 술(경산)…. 얼추 떠오르는 것만도 이 정도다 . 손으로 꼽기도 힘들다. 조금 오버해 눈감고 골라도 만찬주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게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경북 전통주의 세계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몇 해 전 위스키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에서 안동소주 시음회를 열어 찬사를 받기도 했다. 최근 페이스북 눈팅을 하다 배성훈 경북도자치경찰위원회 사무국장이 올린 경북 전통주 홍보 영상(경북도 유튜브 채널 보이소 TV)을 접했다. 영상 속 '한 잔의 술(sool)이 아니라 소울(soul)'이라는 자막이 가슴을 울렸다. 오는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소개될 술도 '경북의 정신'을 알릴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에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말이 있다. 이는 소통과 나눔의 공동체 정신을 뜻한다. 경북의 술이 APEC에서 그 촉매가 될 것이다.
이창호 경북본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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