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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6 끝] 대구 도동서원(下)...정몽주 이후 끊어진 '의리'의 학문 계승, 김굉필의 정신 고스란히
김굉필은 동방오현(東方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다. 그는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 말 삼은(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었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사림파는 성리학의 도덕적 명분론에 입각해 훈구대신들과 대립했는데, 훈구세력이 정치적 보복으로 일으킨 사건이 사화(士禍)다. 사림파는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으킨 무오사화, 1504년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사건을 구실로 일으킨 갑자사화로 큰 재앙을 입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는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그때 아버지의 벼슬길에 따라온 조광조를 제자로 맞아 학문을 전수했다. 다시 순천으로 옮겨져 유배생활을 하던 중 갑자사화 때 무참히 처형당했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고 1610년 문묘에 배향됐다.김굉필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시문 중심의 학문을 버리고, 정몽주 이후에 끊어진 의리의 학문을 다시 열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의리 학문은 '소학(小學)' 공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스로를 '소학동자'로 자처한 그의 공적은 후학들에게 성현의 학문을 가르치며 일상생활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도학으로 숭상한 점이다.'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받는 김굉필은 어떤 인물일까.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도동서원' 편액 글씨를 쓴 배대유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김굉필 제사를 위해 지은 제문과 김굉필의 제자 이적이 지은 김굉필 행장이다.◆도동서원 제문(祭文)<만력 경술(1610년)에 도사(都事) 배대유(裵大維)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제사를 봉행했을 때의 제문>우리 선생이 동쪽 나라에서 일어났도다. 천품이 본시 굳세고 바르며, 덕은 순수하고 온후했다. 일찍이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발 디딜 곳을 정했으며, 정(精)하게 연구하며 힘써 실천했고, 검소함을 지키어 잡되지 않았다. 충신(忠信)은 건(乾)이요, 경의(敬義)는 곤(坤)이었다. 참다운 성(誠)을 이미 쌓았으며, 시일이 오랠수록 더 철저했다.없어진 학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용기를 내어, 멀리 복희씨(伏羲氏)와 헌원씨(軒轅氏)로부터 노추(魯趨)의 큰 교훈과 염락(濂洛)의 미묘한 학설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동떨어지고 지역이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직접 대면하며 강론을 들은 듯했다. 의리(義理)의 실상이며 성명(性命)의 근원이 흩어지면 만 가지로 다른 형태가 되는데, 이것을 한 근원으로 모아 큰 근본의 공부를 이루고 번잡한 지엽을 잘라 버렸다. 맥락이 분명하니 바로 옛 성현의 연원(淵源)을 이었다. 다른 학설을 힘써 배격해 발붙일 곳을 끊어버렸다. 후학을 인도해 방향을 지시하는 지남철이 되었고, 어두운 거리의 촛불이 되었다. 교육하기를 즐겨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훌륭한 인재가 문하에 가득했다. 제창하여 도를 밝히고 바로잡아 세웠으니, 높은 공과 두터운 은혜였다. 도가 동방으로 찾아왔으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위대한 이름이 전하는 곳에 산이 닳고 바다가 뒤집히도록 영원할 것이다. 대니산은 드높고 낙동강은 철철 흐른다. 그 가운데 깨끗한 집이 있으니 사당의 모습 우뚝하다. 우러러보며 공경하는 마음 일으키니 정령(精靈)이 계신 듯하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높이니 은총이 자주 내렸다. 서원의 사액(賜額)이 거듭 내려 유림에 광채가 빛나는구나.좋은 날을 가려 영령(英靈)을 봉안하니 선비들이 달려서 모여들었다. 아름다운 명령이 대궐에서 내리니, 깨끗한 제물은 제기에 놓여있고 맑은 술은 병에 있네. 한결같은 정성이 매우 전일(專一)하여 밝기가 아침 햇빛 같도다. 길이 편안하여 끝이 없으소서. 해마다 제물을 드리오리다.◆김굉필 행장 <문인(門人) 이적(李積)이 지은 글>우리나라 기자(箕子) 때부터 비로소 문자가 있었고, 삼국과 고려를 지나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찬란했으나 도학(道學)에 대하여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도학을 처음으로 제창한 분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공의 이름은 굉필이요, 자는 대유(大猷)이며, 본관은 서흥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어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크게 분발하여 문장가에 대한 공부에 힘썼다. 소학(小學)을 읽다가 깨닫고 시를 짓기를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라고 하니, 점필재가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근기(根基)다.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또 없으랴' 하였다. 공은 개연(慨然)히 성현의 취지와 다른 여러 학자의 학설을 배척하고, 날마다 소학과 대학을 읽어 이로써 규모(規模)로 삼았다. 육경을 탐구하고 성(誠)과 경(敬)을 힘써 주장해 존양(存養)하고 성찰함으로써 체(體)를 삼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써 용(用)을 삼아 대성(大聖)의 경계에 이를 것을 목표로 삼았다.평상시에 첫닭이 울면 반드시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며, 먼저 가묘(家廟)에 절했다. 다음에 어버이께 문안드리고, 서재에 가서 꿇어앉아 있기를 소상(塑像)처럼 하였다.배우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을 강론함에 있어서, 어린 사람에게는 기초적인 공부를 말해 주고,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심오한 의리(義理)를 말해 차근차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어버이에게 잠자리 보아 드리기를 예절대로 하고, 학문을 강론하여 밤이 깊을 때까지 이르렀다. 30여 년 동안이나 정밀히 한 공부가 쌓이고 힘써 실천함이 오래니, 학식이 넓으면서도 거칠지 않으며, 정통하면서도 흐르지 않고, 견확(堅確)하고 독실하여 오히려 미처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정미년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해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모두 가례대로 행하여 효성이 지극하니 향리가 감화하였다.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고, 또 추천되어 특별히 군자감 주부(主簿)로 발탁되었다. 사헌부 감찰에 전임(轉任)되어 형옥(刑獄)을 판결하면서 모든 것을 성의껏 처리하니 모두 공정함에 감복했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니 공이 점필재의 문하에 다녔다 하여 죄로 몰아 희천으로 귀양 보냈다가 조금 후에 순천으로 옮겼다. 이때 화기(禍機)가 급박했으나 이에 대처하기를 태연히 하여 평소의 지조를 변하지 않았다. 갑자년에 이르러 사화가 다시 일어나서 10월 초하루에 귀양 간 곳에서 화를 당하니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아아! 공의 학문이 오랫동안 전하지 못하던 학문을 얻어서 뚜렷이 홀로 섰다. 한 시대의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높이 우러러보았으며, 문하에 직접 다니지 못하고도 사숙(私淑)하며 선인(善人)이 된 사람도 또한 많았으니 그의 베푼 바가 널리 미치었다. 병인년에 나라가 바로잡혀 예(例)에 의해 통정대부승지를 증직(贈職)하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도동서원 사당.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서원 사당은 이 사당처럼 당호가 따로 없는 경우도 많다.서원 사당 내 벽화 2점 중 하나인 '설로장송(雪路長松)'.
2021.04.19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5] 대구 도동서원(上)...입구 400살 은행나무부터, 삐뚤빼뚤 기단석까지 '색다른 멋' 가득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도동서원은 1568년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처음 건립되었고,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5년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강(寒岡) 정구(1543∼1620)다.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3년 후인 1610년에 김굉필의 위판을 본안하고 서책과 전답, 노비 등을 하사받아 원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678년에 정구가 배향되었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김굉필에 의해 '공자의 도,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고,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갖추어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갖추고 있는 대표적 서원이다.김굉필 문집인 '경현록(景賢錄)' 중 보로동서원 건립 관련 내용이다.'현풍 오설리 보로동(甫老洞) 선생의 무덤 곁에 있다. 처음에 융경(隆慶) 무진(戊辰:1568)년에 현풍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해 읍내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 정당(正堂)은 중정(中正)이고, 좌실은 동익(東翼)이요, 우실은 서익이다. 동재는 거인(居仁)이라 하고, 서재는 거의(居義)라 했다. 또 구용료(九容寮), 구사료(九思寮), 사물료(四勿寮), 삼성료(三省寮)가 있다. 또 양정재(養正齋)가 있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문은 환주(喚主)라 했다. 시내 위에다 정자를 지어 명칭을 조한(照寒)이라 하려고 했으니, 선생의 '지호명월조고한(只呼明月照孤寒)'이란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앞으로 두 시내가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르는 까닭에 명칭을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하고, 사실을 갖추어서 위에 아뢰니 액호(額號)가 내리고 서적도 내렸다. 그 후 임진년 병화(兵火)에 불타 버렸다.을사(乙巳:1605)년에 다시 중수했다. 옛터는 인가들이 곁에 가까이 있고 장터가 있어서 시끄러운 까닭에 공부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또 선생의 발자취가 평소에 미치지 않았던 곳이어서 거기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연고(緣故)가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곳에 옮겨지었다. 지금 먼저 사우(祠宇)를 세우고 재당(齋堂)과 주방, 창고 등은 미처 세우지 못했다.'◆보물로 지정된 중정당·사당·담장서원에 가면 입구 아래 400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김굉필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은행나무를 지나 서원으로 올라가면 입구에 누문인 수월루(水月樓)가 보인다. 주자(朱子)의 시 구절인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에서 가져온 것이다. 수월루를 지나면 사모지붕(추녀마루가 지붕 가운데로 몰려 네모뿔 모양으로 된 지붕)의 환주문(喚主門)이 나오고, 일직선상으로 강당인 중정당이 마주 보인다. 서원 정문으로 좁고 낮은 이 환주문의 '환주(喚主)'는 '내 마음의 주인공(主)이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의미다.도동서원에는 눈길을 끄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인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방 앞쪽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이 중정당에 '도동서원' 편액이 두 개 걸려 있다. 앞쪽 처마에는 이황 글씨를 집자한 '도동서원'이, 마루 위 뒤쪽 벽면에는 당대 명필이자 경상도 도사(都事)였던 배대유가 1607년에 글씨를 쓴 사액편액 '도동서원'이 걸려 있다. 중정당의 기둥을 부면 상부에 흰 창호지를 발라 놓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도동서원이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 받는 김굉필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서원 중 수위(首位) 서원임을 나타낸다고 한다.중정단의 기단에 특히 볼거리가 많다. 높은 기단의 기단석을 보면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이다. 모양이나 크기, 색깔, 돌의 재질 등이 다 다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더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원을 지을 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선비들에게 알려 저마다 쓸 만한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다듬어 쌓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석조 기단에는 여의주나 물고기를 문 용머리 4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석축 양쪽에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이 배치돼 있다. 한쪽에는 올라가는 모습으로, 다른 쪽엔 내려가는 모습으로 꽃 한 송이와 함께 조각했다. 동쪽 계단으로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올 것을 안내하고 있는 표식이다.뒤편의 사당에는 중앙에 김굉필의 위패, 동쪽에 정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내부의 양 측면 벽에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와 '설로장송(雪路長松)'의 벽화가 있어 눈길을 끈다. 도동서원의 아름다운 담장도 특별하다. 서원의 각 공간은 외곽을 감싸는 담장을 통해 구분되며, 담장에 설치된 문을 통해 연결된다. 담장은 와편 담장과 토석 담장 두 가지 형태다. 와편 담장은 진흙과 기와를 한 겹씩 쌓아 올린 것으로, 음양의 조화와 장식 효과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암막새와 수막새를 사용했다.도동서원의 중정당·사당·담장은 1963년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제례를 위한 특별 장치들도동서원에는 제향(祭享)을 비롯한 예법을 위한 건축적 장치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구가 영남학파 최고 예학자였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수월루 앞의 계단을 비롯해 환주문 앞의 계단, 환주문과 강당 사이에 놓인 좁고 긴 포장로, 사당 입구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등 이 모두가 아주 정성스럽게 가공된 석재로 만들어지고, 폭이 모두 65~70㎝ 로 매우 좁다. 위계질서가 철저한 예법을 일상적 이동에도 적용되도록 한 것이다. 가장 원로가 앞에 서고 서열에 따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좁은 통로와 계단을 따라 일렬로 오르도록 계획한 장치다. 사당 아래 마당에 있는, 정사각형 판석인 생단(牲壇)도 눈길을 끈다. '생(牲)'이란 제수로 쓰는 소나 돼지·염소 같은 짐승을 말한다. 생단은 제사 전날 이곳에 생을 놀려놓고 제관들이 품질을 검사하는 곳이다. 강당 앞 중앙에는 정료대(庭寮臺)가 서 있다. 긴 돌기둥 위에 사각형 상석을 설치한 구조다.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밤에 불을 밝히는 장치다. 야간에 행하는 제례 때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정료대는 사당 앞에 있다. 도동서원 사당 앞에는 석등이 놓여 있다.또한 특이하게 사당 동쪽 담장에 감(坎)라고 하는 정사각형 구멍이 있다. 이는 제사 때 사용한 축문을 태워버리는 곳이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쪽으로 수키와를 끼워 굴뚝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담장을 특별히 더 두껍게 쌓았다.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도동서원 강당 건물인 중정당. 기둥 상부에 흰 창호지를 발라 놓았다. 이는 도동서원이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 받는 김굉필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서원 중 수위(首位) 서원임을 나타내고 있다.중정당의 기단석. 각기 다른 모양·크기의 돌로 세웠다.
2021.04.05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4] 안동 병산서원(下)...유생대표가 선생에 절한 뒤 수업…지식 앞서 '인성 중요시'
교육기관이던 조선시대 서원의 교육은 실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학생 규모와 학습 과목, 교육 모습 등이 어떠하였을까. 1781년 당시 병산서원 주강사(主講事)였던 류종춘(柳宗春)이 쓴 병산서원통독안서(屛山書院通讀案序)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병산서원통독안서(屛山書院通讀案序)'유생들을 모아 병산서원에서 '대학'을 강(講)하니, 옛날에 서원을 만들어 선비들을 강하던 규례가 그러하다. 원외(員外) 남용진 공, 박사(博士) 정석태 공이 강학의 일을 주관하고, 또한 종춘(宗春)이 당시 원석(院席)에 참여했다. 이날 두 공이 새벽에 학생들을 이끌고 뜰 아래에 차례대로 서서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여 마친 후 유사(有司) 이팽윤 군이 동쪽 계단 위로 나아가 주자의 백록동서원 규약을 서서 읽고 모두 경청했다.마침내 학생들을 이끌고 존덕사를 배알하고 물러나 입교당(立敎堂)에 앉아 강석(講席)을 베풀었다. 이에 두건을 쓰고 박대(博帶)를 두른 학생 60여 명이 각기 '대학' 1부를 가지고 차례대로 앉았다. 의례가 매우 숙연했다. 좌석이 정해지자 한 사람이 두 사람 앞으로 나아가 절했다. 그러고 나서 무릎을 꿇고는 첫 장을 한 번 읽고 의의(疑義:의심스러운 부분)의 대략을 강론하고, 좌중의 여러 사람은 각각 자신의 견해가 미치는 바를 따라 이야기하기를 서로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다시 나가서 다음 장을 읽고 의의를 강론하기를 또 그렇게 했다. 이달 계미에 시작하여 4일을 지나 병술에 마치니 이것이 강학하는 일의 전말이다.부족한 내가 생각하기에 서원이 만들어진 것은 본래 강학하여 선비를 양성함에 있지, 유현(儒賢)을 제향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때문에 옛날의 서원은 경학을 중시해 봄가을로 마름의 풀을 모아 제향하기를 의례대로 하고, 학생을 소집해 함께 거처하게 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정주학(程朱學)의 여러 서적으로 심신에 절실한 것을 낮밤으로 강습하게 하는 것을 사계절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훌륭한 선비의 성대함과 학술을 선택함의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지금의 서원은 정반대이니, 중시하는 것은 봄가을의 제향뿐이다. 생도를 모아 학업을 수련하는 일이 혹 있을지 모르나, 대개 과장(科場) 공리(功利)의 끄트머리 학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경학과 강토(講討)의 일은 적막하도다.'여기 나오는 주자의 백록동서원 규약(白鹿洞規) 내용(일부)은 다음과 같다.'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이 다섯 가지는 교육의 요점이다(右 五敎之目)// 넓게 배울 것이며(博學之) 자세하게 물을 것이며(審問之)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며(愼思之) 명확하게 분별할 것이며(明辨之) 행동은 성실하게 해야 한다(篤行之)/ 이는 학문을 하는 순서이다(右 爲學之序)// 말은 충직하고 믿음이 있어야 되고(言忠信)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하며(行篤敬) 성내는 것은 경계하고 욕심은 막고(懲忿窒慾) 허물을 고쳐서 좋은 쪽으로 옮긴다(遷善改過)/ 이는 몸을 수양하는 요결이다(右 修身之要)// 뜻은 바르고 옳은데 두고 이익만을 꾀하지 않는다(正其義 不謨其利) 도를 밝게 하고 공로를 헤아리지 않는다(明其道 不計其功)/ 이는 처신하는 요체이다(右 處事之要)//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고(己所不欲 勿施於人) 행하여 얻지 못하였으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하라(行有不得 反求諸己)/ 이는 사물을 접하는 요령이다(右 接物之要)'◆류성룡 호성공신(扈聖功臣) 교서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임금(선조)을 모시고 의주까지 가는 데 공은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칭호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오른 류성룡에게 선조가 내린 교서의 내용이다. 선조가 류성룡의 공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대우를 했는지 알 수 있다."왕이 말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목숨을 바쳐 널리 구하는 공을 드러내니, 그 공덕과 노고에 보답하여 높이고 널리 알리는 예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중국 한나라에서 공신을 추모하여 공신 화상을 그렸던 일을 따라, 공신 교서의 새로운 문장을 내리노라."경(卿)은 금옥(金玉)과 같은 정기(精氣), 고통 속에서도 얼음과 쓴 나무를 씹으면서 견디는 지조를 지녔다. 재주는 세상에 걸맞아 일찍부터 중국 고대의 직(稷:농사의 신), 설(卨: 역법을 만든 인물)과 같은 훌륭한 신하라 하겠다. 학문은 유림의 스승이 되어 일찍이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을 얻었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사람들이 도덕과 문장으로 추천하여 조정에 명성이 널리 퍼지고 공업(功業)을 쌓으니, 사람들이 모두 중국 한나라의 동중서와 같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였다. <중략> 사방을 둘러보아도 기댈 곳 없고 모든 신하가 버리듯 하였다. 탄식하며 말 한 마리로 강을 건넜다. 내가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니, 그대가 홀로 의로운 충심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배에 올랐다. 동진의 온교(溫嶠)와 같은 의로운 기상으로 말고삐를 부여잡고 서둘러 명을 받들고, 진문공을 도운 호언(狐偃)과 같이 나를 도우며 마음을 썼다. 덕분에 참으로 진퇴에 있어 편안할 수 있었다.늙어서 군부(君父)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맹세하니, 범중엄과 같이 가슴 속에 뛰어난 군사 계책을 갖추어 한 몸으로 장군과 재상의 책임을 겸했다. 송나라 재상 한기(韓琦)가 범중엄과 함께 고난을 해결하고, 한나라 재상 소하(蕭何)가 장군 한신(韓信)을 도와 크게 위무(威武)를 떨치게 하니, 이는 식량이 끊어지지 않음에 힘입은 것이다. 중국의 고관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이는 사신을 대접함이 마땅하였기 때문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랏일이 어수선한 때 가득 쌓인 군사 업무를 맡아 중국 동진의 명장수 도간(陶侃)처럼 일 처리를 물 흐르듯 했고, 당나라 육지(陸贄)와 같이 임금에게 정성스레 아뢰고 답했다. 이제 중국의 병사와 협력해 왜적을 섬멸하여 왕업을 이루어 종사가 옛 도읍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누구의 힘으로 국가가 오늘날을 보장할 수 있었는가. 바로 너의 공로 덕분이다. 이미 위기에서 근심을 함께 하였거늘, 감히 안락에서 서로 배반하겠는가.몸과 마음으로 한 절개를 바쳐 제갈공명의 충정이 드러나고, 옥벽(玉壁)을 강물에 던져 여러 신하들에게 맹세하니, 진문공이 호언에게 상을 내린 것을 따른다. 이에 공을 기리기 위해 호성공신이등(扈聖功臣二等)으로 삼는다. 초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고 두 품계를 승진시키며, 부모와 처자 역시 두 품계를 올려준다. 아들이 없으니 누이의 아들과 사위에게 한 품계 올려준다. 적장자가 이를 세습해 그 녹을 잃지 않게 하며, 죄를 지어도 용서하거나 감형하는 사유(赦宥)는 대대로 후손에게도 미치게 한다. 이어 호위병 6명, 노비 9명, 하인(丘史) 4명, 밭 40결, 은자 7냥, 옷감 1단, 말 1필을 하사하니 도착하거든 받아라."아! 경은 참으로 나라를 부흥시킨 공적이 있으니, 내가 어찌 피란할 때의 심정을 잊겠는가. 땅이 살펴보고 하늘이 훤히 아니, 감히 귀신에게 이 마음을 질정(質正)하는 바이다. 산이 닳아서 숫돌처럼 되고 강이 닳아서 띠처럼 될지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잘 알았으리라."호성공신 1등은 2인(이항복과 정곤수), 2등은 31인, 3등은 53인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1781년 병산서원 교육 모습이 담긴 병산서원통독안서(부분).병산서원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입구. 출입문에 그려놓은 태극 문양과 기둥 초석에 새겨진 팔괘가 눈길을 끈다.
2021.03.22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3] 안동 병산서원(上)...서애 류성룡의 덕 품은 곳, 사방 트인 만대루서 '사계절의 명화' 감상
병산서원은 근처 하회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서원이다. 1613년에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이듬해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된 병산서원은 주변 풍광이 어느 서원보다 빼어나다. 서원 앞 적당한 거리에 병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병산을 끼고 낙동강의 맑은 물이 은빛 백사장을 적시며 굽이쳐 흘러간다. 철마다 시간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 풍광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병산서원 누각인 만대루(晩對樓)다.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와 어우러지는 이 풍광을 보는 것도 멋지다. 우리의 옛 건축이 자연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는지, 그 아름다움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산서원 만대루나 입교당에 올라 느긋하게 풍광을 감상하면 병산서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최근 보물로 지정된 만대루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로 긴 누각인 만대루를 마주하게 된다. '복례'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다. 왼쪽으로 눈길을 주면 작은 연못 '광영지(光影池)'가 보인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둔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다.'광영지' 이름은 주희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가져온 것이다.'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天光雲影共徘徊)/ 묻건대 어찌하여 그리 맑은가(問渠那得淸如許)/ 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다네(爲有原頭活水來)'병산서원 건물 중에서도 만대루는 그중 백미로 꼽힌다. 정면 7칸, 측면 2칸 누각인 만대루는 사방이 다 트여 있다. 전방 8개와 측면 3개 기둥 사이 드러난 각각 7칸, 2칸의 공간이 화면처럼 병산과 낙동강의 풍광을 담아낸다. 누각 위에서 병산을 바라보면 7폭의 병풍산으로 다가온다.자연의 경치를 빌려 건축의 한 구성요소로 활용하는 '차경(借景)'의 대표적 사례로,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이 서원의 정원이 되도록 한 건축적 장치가 만대루다. 건물 자체도 우리의 전통 미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목재들은 휘어진 그대로 대충 다듬어 사용하고 있다. 다채로운 모습이 운율을 느끼게 한다. 기둥 아래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크기도 모양도 높낮이도 각기 다르다. 누각 마루에 오르는 계단도 눈길을 끈다. 굵은 통나무를 도끼질로 서너 곳을 잘라 계단으로 삼았다.휴식과 강학의 공간인 만대루의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왔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이 모여 그윽하게 즐기기 좋구나'라는 뜻이다. 병산서원 만대루는 2020년 보물 제2104호로 지정됐다.만대루 아래를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좌우에 서재와 동재가 눈에 들어온다. 동재와 서재 앞에는 매화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입교당은 1.8m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5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방이 하나씩 있다.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에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敬義齋)'는 부원장이나 교수들이 머물렀다.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와 어우러진 낙동강과 병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앉아있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다.그리고 상급생 기숙사인 동재는 '거동을 바르게 하라'는 뜻을 담은 '동직재(動直齋)'다. 하급생을 위한 서재는 '정허재(靜虛齋)'이다. 두 건물은 각각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돼 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좌고우저'의 원리를 좇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사당은 존덕사입교당과 동재 사이를 돌아 들어가면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수암 류진의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가 나타난다. 존덕사는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지은 명칭이다. '중용'에 나오는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며,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에서 따온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이다. 출입문인 삼문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4개 기둥 초석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존덕사 아래 양쪽에는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과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이 들어서 있다.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와 전사청 마당 등에는 배롱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여름이면 별천지를 만든다. 이곳 배롱나무는 2008년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1613년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류성룡 후손인 류진이 심었다고 전한다.병산서원의 역사는 고려 때부터 안동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에서 비롯된다. 풍악서당은 류성룡이 1575년 현재의 병산서원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병산서당으로 고쳤다. 1613년에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과 유림이 힘을 모아 사당인 존덕사를 세우고 이듬해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함으로써 강학과 제향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 1662년에는 류성룡의 셋째아들 수암(修巖) 류진(1582~1635)이 추가로 배향되고, 1863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류성룡의 시호는 문충(文忠). 1542년 의성군 사촌마을 외가에서 류중영(柳仲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예조판서, 우의정, 도체찰사, 영의정 등 관직을 역임했다. 도학(道學)과 문장, 덕행 등으로도 이름을 떨치며,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등 저서를 남겼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병산서원 강당 마루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만대루와 그 너머 낙동강 및 병산이 멋지게 어우러진다.병산서원 연못 '광영지'.
2021.03.08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2] 경주 옥산서원..."학문은 오로지 仁을 구하는데 있다"…담장 겹겹이 둘러 자연마저 차단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72년에 건립되고, 이듬해 2월에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했다. 같은 해 12월에 '옥산(玉山)'으로 사액을 받았다. 당시 사액 글씨 '옥산서원'은 아계(鵝溪) 이산해(1539~1609)가 썼으며, 1574년 5월에 편액을 걸었다.1839년 사액 현판이 걸려있던 강당 건물(구인당)이 화재로 전부 불타버렸다. 그러자 나라에서 다시 사액 글씨를 내렸는데, 이때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썼다. 김정희는 '옥산서원' 네 글자를 네 장의 종이에 한자씩 썼다. 그 원본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현재 강당 건물 처마에는 김정희 글씨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 마루 위에는 후대에 다시 제작한 이산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건물 사이에 중첩되는 지붕선모퉁이마저 닫힌 폐쇄적 공간묵묵히 수양…실천철학 요체회재 이언적 덕행 기리는 곳아계·추사의 현판 원본 간직조선 후기 남인 구심점 역할16~20C 방명록 170책 전해와◆폐쇄적 공간 구성옥산서원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가 멋진 자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참나무를 비롯한 고목들과 넓은 반석이 어우러진 자계천이 서원 앞으로 휘돌아가고, 서원 앞으로는 자옥산이 펼쳐진다. 바로 뒤쪽은 화개산이 둘러싸고 있다.옥산서원은 이런 계곡 옆에 자리하고 있지만, 건물들은 매우 폐쇄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 문루인 무변루(無邊樓) 아래를 지나 마당에 오르면, 주변 자연경관과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을 맞이하게 된다. 정방형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무변루와 그 맞은편의 강당 건물 구인당, 좌우의 동·서재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사방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퉁이 부분이 서로 겹쳐지게 해 마당의 모퉁이마저도 닫혀 있다.여느 서원들과 다른 구성이다. 예를 들면 병산서원이 낙동강과 병산의 경관을 끌어들이는 건축 구성인 데 비해 외부 자연과 차단되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런 공간 구성을 위해 무변루를 특별한 구조로 만든 듯하다. 다른 서원들의 누각이 벽면을 개방한 것과 달리 무변루는 바깥벽을 모두 막아서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앞을 틔우고, 그 양쪽 한 칸씩은 방을 만들어 강당 쪽을 벽으로 만들었다. 방 옆으로 한 칸씩 누마루를 달아서 외부로 향하게 했다.옥산서원은 특히 담장이 많다. 서원 영역 전체를 담장으로 막아 차단함은 물론 서원 건물 사이에도 영역별로 담장과 벽으로 차단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 이름은 처음에는 '납청루(納淸樓)'라 지었으나 나중에 소재(蘇齋) 노수신(1515~1590)이 '무변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뜻을 취해 무변루로 고쳤다. 누각 대청에 걸려있는 무변루 편액 글씨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작품이다.강당 건물 이름인 구인당(求仁堂)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편액 글씨는 한호가 썼다.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3칸의 대청마루와 대청 양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방 앞에는 명(明)과 성(誠)을 뜻하는 '양진재(兩進齋)', 경(敬)과 의(義)를 뜻하는 '해립재(偕立齋)' 현판이 걸려 있다. 다른 서원의 강당과 달리 온돌방 앞에 툇간이 없다.'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오로지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이언적의 핵심사상이다. 구인당 대청마루에 앉으면 무변루 지붕 너머로 자옥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언적은 "천만 권 경전과 서적들이 오로지 '인(仁)'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개탄했다. 강당 앞의 학생들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성인은 날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옛 진리를 구해 그것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암수재(闇修齋)'는 남몰래 묵묵히 수양한다는 의미다.구인당 뒤에 사당인 체인묘(體仁廟)가 있는데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체인'은 어질고 착한 마음인 인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언적이 행한 실천철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사당 담장 밖 왼쪽에는 1577년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옥산서원 방문객이 자필로 이름과 날짜 등을 간단하게 적어놓은 책자 '심원록(尋院錄)'이 전하는데, 이것을 보면 류성룡, 권율, 이항복, 차천로, 이현일, 이형상 등 서울과 남인계의 명망 높은 인사들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조선 후기 남인계 입장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구심적 역할을 한 서원임을 알 수 있다. 심원록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모두 170책이 전한다.◆회재 이언적은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이언적은 조선 역사상 정치적 파란이 가장 심했던 16세기 사화기에 일생을 보냈다.외가인 경주 양동마을 월성손씨 대종가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1531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했다가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532년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은둔했다.자계옹(紫溪翁)·자옥산인(紫玉山人)이라 자처했던 이언적은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도덕산(道德山), 무학산(舞鶴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자계(紫溪)로 불린 계곡의 다섯 군데 바위는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로 이름 짓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면서 성리학에 몰두했다. 옥산서원은 세심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심대 암반에는 이황 글씨 '세심대'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1538년에는 청백리에 올랐다. 그러나 1546년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고, 1547년에는 훈구파가 사림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오지인 강계로 유배됐다. 6년 후 1553년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언적은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을 남겼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문루(門樓)인 무변루에서 바라본 옥산서원 강당 건물 구인당(求仁堂).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아계 이산해(위)와 추사 김정희 글씨 '옥산서원'. 네 장의 종이에 한자씩 썼다. 〈옥산서원 소장〉
2021.02.08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1] 함양 남계서원...'동방오현' 정여창의 참선비 정신 서린 곳…'전학후묘' 건물배치 시초
경남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문헌공 최충을 기리는 황해도 해주 문헌서원(1549년 '수양서원' 건립·1550년 '문헌서원' 사액)을 포함하면 세 번째다. 남계는 서원 앞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다.동방오현 중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이 중심 제향 인물이다. 우리나라 서원 건축 및 배치의 전형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이면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이후 건립되는 서원의 전범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닌 남계서원은 '선비의 고장' 함양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함양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되어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로 통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서울을 기준으로 좌는 낙동강 왼쪽 땅을, 우는 낙동강 오른쪽 땅을 말한다. 이 '우 함양'의 학문적 자부심을 세운 인물이 정여창이다. 동방오현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을 일컫는다.◆함양 유림이 주도해 건립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영주) 건립 후 9년 뒤인 1552년 함양 유림의 주도로 건립됐다. 개암(介菴) 강익(1523~1567)이 중심이 되어 박승임, 노관, 정복현, 임희무 등 30여 명이 정여창을 위한 서원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우선 지역 유림이 쌀을 비롯한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 여론을 환기하고, 당시 군수 서구연이 강당 건립을 위한 물자 등을 지원했다. 하지만 강당을 조성하던 중 서구연이 군수에서 물러난 후 흉년과 지방관의 무관심 등으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은 상태에서 중단되었다. 1559년 함양군수 윤확의 도움으로 다시 공사를 시작, 1561년에 강당과 사당을 완성하고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했다. 1562년부터 강학활동을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남명 조식이 강론하기도 했다. 1564년에는 김우홍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동재와 서재를 세우고 작은 연못을 만든 후 담장을 둘러 서원이 전체적으로 완성되었다. 건립 시작 후 12년 만이다.1552년 국내 세번째로 세운 서원소수·임고·수양이어 네번째 사액경사지형 이용 공간 위계 드러내 정문인 풍영루선 토론·詩會 열려정유재란때 위패 묻어 화 피해"2년 동안이나 흙 속에 있었어도한 군데도 상한 부분이 없으니참으로 하늘의 도움이 아니런가" 초대 원장을 맡은 강익은 강학에 힘쓰면서 규칙을 정하고 재정적 뒷받침을 위한 조치도 강구하는 등 서원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1566년 강익을 중심으로 한 함양 선비들이 사액을 청하자 임금이 '남계'로 사액했다. '소수' '임고' '수양'서원에 이어 네 번째로 받은 사액이었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함양 일대를 습격하자, 서원 원임(院任)들은 서책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정여창의 위패는 땅속에 묻었다. 서원은 일본군에 의해 불탔으나 덕분에 위패는 난을 피할 수 있었다. 1599년 3월15일 정경운은 관련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내가 서원에 가서 위판을 감춘 곳은 헤쳐 보니, 2년 동안이나 흙 속에 있었어도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 분칠한 면이 새로 만든 것과 같았고, 자획도 깎인 곳이 없었다. 흉적의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참으로 하늘의 도움과 귀신의 꾸짖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정경운은 위판을 찾아낸 후 작은 움막을 지어 그 위판을 봉안했으며, 1603년 나촌(羅村)으로 서원을 옮겨 건립했다가 1612년 원래 터인 현재의 장소로 다시 옮겼다. 1677년에 강익이, 1689년에 동계 정온(1569~1641)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한국 서원의 전범 '전학후묘'남계서원은 한국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세운 서원이다. 앞쪽에 교육을 위한 건물을, 뒤쪽에 선현(先賢)을 기리는 묘당을 배치하는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했다.남계서원이 들어선 터는 앞이 낮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경사지다. 유식·강학 공간은 낮은 곳에, 제향공간은 높은 곳에 배치해 각 공간이 가진 위계를 지형의 고저를 이용해 드러내고 있다.문루인 풍영루(風영樓) 아래를 지나 들어서면 기단 위 높은 곳에 자리한 강당 명성당(明誠堂)이 정면에 보인다. 명성당 왼쪽(동쪽) 방에는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방에는 '집의재(集義齋)' 현판이 걸려 있다. 거경재는 서원 원장이 거처하면서 원생들의 수업을 감독하던 곳이고, 집의재는 교수 및 유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다. 강당이 네 칸 규모 건물로 가운데 두 칸이 대청이라서 그런지, 처마에 걸린 현판(1566년 사액)이 '남계'와 '서원'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1569∼1641)과 강익(姜翼·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강당인 명성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한 칸의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는 '애련헌'과 '영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연꽃과 매화는 모두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다.동·서재 아래 문루 양쪽에는 각각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에 핀 연꽃과 연못에 비친 주변의 매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탁한 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찬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에 서려 있는 기상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남계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풍영루의 2층 누각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무엇을 논의하고 토론하거나 시회(詩會)를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성을 도야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풍영루에 올라보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일두 정여창정여창은 1450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공부하다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문하생이 됐다. 한훤당 김굉필도 함께 김종직의 가르침을 받았다. 149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어 동궁(연산군)을 가르쳤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펼쳤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1498년 연산군 때 조의제문 사초사건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그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가게 됐다. 1504년 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그해 가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당했다. 1610년(광해군 2년) 문묘에 배향됐다.정여창은 스스로 '한 마리의 좀'이란 뜻의 '일두(一蠹)'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어서 불렀다. 이 말은 정이천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정여창이 박언계의 편지에 대한 답서에서 '오직 학문을 지향하면서 성(誠)으로써 몸을 단속하면서 경(敬)으로써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나 같이 용렬한 중에 시들고 게으름이 더하니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간에 한 마리 좀 벌레라는 나무람을 진실로 면하기 어려우니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고 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동방오현 중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을 기리는 남계서원. 앞쪽에 교육을 위한 건물을, 뒤쪽에 선현을 기리는 사당을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한 서원이다.'남계'와 '서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남계서원 현판.
2021.01.25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0] 정읍 무성서원...신라 대학자 최치원 배향…일반 서원과 달리 마을 중심부에 자리잡아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은 다른 세계문화유산 서원에 비해 규모가 적고 건물도 매우 소박하다. 그리고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뒤쪽을 제외하고는 앞과 옆에 주민의 농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웃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인물들도 독특하다. 다른 서원처럼 조선 시대의 유명한 선비(성리학자)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처음에 위패를 모신 인물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관리인 고운(孤雲) 최치원(857~?)이다. 그 후 6명이 추가로 배향됐다. 그중 불우헌(不憂軒) 정극인(1401~1481)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인물로 유명하고, 영천자(靈川子) 신잠(1491~1554)은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다. 글씨를 잘 썼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정읍 지역의 군수를 지냈다. 최치원은 태산(태인 옛 지명) 태수를, 정극인과 신잠은 태인현감을 지냈다. 눌재 송재림(1479~1519), 묵재 정언충(1491~1557), 성재 김약묵(1500~1558), 명천 김관(1575~1635)은 이 지역 출신으로, 주로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후진을 교육한 인물들이다.태산주민들 그의 선정 기려 지은 '생사당'이 서원으로 발전정극인·신잠·송재림·정언충·김약묵·김관 위패도 추가 봉안담장 안에 강당인 명륜당과 사당만 있는 독특한 건물 배치구한말 최익현·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 거점으로도 유명◆고운 최치원 기리는 서원최치원을 기리는 무성서원은 1615년에 서원으로 문을 열게 됐는데, 건립 과정도 독특하다.최치원은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해 당나라의 과거제도 실시를 비롯한 국가행정 전반의 개혁을 건의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폐쇄성에 부딪혀 한계를 느끼고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 태산 태수로 부임했다. 28세 때 일이다. 8년 동안 선정을 베풀고 함양군수로 떠나자, 주민들이 그의 선정 치적을 기려 최치원을 위한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는 인물을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짓고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태산사는 고려 말에 훼손됐으나 1484년 유림의 발의로 칠보 월연대에서 지금의 무성서원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그 후 1544년 신잠이 태인 현감으로 부임해 5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강원도 간성 군수로 떠나자, 주민들이 또 신잠의 생사당을 세워 기렸다. 나중에 최치원의 태산사에 함께 합쳐 기리다가 1615년 지역 유림이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1696년에는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최치원은 6두품 출신의 통일신라 시대 대문장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2세(869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까지 지내면서 필명을 날렸다. 당나라 유학 시절인 882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보냈다. 이 글을 읽던 황소가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당나라에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진성여왕 8년(894)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10가지 정책(時務十條)'을 제시해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지리산 등 우리나라 곳곳에 머문 흔적을 남기며 지내다가 가야산으로 들어간 후 종적을 감춰버렸다.최치원은 문묘에 배향된 최초의 우리나라 학자이기도 하다. 유교 명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文廟)는 우리나라의 경우 714년(신라 성덕왕) 처음 건립됐다. 그동안 공자, 안자, 증자, 맹자, 주자 등 중국의 명현들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1020년(고려 현종) 최치원의 공적을 높이 인정해 처음으로 우리나라 학자를 향교 문묘에 배향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 때 설총과 안향의 위패가 봉안되고, 조선 때 15위의 위패가 추가되면서 18위의 우리나라 유현(儒賢)이 모셔지게 되었다.◆독특한 건물 배치무성서원도 기본적인 서원 건물 배치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입구에는 다른 서원처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출입문을 겸한 문루인 현가루(絃歌樓)가 눈에 들어온다. 2층 누각의 이름인 '현가루' 명칭에 이 서원 건립의 취지와 의미가 담겨 있다.'현가'는 공자의 일화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노나라 무성(武城)의 현감이 되었는데,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잘 다스렸다.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아가니 마침 현가지성(絃歌之聲: 현악에 맞춰 부르는 노래)이 들려와 탄복했다고 한다.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서원이 예악을 일으켜 백성과 가깝게 있도록 해야 한다는 공자의 교화사상을 담고 있다. 무성은 정읍의 신라 시대 지명이기도 한다.현가루를 아래로 담장 안에 들어서면 '무성서원' 사액 현판이 걸린 강당(명륜당)이 보인다. 다른 서원과 달리 명륜당 건물 하나만 있고, 동재와 서재는 없다. 강당 건물(정면 5칸 측면 3칸)은 가운데 3칸이 대청이고, 좌우 한 칸씩은 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은 앞뒤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대청에 앉으면 앞에는 현가루가, 뒤로는 사당인 태산사(泰山祠)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루 위에는 기문과 시 등이 새겨진 현판이 가득 걸려 있다.강당 바로 뒤에 있는 사당 입구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의 으뜸이라(士林首善)/ 임금(숙종)께서 이름 지어 현판 내리셨네(聖朝額恩)'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최치원 초상화와 함께 최치원을 비롯한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담장 안에는 이렇게 강당과 사당만 있고, 담장 동쪽 밖에 동재(東齋)라 할 수 있는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강수재 앞에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서 있다.무성서원은 구한말 병오창의(丙午倡義)로도 유명하다. 1906년 병오년에 최익현(1833~1906년)과 임병찬(1851~1916년)이 의병을 일으킨 거점이 이곳이다. 을사늑약으로 굴욕적인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최익현과 임병찬은 1906년 6월4일 무성서원에 모여 강회를 연 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태인·정읍·순창·곡성을 점령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등 13명이 서울로 압송됐다. 최익현은 다시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단식으로 저항하다 순국했다.이를 기념하는 병오창의기적비가 강수재 앞에 세워져 있다. '무성창의'로도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무성서원의 위상과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익현의 창의가 무성서원의 강회와 유림 동원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병찬은 조선으로 돌아와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자 단식으로 순국했다. 무성서원에서는 항일 구국 의병들의 호국정신과 의로운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무성서원 강당인 명륜당. 가운데 3칸이 마루인데 앞뒤로 트여 있다. 마루 뒤쪽에 사당 입구 문이 보인다.무성서원 사당에 모셔진 최치원 초상. 유명 초상화가인 채용신(1850~1941)이 그렸다.
2021.01.11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9] 장성 필암서원(하)...인종이 그려 김인후에 선물한 '묵죽도'…이상적 君臣관계 후대 본보기
필암서원에는 다른 서원에는 없는 건물인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소중한 것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의 이 경장각은 김인후와 인종의 각별한 인연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가 지시해 세우도록 한 건물로, 인종이 김인후에게 선물한 묵죽도(墨竹圖)를 새긴 목판을 보관해 왔다. 정조의 친필 글씨인 '경장각' 편액은 특별히 망사로 보호되고 있다.◆왕세자와 선비의 운명적 만남김인후는 영남의 이황에 비견되는 대학자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된 18인의 유학자 중 유일한 호남 출신의 학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시를 잘 지어 신동으로 불리던 김인후는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31세(1540년) 때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는데, 이때 안동에서 올라온 이황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깊이 사귀게 되었다.그는 사가독서 후 홍문관의 정자를 거쳐 박사로 있을 때,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설서(設書)를 겸하면서 인종과 운명적인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인종은 29세, 김인후는 34세였다. 1543년의 일이다. 인종은 시강원의 여러 스승 가운데 특히 김인후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김인후가 당직을 서는 날 밤이면 매번 찾아가서 긴 시간 학문을 논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대윤과 소윤의 갈등 속 권력투쟁이 치열하던 때여서, 학덕이 높은 참된 선비이자 스승인 김인후에게 인종이 각별한 존경심과 호감을 가진 것 같다. 송시열은 "인종은 김인후의 도덕과 학문이 훌륭함을 알아 성심으로 예우했고, 김인후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요순의 정치를 펼 것으로 여겼다. 두 분의 만남은 날로 더욱 짙어지고 기대도 날로 더욱 높아 갔다"고 했다.홍문관 박사-세자로 사제의 연존경·신뢰 쌓으며 각별한 교류인종 즉위 8개월 만에 단명하자김인후 몇날 대성통곡 후 낙향오랫동안 왕세자 교육을 받은 인종에게 궐 안팎의 사람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1544년)한 직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1545년 8개월 만에 명을 다하고 만다. 소식을 들은 김인후는 문을 닫아걸고 몇 날을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병을 핑계 삼아 향리로 낙향, 세상을 등진 채 평생을 학문을 닦으면서 보냈다. 그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음력 7월1일)이 되면 집 앞산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통곡했다. 인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자 김인후에게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 교리를 제수했다. 이에 그는 두어 섬의 술을 싣고 마지못해 서울로 떠났다. 가다가 대나무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대나무숲·꽃과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인종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인종을 위해 그는 이렇게 절의를 지켰다.그는 인종에 대한 그리움을 '유소사(有所思)'라는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임의 나이 서른이 되어가고(君年方向立)/ 내 나이는 3기(1기는 12년)가 되려는데(我年慾三紀)/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新歡未渠央)/ 한 번 이별은 화살 같네(一別如絃矢)/ 내 마음은 굴러갈 수 없는데(我心不可轉)/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世事東流水)/ 젊은 나이에 해로할 짝을 잃었으니(盛年失偕老)/ 눈은 어둡고 머리털과 이빨도 쇠했네(目昏衰髮齒)/ 덧없이 살기 몇 해던가(泯泯幾春秋)/ 지금까지도 죽지 못했네(至今猶未死)/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栢舟在中河)/ 남산에는 고사리 돋아나는데(南山薇作止)/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여(却羨周王妃)/ 살아 이별하며 권이곡을 노래하다니(生離歌卷耳)' 먼저 떠난 젊은 왕을 그리며 지은 시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가련한 여인의 한을 빌려 그리움을 표현했다.◆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인종은 세자시절인 1543년 자신의 마음이 담긴 묵죽도를 그려 김인후에게 내린다. 이 그림에는 우뚝 선, 거친 바위 뒤에 네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왕의 명에 따라 쓴 아래 시가 담겨 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사귀 모두 정미해/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하네/ 이제야 알겠네 성스러운 솜씨가 조화를 짝해/ 하늘 땅이 한 덩이로 어김없이 뭉쳤음을(根枝節葉盡精微 石友精神在範圍 始覺聖神모造化 一團天地不能違)'그림 속 바위가 대나무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내용이다. 왕이 그림을 그려 스승에게 주고, 스승은 그림에 답시를 쓴 존경과 신뢰의 증표인 셈이다.묵죽도에 충정의 답시 쓴 스승'뿌리 가지 잎사귀 모두 정미해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그의 덕행과 절의 감탄한 정조"경장각 지어 그림 소중히 보관"인종과 김인후의 이야기는 후대에도 전해지면서 군신관계의 표본으로 남았다. 김인후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선왕인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필암서원에 경장각을 세우게 했다. 1786년경의 일이라고 한다. 친필로 '경장각' 편액 글씨를 내리고, 하서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인종 묵죽도와 그 목판을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했다. 정조는 김인후의 치제문(致祭文)에서 인종의 묵죽에 대해 '대궐 비단 옛날 먹빛은/ 거룩한 상감의 그림이시네/ 천년 뒤에 자세히 살펴보니/ 대는 더욱 푸르고 마음은 더욱 붉어라(宮초古墨 盛際繪事 千載省識 筠碧心丹)'라고 읊었다.현재 인종의 묵죽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목판에 새긴 묵죽도판각(墨竹圖板刻)이 전한다. '인종대왕묵죽'이라는 제목이 새겨진 목판본 묵죽도(97.5x62.3㎝)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기 1년여 전에 스승으로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김인후에게 내린 묵죽도는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표본으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후대에 필암서원에서 목판으로 제작했다. 관련 기록으로 유숙기(兪肅基·1696~1752)가 1736년에 남긴 '어화묵죽발(御畵墨竹跋)'도 전한다. 이 서두에 '인종대왕이 동궁에 있을 적에 당신이 그린 그림을 신하 김인후에게 주셨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여러 번 모각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발문은 인종대왕묵죽도 목판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남긴 글이다. 1668년에 김인후를 자헌대부로 추증하면서 목판본의 인본을 만들어 인종의 묘소인 효릉 재실에 보관하게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인본이 훼손되자 당시 효릉 재사를 관리하던 유숙기가 이를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인종이 그려 김인후에게 선물한 묵죽도. 그림에 대한 화답으로 김인후가 지은 시가 담겨 있다.인종의 묵죽도와 그 목판을 소중히 보관하라며 정조가 지어 준 경장각. 편액 '경장각' 글씨는 정조 친필.
2020.12.28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8] 장성 필암서원(상)...'호남 성리학 초석' 김인후 기린 곳… '경장각' 편액은 정조의 친필
필암서원(筆巖書院·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은 호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를 기리고 있다. 퇴계 이황을 기리는 안동 도산서원이 영남사림의 본거지라면, 필암서원은 호남 학맥의 본산이다. 이 필암서원의 주인공이 김인후다. 그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성리학자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시인이고 문장가이며, 절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필암서원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루인 확연루와 담장, 그 너머 기와지붕들만 보인다. 확연루 앞으로는 작은 하천인 문필천이 흐르고, 그 너머 멀리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뒤쪽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처음에는 황룡강과 문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기산리에 건립됐다. 1590년의 일이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1624년 그곳에서 500m 떨어진 필암리 증산(甑山)에 다시 건립됐다. 1662년 유생들의 건의로 '필암서원' 사액을 받았다. 하지만 이곳이 지대가 낮아 서원이 물에 잠겨 수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1672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필암(筆巖)'은 김인후의 고향인 황룡면 맥동마을 입구에 자리한 바위 필암에서 유래한다. 이 바위는 마치 모양이 붓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임금(인종)과 각별한 인연의 김인후김인후는 1540년 대과에 급제했다. 3년 뒤 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을 맡았다. 세자는 1544년 조선의 제12대 임금(인종)이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신뢰하며 군신 간의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인종은 임금 자리에 올라 어진 정치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1545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김인후는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을 세상과 단절한 채 인종을 그리워하며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5년 후 인종이 승하한 이후의 벼슬은 묘비에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인종과 김인후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후대에 전해지면서 군신관계의 표본이 됐다. 김인후는 인종 승하 이후 곧바로 낙향해 고향에서 서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호남 성리학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수준을 높이면서, 율곡학파의 학설이 정립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송시열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다 갖춘 사람은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했다. 1796년(정조 20년) 문묘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는데, 이때 정조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했다.김인후는 1천600여 수에 이르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인종 사후에 쓴 사모곡이나 소쇄원 48영 등 유명한 시가 많이 있다. 백성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에서는 보리 베기, 콩 심기, 풀 베기 등을 통해 피폐해진 농촌 실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널리 알려진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라는 시조도 그의 작품이다.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일화도 전한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나오는 이야기다.김인후가 50세에 별세한 뒤 그와 친분이 있는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죽어 어떤 천부(天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우뚝한 누각에 난(鸞)새(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다. 흘긋 보니 바로 이웃에 살던 김인후였다. 그런데 저승에서 김인후가 판관을 맡고 있었다. 김인후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라며 이승으로 돌려보내는 길에 다음의 시를 지어 주었다. '세억은 그 이름이고, 자는 대년(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 신선 뵈었구려(排門來謁紫微仙)/ 일흔일곱이 된 뒤에 다시 만나세(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시길(歸去人間莫浪傳)' 다시 살아난 오세억은 이 사연을 소재상공(蘇齋相公: 노수신)에게 알렸다. 소재 노수신은 김인후와 막역한 사이였다. 오씨는 시에 적힌 대로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문루 이름은 '확연루'서원 앞에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홍살문 뒤로 보이는 서원 정문인 문루는 '확연루(廓然樓)'다.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이는 모든 일에 사심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기(廓然樓記)'는 '확연'이라 이름 지은 연유에 대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해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 송시열이 특별히 두 글자를 차용했다'고 적고 있다.확연루를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 건물이 나온다. '청절당(淸節堂)'인 이 강당은 다른 서원과 달리 입구의 문루 쪽이 아니라 반대편 사당을 향하고 있다. 사당 쪽 처마에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가 쓴 '필암서원'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 위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이 쓴 '청절당' 편액이 걸려 있다. 청절당 좌우에는 수학하는 원생들이 거처하는 서재(崇義齋)와 동재(進德齋)가 배치돼 있다. 필암서원은 이처럼 강당과 동·서재가 사당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독특한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 경장각(敬藏閣)이 세워져 있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에 직접 그려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장각' 편액은 이 건물을 짓도록 한 정조 임금의 친필 글씨다. 묵죽도의 대나무 그림은 인종이 그렸고,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지어 쓴 시가 담겨 있다.경장각 뒤쪽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 우동사(佑東祠)가 있다. 우동사에는 중앙의 북쪽 벽에 김인후 위패가, 동쪽 벽에 그의 학맥을 이은 고암(鼓巖) 양자징(1523~1694)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송시열이 지은 김인후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천우아동(天佑我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조선)에 태어난 인물이 김인후 선생'이라는 의미다. '우동사' 편액 글씨는 회암(悔庵) 주희(1130~1200)의 글씨에서 골라 모아 새긴 것이다.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필암서원의 문루인 확연루와 주변 풍경. 평지에 자리한 필암서원은 입구에 홍살문과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고 확연루 뒤로 강당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김인후가 생전에 사용하던 옥필(玉筆)과 벼루. 붓자루가 옥으로 되어 있다.
2020.12.21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7] 논산 돈암서원(하)...눈썹지붕 달고 공중부양…독특한 양식의 거대 강당 '응도당'
돈암서원에 들어서면 저절로 눈길이 가는 건물이 하나 있다. 왼쪽에 홀로 서 있는 응도당(凝道堂)이라는 강당 건물이다. 서원 건물로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규모가 큰 데다 건물 모양도 특이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한옥이 공중에 약간 떠 있는 구조이고, 건물 측면 중간 높이에 눈썹처럼 가로로 길게 붙어 있는 눈썹지붕이 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양식이다.응도당은 오래된 건물이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져 그 가치가 매우 높아 2008년 이 건물만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됐다. 서원에 별 관심이 없어도 이 응도당 하나만 보기 위해서도 돈암서원은 가볼 만하다. 사찰로 치면 화엄사의 각황전이 떠오르기도 한다.◆보물로 지정된 강당 '응도당'이 응도당은 옛 돈암서원 시절 사당 앞에 세운 강당이었다. 하지만 1880년 서원의 다른 건물들이 옮겨질 때 함께 옮기지 못했다가 1971년에 옮겨 세우면서 서원의 서쪽 마당에 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강당 자리에는 양성당이 이미 들어서 있었다.옛 서원 건물 중 최대 규모인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나 양 측면에 풍판을 달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툇간처럼 달아냈다. 본채 부분만 보면 앞면이 12.8m지만 양 측면에 눈썹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까지 포함하면 16m나 된다.모든 서원 건물 중 최대규모…공포·화반 등 조각 매우 세밀사각형 주춧돌의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어 천원지방 상징화김장생이 '가례집람'에 정리한 고대 예법 건물양식 실제 적용'응도당'과 마루 위에 걸린 '돈암서원' 편액은 송시열 글씨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후면 양 측면에는 문을 달아 마루방을 꾸몄다. 남쪽에 두 칸, 북쪽에 한 칸을 두었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은 기단에서 두 자(60㎝) 정도로 높여 건물 자체가 높게 보이도록 했다. 주춧돌 모양은 하부는 사각형,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화했다. 주춧돌 위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깔았다. 그래서 건물은 주춧돌 높이만큼 공중에 떠 있다. 정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고, 측면과 마루방에는 띠살 분합문을 달았다.이 응도당은 규모가 크면서도 안정감 있게 다가오는 데다 공포(공包)와 화반(花盤) 등 건축 부재들의 조각 수법이 매우 세밀하고 아름다워 건축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기둥 위 공포와 공포 사이에 있는 화반이 특히 눈길을 끈다. 화반은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목재)와 창방(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부재) 사이에 끼우는데, 지붕의 하중을 창방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화반이 응도당의 경우 마치 장식을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놓은 듯하다.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화려하기 때문이다.응도당은 기와에 쓰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대 예법에 따른 건물 응도당의 특별한 건축적 의미는 김장생이 '가례집람(家禮輯覽)'에서 이론적으로 정리했던, 고대 예법에 따른 건물 양식을 실제로 적용한 사례라는 점이다. 김장생이 현실에 맞게 각종 예법을 정리·편찬한 '가례집람' 내용 중 가옥에 대한 것도 언급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옥하옥제(殿屋廈屋制)를 참고로 했는데, 이는 신분에 따라 건축형식을 구분하는 규정이다. 기본적으로 천자와 제후의 건축인 전옥, 경·대부·사의 건축인 하옥으로 대별된다. 전옥하옥제는 평면 구성에 대한 방실제(房室制)와 지붕 구성의 차이를 규정한 당우제(堂宇制)로 나뉜다. 그 주요 내용이다.방실제는 중앙의 실을 기준으로 좌우에 방을 동일하게 설치하는 좌우방제와 실은 서쪽에, 방은 동쪽에만 설치하는 동방서실제로 구분한다. 좌우방제는 제후의 집에 적용되며, 동방서실제는 경·대부·사의 집에 적용된다. 또한 당우제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천자·제후의 집은 사주(四注), 즉 사방으로 지붕면을 만든다. 경·대부·사의 집은 양하(兩下), 즉 앞뒤 2면으로만 지붕을 만들도록 한다. 사주로 만든 집은 동서남북 모두에 유를 두고, 양 측면에는 영을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는 낙수받이(처마)를 말하고 영은 눈썹지붕을 말한다.하옥제도를 본받은 응도당은 실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방을 배치한 동방서실제를 적용하고 있다. 두 방의 동쪽은 거경재, 서쪽은 정의재로 당호를 지었다. 주자의 회당(悔堂) 좌우 협실(夾室) 이름인 경재(敬齋)와 의재(義齋)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강당 내의 좌우 협실에 당호를 내건 것은 이후 서원 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송시열이 쓴 돈암서원 원정비문(院庭碑文)에도 창건 당시 응도당에 대한 관련 내용이 있다.'사우 앞에는 오가(五架)의 강당을 두었는데, 고제의 하옥제도를 사용했다. 문원공께서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고찰하고 바로잡아 죽림서원에서 창건한 적이 있다. 지금 한결같이 선생께서 남기신 법도를 따랐으니 방, 실, 당, 서(序), 점(岾), 요, 이, 오(奧), 옥루(屋漏), 의(依), 진(陳), 호(戶), 유가 구비되었다. 이름은 응도라 했다. 상고할 수 없는 고제가 환하게 밝아져서 손바닥을 보는 듯했다. 양 옆에는 재(齋)를 두었는데 왼쪽을 거경(居敬), 오른쪽을 정의(精義)라 했다. 주자의 연처(然處)인 회당(悔堂)의 양협(兩頰) 이름 뜻을 취한 것이다.'죽림서원은 김장생의 문인들이 주도해 1626년 논산 강경에 건립한 서원이다.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이 배향돼 있다.◆편액은 송시열 글씨응도는 '도(道)가 머문다'는 뜻이다. '응도당'과 응도당 마루 위에 걸린 '돈암서원' 편액은 송시열 글씨다. 응도당의 주련은 중국 송나라 범준(范浚)의 '심잠(心箴)' 내용(일부)을 담고 있다. 정면 5칸의 6개 기둥 앞면과 양쪽 끝 기둥의 측면에 하나씩 모두 8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그 내용이다.'망망한 천지여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끝이 없다(茫茫堪輿俯仰無垠)/ 사람이 그 사이에 가물가물하게 작은 몸을 두고 있으니(人於其間渺然有身)/ 이 몸의 보잘것없음은 큰 창고의 한 톨 쌀알이로다(是身之微太倉제米)/ 하늘과 땅과 함께 삼재가 됨은 오직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爲參三才曰惟心爾)/ 예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겠느냐마는(往古來今孰無此心)/ 마음이 물질의 지배를 받으니 마침내 짐승이 되는 것이다(心爲形役乃獸乃禽)/ 오직 입 귀 눈 손 발의 모든 동정이(惟口耳目手足動靜)/ 물욕 사이에 던져지고 끼여서 그 마음의 병이 된다(投間抵隙爲厥心病)'다음은 나머지 글귀다.'미약한 한 마음을 온갖 욕심들이 공격을 하니(一心之微衆欲攻之)/ 그 마음 온전하게 보존하는 이 드물도다(其與存者嗚呼幾希)/ 군자가 성심을 보존하며 능히 생각하고 공경하면(君子存誠克念克敬)/ 천군(마음)이 태연해져서 모든 것이 그 명을 따를 것이다(天君泰然百體從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돈암서원 강당 건물인 응도당. 현 위치로 서원을 옮길 때(1880년) 같이 못 옮기고 91년 후에 따로 옮기게 되면서 강당 자리가 아닌 곳에 홀로 서 있다. 송시열 글씨의 편액 '응도당' '돈암서원'이 걸려 있다.응도당의 모델인 '하옥전도'. 김장생의 저서 '가례집람'에 실려 있다.
2020.12.07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6] 논산 돈암서원(상)...사계 김장생의 예학정신 깃든 곳…호서 서인계 학맥 거점 역할
김장생이 제자 가르치던 장소평지에 전학후묘 형태로 구성양성당 앞에 그의 업적 등 기록전서체 한문 글귀 새긴 숭례사모두 포용하라는 가르침 담겨장판각엔 목판본·서적들 소장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계(沙溪) 김장생(1548~1631)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처음 건립됐다. 그의 제자들이 김장생의 학덕을 잇기 위해 1634년에 건립했다. 현재의 위치에서 1.7㎞ 정도 떨어진 곳에 건립됐는데, 하천에 가까운 저지대여서 자주 침수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수해 우려를 피해 188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 평지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고, 뒤로는 낮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다.돈암서원은 호서 서인계 학맥의 거점으로, 당대 정계와 학계에서 큰 활약을 한 송준길·송시열·이유태·윤원거·윤문거·윤선거 등이 강학하고 모임을 갖던 곳이다.김장생이 별세한 이듬해인 1632년 그의 아들 김집을 비롯한 김장생의 문인들은 충청도 20개 군현 유림과 함께 창건을 발의했다. 당시 현직 관료 중에는 천안군수, 니산현감이 포함되었으며, 전직 관료로는 윤전·송준길·송시열·이유태 등이 참가했다. 당시 송준길이 작성해 돌린 통문(遯巖書院創建通文)의 일부다.'우리가 선생과 같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또 같은 고장에 함께 살면서 명성을 듣고 기뻐하고, 덕을 보고는 심취한 지가 모두 몇 년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비록 우리나라 전역에서 모두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한다 하더라도 한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더욱 깊다 하겠다. 이제 기린의 덕과 봉황의 자태를 지닌 선생께서 서거하셨으나 선생을 잊을 수 없으니, 신주를 모시고 마음을 붙일 사당이 없다면 장차 후학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며, 거의 끊어져 가는 사도(斯道:유학의 도)를 어떻게 보위하겠는가.' ◆예학의 종장 김장생이 주인공돈암서원의 중심 제향인물인 김장생은 성리학의 실천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인물이다. 후에 김집(1658년)·송준길(1688년)·송시열(1695년)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들 4명은 모두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기도 하다.조선시대 예학의 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장생은 송익필(1534~1599년)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했고, 20세 무렵에는 율곡 이이(1536~1584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송익필은 당시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 등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성리학과 예학에도 밝았다. 이이의 학맥을 이은 김장생의 학문은 훗날 아들 신독재 김집에게 계승되고,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했다.일찍부터 과거시험은 생각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김장생은 학행으로 천거돼 1578년 창릉참봉이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연산으로의 낙향을 거듭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연루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뒤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해 은거할 때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니 정자로다/ 백운(白雲) 덮인 데 날 있는 줄 뉘 알리/ 정반(庭畔)에 학 배회하니 그 사람 벗인가 하노라'84세 때 연산에서 생을 마친 그는 후손에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다.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誼:우애)를 두터이 지낼 것'이다.'가례집람(家禮輯覽)' '경서변의(經書辨疑)' '의례문해(疑禮問解)'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저서를 남겼다.돈암서원은 1660년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돈암'에서는 '돈'으로 발음하지만, 보통 숨는다 피한다는 의미의 '둔'자로 읽는다. 돈암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서원이 처음 건립된 마을인 숲말의 산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돈암'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주역의 돈괘(遯卦)의 의미와 관련이 있고,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호인 '돈옹(遯翁)'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한다.◆김장생의 양성당을 기반으로 건립돈암서원은 거의 평지에 전학후묘형태로 구성돼 있다. 입구에 산앙루(山仰樓)라는 누각이 있다. 산앙루는 1880년 이건 당시 건립할 계획을 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2006년에야 건립하게 되었다. 담장 밖에 따로 있는 이 누각 뒤로 담장을 끼고 있는 입덕문을 지나면 전면에 강학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의 동·서재다. 양성당 앞에 특이하게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인 연산현돈암서원비기(蓮山縣遯巖書院碑記)가 세워져 있다. 돈암서원의 건립 내력과 김장생·김집의 업적, 서원의 건립 배경 및 구조를 기록한 비석이다. 1669년에 건립됐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 글씨는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만기(金萬基)가 쓴 것이다. 양성당은 김장생이 1601년 영의정 이항복의 천거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가 이듬해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집권하자 낙향한 후 지은 서당이다. '양성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이곳에서 30여 년 동안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옛 돈암서원은 이 양성당과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강학하던 정회당(靜會堂)을 기반으로 건립됐다.돈암서원에는 창건 당시 사당 앞에 건립한 강당인 응도당(凝道堂)이 있었으나, 규모가 너무 크고 비용이 많이 들어 1880년 이건 당시 함께 옮기지 못하고 1971년에야 옮겨졌다. 그래서 응도당이 들어설 자리에 양성당이 자리하게 되었다. 응도당은 양성당의 동남쪽에 별도로 배치됐다. 정회당은 양성당 옆에 있다.양성당 뒤쪽 한 단 위에 사당인 숭례사(崇禮祠)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칠해진 이 사당을 둘러싼 꽃담 앞면에 기와 편을 활용한 상감기법의 전서체 한문 글귀가 눈길을 끈다. '지부함해(地負海涵: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넓게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온화한 바람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이다. 이를 실천해 나간다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김장생의 인품과 예학정신이 담겨 있다. 양성당과 정회당 사이에 있는 장판각에는 김장생의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비요' '가례집람' 등의 서적들이 목판본과 함께 소장돼 있다.한편 입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마당 한쪽에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난 8월에 갔을 때 붉은 꽃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서원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문화해설사도 이 배롱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배롱나무를 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서원에는 배롱나무 고목이 있는 경우가 많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돈암서원 사당인 숭례사. 앞 담장에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등 김장생의 예학정신을 담은 전서체 글귀가 기와로 수놓아져 있다.
2020.11.23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5] 안동 도산서원(하)...왕명으로 일곱 번의 치제 봉행…"오직 영남만 정학을 빼앗기지 않았다"
서당과 서원의 중요한 차이는 사당 유무다. 서원에는 있고 서당에는 없다. 서원 사당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도산서원 사당의 역사를 통해 살펴본다.도산서원 건물 중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있는 사당(보물 제211호)에는 이황과 그의 제자인 조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이름은 상덕사(尙德祠)다. 퇴계 이황 선생의 덕과 가르침을 숭상하고 본받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원 사당은 이처럼 이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도동서원이나 남계서원처럼 없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상덕사는 팔작지붕인 것이 특징이다. 이 안 정면 중앙에 남향으로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 앞에 서향으로 '월천 조공(月川 趙公)' 위패를 종향위(從享位)로 봉안하고 있다. 상덕사는 1574년 봄에 완공하고 여름에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에 이황의 위패를 봉안했다.◆사당 상덕사 이야기상덕사에서는 정기적 의례와 비정기적 의례가 봉행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닷새 날에는 세배를 올리는 정알례(正謁禮)를,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에는 제사를 지내는 향사례(享祀禮)를 봉행한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분향 참배하는 향알례(香謁禮)를 올린다. 비정기적 행사로는 조선 시대 왕명으로 일곱 번의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 죽은 신하의 제사 지내던 일)가 있었다. 그리고 퇴계 선생과 서원에 관련된 사안이 있을 때 아뢰는 고유례(告由禮), 선비들이 인사를 드리는 알묘례(謁廟禮)가 봉행된다.코로나19는 도산서원 향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3월5일(음력 2월11일) 오전 11시에 봉행된 봄 향사례는 평소보다 참석 범위와 절차를 줄여 진행했다. 당초 서원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아 여성인 이배용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을 초헌관으로 삼아 대규모로 봉행하려고 했다. 이배용 이사장은 가을 향사 때인 지난 10월1일 제사 때 초헌관으로 첫 술잔 올렸다. 한국의 서원 6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산서원 향사에서 여성이 초헌관을 맡는 역사를 쓰게 됐다.상덕사는 건물이 10차례 정도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에 봉안된 위패도 몇 차례 변고를 당했다. '도산서원 묘변시일기(陶山書院 廟變時日記)'에 기록된 내용이다.'1901년 동짓달 초하루 아침 일찍 분향례를 위해 묘정에 들어가니 사당 문 자물쇠가 부서졌고, 사당에는 원위(元位:퇴계 위패) 의탁(椅卓)이 비어 있고 독(위패 함)은 제상 위에 있었다. 종향위 위판은 서쪽 협문 안에 옮겨져서 분면(粉面)이 벗겨져 있었다. 또 서쪽 담에 도적이 든 흔적도 있었다. 사당의 퇴계 선생 위판이 없어진 변고가 생겼다. 이 사건이 황성신문에 보도되고, 11월21일에 임금께서 위판목을 하사해 12월17일 10시경에 운정(雲庭 : 이원호 1860~1919)공이 다시 써서 봉안하고 예안군수를 겸임한 봉화군수가 위안제를 봉행했다. 이 위안제에 5천~6천명이 참례했다.'원래 위판은 이듬해 2월 월란정사 앞 강 가운데 바위에서 발견돼 도산서당에 모셨다가 3월7일 상덕사 뒤 깨끗한 곳에 묻었다.이런 일도 있었다. 1809년 5월 초하룻날 함안에 사는 박형옥 등이 알묘 후 봉심을 할 때 종향위의 독이 열려 뱀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원임(院任)들에게 알렸다. 처음 있는 중대한 일이라서 의논을 거듭하다가 9월4일 회의에서 결정, 김종수(1761~1813)가 개제(改題)해 11월16일 오전 6시경에 다시 봉안했다. 또 1901년 묘변 시에 종향위 위패에도 분면이 벗겨져 다시 써서 원위 봉안 때 다시 모셨다.'◆정조가 내린 전교(傳敎)1792년 3월3일 정조 임금이 내린 명령의 내용이다.'정학(正學)을 높이려면 마땅히 선현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사신이 그 지역에 들어감에 어제 옥산서원에 치제하도록 명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옥산서원에만 치제를 하고 도산서원에는 치제하지 않는다면 옳겠는가. 요즘 사학(邪學:천주교)이 점차 퍼지고 있다. 오직 영남의 인사들만 선정(先正)의 정학을 조심스럽게 지켜 꺾이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의 한 없는 그리움이 더해졌다. <중략> 각신(閣臣) 이만수가 명을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으로 달려가 선정 문순공 이황의 서원에 치제하도록 하라는 제문을 지어 내려 보내겠다. 미리 내각에 당부해 감사가 알도록 하고, 감사가 순시하면 즉시 해당 고을에 알려라. 선정의 자손들과 인근 고을 인사들이 와서 치제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은 미리 와서 모여 기다리도록 하라. 치제 날에 각신은 전교당에 자리를 정해 앉아 여러 유생을 불러 진도문 안뜰에 세우고, 지니고 간 서제(書題)를 걸어 보이도록 해 각기 글을 짓도록 하고 시권(詩卷)을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에 보고하라. 이렇게 하면 작은 고을에 준비하느라 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조정에 당부해 경상감사가 곡식을 준비하도록 하라.'이 전교와 정조가 지어 내린 치제문은 3월8일에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이후 준비를 거쳐 3월24일 치제가 봉행됐다. 하루 전날 사당에 고유를 올렸는데, 참석자가 몇 천명인지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이 많아 술과 음식을 다 제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고유문 내용이다. '임금의 높고 밝은 덕이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붙드시니, 이에 보살핌이 남으로 돌아보아 제사로 융숭하게 보답하고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이시니 사문(斯文)이 더욱 기뻐하여 장차 일을 시작하려 함에 삼가 그 사유를 아룁니다.'전교와 치제문 현판은 도산서원 전교당에 걸려 있다.3월25일에는 별과가 진행됐다. 진시(오전 7~9시)에 유생이 넘쳐나 1만명으로 제한하고, 사시에 시제를 소나무에 걸었다. 답안지는 신시(오후 3~5시)에 거두니 3천730장이었다. 과거시험은 선비들이 예상 밖에 많이 모여 도저히 서원 경내에서 치르기 어려워 강 건너 송림에서 치르게 되었다. 시험장에 들어온 선비는 7천228명이었다고 한다. 4월16일 합격자 30명이 발표됐다.이 도산 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에 단을 쌓아 채제공(1720~1799)이 짓고 쓴 비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현재의 시사단(詩社壇) 비와 비각은 182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75년 안동댐으로 인해 물속에 잠기게 되면서 그 자리에 10m 높이로 축대를 쌓아 올려 인공섬을 만들어 옮겨놓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안동호에 떠 있는 도산서원 시사단(詩社壇) 풍경. 지난달 초 모습이다. 시사단은 안동댐이 생기면서 원래 자리에 10m 높이로 축대를 쌓아 옮긴 것이다.
2020.11.09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4]안동 도산서원(상)...퇴계가 꿈꾼 유교적 이상향, 건물·주변공간 직접 작명하고 친필 새겨
청명한 가을 나날. 야외 어디로 나가든 좋을 때다. 구름 한 점 없던 지난 6일 찾은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도 정말 좋았다. 도산서원은 여러 번 탐방했지만 이번이 가장 좋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광을 감상했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와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길은 물론 무엇보다 오른쪽으로 푸른 물이 가득한 안동호가 펼쳐져 최고의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 풍광에 마음껏 젖어 들 수 있어 더욱 좋았다.심신이 청명해지는 가운데 10분 정도 걸으니 도산서원 앞마당에 이르렀다. 서원 앞 호숫가에 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 명명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주변 풍광을 둘러보니 마음이 더욱 깨끗하고 상쾌해졌다. 이곳에 도산서당을 짓고 만년을 보내며 느꼈던 퇴계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이황은 낙동강 변 도산(陶山)에 지은 도산서당에 기거하면서 느낀 마음 등을 읊은 시를 모아 엮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남겼다. 그 서문에 해당하는 '도산잡영병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어떤 때는 바위에 앉아 샘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 물가에서 고기를 살펴보기도 하며, 배를 타고 갈매기를 가까이하기도 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서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눈 닿는 곳마다 흥이 인다.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일어나는데 흥이 극에 달해 돌아온다.그러면 온 집이 고요하고 도서는 벽에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고 사색하여, 왕왕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의 가르침에 힘입고, 그래도 얻지 못하면 분발하면서도 감히 억지로 통하려 하지는 않았다. 잠시 한쪽에 놔두었다가 때때로 끄집어내어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고 풀어보면서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늘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할 것이다.'◆도산서당도산서당은 이황이 이곳에 터를 잡고 1557년에 착공, 4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1561년 완공한 서당이다. 이황의 편지에는 건물의 방향이나 세세한 수치까지 있어 얼마나 세심하게 서당을 계획하고 추진했는지 알 수 있다. 세 칸 반짜리 이 서당 건물과 함께 그 서편에 제자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농운정사도 함께 지었다. 이 건물들에는 '도산서당' '암서헌(巖栖軒)' '완락재(玩樂齋)' '농운정사' '시습재(時習齋)' '관란헌(觀瀾軒)' 등 건물과 마루 등의 이름을 적은 현판이 많이 걸려 있는데, 모두 이황이 직접 작명하고 친필로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이황 글씨의 멋과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황의 글씨에 대해 제자 성재(惺齋) 금난수(1530~1604)는 '필법은 단정하고 굳세고 아름답고 중후하여, 다른 명가에서 기이하고 괴상함을 숭상할 뿐인 것과는 다르다'고 평했다.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은 '따뜻하고 편안하며 화목한 의중이 필묵에 드러나 있다. 옛사람들의 덕성을 어떻게 언행과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이황은 또 서당 주변에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각기 이름을 붙임으로써 성리학적 가치관과 이상을 담아 구현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서당 앞의 낙동강 변 좌우에 만든 천광운영대와 천연대는 그 대표적 공간으로, 이황은 이곳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천지자연의 이치를 탐구했다. 서당 건물 근처의 연못 '정우당(淨友塘)',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은 '절우사(節友社)', 샘 '몽천(蒙泉)' 등도 마찬가지다.이황은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다 1570년에 별세했다. 이황이 기거하던 도산서당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금난수는 '고서 천여 권을 좌우 서가에 나누어 꽂아 두시고 화분 하나, 책상 하나, 벼루 집 하나, 안석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 삿자리, 향로, 혼천의가 있었다. 그리고 남쪽 벽 윗면 뒤에 가로 선반을 설치하고 옷상자와 서류함을 비치했다. 이외 다른 물건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도산서원도산서원은 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토대로 그 뒤쪽에 누각 형태의 장서각인 광명실, 강당인 전교당, 사당인 상덕사 등을 건립해 1574년 서원을 개원했다. 이듬해에 사액을 받았다. 전교당 처마에 걸린 '도산서원' 사액 현판은 선조 임금이 각별하게 아낀 당대 최고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하고 있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복제본이다.강당 뒤에 있는 사당 상덕사에는 이황의 위패와 함께 이황의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1524~1826)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15세 때 이황의 제자가 된 조목은 봉화현감,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학문에만 전념한 대학자였다. 이황 사후에는 스승을 대신해 서당에서 원생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문집 발간과 서원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도산서원과 그 주변 자연환경은 안동댐(1976년 준공)이 건설되면서 일부 계곡이 수몰되고 메워지며 석축이 쌓이는 등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이황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그의 학풍은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의 대표적 학파인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조선을 넘어 일본 유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들로부터도 크게 존숭을 받았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중일 동양 3국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황이 별세하자 선조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610년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모셔졌다.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이들이다.이황을 기리는 서원은 전국 40군데 정도에 이르고, 도산서원은 제3공화국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비 보조로 대대적으로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곽종석은 "이황은 동방 도학의 근본이고,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으뜸"이라고 했다.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도산서원 중 도산서당 주변 모습.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만년에 심혈을 기울여 지어 학문을 탐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 별세한 곳이다.이황이 거처하며 자연을 완상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암서헌 마루. 앞에는 연못 정우당이, 옆에는 매화와 국화 등을 심은 절우사가 있다.
2020.10.26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3] 영주 소수서원(하)..."교육은 기근 구제보다 급하다" 주세붕의 각별한 서원건립 애정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새로운 교육 과정과 시설을 구축하는 만큼 그 설립자인 주세붕의 서원 건립에 관한 생각과 준비 과정은 각별했을 것이다. 건립 당시 그의 각별한 마음과 노력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을 소개한다. 당시 지식인(선비)들의 가치관과 의식 등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후 자신의 글을 비롯한 관련 기록을 수집해 엮은 '죽계지(竹溪志)'의 서문 글이다.◆'죽계지' 서문 1541년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에 내가 풍기에 도착했는데,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었고 다음 해(1542년)에도 큰 기근이 들었다. 1542년에 백운동에 회헌(안향) 선생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1543년)에는 향교를 고을 북쪽으로 옮기고 사당 앞에 따로 서원을 세웠다.<중략>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중략> 아, 회옹(晦翁: 주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는 바로 문성공(안향 시호)의 궐리(闕里: 공자의 고향으로, 고향을 의미)다. 교육을 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성공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태평한 세상을 만나 이 고을 군수가 되었으니 고을을 위해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마음과 힘을 다해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며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의 고사(故事)에 따라 하고서, 무궁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중략> 공은 실로 우리나라 도학의 조종이다. 비록 설홍유(薛弘儒: 설총), 최문창(崔文昌: 최치원) 같은 훌륭한 유학자도 그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나머지야 어떻게 더 말하겠는가. 아, 공의 사적이 이러한데도 문묘에 종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사에서 '안모(安某)가 섬학전을 마련한 공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고 하였으니, 사관의 식견이 비루한 것이 이와 같다. 공의 시에 '곳곳마다 향불 피워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피리소리 신을 섬기네(簫管家家盡事神)/ 유독 두어 칸 공자 사당에는(獨有數間夫子廟)/ 봄풀만 가득하고 찾는 이 없어라(滿庭春草寂無人)'고 읊었으니 사교를 배척하고 정도를 걱정한 뜻이 지극하다.<중략> 공의 학문은 비록 주자에 미치지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국내 最古 '안향 초상화' 봉안아들 안우기 찬문 써 내력 기록소수서원 제례때 '도동곡' 불러주세붕이 창건당시 지은 노래경기체가 형식 도학·안향 찬양 ◆안향 초상화에 쓰인 글소수서원에는 안향 초상화가 봉안돼 있는데, 이 초상화는 우리나라 현존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화폭 상단에 안향의 아들 안우기(1265~1329)가 쓴 찬문(撰文)이 있어 그 내력을 알게 한다.이 초상화는 1318년 고려 충숙왕이 학교를 세운 안향의 공을 치하하며 영정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고, 고향에 제사를 올리게 하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흥주수(興州守 : 흥주는 영주 옛 이름) 최림이 1본을 더 모사해 향교에 봉안했다. 향교에 봉안된 영정은 이후 한양의 대종가로 옮겨졌다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요청하자 안향의 후손 안정이 모시고 내려와 1543년 문성공묘에 봉안하게 되었다. '지난 연우(延祐) 5년(1318) 2월에 유지(宥旨)가 내렸다. 그 조목에 의하면 '도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 안향은 학교를 숭상하여 설치한 공이 있으니 공자 사당에 영정을 봉안하고 고향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라' 했다. 흥주수 산랑(散郞) 최림이 임금의 유지에 따라 영정 한 벌을 그려 향교에 봉안했다. 당시 사자(嗣子) 우기가 마침 조정의 부름을 받아 변방에 나가 있었는데, 최림이 이를 보여주었다. 이에 향을 피우고 절한 뒤 찬(贊)을 쓴다. 선친께서 예전에 유풍을 진작하신 공으로/ 영정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라 명하였네/ 한 폭의 진상 고향에서 빛나고/ 사계절 제사 올려 큰 공에 보답하네.이해 가을 9월 경상전라주도순무진변사 광정대부 검교평리겸판전의사시 상호군 안우기 절하고 쓰다.'◆450년 이어진 제례악 '도동곡'소수서원의 제사 의례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절차는 '도동곡(道東曲)'이라는 가사를 부르는 점이다. 주세붕이 소수서원 창건 당시에 지은 노래로, 공자와 주자 등의 도학(성리학)을 칭송하고 그 도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사 때 헌관이 잔을 올릴 때마다 부르는 곡인 이 노래의 형식은 경기체가다. '초헌: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皇帝), 요순(堯舜)이 하늘을 이어 법을 세우니, 그 광경 어떠한고/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만 실로 중(中)을 잡을 수 있네/ 아, 주고받는 성인의 심법이란 다만 이것뿐이로다/ 우탕문무(禹湯文武)와 고이주소(皐伊周召) 군신(君臣)이 서로 만났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아헌: 하토(下土)가 아득하니 상제께서 이를 걱정하사 우정대인(공자)을 수사 위에 내리시니/ 만고 연원이 그치지 아니하도다/ 안연의 사물(四物)과 증자의 삼성(三省)이여, 우러러봄에 더욱 높고 뚫으려 함에 더욱 견고하며 앞에 보이는 듯하다가 문득 뒤에 있도다/ 성인을 배우며 수고로움 잊으셨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따라야 할 것은 하늘이 명한 성(性)이며 함양해야 할 것은 호연지기이고, 정성 다함을 쉬지 않는 것이 근본이니라.삼헌: 광풍제월(光風霽月) 서일상운(瑞日祥雲), 도통이 끊어진 기나긴 날에 어떻게 아셨을까/ 사람 욕심 걷잡을 수 없어 하늘까지 뒤엎었도다/ 1천500년 만에 주자께서 태어나시어 경(敬)으로 근본 세워 큰 언덕 만드시고, 옛 성인이 이으시고 후학이 열어 주셨도다/ 아 공자와 다를 바 있으랴/ 삼한 천만년에 진유(眞儒)를 내리시니, 소백산이 여산(廬山)이요 죽계수가 염수(濂水)로다/ 학교 일으키고 도를 보호함은 작은 일이겠지만, 주자를 높여 모신 그 공이 크시었다/ 우리나라에도 도가 전해졌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소수서원 제사 때 읊는 가사인 '도동곡'. 고려 후기에 발생한 시가인 경기체가 형식으로 되어 있고, 도학(성리학)과 도학을 우리나라에 전한 안향을 찬양하고 있다. 〈소수박물관 제공〉소수서원에 있는 안향 초상화. 현존 국내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소수박물관 제공〉소수서원 지락재에 걸려 있던 백운동서원령 현판. 학생들에 대한 음식 제공, 서고 출입 등에 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다. 〈소수박물관 소장〉
2020.10.05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2] 영주 소수서원(상)...朱子 강학했던 백록동서원이 모델, 입구엔 870여 그루 '학자수림'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이 소수서원(경북 영주)을 세운 후 남긴 기록이다.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풍기군수 시절인 1543년에 지역 사림의 힘을 모아 건립한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설립 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죽계천이 흘러가며 만들어낸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다. 죽계천이 서원 동쪽을 돌아 흘러가고 있는데, 건물과 주변 자연의 조화가 돋보인다.주세붕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해 연구한 안향(1243~1306)이 젊은 시절 공부하던 곳인 숙수사(宿水寺) 터에 문성공(文成公) 안향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세우고, 사당 옆에 강학당을 지어 백운동서원을 창건했다. 성리학을 확립한 중국의 주자가 1178년 장시(江西)성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부임하면서 중수한 뒤 직접 원장이 되어 강학하며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애썼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델로 삼아 설립했다. 백록동서원은 장시성 여산(廬山) 아래에 있다.◆최초 사액서원백운동서원은 이황(1501~1570)이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듬해인 1549년 12월 이황은 경상도관찰사에게 중국 송나라의 선례에 의거, 서원의 교육기능 강화를 통한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해 서책과 편액, 토지, 노비 등을 지원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우리나라 교육은 중국의 제도를 좇아 서울에 성균관과 사학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으나 서원이 없는 것이 큰 흠이었는데, 주세붕 군수가 주위의 비웃음과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에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이란 반드시 나라의 인정을 받아야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근원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또 주세붕 군수와 안현 감사가 아무리 설비를 잘해 놓았다 할지라도 이는 한 군수와 방백이 한 일이라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국사에 오르지 못하면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께서는 위에 아뢰어 송나라 때의 예와 같이 서적과 편액, 토지, 노비를 내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명종 윤허로 첫 사액서원에소수서원 친필 편액도 하사정문 앞 건립 '경렴정' 눈길세계유산 서원 중 유일 정자유생들 풍류 즐기던 휴식처이황의 글 중 일부다. 1550년 조정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대제학 신광한(1484~1555)이 지은 '소수(紹修)'라는 명칭을 명종 임금이 윤허함으로써 서원 이름으로 정했다. 그리고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을 하사했다. 당시 명종은 16세였다. 이로써 최초로 나라의 공인을 받은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탄생했다. '소수'는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 소수서원 이후 서원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향촌 사회의 교화를 통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소수서원 입학 정원은 처음에는 10명이었으나 사액 이후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명품 송림 '학자수림'소수서원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멋진 소나무 숲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노송 군락이다. 선비들이 그 기상을 닮으라는 의미에서 '학자수(學者樹)'라 부른 적송 870여 그루가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청정한 기상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수령은 300~500년. 이 송림과 관련, 1586년과 1614년에 이 지역 선비들(황응규, 이준)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64년 정월 25일에 소나무 1천 그루를 심어 500그루가 살아남았는데, 소를 방목하거나 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잘 관리하고 오솔길을 가다듬으며 사이사이에 소나무를 보완해 심어 무성하게 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도 '소수서원 잡록'에 담겨 있다. 1757년 봄부터 1758년 봄까지 소나무를 보충해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학자수림이 끝나는 곳에 높이 4m의 숙수사터 당간지주가 서 있어 이곳이 숙수사가 있던 곳임을 알게 한다. 숙수사는 1458년에 화재로 타버렸으며, 보물 제59호인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서원 입구(志道門) 앞에 서 있는 정자 경렴정(景濂亭)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경렴정 뒤쪽으로 죽계천이 흘러가고, 그 건너편 오른쪽 천변 솔숲 속에 자리한 정자 취한대(翠寒臺)가 각별한 풍광을 선사한다. 서원에 이처럼 정자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세계유산 서원 9개 중에는 소수서원이 유일하다. 경렴정은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풍류를 즐기던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다. 주세붕이 서원 건립 때 지은 정자다. 서원이 일정한 틀을 갖추기 전이어서, 누문(樓門)이 없는 대신 이런 정자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다른 서원에는 없는 정자 건물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 첫 글자를 따와 '경렴(景濂)'이라 지은 것이다.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이황의 문인인 고산(孤山) 황기로가 이황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정면 처마의 해서 '경렴정' 글씨는 주세붕이 썼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이황 등의 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바로 옆에는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다.경렴정 앞의 서원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강당인 명륜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 명륜당 안에 명종 임금 글씨의 '소수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처마에는 '백운동' 현판이 걸려 있다. 제작 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1543년 백운동서원 건립 당시의 현판을 1610년 봄에 새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세붕 글씨로 추정된다. 명륜당 뒤편에 학생과 스승과 서원 임원들이 기거하던 직방재·일신재가 있고, 그 오른쪽에 학생들의 공간인 지락재·학구재가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가진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강당의 서쪽에 안향을 기리는 사당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대부분 사당은 '사(祠)'라고 부르지만, 나라에서 인정하고 임금이 윤허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廟)'라 칭한다. 소수서원의 사당은 그 위상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 '묘'로는 역대 임금들 위패를 모신 종묘, 공자를 기리는 문묘가 있다.사당에는 안향과 안축(1282~1348), 안보(1302~1357), 주세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안축과 안보는 안향의 후손이자 이 지역 출신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 학자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영주 소수서원은 '학자수림'으로 불리는 입구 소나무숲이 유명하다. 창건 이후 꾸준히 심어 관리한 300~500년 된 소나무 870여 그루가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학자수림이 끝나는, 서원 정문 앞에 있는 정자 경렴정.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정자로, 주세붕이 쓴 '경렴정' 현판이 처마에 달려 있다.소수서원 강당 처마에 걸린 '백운동' 현판. 사액 전 '백운동서원'에 걸려 있던 것으로, 주세붕의 글씨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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