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0] 정읍 무성서원...신라 대학자 최치원 배향…일반 서원과 달리 마을 중심부에 자리잡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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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1   |  발행일 2021-01-11 제20면   |  수정 2021-07-06 15:36

무성서원
무성서원 강당인 명륜당. 가운데 3칸이 마루인데 앞뒤로 트여 있다. 마루 뒤쪽에 사당 입구 문이 보인다.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은 다른 세계문화유산 서원에 비해 규모가 적고 건물도 매우 소박하다. 그리고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뒤쪽을 제외하고는 앞과 옆에 주민의 농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웃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인물들도 독특하다. 다른 서원처럼 조선 시대의 유명한 선비(성리학자)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처음에 위패를 모신 인물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관리인 고운(孤雲) 최치원(857~?)이다. 그 후 6명이 추가로 배향됐다. 그중 불우헌(不憂軒) 정극인(1401~1481)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인물로 유명하고, 영천자(靈川子) 신잠(1491~1554)은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다. 글씨를 잘 썼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정읍 지역의 군수를 지냈다. 최치원은 태산(태인 옛 지명) 태수를, 정극인과 신잠은 태인현감을 지냈다. 눌재 송재림(1479~1519), 묵재 정언충(1491~1557), 성재 김약묵(1500~1558), 명천 김관(1575~1635)은 이 지역 출신으로, 주로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후진을 교육한 인물들이다.


태산주민들 그의 선정 기려 지은 '생사당'이 서원으로 발전
정극인·신잠·송재림·정언충·김약묵·김관 위패도 추가 봉안
담장 안에 강당인 명륜당과 사당만 있는 독특한 건물 배치
구한말 최익현·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 거점으로도 유명



◆고운 최치원 기리는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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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 사당에 모셔진 최치원 초상. 유명 초상화가인 채용신(1850~1941)이 그렸다.

최치원을 기리는 무성서원은 1615년에 서원으로 문을 열게 됐는데, 건립 과정도 독특하다.

최치원은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해 당나라의 과거제도 실시를 비롯한 국가행정 전반의 개혁을 건의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폐쇄성에 부딪혀 한계를 느끼고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 태산 태수로 부임했다. 28세 때 일이다. 8년 동안 선정을 베풀고 함양군수로 떠나자, 주민들이 그의 선정 치적을 기려 최치원을 위한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는 인물을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짓고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태산사는 고려 말에 훼손됐으나 1484년 유림의 발의로 칠보 월연대에서 지금의 무성서원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그 후 1544년 신잠이 태인 현감으로 부임해 5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강원도 간성 군수로 떠나자, 주민들이 또 신잠의 생사당을 세워 기렸다. 나중에 최치원의 태산사에 함께 합쳐 기리다가 1615년 지역 유림이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1696년에는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의 통일신라 시대 대문장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2세(869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까지 지내면서 필명을 날렸다. 당나라 유학 시절인 882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보냈다. 이 글을 읽던 황소가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당나라에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진성여왕 8년(894)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10가지 정책(時務十條)'을 제시해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지리산 등 우리나라 곳곳에 머문 흔적을 남기며 지내다가 가야산으로 들어간 후 종적을 감춰버렸다.

최치원은 문묘에 배향된 최초의 우리나라 학자이기도 하다. 유교 명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文廟)는 우리나라의 경우 714년(신라 성덕왕) 처음 건립됐다. 그동안 공자, 안자, 증자, 맹자, 주자 등 중국의 명현들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1020년(고려 현종) 최치원의 공적을 높이 인정해 처음으로 우리나라 학자를 향교 문묘에 배향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 때 설총과 안향의 위패가 봉안되고, 조선 때 15위의 위패가 추가되면서 18위의 우리나라 유현(儒賢)이 모셔지게 되었다.

◆독특한 건물 배치

무성서원도 기본적인 서원 건물 배치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입구에는 다른 서원처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출입문을 겸한 문루인 현가루(絃歌樓)가 눈에 들어온다. 2층 누각의 이름인 '현가루' 명칭에 이 서원 건립의 취지와 의미가 담겨 있다.

'현가'는 공자의 일화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노나라 무성(武城)의 현감이 되었는데,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잘 다스렸다.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아가니 마침 현가지성(絃歌之聲: 현악에 맞춰 부르는 노래)이 들려와 탄복했다고 한다.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서원이 예악을 일으켜 백성과 가깝게 있도록 해야 한다는 공자의 교화사상을 담고 있다. 무성은 정읍의 신라 시대 지명이기도 한다.

현가루를 아래로 담장 안에 들어서면 '무성서원' 사액 현판이 걸린 강당(명륜당)이 보인다. 다른 서원과 달리 명륜당 건물 하나만 있고, 동재와 서재는 없다. 강당 건물(정면 5칸 측면 3칸)은 가운데 3칸이 대청이고, 좌우 한 칸씩은 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은 앞뒤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대청에 앉으면 앞에는 현가루가, 뒤로는 사당인 태산사(泰山祠)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루 위에는 기문과 시 등이 새겨진 현판이 가득 걸려 있다.

강당 바로 뒤에 있는 사당 입구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의 으뜸이라(士林首善)/ 임금(숙종)께서 이름 지어 현판 내리셨네(聖朝額恩)'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최치원 초상화와 함께 최치원을 비롯한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담장 안에는 이렇게 강당과 사당만 있고, 담장 동쪽 밖에 동재(東齋)라 할 수 있는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강수재 앞에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서 있다.

무성서원은 구한말 병오창의(丙午倡義)로도 유명하다. 1906년 병오년에 최익현(1833~1906년)과 임병찬(1851~1916년)이 의병을 일으킨 거점이 이곳이다. 을사늑약으로 굴욕적인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최익현과 임병찬은 1906년 6월4일 무성서원에 모여 강회를 연 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태인·정읍·순창·곡성을 점령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등 13명이 서울로 압송됐다. 최익현은 다시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단식으로 저항하다 순국했다.

이를 기념하는 병오창의기적비가 강수재 앞에 세워져 있다. '무성창의'로도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무성서원의 위상과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익현의 창의가 무성서원의 강회와 유림 동원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병찬은 조선으로 돌아와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자 단식으로 순국했다. 무성서원에서는 항일 구국 의병들의 호국정신과 의로운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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