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9] 장성 필암서원(하)...인종이 그려 김인후에 선물한 '묵죽도'…이상적 君臣관계 후대 본보기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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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28   |  발행일 2020-12-28 제20면   |  수정 2021-07-0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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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 그려 김인후에게 선물한 묵죽도. 그림에 대한 화답으로 김인후가 지은 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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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묵죽도와 그 목판을 소중히 보관하라며 정조가 지어 준 경장각. 편액 '경장각' 글씨는 정조 친필.

필암서원에는 다른 서원에는 없는 건물인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소중한 것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의 이 경장각은 김인후와 인종의 각별한 인연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가 지시해 세우도록 한 건물로, 인종이 김인후에게 선물한 묵죽도(墨竹圖)를 새긴 목판을 보관해 왔다. 정조의 친필 글씨인 '경장각' 편액은 특별히 망사로 보호되고 있다.

◆왕세자와 선비의 운명적 만남

김인후는 영남의 이황에 비견되는 대학자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된 18인의 유학자 중 유일한 호남 출신의 학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시를 잘 지어 신동으로 불리던 김인후는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31세(1540년) 때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는데, 이때 안동에서 올라온 이황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깊이 사귀게 되었다.

그는 사가독서 후 홍문관의 정자를 거쳐 박사로 있을 때,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설서(設書)를 겸하면서 인종과 운명적인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인종은 29세, 김인후는 34세였다. 1543년의 일이다. 인종은 시강원의 여러 스승 가운데 특히 김인후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김인후가 당직을 서는 날 밤이면 매번 찾아가서 긴 시간 학문을 논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대윤과 소윤의 갈등 속 권력투쟁이 치열하던 때여서, 학덕이 높은 참된 선비이자 스승인 김인후에게 인종이 각별한 존경심과 호감을 가진 것 같다.

송시열은 "인종은 김인후의 도덕과 학문이 훌륭함을 알아 성심으로 예우했고, 김인후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요순의 정치를 펼 것으로 여겼다. 두 분의 만남은 날로 더욱 짙어지고 기대도 날로 더욱 높아 갔다"고 했다.


홍문관 박사-세자로 사제의 연
존경·신뢰 쌓으며 각별한 교류
인종 즉위 8개월 만에 단명하자
김인후 몇날 대성통곡 후 낙향



오랫동안 왕세자 교육을 받은 인종에게 궐 안팎의 사람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1544년)한 직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1545년 8개월 만에 명을 다하고 만다. 소식을 들은 김인후는 문을 닫아걸고 몇 날을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병을 핑계 삼아 향리로 낙향, 세상을 등진 채 평생을 학문을 닦으면서 보냈다. 그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음력 7월1일)이 되면 집 앞산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통곡했다.

인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자 김인후에게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 교리를 제수했다. 이에 그는 두어 섬의 술을 싣고 마지못해 서울로 떠났다. 가다가 대나무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대나무숲·꽃과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인종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인종을 위해 그는 이렇게 절의를 지켰다.

그는 인종에 대한 그리움을 '유소사(有所思)'라는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임의 나이 서른이 되어가고(君年方向立)/ 내 나이는 3기(1기는 12년)가 되려는데(我年慾三紀)/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新歡未渠央)/ 한 번 이별은 화살 같네(一別如絃矢)/ 내 마음은 굴러갈 수 없는데(我心不可轉)/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世事東流水)/ 젊은 나이에 해로할 짝을 잃었으니(盛年失偕老)/ 눈은 어둡고 머리털과 이빨도 쇠했네(目昏衰髮齒)/ 덧없이 살기 몇 해던가(泯泯幾春秋)/ 지금까지도 죽지 못했네(至今猶未死)/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栢舟在中河)/ 남산에는 고사리 돋아나는데(南山薇作止)/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여(却羨周王妃)/ 살아 이별하며 권이곡을 노래하다니(生離歌卷耳)'

먼저 떠난 젊은 왕을 그리며 지은 시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가련한 여인의 한을 빌려 그리움을 표현했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

인종은 세자시절인 1543년 자신의 마음이 담긴 묵죽도를 그려 김인후에게 내린다. 이 그림에는 우뚝 선, 거친 바위 뒤에 네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왕의 명에 따라 쓴 아래 시가 담겨 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사귀 모두 정미해/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하네/ 이제야 알겠네 성스러운 솜씨가 조화를 짝해/ 하늘 땅이 한 덩이로 어김없이 뭉쳤음을(根枝節葉盡精微 石友精神在範圍 始覺聖神모造化 一團天地不能違)'

그림 속 바위가 대나무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내용이다. 왕이 그림을 그려 스승에게 주고, 스승은 그림에 답시를 쓴 존경과 신뢰의 증표인 셈이다.


묵죽도에 충정의 답시 쓴 스승
'뿌리 가지 잎사귀 모두 정미해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
그의 덕행과 절의 감탄한 정조
"경장각 지어 그림 소중히 보관"



인종과 김인후의 이야기는 후대에도 전해지면서 군신관계의 표본으로 남았다. 김인후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선왕인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필암서원에 경장각을 세우게 했다. 1786년경의 일이라고 한다. 친필로 '경장각' 편액 글씨를 내리고, 하서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인종 묵죽도와 그 목판을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했다.

정조는 김인후의 치제문(致祭文)에서 인종의 묵죽에 대해 '대궐 비단 옛날 먹빛은/ 거룩한 상감의 그림이시네/ 천년 뒤에 자세히 살펴보니/ 대는 더욱 푸르고 마음은 더욱 붉어라(宮초古墨 盛際繪事 千載省識 筠碧心丹)'라고 읊었다.

현재 인종의 묵죽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목판에 새긴 묵죽도판각(墨竹圖板刻)이 전한다. '인종대왕묵죽'이라는 제목이 새겨진 목판본 묵죽도(97.5x62.3㎝)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기 1년여 전에 스승으로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김인후에게 내린 묵죽도는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표본으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후대에 필암서원에서 목판으로 제작했다. 관련 기록으로 유숙기(兪肅基·1696~1752)가 1736년에 남긴 '어화묵죽발(御畵墨竹跋)'도 전한다. 이 서두에 '인종대왕이 동궁에 있을 적에 당신이 그린 그림을 신하 김인후에게 주셨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여러 번 모각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발문은 인종대왕묵죽도 목판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남긴 글이다. 1668년에 김인후를 자헌대부로 추증하면서 목판본의 인본을 만들어 인종의 묘소인 효릉 재실에 보관하게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인본이 훼손되자 당시 효릉 재사를 관리하던 유숙기가 이를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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