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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미학 .4] 닫집...불단 위 천장에 펼쳐진 ‘불국정토’…전통 공예미의 정수
산사의 옛 전각들 중에는 매우 소중한 문화재가 적지 않다. 재력과 권력, 신심의 뒷받침 아래 당대의 대표적 건축가와 공예가들이 최고 수준의 솜씨를 동원한 작품들이다. 특히 법당 안에 들어서면 당대 최고 전문가들의 솜씨가 한 곳에 농축돼 있는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불상 위 천장에 매달려 부처님을 장엄하고 있는 닫집이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닫집은 전통 건축미와 공예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닫집이지만 법당 안 천장에 있는 데다 조명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일반인은 물론 불교 신도들도 그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법당 안 불상 위에 만들어 놓은 장엄물닫집은 존귀한 존재를 장엄하기 위해 건물 안 천장에 별도로 만들어 놓은 집 형태의 조형물이다. 주로 사찰 법당의 불상 위나 궁궐의 어좌 위에 조성돼 있다. 닫집은 ‘당가(唐家)’라고 하는데,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된 집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닫집의 ‘닫’은 ‘따로’라는 옛말로, 닫집은 ‘따로 지어놓은 집’이란 뜻이다. 이 닫집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산개(傘蓋)나 일산(日傘)에서 비롯돼 천장을 장식하는 장엄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존귀한 존재 장엄하는 집 형태의 조형물석가모니 햇볕가리개서 비롯된 것 추정연꽃·오색구름 등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쌍계사 대웅전·화암사 극락전 닫집 유명법당 안 어두컴컴해 예술적 가치 가려져사찰의 닫집은 불단(佛壇) 위에 장엄물로 조성되는데, 천개(天蓋)라고도 한다. 인도는 더운 나라여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할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산개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후에 닫집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천으로 만들어졌으나 점차 목재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법당의 닫집은 부처의 세계인 불국정토, 극락세계의 궁전을 가리키는 적멸궁, 칠보궁, 만월궁, 내원궁 등을 상징한다. 이러한 닫집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형태에 따라 일반적으로 보궁형(寶宮形), 운궁형(雲宮形), 보개형(寶蓋形)으로 나눈다. 보궁형은 공포를 짜 올려 천장과 별도로 독립된 집 모양을 만들어 설치하는 형식이다. 현재 가장 많이 남아있는 닫집 형태이다. 공포 아래에는 짧은 기둥이 달려 있는데 이를 헛기둥(虛柱)이라고 부른다. 보궁형 닫집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닫집처럼 단아하고 조촐함을 보이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변해갔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 완주 화암사 극락전, 강화 전등사 대웅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 등 사찰 법당 닫집의 대부분이 보궁형이다. 보궁형은 일자(一字)형, 아자(亞字)형, 정자(丁字)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운궁형은 공포를 짜 올리지 않고 장식판재 등으로 구획을 짓고 안쪽에 극락조, 오색구름, 용, 봉황 등 길상의 상징물들로 장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청도 운문사 비로전, 서산 개심사 대웅전, 남양주 봉선사 금당,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경산 환성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보개형은 천장 일부를 감실처럼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로 설치된다. 특별한 장식물 없이 용이나 봉황 등을 단청으로 장식하고, 천장 속 공간의 사면에 공포(전통 목조건축에 쓰이는 조립부분 부재) 모형을 짜 넣어 집 모양을 만들고 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지은 법당에서 볼 수 있는 초기 닫집 형태이다. 대표적으로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안동 봉정사 대웅전, 문경 봉암사 극락전 등에서 볼 수 있다.닫집은 보개형에서 운궁형, 보궁형으로 발전해왔다. 보궁형의 경우 기둥으로 닫집의 하중을 받치는 형식인 지지주형(支持柱型)과 닫집을 천장에 매다는 형식인 현괘형(懸掛型)이 있다.닫집은 다포계의 섬세한 포작(包作: 처마의 공포를 짜맞추는 일) 기술을 총동원하고 용, 극락조, 연꽃, 오색구름 등의 화려한 조형물로 장식해 신성한 불국정토의 세계를 표현한 것인 만큼 특별할 수밖에 없다.◆논산 쌍계사 대웅전 닫집 등이 특히 유명사찰 법당의 닫집 중 논산 쌍계사 대웅전의 닫집이 정교하면서도 절제된 품격을 갖춘 대표적 닫집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보물 제408호)이 재건축된 1738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닫집은 보궁형 닫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꼽힌다. 불단에 모셔진 세 불상 위에 각각 별도의 닫집이 조성돼 있고, 다른 사찰의 닫집과는 달리 각각 ‘적멸궁(寂滅宮)’ ‘칠보궁(七寶宮)’ ‘만월궁(滿月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지지 기둥이 있는 지지주형 닫집이다.가운데 석가모니불 위 닫집이 적멸궁이고, 왼쪽 아미타불 위의 닫집이 칠보궁, 오른쪽 약사여래불 위 닫집이 만월궁이다. 중층의 목조건물 형태로 조성된 닫집은 층별로 처마 아래에 한 층에 10개 정도씩의 공포가 첩첩이 짜여 있다. 그리고 전실(1칸), 중실(3칸), 후실(5칸)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 처마(겹처마)들이 만들어내는 곡선미가 아름답다. 처마 귀퉁이 위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 불길 모양의 장식물)가 장식돼 있다.닫집 안은 오색구름 사이로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고, 아래로 뻗은 헛기둥 끝에는 다양한 형태의 연꽃이 조각돼 있다. 닫집 천장에는 용의 몸체와 학, 영지 등이 그려져 있다. 용은 칠보궁과 만월궁에는 한 마리씩만 조각돼 있지만, 적멸궁에는 아홉 마리의 용조각이 있다. 그리고 적멸궁 닫집 앞에 세 마리의 극락조가, 만월궁 앞에는 한 마리의 극락조가 날고 있다. 쌍계사 주지 종봉 스님은 극락조가 더 많이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국보 제316호, 1605년 건립) 닫집도 유명하다. 작은 삼존불 위에 지지주형으로 된 단층 아자형 닫집이다. 매우 화려하고 다양한 조각물들이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황룡 한 마리가 위력적인 기세로 꿈틀거리고 있고, 헛기둥에 피어난 열 송이 연꽃과 오색구름 등이 주위를 수놓고 있다. 그리고 비천상 한 쌍이 황룡 좌우에서 춤을 추고 있다.법당 장엄의 극치를 보여주는 닫집은 불교 가치관이 담겨있지만, 우리 전통의 건축미와 미의식이 어느 곳보다 잘 녹아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고딕 양식 건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난달 16일 화재로 대부분 불타버렸다. 대참사 현장을 지켜본 프랑스인은 물론 지구촌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 속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참사 후 곧바로 세계적 기업 등이 내놓겠다고 한 복구 성금이 1조원을 넘어섰다. 재산이나 권력을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고 복원하는 일에 쓰는 것은 특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아름답고 멋진 닫집을 가진 사찰 법당도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인류 문화재와 다름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닫집들을 어두컴컴한 법당 안에 둘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닫집들을 따로 복제해 한 곳에 모은 닫집 박물관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사찰 법당의 불상 위 천장에 장엄물로 만들어놓은 닫집은 전통 건축미와 공예미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 닫집인 논산 쌍계사 대웅전 닫집(위쪽)과 완주 화암사 극락전 닫집.
2019.05.02
[山寺미학 .3] 사찰과 용...佛法 지키는 용신…인간사회 양심·정의 바로 서도록 조화 부릴까
봉황과 함께 상상의 동물인 용은 매우 신령스러운 존재로,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하다. 용은 민족이나 지역,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역할이 조금씩 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해온 용은 중국인들이 상상했던 용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 위나라 장읍이 지은 자전(字典)인 ‘광아(廣雅)’는 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부분에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9·9 양수(陽數)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다.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다.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 : 공작 꼬리 무늬같이 생긴 용이 지닌 보물)이 있다.’ 이런 용에 대해 ‘관자(管子)’ 수지편(水地篇)에서는 ‘다섯 가지 색깔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다. 용은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용은 부정적 측면이 있기도 한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이처럼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수호신으로 통한다. 수호신 역할을 하는 용의 모습들은 산사에 가면 실컷 만나볼 수 있다. 커지고자 한다면 천하를 덮는 龍강력한 힘 가진 신령스러운 존재우리나라 불교에 수용 사랑받아부처 가르침 받들고 중생 구제도사찰 곳곳 다양한 장식물로 표현개암사 대웅전 천장 조각 빼어나◆불법 수호자인 용불교에서 용은 불법(佛法: 부처의 가르침, 진리)을 수호하는 신장들인 천왕팔부신중(天王八部神衆)의 하나로, 팔대용신이 대표적이다. 이 용신들은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고, 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이런 역할을 하는 용은 사찰 곳곳에 다양한 장식물로 나타난다. 사찰입구에 세우는 깃대인 당간(幢竿)의 꼭대기를 용머리 조각으로 장식하는데, 용두보당(龍頭寶幢)이라 한다. 범종의 가장 윗부분인 고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용뉴라고 한다. 그리고 법고와 목어도 용 그림으로 장식해 용의 소리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우주법계에 두루 울리게 하는 상징성을 갖게 하였다. 또한 석등에도 용을 조각해 진리의 등불을 수호하는 의미를 부여했다.탑의 상륜부와 법당의 공포에도 용을 조각해 부처님을 수호하게 했다. 법당의 용 형상 가운데 법당 전면의 중앙 칸 양쪽 기둥머리 바깥쪽에 만들어놓은 용두의 경우, 안쪽에 용미(龍尾)가 장식되어 있으면 이때 용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선수(船首)를 상징한다. 또 법당 안 불상의 머리 위 닫집 속과 대좌에 용을 배치해 부처님을 최근거리에서 수호하게 했다. 법당 안 천장과 기둥에도 용을 조각해 장엄하고 있다. 불화(佛畵)에도 용이 등장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승주 선암사의 경우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아치형의 돌다리인 승선교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 밑에 용머리 조형물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뛰어난 조각 솜씨가 발휘된 이 용머리는 계곡의 물을 타고 사찰 경내로 들어올지 모를 사악한 무리들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이처럼 용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의 중요한 장엄물로 다양하게 활용되며 사랑을 받아왔다.◆대웅전 용조각사찰의 용 중에서도 대웅전(대웅보전)의 용조각이 대표적이다. 부안 능가산 개암사의 대웅보전 용조각은 특히 뛰어나다. 1636년에 중건된 건물인 이 대웅보전(보물 제292호)을 보면, 우선 바깥 처마 두 귀퉁이에 멋진 용머리가 조각돼 있다.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법당 안에 들어가면 불상 주위의 천장에 7개의 용머리 조각이 보는 이들을 압도할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모습들이다. 대들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은 몸통도 형상화하고 있고, 머리만 있는 용은 그 위에 봉황이 함께 조각돼 있다. 불상 위의 닫집에도 5마리 용이 엉켜 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근처의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안 천장에서도 특별한 형태의 용조각을 만날 수 있다. 1633년에 건립된 이 대웅보전은 아름다운 꽃살문으로도 유명하다. 양쪽 공포 위에서 솟아나 대들보에 머리 부분을 걸친 두 마리 용이다. 몸체에는 비늘이 그려져 있고, 용 머리가 매우 화려하다. 부릅뜬 눈과 쫑긋한 귀, 날카로운 뿔과 긴 수염이 생동감을 준다. 한 마리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붉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바깥 처마 네 귀퉁이에도 용머리가 장식돼 있다.대구 팔공산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에도 용이 많다. 대웅전 앞쪽에서만 용을 14마리나 만날 수 있다. 처마 아래 공포(처마의 하중을 받치기 위한 부재)의 맨 위쪽에 용이 조각된 것이 12개이고, ‘대웅전’ 현판 좌우에도 머리를 길게 내밀어 늘어뜨리고 있는 용조각이 있다. 편액 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내밀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매우 창의적이다. 법당 앞면의 용조각 장식은 통도사와 마곡사의 대광보전처럼 중앙 칸의 양쪽 기둥 위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웅전 뒤쪽 처마 귀퉁이 아래와 양 측면 공포에 5마리가 더 있다. 그래서 모두 19마리의 용이 대웅전 바깥쪽에서 부처님을 수호하고 있다. 안쪽에 들어가면 불상 위 닫집에 4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 대들보에도 용그림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은 이처럼 막강 수호신인 용들이 몇 겹으로 둘러싼 채 지키고 있다. 사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는 그렇게 지키지 않아도 침범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 삶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사회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일이다. 인간의 현실 삶에서는 눈에 보이는 용을 아무리 많이 동원시켜도 인간 스스로가 용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과 정의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정의가 침해받고 양심이 용기를 낼 때 ‘미투’ 바람이 폭풍처럼 불어닥친다면 용이 조화를 부리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용은 산사의 대웅전 등 법당 곳곳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전북 부안 개암사 대웅보전 천장의 용조각.
2019.04.18
[山寺미학 .2] 막존지해(莫存知解) 주련...이기심·편협함 버리라는 글귀, 마음의 문에 걸어두고 새겼으면…
요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하곤 한다.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생각이나 언행들이다.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듣거나 SNS를 통해 보게 되면서 겪는 일인데, 그 내용이 점점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현안을 비롯한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주장들을 접하다 보면, 건성으로도 동조하기가 쉽지 않아 난감해지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사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고, 자신있게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깨닫게 되니 더욱 그렇다. 나이가 들면 겸손해지고 지혜가 생기며 아량도 늘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고집이 강해지고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일 것이다. 전자인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더 살 만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후자가 많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인간사 불행한 일의 대부분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분별심이나 편협한 가치관에서 비롯된다.◆사찰 입구에 걸린 ‘모든 지식이나 분별심 버려라’는 글귀우리나라 최고의 참선수행 도량(사찰)인 문경 봉암사의 태고선원에 들어가는 문의 이름이 진공문(眞空門)이다. 이 문의 양쪽 기둥에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글귀를 네 자씩 나눠 새긴 주련이 걸려 있다.‘이 문 안에 들어서면 모든 알음알이를 버려라’는 의미다. 세속에서 가졌던 기존의 모든 지식이나 고정관념, 분별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부산 범어사에는 일주문(一柱門)과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나타나는 불이문(不二門)에 이 주련이 걸려있다. 이 불이문에는 왼쪽 기둥에 ‘입차문내막존지해’가 걸려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라는 글귀의 주련이 걸려 있다. 글씨는 범어사 조실로 오랫동안 주석한 현대의 대선사 동산 스님(1890~1965)이 썼다. 오른쪽 주련 글귀는 ‘밝고 신령스러운 빛이 영원히 빛나다’라는 의미다.참선수행 도량으로 드는 문 기둥에‘입차문내막존지해’ 선가귀감 구절세속의 모든 알음알이 없애고 나면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다는 가르침정치인·지도자들 극단으로 치달아우리사회에 지혜로운 언행 못 보여靑·국회 등 권력기관에도 내걸려야이처럼 산사에 가면 그 초입에서 이런 글귀를 만나게 된다. 사찰 입구의 돌 기둥에 새긴 경우도 있고, 일주문이나 불이문에 걸려 있기도 하다. 태고선원처럼 선원(禪院) 입구에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구례 화엄사 부속암자인 연기암에는 입구 돌기둥에 새겨져 있고, 문경 용문사와 하동 쌍계사 등은 일주문에 걸려있다.‘입차문내막존지해’와 짝을 이루는 글귀로 ‘신광불매만고휘유’ 대신 ‘무해공기대도성만(無解空器大道成滿)’이 걸려있는 경우도 있다. 쌍계사와 용문사의 일주문에는 이 글귀가 걸려 있다. ‘알음알이가 없는 빈 그릇이라야 큰 도를 이룬다’는 의미다. ‘신광불매만고휘유/입차문래막존지해’ 글귀는 중국 원나라 승려 중봉 명본(中峯 明本: 1238~1295)의 글이라고 한다. 서산대사(청허 휴정)가 참선수행에 요긴한 지침을 엮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마지막 글귀도 이것이다.세속의 지식과 정보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알음알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무엇보다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만고에 빛나는 밝고 신령한 광명, 불생불멸의 본래 자리는 모든 지식이나 사상, 그것에 바탕한 분별심을 떠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선가귀감 첫 구절은 이렇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모두에게 필요한 가르침어린 시절의 시골생활 기억을 떠올리면, 당시에는 노인들 대부분이 너그럽고 지혜로운 언행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을 통해 접하는 우리 사회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은 더욱 그렇다.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바람직한 해법을 이야기하는 어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은 점점 딱딱해져도 마음은 더욱 부드러워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 열린 마음이 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 듦의 값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몸처럼 마음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져버린다면, 어른은 오히려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지도자들이 그러면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고 갈수록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가정이나 조직, 국가나 지구촌 모두 마찬가지다.탈무드의 전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인간에게 노화의 흔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나이가 들면 용모를 보고 구별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한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구별하기 힘들면 누가 경험과 지혜가 더 많은지를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늙는 것은 지혜의 표상이었던 것이다.종교 전쟁이나 마녀사냥, 나치의 만행, 전쟁과 테러 등 인류의 대표적 불행의 역사는 모두 어느 종교, 사상, 문화, 민족 등의 편협한 가치관이나 분별심, 이기주의가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불행한 현실과 지난 역사도 그렇다.고집이나 편견을 점점 없애가야 함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인데, 개인이나 사회가 점점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부처가 되고 신선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막존지해’가 절실하다.자신의 지식이나 가치관이 틀릴 수 있고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이 지구촌이나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절실하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문명의 지배가 가속화할 앞으로의 인간사회는 이 같은 인식이 더욱 절실한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막존지해’ 글귀는 사찰이나 선원 입구 문에만 걸릴 게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기관의 문에도 걸려야 될 듯하다. 국회, 검찰청, 대법원, 청와대, 그리고 미국 백악관, 중국 주석궁, 유엔 등에도. 걸어놓기만 하면 별 효과가 없을 터이니, 반드시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백일몽을 꿔본다. 어떻든 나이가 들수록 ‘막존지해’ 방향으로 나아가야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질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글귀의 주련이 걸려 있는 부산 범어사의 불이문(위쪽)과 같은 글귀가 돌기둥에 새겨져 있는 구례 화엄사 부속암자 연기암 입구.
2019.04.04
[山寺미학 .1] 산사 매화....화엄사 각황전 앞, 맑으면서도 진붉은 ‘득도의 꽃’ 홀로…
지난해 6월 한국의 전통 산사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됐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등재된 7개 사찰은 부석사(영주), 봉정사(안동), 통도사(양산),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들 7개 사찰은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을 담고 있고, 내·외부 공간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점, 한국 불교만이 갖는 통불교적 사상과 의식이 있는 점, 산사에서의 승려 생활과 산사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점 등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한국의 전통 산사와 승려들의 수행 생활에는 인간 삶에 필요한 유·무형의 소중한 가치관과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극단주의, 물질만능주의, 이기와 탐욕이 갈수록 만연하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더욱 절실한 그 ‘미학’을 조명해 본다.매화 애호가 사랑받는 유명 古梅화엄사처럼 오래된 산사에 많아이른봄 수많은 이들 발길 붙잡아안분지족하며 성실히 살아가면행복이 온다고 해마다 말하는 듯수행자 깨달음 매개체가 되기도삭막하고 추운(지난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지만)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날이 반갑고 고마운 때다. 이런 좋은 시절이 곧 지나가버릴 것을 생각하며, 기운 생동하는 따뜻한 봄날만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산속 사찰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많은 아름다움과 좋은 기운을 지니고 있다. 철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산사는 특히 자연 풍광과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각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 중 이른 봄날에는 추운 겨울을 견디다 가장 먼저 탐스럽게 피어나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가 사람에게 환희심을 선사한다. 매화 개화 시기는 지역·환경마다 다르지만, 산속 매화는 대부분 지금 본격적으로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유명 고매(古梅)는 대부분 산사에요즘은 매화를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매화 애호가의 많은 사랑을 받는 이름난 고매(古梅)는 특히 오래된 산사에 많다.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 선암사 고매(선암매), 통도사 홍매(자장매), 백양사 홍매(고불매) 등이 해마다 이른 봄이 되면 수많은 이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고매 중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가 각별히 기다려진다. 맑으면서도 진한 붉은색 꽃을 피우는 이 홍매는 꽃도 홑꽃으로 아름답고 나무 모양도 준수한데다, 주변의 오래된 한옥인 각황전 및 영산전과 어울려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 호젓하게 즐기기 어렵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이긴 하다. 이 홍매는 각황전을 중건할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은 300년이 훨씬 넘는다.화엄사 부속 암자인 길상암 앞에는 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450년 정도 됐다는 이 백매는 울창한 숲 속에 자라서인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꽃도 드문드문 피우는,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매화나무인지도 모를 자태로 주변의 숲과 어울려 각별한 멋을 선사한다.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으며, ‘화엄매’로 불린다.선암사에는 오래된 고매가 특히 많다. 원통전 앞 백매는 650년 정도 된 고매로, 지금도 온전한 형태의 나무 전체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꽃이 매우 성글게 피어 더욱 고귀하게 보인다. 이 옆에 무우전 돌담을 따라 300년이 넘은 홍매와 백매 20여 그루가 봄만 되면 진하고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선암사 어느 스님은 이 ‘선암매’가 한창 꽃을 피우면 멀리 떨어진 선암사 입구에만 들어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불매’라 불리는 백양사 홍매는 수령이 3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담홍색 꽃을 피운다. 1863년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을 때,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터에 있던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 같이 옮겨 심었는데,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1947년에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古佛梅)’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양산 통도사의 ‘자장매(慈藏梅)’는 수령 350년의 홍매화로,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도사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이 자장매는 다른 산사의 고매보다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에 매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가장 먼저 끌어들이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깨달음의 기연(奇緣)을 선사하기도 하는 매화산사의 고매들은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겨울의 끝자락이나 이른 봄철에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수백 년 전에 매화를 심은 스님 덕분이다. 스님들은, 불교 수행자들은 왜 매화나무를 심었을까. 일반 사람처럼 봄소식을 빨리 전해주는데다 꽃도 아름답고 향기가 특별히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것을 넘어 매화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목적인 깨달음을 얻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던 선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것이든 깨달음의 인연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매화는 단순히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는 향기로운 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득도의 기연(奇緣)을 선사하는 대표적인 꽃이었던 것이다.이것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로 무명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오도송 ‘심춘(尋春)’이라는 시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실려 있다고 한다.‘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 발로 온 산을 헤매며 구름만 밟고 다녔네/ 돌아와 웃으며 매화가지 집어 향기 맡으니/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遍頭雲. 歸來笑拈梅花臭, 春在枝頭已十分)’‘돌아와 웃으며 매화가지 집어 향기 맡으니(歸來笑拈梅花臭)’ 대신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歸來偶過梅花下)’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여기서 봄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마음의 봄’, 즉 깨달음을 얻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가 사라지는 경지를 체득하면 영원한 봄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아니라도 봄은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에 있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클로버 밭에서 주위에 널려 있는 세잎클로버(행복 상징)는 제쳐 두고, 불행을 가져올지 모를 네잎클로버(행운)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을 키워가야 집 안에 핀 매화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누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매화를 찾아 험한 산을 헤매는 헛수고를 줄이려면 과욕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삶이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매화를 소재로 한 선시 하나를 더 소개한다. 고려 후기 스님인 진각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시다.‘서리 바람 땅을 휩싸며 마른 풀뿌리 쓸지만(霜風括地掃枯)/ 봄이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誰覺東君令已廻)/ 고갯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唯有嶺梅先漏洩)/ 눈속에서 가지 하나 홀로 피었네(一枝獨向雪中開)’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이른 봄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산속 매화는 치열한 수행자에게 득도의 기연을 선사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매(古梅)는 대부분 산사에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왼쪽 건물)의 홍매.
2019.03.21
[九曲기행 .41 끝] 대구 운림구곡(下)...유유한 금호강, 정구·서사원 선생의 도학이 흐르는 듯…
3곡 송정은 어대에서 1.4㎞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소나무들이 많았겠으나, 1970년대 이후 강폭을 좁혀 제방을 쌓고 성서산단이 들어서면서 주변의 물길은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삼곡이라 솔바람 배에 가득 불어오니(三曲松風滿載船)/ 푸른 수염 붉은 껍질 몇 해나 묵었는가(蒼髥赤甲幾經年)/ 초연히 가시와 덤불 속에 우뚝 서서(超然特立荊榛裏)/ 추위에도 곧은 모습 정말로 어여쁘네(寒後貞姿正自憐)’송정에서는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송정에서 1.6㎞ 거슬러 오르면 4곡 오곡이다. 강물이 완만하게 굽이를 이루는 곳인데 주변에 강정들과 산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을 오곡(梧谷)이라 한 것을 보면, 오동나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우성규는 여기서 오동나무를 보고 오동나무로 만드는 거문고를 떠올렸다.‘사곡이라 외로운 오동 바위 곁에서/ 흔들리는 가지의 이슬 맺힌 잎 푸른 빛 드리우네/ 거문고 옛 곡조를 누가 알겠는가/ 출렁출렁 물 흐르고 달빛은 못에 가득하네’5곡 강정은 부강정(浮江亭)을 말한다. 부강정은 다사읍 죽곡리 강정마을에 있었다. 신라 때 처음 건립된 정자다. 정구와 서사원, 손처눌 등 많은 선비들이 노닐었다.‘오곡이라 배를 저어 깊은 마을 찾아드니(五曲行舟入洞心)/ 돌기둥 높다랗게 성근 숲에 솟아있네(巍然石楫出疎林)/ 이 사이에 진실로 뛰어난 선비 있었으니(此間有奇士)/ 평생토록 벼슬살이 마음 쓰지 않았네(爵祿平生不入心)’5곡에서 백이숙제의 선비정신을 떠올린다. 이곳에서 도학을 연마하던 뛰어난 선비들처럼 자신도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도학을 완성하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3곡 송정, 소나무의 기상을 노래성서산단 들어서며 옛모습 잃어6곡 연재는 ‘이락서당’을 일컬어정구·서사원 선생 후학들이 세워7곡 선사, 다사출신 학자 강학처선비들 선유 자취 가장 잘 나타나9곡 사양서당 정구가 만년에 지어死後 사라졌다 제자 등이 재건립◆6곡 연재는 강창교 부근 이락서당6곡 연재는 강정에서 1.4㎞ 정도 거슬러 오른 곳에 있는 강창교 부근이다. 연재(淵齋), 즉 못가에 있는 재실은 이락서당(伊洛書堂)을 말한다. 당시의 이락서당은 지금보다 낮은 곳에 있었으나, 강창교가 생기면서 강창교보다 약간 높은 위치로 옮겨 개축했다.이락서당은 정구와 서사원의 강학처에 후학들이 세운 것이다. 서사원은 정구의 제자이다. 정구와 서사원의 학문은 대구의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에게 배웠던 11개 마을 아홉 문중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학계(學契)를 조직하고, 두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1798년 강창(江倉)의 파산(巴山) 자락에 이락서당을 건립했다. ‘육곡이라 푸른 물굽이에 낚시터 있으니(六曲釣磯在碧灣)/ 인간세상 영욕과는 무관한 곳이네(世間榮辱不相關)/ 못가에 다가가서 집 이름 생각하니(臨淵想像扁齋意)/ 푸른 물 유유하고 밝은 해 한가롭네(綠水悠悠白日閒)’이락서당 편액을 보며 우성규는 두 선생을 떠올렸다. 이락(伊洛)은 이천(伊川)과 낙강(洛江)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다. 서사원의 거처는 이천에 있었다. 정구는 성주, 칠곡, 대구 등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니 이락은 정구와 서사원을 의미한다. 또한 이락서당의 협실 편액도 모한당(慕寒堂)과 경락재(景樂齋)라 하여, 두 사람을 경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온 두 선생의 도학을 자신도 이어받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7곡은 선사다. 6곡에서 4㎞ 정도 거슬러 오른 지점이다. 선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인 선사암이 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사암은 마천산에 있는데, 암자 곁에 최치원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1832년경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부읍지’에는 ‘선사암은 부 서쪽 20리에 있었는데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선사는 다사 출신의 학자들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처음 이곳에 강학처를 연 사람은 다사 문양 출신의 임하(林下) 정사철(1530~1593)이다. 정구와 김우옹(1540~1603) 등과 교유했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해 관군을 도왔으며, 1587년에 선사서사를 지어 강학하고 주변 선비들과 교유했다. 선사서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자 서사원이 뒤를 이어 그 터에 선사재를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또한 선사는 선유(船遊)의 자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호선사선유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서사원은 1601년 2월 자신의 거처인 금호강 이천에 완락재를 지어 낙성했다. 3월에 낙성을 축하하러 장현광을 비롯한 선비 22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의기투합, 서사원을 금호선사선유의 주인으로 삼아 부강정까지 10리를 내려가 시회를 열었다. 감호(鑑湖) 여대로는 금호선사선유도 서문에 그날의 선유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칠곡이라 굽이도니 또 하나의 여울인데(七曲沿回又一灘)/ 구름 속에 춤추는 학 정히 볼 수 있겠네(雲中鶴舞正堪看)/ 그 가운데 혹여 신선이 있는가(箇中有仙人否)/ 바위 사이 차가운 집 웃으며 가리키네(笑指巖間白屋寒)’이 굽이에서는 신선의 경지에 노닐던 최치원을 떠올리고 있다.8곡은 강가에 있는 바위산 봉암이다. 선사에서 6㎞ 정도 상류에 있다. 와룡대교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산이다. 다리와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잘려나간 상태다.‘팔곡이라 바위 높고 묘한 경계 열리니(八曲巖高妙境開)/ 봉우리들 늘어선 데 물결 휘어 도네(群峰羅列衆坡)/ 산에 가득한 아름다운 기운 새들이 먼저 아니(滿山佳氣禽先得)/ 아침 햇살에 날갯짓하며 봉황이 내려 앉네(翼翼朝陽鳳下來)’마지막 9곡 사양서당은 8곡 봉암 건너편 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에 있다. 사양서당은 원래 정구가 만년에 지어 학문에 몰두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사양정사(泗陽精舍) 터(대구 북구 사수동)에 건립됐다. 정구 별세 후 사양정사는 없어지고 1651년 제자와 마을사람들이 그곳에 사양서당을 건립해 정구를 배향했다. 그러나 1694년 칠곡군 지천면 웃갓마을로 이건되고 빈터만 남아있었으나, 대구 금호택지개발지구 내 한강근린공원이 조성되면서 사양정사가 복원되었다.‘구곡이라 서림 깊고 맑으니(九曲書林然)/ 봄이 오자 꽃과 버들 앞내에 가득하고(春來花柳滿前川)/ 강옹과 담로 향기 남은 이 땅에는(岡翁潭老遺芬地)/ 밝고 밝은 이치 고요 속에 빛나네(一理昭昭靜裏天)’강옹과 담로는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를 말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구곡기행’ 연재는 대구와 경북의 구곡문화 학술조사 연구단(연구 책임자 김문기) 연구 결과물로 경북대 퇴계연구소가 경북도·대구시와 함께 펴낸 ‘경북의 구곡문화’ Ⅰ·Ⅱ권과 ‘대구의 구곡문화’를 비롯한 기존의 연구성과 덕분에 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연재기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격려를 보내준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운림구곡은 우성규가 금호강 하류에 설정한 구곡이다. 운림구곡 중 6곡 연재 주변 풍경. 연재는 이락서당을 말한다.6곡에 있는 이락서당. 이락서당은 낙재 서사원과 한강 정구의 학덕을 기려 건립됐다.
2019.03.07
[九曲기행 .40] 대구 운림구곡(上)...금호강 물길따라 설정된 구곡…한강 정구 강학하던 사양서당이 중심
대구에도 운림구곡, 농연구곡, 와룡산구곡, 수남구곡 등이 있다. 대구의 구곡에 대해서는 ‘대구의 구곡문화 학술조사 연구단’(연구 책임자 김문기)이 2004년 연구 결과물로 출간한 ‘대구의 구곡문화’(대구시·경북대 퇴계연구소 펴냄)가 있다. 대구의 구곡 중 운림구곡(雲林九曲)에 대해 ‘대구의 구곡문화’ 관련 내용을 토대로 답사 후 정리했다.운림구곡은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사문진교 부근부터 금호강 물길을 따라 대구 북구 사수동의 사양서당(泗陽書堂) 부근까지 16㎞에 걸쳐 설정된 구곡이다. 금호강 하류에 설정된 이 운림구곡의 주인공은 조선 말기 학자이자 문신인 경도재(景陶齋) 우성규(1830~1905)다. 우성규가 이 지역을 구곡으로 설정한 것은 자신이 존경하던 선비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의 강학처인 사양정사(사양서당)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구는 1617년 칠곡의 사수(泗水)에 사양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길렀다. 당시 괴헌(槐軒) 곽재겸(1547~1615), 낙재(樂齋) 서사원(1550~1615), 모당(慕堂) 손처눌(1553~1634), 양직당(養直堂) 도성유(1571~1649), 대암(臺巖) 최동집(1586~1661) 등 대구의 많은 선비가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우성규는 호를 경도재라 지을 정도로 도산의 퇴계 이황을 흠모했다. 월촌(월배)이 고향인 그는 문경 주흘산에 들어가 향산(響山) 이만도(1842~1910)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서울로 올라가 명사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1875년 음서(蔭敍)로 벼슬길로 들어서 선공가감역, 상의원주부, 사직령 등을 역임했다. 그후 현풍현감, 영덕현령, 예안현감 등을 지냈다. 우성규는 1892년 돈령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속귀거래사’를 지어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귀향했다.◆우성규가 금호강에 설정한 구곡우성규가 언제 운림구곡을 설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세기 말에 설정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우성규는 운림구곡을 설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용무이도가운부운림구곡(用武夷櫂歌韻賦雲林九曲)’을 지었다.운림구곡 아홉 굽이는 1곡 용산(龍山), 2곡 어대(魚臺), 3곡 송정(松亭), 4곡 오곡(梧谷), 5곡 강정(江亭), 6곡 연재(淵齋), 7곡 선사(仙), 8곡 봉암(鳳巖), 9곡 사양서당(泗陽書堂)이다. 운림구곡은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로 주변이 많이 훼손되면서 지금은 옛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현실이다.정구 존경한 조선말 학자 우성규서당 자리한 운림 신령하게 여겨사문진교∼서당 부근 16㎞ 걸쳐무이도가 차운 운림구곡시 읊어도시개발로 옛모습 찾기 어려워우성규의 운림구곡시는 서시에 해당하는 총론(總論)과 구곡을 각각 읊은 아홉 수 등 총 10수로 이루어져 있다.‘하늘이 운림을 보호해 참으로 신령하니(天護雲林異靈)/ 산은 굽이굽이 밝고 물은 맑아라(山明曲曲水澄淸)/ 조각배 타고 창주 길 찾으려고(扁舟欲覓滄洲路)/ 주자의 뱃노래 화답하며 구곡시 지어보네(和櫂歌九曲聲)’운림은 칠곡 웃갓(上枝)마을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까지 칠곡군 상지면이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역이 생기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신동(新洞)으로 불리었다. 웃갓은 한강 정구의 제자로 이조참판을 지낸 석담(石潭) 이윤우(1569~1634)가 태어난 곳이고, 마을에는 정구와 이윤우, 송암(松巖) 이원경(1525~1571)을 배향한 사양서당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피해를 입어 강당인 경회당(景晦堂)만 남아있다.사양서당은 1651년 정구가 학업을 닦았던 대구 북구 사수동의 사양정사 터에 향인들이 그를 기려 건립했다. 그 후 1694년 지금의 웃갓마을로 이건하면서 정구를 중심으로 이윤우를 배향하고 이원경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우성규가 운림을 신령스럽게 생각한 것은 이곳에 사양서당이 있기 때문이다. 정구와 이윤우의 학덕을 하늘이 보호하기 때문에 그 주변 산은 밝고 물은 맑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창주는 주자가 만년에 거처했던 창주정사를 말한다.◆1곡은 금호강 낙동강 합쳐지는 용산1곡 용산은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쳐지는 곳으로, 현재 사문진교가 놓여있다. 주변에 화원동산과 사문진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옛날에는 사문진(沙門津) 나루가 있었다. 사문진은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기도 하다. 1900년 3월26일 미국 선교사 사이드 보탐(1874~1908) 부부가 낙동강 배편으로 피아노를 실어와 이곳에 들여왔고, 인부 20여명이 소달구지에 싣고 대구 약전골목에 있던 보탐 부부의 숙소로 옮겼다고 한다. 사문진 나루터 주변은 현재 사문진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일곡이라 용암에 조각배 매었다가(一曲龍巖繫葉舟)/ 사공의 손 빌려 긴 강을 거스르네(梢工副手遡長川)/ 나루를 물은 지난 일 찾을 곳 없고(問津往事憑無處)/ 오직 아침 노을 저녁 안개만 보이네(惟見朝霞與暮烟)’용암이 정확하게 어느 바위인지는 알기 어렵다. 우성규는 사문진 나루에서 배를 타고 유학의 도가 지향하는 바의 근원을 찾아 금호강을 거슬러 오른다. 그는 옛날 공자가 초나라를 향해 가다 길을 잃고 자로에게 나루를 묻게 한 고사를 떠올렸다. 자로가 장주와 걸익이라는 은자를 만나 나루를 물었더니 그들은 세상을 피해 살라고 권했다. 공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세상을 함께 살면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공자의 문진(問津)은 현실적 해결 방도를 찾는 과정이었다. 나루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이자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우성규도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도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2곡 어대는 금호강과 진천천(辰泉川)이 합류하는 곳이다. 사문진에서 금호강으로 850m 정도 올라가면 두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다. 여기가 어대다. 진천천은 대구 산성산 서쪽에서 발원해 화원 부근에서 금호강과 합류한다. ‘이곡이라 배 저어 푸른 봉우리 돌아가니(二曲移船繞碧峰)/ 어대의 꽃과 나무 봄빛을 드러내네(魚臺花木燁春容)/ 흐르는 강물 잠잠해지고 옅은 구름 걷히니(江流浪息微雲捲)/ 돛대 너머 산 빛 푸르디 푸르네(帆外山光翠萬重)’2곡 어대에서는 1곡에서 안개와 노을로 비유된, 학문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 등을 기리고 있는 사양서당(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 운림구곡은 우성규가 한강 정구의 강학처인 사양서당을 중심으로 설정한 구곡이다.사양서당 강당건물인 ‘경회당(景晦堂)’ 편액.
2019.02.21
[九曲기행 .39] 충북 괴산 선유구곡(下)...선인은 떠났어도 바위문 들어서니 세속이 저절로 멀어지네
문경 가은의 선유구곡에 대한 시를 남긴 정태진(丁泰鎭·1876~1956)은 괴산의 선유구곡 풍경을 읊은 시 ‘외선유구경(外仙遊九景)’도 남겼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선유구경의 명칭은 좀 다르다. ‘외선유구경’의 명칭은 석문(石門), 경천벽(擎天壁), 학소대(鶴巢臺), 연단로(煉丹爐), 와룡폭(臥龍瀑), 귀암(龜巖), 기국암(碁局巖), 난가대(爛柯臺), 은선대(隱仙臺)의 순으로 되어 있다. 상편에서 다룬 괴산 선유구곡의 명칭은 1곡 선유동문, 2곡 경천벽, 3곡 학소암, 4곡 연단로, 5곡 와룡폭, 6곡 난가대, 7곡 기국암, 8곡 귀암, 9곡 은선암이다. 명칭이 약간 다르기도 하고, 순서도 일치하지 않는다. 정태진이 괴산의 선유구곡 풍경을 읊은 시를 보면 곳곳에 서린 전설과 풍광, 그곳이 주는 가르침 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 신선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2005년에 출간된 ‘문경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김문기 지음)의 관련 내용을 토대로 정태진의 ‘외선유구곡시’를 소개한다. 서시 ‘외선유동(外仙遊洞)’에 이어 구경(九景)을 읊고 있다.◆정태진 시‘외선유구경(外仙遊九景)’‘옛 사람 이미 가고 나 지금 와서(昔人已去我來今)/ 안개 덮인 선유동 차례로 찾아본다(洞裏煙霞取次尋)/ 선생의 당일 자취 사모해 우러르니(景仰先生當日蹟)/ 이 몸의 말년 마음 슬프게만 하네(偏傷小子暮年心)/ 이곳 산수를 품으니 진흔의 밖이고(懷玆山水塵 外)/ 깊은 곳엔 신선이 사는 듯하네(疑有神仙窟宅深)/ 한 길로 점차 나아가면 진경의 경계이니(一路漸窮眞境界)/ 높은 대에 기대어 한 번 길게 노래하리(高臺徙倚一長吟)동천은 쓸쓸해 돌이 문이 되고(洞天寥廓石爲門)/ 늘 구름 안개 끼어 밝은 해를 가리네(常有雲霞白日昏)/ 우리는 여기서부터 신선처럼 노니나니(吾輩仙遊從此始)/ 세상 어느 곳에 진훤이 있겠는가(世間何處有塵喧) <석문>아름다운 이름 옛날 언제 시작되었나(嘉名肇錫昔何年)/ 한 벽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네(一壁 嶢擎九天)/ 곧게 솟아 진실로 기상을 이루니(矗立眞能成氣像)/ 몇 번이나 강산이 변했지만 홀로 푸르네(幾經桑海獨蒼然) <경천벽>정태진이 읊은 구곡시전설과 아름다운 풍광교훈이 생생히 드러나쌍곡마을의 쌍곡구곡괴산의 3대 구곡 꼽혀붉은 산꼭대기 흰 학 옛날부터 둥지 틀고(丹頂皓衣昔此巢)/ 바위 틈 소나무 가지 끝만 보이네(巖 惟見古松梢)/ 이를 잡고 곧바로 신선길 좇고자 하지만(秉渠直欲追仙路)/ 벽이 끊어지고 구름 가리어 만날 수 없네(壁斷雲悠不可交) <학소대>단약 만드는 비결 지금 어찌 없는가(成丹要訣奈今無)/ 바위 위에 노닌 신선 화로 남겼구나(巖上遊仙遺煉爐)/ 세상 사람 흰 머리 많다 하며 탄식하나(堪歎世人多白髮)/ 헛된 도구 의지하며 부질없이 전하네(只憑虛器浪傳呼) <연단로>긴 폭포는 흰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고(瀑布長看臥白龍)/ 큰 소리 내고 흰 눈 뿜으며 날마다 떨어지네(轟雷噴雪日撞春)/ 온전히 옮겨 놓은 장관이 이렇게 지극하고(全輸壯觀玆焉極)/ 시원한 기운 따르니 마음도 차갑네(心目冷然爽氣從) <와룡폭>거북을 구워 치는 점 해석할 이 없어(無人解古灼神龜)/ 이를 방치하니 황량하여 기괴하게 되었네(放置荒閑等怪奇)/ 마땅히 폭포 용과 더불어 길이 칩거하며(應與瀑龍長蟄伏)/ 신령한 기운 쌓아 밝은 때 기다리네(蓄他靈異待明時) <귀암>바위 위 늙은 신선 바둑 두기 사랑하여(巖上老仙愛看碁)/ 나무 하는 초동과 어울려 바둑을 두네(欄柯樵者也相隨)/ 한가한 마음 좋은 곳에서 기심 사라지니(閒情適處機心息)/ 바둑 두지만 승부엔 관심 없다네(局外輸 不知) <기국암>바위 위 신선 바둑 마치니 물소리 요란하고(巖仙碁罷水聲多)/ 누대 위 그 누가 옛날에 도끼 자루 불살랐나(臺上何人昔爛柯)/ 진경은 깊은 곳에 있다는 것 알게 되고(眞境方知深處在)/ 시내 너머에서 자지가 들리는 듯하네(隔溪如聞紫芝歌) <난가대>선인은 이미 가고 바위는 아직 남아 있어(仙人已去尙餘巖)/ 한 번 바위 문 들어서니 세속에 멀어지네(一入巖門謝俗凡)/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어찌 가벼이 말하는가(紛拏世機那管說)/ 예부터 말할 때는 신중히 하라고 하였네(古來金口戒三緘) <은선대>’서시에서 ‘선생’은 퇴계 이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곡 난가대를 읊은 시에 나오는 자지가(紫芝歌)는 중국의 상산사호(商山四皓) 고사에서 유래된 노래다. 진(秦)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 里) 네 노인은 상산(商山)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었기에 상산사호라고 불렸다. 네 노인은 상산에서 영지버섯 등을 따먹으며 지냈다. 유방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했을 무렵에는 이미 천하에 현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래서 한(漢) 고조 유방이 사호를 불렀으나 네 노인은 ‘자지가(紫芝歌)’를 부르며 거절했다. 자줏빛 버섯인 ‘자지(紫芝)’는 선가(仙家)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치던 영지버섯을 뜻한다.◆쌍곡구곡괴산 대표적 구곡으로 이 선유구곡 및 화양구곡과 함께 쌍곡구곡(雙谷九谷)이 있다. 괴산 3대 구곡으로도 불린다. 쌍곡구곡을 간단하게 소개한다.쌍곡구곡은 괴산군 칠성면 쌍곡마을에서 제수리재에 이르는 쌍곡계곡에 있는 구곡이다. 보배산·군자산·비학산에 둘러싸인 구곡이다. 맑은 물과 기암절벽, 노송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괴산팔경의 하나로 손꼽혀온 곳이다. 구곡의 이름은 1곡 호롱소, 2곡 소금강(小金剛), 3곡 병암(餠岩:떡바위), 4곡 문수암(文殊岩), 5곡 쌍벽(雙壁), 6곡 용소(龍沼), 7곡 쌍곡폭포(雙谷瀑布), 8곡 선녀탕(仙女湯), 9곡 장암(場岩:마당바위)이다.1곡 호롱소는 계곡물이 꺾이며 생긴 소와 바위, 노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근처 절벽에 호롱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호롱소라 불리었다. 제2곡 소금강은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계절마다 변하는 모습이 절경을 이룬다. 제3곡 병암은 바위 모양이 시루떡을 자른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기근이 심했던 시절에 떡바위 근처에 살면 먹을 것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 제4곡 문수암은 소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노송과 조화를 이룬다. 옛날에 바위 밑으로 나있는 동굴에 문수보살을 모신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5곡은 쌍벽으로 계곡 양쪽에 높이 10여m, 너비 5m 정도의 바위가 늘어서 있다. 제6곡 용소는 암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바위웅덩이를 휘돌며 장관을 이룬다. 제7곡 쌍곡폭포는 반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여인의 치마폭처럼 펼쳐지고, 제8곡 선녀탕은 작은 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제9곡인 장암은 반석 모양이 마당처럼 넓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괴산 선유구곡 중 7~9곡이 몰려 있는 계곡 풍경. 오른쪽이 7곡 기국암(바둑 바위)이고 왼쪽이 8곡 귀암(거북바위)이며, 뒤쪽에 보이는 큰 바위가 9곡 은선암이다. 바위마다 굽이 명칭이 새겨져 있다.
2019.02.07
[九曲기행 .38] 충북 괴산 선유구곡(上)...높고 거대한 기암 즐비…경치에 도취된 퇴계이황 9개월간 머물러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문경의 선유구곡과 같은 이름의 또다른 선유구곡이 있다. 문경 가은의 선유구곡이 동(東)선유구곡이라면 이는 서(西)선유구곡이라 할 수 있다. 괴산의 이 선유구곡은 화양구곡, 쌍곡구곡과 함께 괴산의 3대구곡으로도 꼽히는 대표적 구곡이다.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의 상류에 펼쳐진 이 선유구곡은 청천면 삼송리(三松里)와 송면리(松面里)에 있는 선유동계곡에 설정된 구곡이다. 이 계곡은 특히 거대한 기암들이 많은 멋진 계곡이다. 화양계곡의 상류 지역인 화양천(삼송천)을 따라 흐르는 선유동계곡은 퇴계 이황이 칠송정(현재의 송면리 송정부락)에 사는 함평이씨 이녕(李寧)을 찾아왔다가 부근의 경치에 도취되어 9개월간이나 머물면서,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는 의미의 ‘선유동’이라 불렀다 한다. 또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 9곡을 설정했다고 전한다. 계곡 1.6㎞ 정도에 걸쳐 있는 이 선유구곡은 1곡 선유동문, 2곡 경천벽, 3곡 학소암, 4곡 연단로, 5곡 와룡폭, 6곡 난가대, 7곡 기국암, 8곡 귀암, 9곡 은선암이다. 선유구곡이 시작되는 1곡 선유동문 앞 길가에 이 선유구곡 안내표지가 있다. 이 선유구곡도 굽이마다 그 명칭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서체는 해서와 행서, 초서 등 다양하다.◆1곡은 선유동문(仙遊洞門)선유구곡 초입에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을 지나 차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구곡이 시작된다. 1곡은 선유동문이다. 평지 하천이 끝나고 산속 계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입구에 있다. 높고 거대한 바위들과 넓은 소가 있어 경치가 좋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기 좋은 곳이다.거대한 바위들은 사람이 일부러 쌓아놓은 듯하다. 허리 부분이 잘록하여 무너질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맨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넓적한 바위 앞면에 ‘선유동문(仙遊洞門)’이라는 글씨가 행서로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신선들이 살던 선유동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리고 있는 셈이다.청천면 삼송∼송면리 계곡 1.6㎞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전설 간직퇴계, 선유동이라 짓고 구곡설정화양·쌍곡과 함께 ‘괴산 3大 구곡’‘선유동문’ 글씨 옆에 ‘이보상서(李普祥書)’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9곡 ‘은선암(隱仙巖)’ 각자(刻字) 옆에 ‘김시찬 이보상 정술조 동주이상간 임신구월일(金時粲 李普祥 鄭述祚 洞主李尙侃 壬申九月日)’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752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괴산 선유구곡을 연구한 학자(이상주)는 선유구곡 각각의 명칭을 이보상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위 네 사람을 선유구곡 설정자로 결론짓고, 그 주도자는 선유동 소유주인 이상간으로 판단했다.김시찬(1700~1767)은 1751년 12월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었고, 이보상(1698~1775)은 괴산군수를 지냈다.2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선유동문 맞은편 바로 위쪽에 있는 층암 절벽 바위이다. 층층암석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는 의미에서 경천벽이라 했으나, 그 규모가 그리 거대하지는 않다. 홍치유(洪致裕·1879~1946)는 이 경천벽을 두고 ‘푸른 절벽이 허공을 받치고 높은 기상 자랑하니, 높고 높아 미친 듯한 거센 물결도 막을 수 있을 것 같네’라고 읊었다고 한다.3곡 학소암(鶴巢巖)은 조금 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온다. 계곡 오른쪽의 숲속에 우뚝 솟아 있는 기암이다. 숲이 우거진 계절에는 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깃들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암이라 했다 한다. 4곡은 신선이 단약을 만들었다는 바위인 연단로(煉丹爐)이다. 길을 따라 다시 좀 더 올라가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 위쪽으로 시내 한가운데에 큰 바위 두 개가 서있다. 그 중 위가 평평한 바위가 연단로다. 연단로 바위 위에는 두 군데가 절구통처럼 파여 있다. 신선들이 이 바위에서 금단(金丹)을 만들어 먹고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쪽에는 ‘연단로(煉丹爐)’가 행서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신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면도가 새겨져 있다.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5곡 와룡폭(臥龍瀑)이 나온다. 은선휴게소 앞이다. 큰 폭포는 아니나 용이 누워 꿈틀대는 모양의 암반 위로 물이 흘러 내리는 곳이고, 아래는 큰 소가 형성돼 있다. 경관이 수려하다. ◆거대한 바위들이 몰려 있는 7~9곡6곡 난가대(爛柯臺)는 암반 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바로 옆에 있는 널따란 바위가 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옛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가다가,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며 노니는 것을 구경하다가 도끼자루가 썩어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6곡 바로 위에 7곡 기국암(碁局巖), 8곡 귀암(龜巖), 9곡 은선암(隱仙巖)이 몰려 있다. 거대한 바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7곡 기국암은 위가 마치 일부러 깎아낸 듯이 평평한 바둑판 모양의 바위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어 나무꾼이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5세손이 살고 있더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기국암 바로 옆의 8곡 귀암은 바위 모양이 마치 큰 거북이 머리를 들어 숨을 쉬는 듯하다. 표면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어 거북등과 같고, 등과 배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귀암(龜巖)’이라는 글씨가 초서로 새겨져 있다.9곡 은선암은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다. 바위 사이가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은선암에는 통소를 불며 달을 희롱하던 신선이 머물렀다 한다.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는 생각이 드는 분위기다. 한쪽 바위에 ‘은선암(隱仙巖)’이라는 초서 글씨와 함께 여러 사람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괴산 선유구곡 중 1곡인 선유동문 주변 풍경. 기암들과 넓은 못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1곡 바위에 새겨진 ‘선유동문(仙遊洞門)’ 글씨.
2019.01.24
[九曲기행 .37] 성주 포천구곡(下)...9곡 중 가장 아름다운 굽이 ‘홍개동’…욕심 난무하는 세상 멀리한 별천지
‘삼곡이라 고인 물가에 돌배가 걸리고(三曲渟匯架石船)/ 시냇가 늙은 나무 나이를 알지 못하네(溪邊老木不知年)/ 당시 놀던 아홉 노인이 새긴 제명 남아(當時九老題名在)/ 선배가 가졌던 풍류 후배도 사랑하네(前輩風流後輩憐)’3곡은 구로동이다. 조연에서 600m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구로동(九老洞)’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제3곡을 구로동이라 한다. 하얀 돌이 반타석(盤陀石)을 이루고, 고목이 그 위에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 향로(鄕老) 9명이 함께 노닐고는 돌에 새겨 기록했다.’이원조의 ‘포천산수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선배 아홉 노인의 풍류를 자신도 계승하겠다고 노래하고 있다.◆베를 말리는 듯한 4곡 포천‘사곡이라 물속에 우뚝 솟은 바위(四曲亭亭出水巖)/ 꼭대기 가득 꽃나무 거꾸로 늘어졌네(滿花木倒)/ 반타석 표면이 길게 베 씻어 놓은 듯한데(盤陀一面長如洗)/ 경실과 요대는 푸른 못을 내려다보네(瓊室瑤臺碧潭)’3곡 위로 7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4곡 포천이 나온다. 계곡 바위가 2단으로 자리하고 있어 그 위로 시냇물이 흘러내리면 마치 베를 걸어놓은 듯한 모습이다.‘제4곡을 포천이라 한다. 돌 위에 물무늬가 있는데 짙은 푸른빛의 물이 베를 말리는 듯하고, 그 끝을 볼 수 없지만 이따금 돌을 만나면 깊이가 드러난다. 포천이란 이름은 이 때문이다.’이원조는 4곡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5곡 당폭, 평평한 큰 돌이 수십보마을 사람들 빨래와 타작하던 곳6곡 사연엔 山 등진 인가 10여호사량촌 앞 못이라는 의미로 명명7곡 석탑동 이르면 가야산 보여시내 우측에 석탑처럼 생긴 바위‘오곡이라 밝게 빛나 돌 기운 깊으니(五曲鱗鱗石氣深)/ 그 누가 푸른 베를 빈숲에서 말리는가(誰將綠布空林)/ 세상의 베 짜는 여인이 베틀을 비우니(人間織女空軸)/ 밝은 달빛 아래 밤마다 실을 짜네(明月機絲夜夜心)’‘제5곡을 당폭(堂瀑)이라 한다. 시내 곁에 큰 돌이 있는데 평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 당(堂)과 같다. 넓이가 수십 보가 되어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타작을 한다. 산이 솟은 곳에 바위가 몇 길 드리워있는데, 물이 뿜어 나와 퍼져 가는 소리가 우레와 같다. 꽃나무가 덮고 있다.’이원조는 5곡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5곡에서 이원조가 이야기한 우레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형세는 아니다.‘육곡이라 사량은 푸르고 맑은 물굽이(六曲沙梁碧玉灣)/ 몇 집이 물에 임해 대나무로 문 삼았네(數家臨水竹爲關)/ 안개와 구름이 문득 오는 길 막으니(烟雲却鎖來時路)/ 잠든 사슴 깃든 새 절로 한가하네(眠麓棲禽自在閑)’6곡 사연(沙淵)을 읊고 있다.‘제6곡은 사연이라 한다. 산세가 조금 넓어지고 고개 위에 소나무가 많다. 비로소 인가 10여 호가 보인다. 산을 등지고 물을 임하니 곧 사량촌이다. 여러 시내가 합류하고 양쪽 벼랑에 있는 돌이 섬돌과 같아 낚시터로 삼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사량촌 앞에 있는 못이라는 의미로 사연이라 명명한 듯하다. 사량촌은 지금의 사부랭 마을을 말한다. ◆9곡 홍개동에 만귀정 지어 은거‘칠곡이라 험한 곳 오르내리는 여울(七曲崎嶇上下灘)/ 높이 솟은 석탑 비로소 둘러보네(穹然石塔始廻看)/ 이곳에 이르러 고절할 줄 누가 알겠는가(到頭孤絶人誰識)/ 바람이 가야에서 불어 소매 가득 차갑네(風自伽倻滿袖寒)’7곡은 석탑동이다. 이 굽이에 이르면 멀리 가야산이 눈에 들어오고 널따란 지형이 나타난다. 시내 오른쪽에 마치 석탑 같이 생긴 바위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 굽이를 석탑동이라 했다. ‘제7곡은 석탑동이라 한다. 이곳에 이르면 산 사이가 더욱 넓어지고 물은 더욱 빨라진다. 주점 몇 채가 바위에 기대어 있는데 집이 맑은 여울물을 굽어본다. 멀리 푸른 남기(嵐氣)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니 즐길 만하다.’속세의 기운이 아니라 고절한 기상이 가득한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팔곡이라 신촌은 시야가 갑자기 열리고(八曲新村眼忽開)/ 반선대 아래로 시냇물 돌아 흘러가네(盤旋臺下水廻)/ 주민들 어떻게 연하의 맛을 알겠는가(居民那識煙霞趣)/ 소나무 그늘에서 술에 취해 잠드네(猶向松陰醉睡來)’8곡 반선대를 읊고 있다.‘제8곡을 반선대라 한다. 신평촌(新坪村) 곁에 언덕이 있는데 높이 솟아 시내에 임하고 위에는 교목이 많다.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연회를 한다. 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니 은자들이 함께 노닐기에 더욱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름 지었다.’신평촌은 지금의 신계리다. ‘구곡이라 홍개동이 널따랗게 있으나(九曲洪開洞廓然)/ 오랜 세월 이 산천을 아껴서 숨겼네(百年秘此山川)/ 새 정자 자리 정해 이 몸 편히 하니(新亭占得安身界)/ 인간세상의 별유천지 아니겠는가(不是人間別有天)’9곡 홍개동에서 정자를 지어 머무니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이 실현됨을 노래하고 있다. 9곡은 이원조가 만년에 은거했던 곳이다. 이곳에 이원조가 마련한 만귀정이 있다.‘제9곡을 홍개동이라 하니 내가 자리 잡아 사는 곳이다. 두 폭포가 물길을 나누어 흐르고, 여러 돌이 바둑판 같이 자리한다. 사방의 산들이 둘러 있고 수풀의 나무가 일산처럼 그늘을 드리운다. 나의 정자가 서쪽 벼랑에서 남향하고 있다. 수석의 경치와 은거의 즐거움은 별도로 기록했다. 이곳을 지나가고 나면 가야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이곳은 이원조가 기록할 당시와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9곡은 포천구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 모습을 봐도 두 줄기 폭포가 흘러내리고 바둑판 같은 돌들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나무 숲이 일산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원조는 오래 기간에 걸쳐 장소를 물색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드디어 만년을 보낼 은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욕심이 난무하는 세상과는 거리가 먼 이곳은 도가 펼쳐지는 별천지임을 노래하며 자신도 그런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포천구곡 중 9곡 홍개동. 포천구곡 중 가장 아름다운 굽이다. 9곡 근처에 만귀정과 만산일폭루가 있다.9곡 옆에 있는 만산일폭루.
2019.01.10
[九曲기행 .36] 성주 포천구곡(上)...퇴계 학통 이어받은 이원조, 만년에 벼슬 버리고 가야산 계곡 은거
성주 포천구곡(布川九曲)은 응와(凝窩) 이원조(1792~1871)가 성주군 가천면 화죽천에 설정한 구곡이다. 이원조의 학통은 입재 정종로와 정종로의 스승인 대산 이상정,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 이황으로 연결된다. 이원조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한다. 그 후 강릉대도호부사, 제주목사, 경주부윤 등 지방 수령을 지내며 민생 안정과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가야산 아래 만귀정을 짓고 은거하며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그는 만귀정 은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응와선생문집’에 나오는 내용이다.18세에 문과 급제 응와 이원조평소 세속적 명성·이익 멀리해모범적인 학자관료 전형 보여줘성주 가천 화죽천에 구곡 설정만귀정 짓고 지내다가 생 마감포천구곡시·포천도지 등 남겨 ‘나는 일찍이 벼슬길에 나갔으나 재주가 적고 능력이 많지 않았다. 스스로 많은 사람이 달려가는 곳을 잘 살펴서 매번 머리를 숙이고 한 걸음을 물러날 줄 알아 감히 명예를 다투고 이익을 취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요행히 벼슬에 나아가 당상관의 품계와 지방관의 관직에 이르니 이미 분수에 넘치고, 나이가 너무 많아 모든 방면에서 가진 뜻이 권태로워 산수의 사이에 소박한 집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마침내 쌍계(雙溪)를 버리고 포천에 들어가니 그 출처(出處)에 한결같이 머리를 숙이고 걸음을 물려서 사람과 다투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것을 맛보니, 얕은 것이 깊은 것 못지않고 작은 것이 큰 것 못지않은데 하물며 그 산의 그윽함과 물의 청정함과 돌의 기이함이 뒤지지 않거나 더 나음에 있어서랴.’그는 일찍 벼슬길로 들어서 여러 관직을 맡으며 승진도 했으나 세속적인 명성과 이익을 탐하는데 빠지지 않았다. 그는 63년 동안 벼슬하면서도 항상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지녔다. 모범적인 학자 관료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원조가 주자를 본받아 가야산 계곡에 설정한 포천구곡이원조는 비록 벼슬길에 올랐으나 자신의 본령은 학문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으로 돌아가 학문과 더불어 생을 마감할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랬던 그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1851년 마침내 가야산 북쪽 포천계곡 상류에 만귀정을 짓고 은거했다.이원조는 이렇게 남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본 포천에 주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포천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그가 설정한 구곡의 명칭은 1곡 법림교(法林橋), 2곡 조연(槽淵), 3곡 구로동(九老洞), 4곡 포천(布川), 5곡 당폭(堂瀑), 6곡 사연(沙淵), 7곡 석탑동(石塔洞), 8곡 반선대(盤旋臺), 9곡 홍개동(洪開洞)이다.그는 ‘제무이도지후(題武夷圖誌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무이산은 천하의 명산이다. 주자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 시를 많이 화운(和韻)하고 그 땅을 그림으로 그리고, 또 글로 기록했다. 내가 일찍이 수도산(修道山)에 정자를 지어서 망령되이 고인을 사모하는 뜻을 두고 구곡을 모방하려고 구곡시에 화운하였다.’이원조는 이처럼 다른 많은 선비처럼 주자의 무이구곡을 따라 가야산 포천계곡에 포천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포천구곡시를 짓고 포천구곡도를 그렸다. 그리고 포천구곡가를 비롯해 제자들과 함께 만귀정의 풍경을 읊은 시 등을 수록한 ‘포천지’를 남기고, 포천구곡도 그림을 그려 엮은 ‘포천도지(布川圖誌)’를 남겼다.이원조는 또한 무이구곡도와 함께 무이구곡과 관련 있는 선인(先人)들의 글을 엮어 ‘무이도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황, 정구, 정종로가 쓴 무이구곡 차운시, 이상정의 구곡도 발문 등을 실었다.◆이원조의 포천구곡시이원조의 포천구곡시 ‘포천구곡차무이도가’는 다음의 서시로 시작된다.‘가야산 위에 선령이 자리하고 있어(伽倻山上有仙靈)/ 산은 절로 깊고 물은 절로 맑다(山自幽水自淸)/ 산 밖에 노니는 지팡이 이르지 않아(山外遊曾未倒)/ 달은 밝고 생학 소리만 들을 뿐이네(月明笙鶴但聞聲).’1곡은 법림교다. 이원조는 ‘포천산수기’에서 법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을에서 30리쯤 가면 장산(獐山)에 이르는데 위쪽에서 나뉜 물이 다시 합쳐지는 곳으로, 하류에는 한강대와 봉비암이 있으니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장산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법림교에 이른다. 이곳이 산으로 들어가는 제1곡이다. 법림교 동쪽 수 리쯤에 아전리(牙田里)가 있는데 시내가 사현(沙峴)에서부터 내려와 폭포가 되니 매우 기이하다. 내가 처음에는 그 위에 정자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좁아서 그만두었다. 법림교 서쪽으로 시냇물 따라 길이 있으니, 포천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일곡이라 모래 여울 배 띄울 수 없고(一曲沙灘不用船)/ 법림교 아래서 맑은 시내 시작되네(法林橋下始淸川)/ 유인이 이곳에 원두를 찾아가는데(遊人自此尋源去)/ 골짜기 가득한 무지개 빛 저녁 연기 끄네(萬壑虹光拖夕烟).’법림교를 읊고 있다. 배를 띄울 수 있는 계곡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배를 타고 산수를 구경하며 유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를 찾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源)’은 ‘원두(源頭)’를 말하는데,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오는 표현으로 샘의 원천, 도의 원천을 의미한다.길을 나서며 앞을 바라보는데 골짜기에 무지갯빛 저녁 안개가 덮여 있다고 표현한 것은 도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현재도 1곡 지점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나 다리 이름은 법림교가 아니라 아전촌교이다. 근처에 아전촌이 있다. 하지만 1곡 아래에 법림동이 있어 과거에는 다리 이름을 법림교라 한 까닭을 알 수 있다.아전촌교 아래로 흐르는 시내가 화죽천이다. 화죽천은 증산에서 발원해 동남으로 흐르면서 포천계곡을 관통하는데 이 굽이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화죽천은 이 굽이를 지나서 대가천에 흘러든다.‘이곡이라 조연 가엔 봉우리 솟아 있고(二曲槽淵淵上峰)/ 봉우리 위에 선돌은 신선의 모습이네(峰頭石立羽人容)/ 동문(洞門)의 한 길은 그야말로 실과 같은데(洞門一逕如線)/ 물과 산이 돌아가니 푸르름 몇겹인가(水復山回翠幾重).’2곡 조연이다. 2곡에 대해 이원조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제2곡을 조연이라 한다. 돌이 파인 것이 구유와 같고, 물이 맑은 것이 구슬과 같다. 피라미가 오가며 헤엄을 치는데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1곡에서 500m 정도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2곡이다. 지금은 지형이 변해 구유 모양을 한 못을 쉽게 찾을 수는 없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이원조가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 포천구곡의 9곡 근처에 있다.포천구곡을 그린 포천구곡도 중 제1곡(오른쪽)과 제2곡.
2018.12.27
[九曲기행 .35] 충북 괴산 갈은구곡...강선대·선국암·칠학동천…신선처럼 살려했던 전덕호의 ‘이상향’
갈은구곡(葛隱九曲)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은(갈론)마을을 지나 속리산 옥녀봉을 향하는 계곡인 갈은계곡을 따라 설정된 구곡이다. 구곡이 설정된 구간은 2㎞ 정도 된다. 이 구곡도 선유구곡처럼 신선들이 노닐 만한, 맑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계곡이다. 괴산댐으로 생긴 괴산호 옆을 따라 이 구곡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보는 풍광도 멋지다. ‘갈은(葛隱)’은 ‘칡넝쿨 우거진 산속에 숨어 산다’ ‘칡뿌리를 먹으며 은둔한다’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갈은구곡은 갈천정, 강선대, 칠학동천, 선국암 등 신선과 관련된 곡명이 많다. 흰 바위와 맑은 물, 우거진 숲이 어우러져 신선이 사는 계곡이라 할 만하다. ‘갈은’은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에 대한 염원도 담고 있을 것이다. 갈은구곡을 설정해 경영한 주인공은 전덕호(全德浩·1844~1922)다. 그는 괴산읍 대덕리에서 태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 중군(中軍),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사람도 신선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신선이 머물 만큼 아름다운 갈은구곡에서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모양이다. 갈은구곡은 1곡 장암석실(場石室), 2곡 갈천정(葛天亭), 3곡 강선대(降僊臺), 4곡 옥류벽(玉溜壁), 5곡 금병(錦屛), 6곡 구암(龜), 7곡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8곡 칠학동천(七鶴洞天), 9곡 선국암(仙局)이다.1844년 괴산 대덕리 출생 전덕호통정대부 중군·중추원 의관 역임갈은계곡 2㎞에 걸쳐 구곡 설정굽이마다 바위에 명칭·한시 새겨시작점 ‘갈은동문’ 仙界 출입구◆전덕호가 이상향 꿈꾸며 설정갈은구곡은 갈은동문(葛隱洞門)에서 시작한다. 갈은마을에서 계곡 옆 길을 따라 1㎞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길고 높은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절벽 위에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있고, 아래 부분에 ‘갈은동문’이 새겨져 있다. ‘동문(洞門)’은 신선이 살 정도로 그윽하고 운치 있는 계곡인 동천(洞天)으로 들어가는 문을 뜻한다. 갈은동문은 갈은구곡의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이라는 의미다.이곳을 지나 계곡을 따라 9개의 굽이를 설정해 이름을 붙이고, 굽이마다 바위에 그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굽이를 읊은 한시도 새겨 놓았다. 1곡 장암석실은 갈은동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 숲 속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다. 이 바위에 작은 석실이 있어 정한 이름이다. 암벽 가운데 ‘장암석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갈은동문 쪽 암벽 안쪽에 구곡시가 새겨져 있다. 구곡시를 새긴 암벽 아래가 마치 집과 같다고 해서 ‘집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네/ 태고의 자연과 이웃하니 즐겁기만 하구나/ 흰 암반은 평평하고 둥글어 채소밭을 이루고/ 청산은 겹겹이 높이 솟아 담장으로 둘러있네’2곡 갈천정은 장암석실 맞은편 계곡 건너편에 있는 큰 바위다. 바위 위쪽에 ‘갈천정’이 새겨져 있다. 갈천정 각자 바로 아래 ‘전덕호(全德浩)’라는 이름과 한시가 새겨져 있다.갈천(葛天)은 중국의 상고시대 임금 중 도덕으로 선정을 펼친 ‘갈천씨(葛天氏)’를 말한다. 갈천씨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믿었고, 교화하지 않아도 잘 실천했다고 한다. 욕심 없고 순박한 사람들을 ‘갈천씨지민(葛天氏之民)’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이상향에 대한 꿈이 서려 있는 곳이라 하겠다. ‘햇살은 청산너머로 저물어가고/ 해가 갈수록 백발이 늘어만 가누나/ 오래도록 몇몇 군자들과 함께/ 갈천씨의 백성이 되고파라’3곡은 신선이 내려와 놀던 강선대다. 갈천정에서 조금 올라가면 두 물길이 합쳐지는데, 왼쪽 물길 쪽을 보면 3층으로 쌓인 커다란 암벽이 보인다. 그 주변 물굽이가 강선대다. 바위 절벽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바위 벽에 행서체로 ‘강선대’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구곡시가 새겨져 있다.‘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진짜라고 해야 할까/ 이 세상에 신선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참으로 이상하게 이곳에 오는 사람들 모두/ 가슴이 상쾌해져 저절로 속된 마음 사라지네’강선대 쪽이 아닌, 다른 계곡의 물길을 따라 1㎞ 정도 올라가면 제4곡 옥류벽이 나온다. 옥 같은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벽이라는 뜻이다. 마치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절벽이다. 절벽 앞으로 맑은 물이 흘러가며 못을 이룬다. 절벽 위쪽에 ‘옥류벽’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구곡시가 새겨져 있다.‘용은 단약 솥에 엎드리고 거북은 연꽃 위에 올라간다네/ 참말로 신선 되어 오르기는 어렵구나/ 절벽사이 방울방울 흐르는 물 경장수(瓊漿水)이니/ 오래도록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네’ ◆굽이마다 명칭과 구곡시 새겨비단같은 병풍바위라는 의미의 5곡 금병은 옥류벽 조금 위에 있다. 황갈색 바위벽에 물빛에 반사된 햇볕이 닿으면 그야말로 비단처럼 보인다는 곳이다. 바위 벽에 ‘금병’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그 왼쪽에 세로로 길게 시가 새겨져 있다.‘온갖 꽃 무성하고 햇빛 붉게 비치니/ 오색가사 등에 걸친 중이어라/ 층층이 쌓인 바위 금병의 그림자 어떠한가/ 차가운 연못에 거꾸로 비치니 푸르고 맑도다’ 6곡 거북바위 구암은 금병에서 50m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암벽에 ‘구암’이라는 전서 각자와 7언절구 시구가 새겨져 있다.‘오래 묵은 거북이 샘물을 들이켰다 내뿜었다 하면서/ 구슬 모양으로 오므렸다 폈다하여 멀리에서나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네/ 한 번 석문(石門)이 우레에 맞아 부서진 이후로/ 이 영산을 잘 아끼고 지켜주지 못 했다네’ 7곡 고송유수재는 U자형을 이룬 바위지대 가운데로 계류가 흐르는 곳이다. 한쪽 바위벽에 ‘고송유수재’ ‘갈은동(葛隱洞)’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오른쪽 벽에는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조부이자 이조참관을 지낸 홍승목(洪承穆), 구한말 국어학자 이능화의 아버지이자 이조참의를 지낸 이원극(李源棘)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맞은편에는 정자터가 남아있다. 노송 아래로 흐르는 물가에 지은 집이라는 뜻의 고송유수재 굽이는 갈은구곡 중 경치가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구곡시는 ‘고송유수재’ 각자 옆에 새겨져 있다. ‘일찍이 학은 여기에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鶴觀何曾在此中)/ 다만 나의 취미는 학과 같다네(但從趣味與之同)/ 바둑판 하나 새기고 한 칸 집 지어 놓고(一局紋楸一間屋)/ 두 늙은이 기쁜 마음으로 마주 앉았네(欣然相對兩衰翁)’8곡 칠학동천은 7곡 바로 위에 있다. 일곱 마리 학이 살았다는 공간이다. 흰 사각 바위에 ‘칠학동천’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여기에 일찍이 일곱 마리 학이 살았다 하나(此地曾巢七鶴云)/ 학은 날아가 보이지 않고 구름만 떠가네(鶴飛不見但看雲)/ 지금 달 밝고 산은 공허한 밤인데(至今月朗山空夜)/ 이슬 싫어하는 학의 소리 들리는 듯 하누나(警露寒聲若有聞)’9곡 선국암은 칠학동천 바로 위에 보이는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다. 신선이 바둑을 두던 바위라는 선국암 위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바둑돌을 넣어두는 홈도 두 개 파여 있다. 바둑판 네 귀퉁이에는 ‘사노동경(四老同庚)’이라는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위 옆면에는 ‘선국암’이라는 글씨와 구곡시, 그리고 네 사람의 이름(전덕호 경인국 홍승섭 이건익)이 새겨져 있다.‘옥녀봉 산마루에 해는 저물어 가는데(玉女峰頭日欲斜)/ 바둑 아직 끝내지 못해 각자 집으로 돌아가네(殘棋未了各歸家)/ 다음날 아침 생각나 다시 찾아와 보니(明朝有意重來見)/ 바둑알 알알이 꽃 되어 돌 위에 피었네(黑白都爲石上花)’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7곡 고송유수재 풍경. 왼쪽 암벽에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건너편 위에는 정자터가 남아있다. 7곡 바로 위에 8곡 칠학동천이 있다.
2018.12.13
[九曲기행 .34] 문경 쌍룡구곡...고산·유수·청풍·명월 ‘四友’ 벗삼아…안빈낙도를 꿈꾼 민우식
쌍룡구곡(雙龍九曲)은 화운(華雲) 민우식(1885~1973)이 문경시 농암면 쌍룡계곡에 설정해 경영했던 구곡이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 속에서 학문에 힘썼다. 민우식은 상주 율리(栗里)에서 문경 화산(華山) 아래에 옮겨 살았다. 이때 그의 부친 민영석을 위해 쌍룡천의 용강(龍崗) 위에 사우정(四友亭)을 세우고, 내서천과 쌍룡천에 걸쳐 구곡을 설정했다. 쌍룡구곡은 다른 구곡과 달리 한 시내에 순차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두 시내에 아홉 굽이를 나누어 설정했다. 1곡에서 6곡까지는 쌍룡천에, 나머지는 내서천에 설정했다. 쌍룡구곡은 1곡 입문(入門), 2곡 지도석(志道石), 3곡 우연(于淵), 4곡 여천대(戾天臺), 5곡 방화동(放化洞), 6곡 안도석(安道石), 7곡 낙경대(樂耕臺), 8곡 광명암(廣明巖), 9곡 홍류동(紅流洞)이다. 아홉 굽이의 이 명칭들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민우식은 ‘서쌍룡구곡시후(書雙龍九曲詩後)’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입문은 도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도는 도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한다. 우연과 여천은 솔성(率性)을 말한다. 방화는 대인이고 저절로 변화함을 말한다. 안도는 도에 편안함을 말한다. 이 여섯 굽이는 공부의 진덕차제(進德次第)로 건괘(乾卦)의 초구(初九)인 잠룡물용(潛龍勿用)의 상(象)이고, 정자(程子)가 말한 회양사시(晦養俟時)다. 낙경이라 말한 것은 안빈낙도이니 곧 건괘의 구이(九二)로 현룡재전(見龍在田)의 상(象)이고, 대순(大舜)이 밭 갈고 고기 잡는 때이다. 광명이라 말한 것은 천하에 명덕(明德)을 넓히는 것을 말하니, 곧 건괘의 구사(九四)와 구오(九五) 상(象)이다. 홍류가 말한 것은 세상을 피하는 도원을 말하니, 건괘의 상구(上九)로 퇴손무회(退遜無悔)의 뜻이다. 이 세 굽이는 출처행장으로 말한 것이다.’관직 나가지 않고 유유자적한 삶농암면 쌍룡계곡 두 시내에 설정1∼6곡 쌍룡천…7∼9곡 내서천父 위해 3곡엔 ‘사우정’도 세워민우식의 구곡은 이처럼 그가 지향하는 도의 세계에 나아가는 입도차제(入道次第)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도는 물론 유가(儒家)의 성현들이 추구했던 도다. 민우식의 ‘쌍룡구곡시’를 따라 가본다.◆민우식이 20세기에 설정한 구곡‘한 폭의 용강에 사우정이 자리하는데/ 세 산이 모이고 두 시내 돌아 흘러가네/ 이 땅의 산과 시내 아홉 굽이를 감추니/ 하늘이 경치를 가장 아름답게 하였네.’이 시에서 나타나듯이 사우정은 세 산(道藏山, 佛日山, 靑華山)이 모이고 내서천과 쌍룡천이 만나는 쌍룡의 용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이다. 사우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청풍(淸風), 명월(明月)이다. 1곡 입문은 사우정이 있는 곳에서 시내를 따라 500m 정도 내려간 지점이다. 내서천과 쌍룡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쌍룡구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형세를 띠고 있다.‘일곡이라 이로부터 도의 문에 들어가니/ 양쪽에 높은 절벽 가는 길 어두워라/ 가다가 서면서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으니/ 차례로 나아가면 앞에는 절로 원두 있으리.’1곡에서 도의 문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어둡고 험한 길이지만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으면 목적지인, 선비가 지향하는 도가 전개되는 극처에 도달할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2곡 지도석은 내서2교가 놓여있는 지점이다. 다리 공사 과정에서 파괴된 것인지 지도석은 남아있지 않다. 높이 5m, 둘레 10m 정도의 바위로 ‘지도(志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곡이라 가파르게 솟아있는 지도석/ 횡류를 막아서니 진실로 주춧돌 같네/ 나는 물줄기 힘찬 폭포수 때로 지나는데/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니 더욱 희네.’3곡은 우연이다. 사우정이 있는 바위 아래 물굽이다. 용강 바위 아래의 못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주변 풍광이 정자와 어우러져 멋지다. 정자에는 ‘명월청풍’과 ‘고산유수’ 주련이 걸려있다. 민우식이 이곳에서 함께했던 네 가지 벗이다. ‘삼곡이라 우연은 물결이 거울같이 잔잔하고/ 천연의 오래된 돌들 저절로 움집을 이루네/ 물결은 쉬고 바람도 없는 따뜻한 봄날/ 못에는 고기떼 이리저리 한가로이 노니네.’잔잔한 물결, 따스한 봄볕,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를 보며 천지의 이치를 깨우친다.4곡은 여천대다. 우연에서 물길을 따라 거슬러 2㎞ 정도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높이 솟은 산을 만난다. 이 산이 여천대다. ‘하늘에 이르다’는 의미를 가진 여천은 산의 형상을 뜻한다. 여기서는 다른 의미도 갖는데, ‘시경’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鳶飛戾天)/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논다(魚躍于淵).’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노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고, 이러한 것이 천지자연에 내재하는 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사곡이라 하늘에 이르는 높은 누대(四曲戾天千尺臺)/ 일찍이 높은 이곳 이르는 이 없어라(無人曾昔到崔嵬)/ 둥지 튼 솔개만 그 본성을 알아(惟有巢鳶能識性)/ 긴 바람 타고 구만리 날아 휘도네(長風九萬任飛回).’5곡 방화동은 4곡에서 물길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다 작은 길을 따라 산속으로 1㎞ 정도 들어가면 나온다. 얼마 전까지 1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마을이다. ‘오곡이라 초연히 방화동이 자리하는데(五曲超然放化洞)/ 가려 뽑은 곳 무리에서 우뚝하네(拔乎其萃出乎衆)/ 몇 사람 이곳에 이르렀는가(屈指幾人能到斯)/ 하늘 땅 고요하니 긴 꿈에 취하리라(乾坤寂寂醉長夢).’6곡 안도석은 5곡 방화동 입구에서 계곡 물길 따라 3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높다란 바위산에 이른다. 위에 소나무가 있는 양파 모양의 이 산이 안도석이다. 멀리서도 잘 보인다. 주변 풍광이 매우 좋은 곳이다. 안도석 앞의 용추계곡은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다운 계곡이다.‘육곡이라 저 멀리 안도석이 자리하는데(六曲迂然安道石)/ 시내 중류에 우뚝 솟아 있네(中流截特百千尺)/ 지금 높아 오르지 못한다 말하지 마라(休說而今高莫攀)/ 문을 통해 나가면 도를 찾을 수 있으리(由門進道可追跡).’도에 이르는 길에서 포기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7곡 낙경대는 내서천에 있다. 농암면 내서리 쌍룡교에서 1㎞ 정도 내서천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소나무들이 있는 작은 숲이 있는데 이곳이 낙경대다. 이 굽이 너머에는 밭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낙경’은 즐겁게 밭을 간다는 의미다. 이 굽이에서는 밭을 가는 평범한 삶 속에 참다운 도가 있음을 노래한다.‘칠곡이라 몸소 밭 갈며 이 대에서 즐기니(七曲躬耕樂此臺)/ 감나무 뽕나무 콩 비가 오자 가꾸었네(枾桑豆菽雨初裁)/ 남산에서 김매고 돌아와 저녁에 누우니(鋤罷南山歸臥夕)/ 아이들 둘러앉아 책 읽기 재촉하네(兒孫環匣讀書催).’8곡은 광명암은 7곡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길옆에 보이는 검은 빛깔의 바위를 말한다. 초서체로 ‘광명암(廣明巖)’이라 새겨져 있다. 그 옆에 해서체로 ‘쌍계수석(雙溪水石)’ ‘사우산림(四友山林)’이 새겨져 있다. ‘팔곡이라 기이한 바위는 넓고 밝으니(八曲奇巖廣且明)/ 맑은 물 뛰는 물고기 서로 정답네(水澄魚躍兩相情)/ 바람 구름 고기 물은 진실로 우연이 아니니(風雲魚水誠非偶)/ 나의 명철 넓혀 가서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推廣吾明利衆生).’9곡 홍류동은 8곡에서 1㎞ 정도 거슬러 올라간 지점의 바위 계곡이다. 원래 지명이 홍골인데, 민우식은 이 굽이를 홍류동이라 명명했다.‘구곡이라 홍류에는 별천지 동천이 있는데/ 도화와 봄물에 세상 근심 이르지 않네/ 아침에 산굴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니/ 길짐승에 기린 있고 날짐승에 봉황 있네.’ 마지막 9곡 홍류동에서 도가 구현되는 별천지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쌍룡구곡 중 사우정이 있는 3곡 우연(于淵) 주변 풍경. 네 벗인 사우(四友)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명월(明月), 청풍(淸風)이다. ‘고산유수’ ‘명월청풍’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2018.11.29
[九曲기행 .33] 문경 석문구곡(下)...높이 솟은 두 봉우리 ‘石門’ 이뤄…별천지서 詩文 짓고 풍류도 즐기네
3곡 우암대는 현리에서 현리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400m 정도 가면 나온다. 금천 왼쪽 야산 아래에 있다. 우암대 위에는 정자 우암정(友巖亭)이 있다. 우암정은 1801년에 창건됐다. 우암(友巖) 채덕동이 선조인 채유부(蔡有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채덕동은 형제간 우애가 각별했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였으며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우암정 뒤쪽에 바위가 솟아있는데, 바위에 ‘우암채공 장수지소(友巖蔡公 藏修之所)’라고 새겨져 있다. 우암 채덕동이 은거한 곳이라는 의미다. 우암대 앞으로 금천이 흘렀을 것이나 지금은 주암과 마찬가지로 금천 둑에 막혀 물길이 이르지 않고 있다. ‘산양천이 적성산의 남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나아가 옛날 추향(樞鄕)인 권 선생의 청대(淸臺)가 되었다. 청대로부터 위로 5리 지점에 수풀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승경이 있다. 인천(仁川) 채군상(蔡君尙)옹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내가 금년 봄에 한 번 올라가니 정자의 좌우는 모두 푸른 바위이고 앞은 시냇물이 있어, 맑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가 자주 난간에 들려왔다. 시내 밖에는 밝고 맑은 모래다. 고요한 별장인데, 별장이 자리하는 옛 현은 아침 저녁에 연기 꽃과 시내 아지랑이가 숲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3곡 우암대 앞엔 금천 흘렀지만주암처럼 물길 막혀 이르지 못해9곡 석문정, 선비 채헌의 이상향12수 한시 ‘석문정십이경’ 남겨정상관(鄭象觀)이 지은 ‘우암정기’에 있는 내용이다. 3곡시는 다음과 같다.‘삼곡이라 여울가에 저문 배가 걸리니(三曲灘頭倚暮船)/ 우암대 몇 천년이 되었는가(友岩臺古幾千年)/ 우뚝 솟은 화주 모래 가에 서 있고(亭亭華柱沙頭立)/ 염바위 바라보니 다만 절로 어여쁘네(回首濂巖只自憐).’화주는 화수헌이라는 집인데 지금은 없다.4곡 벽립암은 금천 가의 바위 벼랑이 맑고 많은 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근래 농지정리 과정에서 바위가 많이 제거돼 옛 모습을 적지 않게 잃어버렸다.‘사곡이라 솟아 있는 푸른 바위 벼랑에(四曲蒼蒼壁立岩)/ 바위 이끼 이슬을 머금어 푸르게 드리우네(岩苔含露翠)/ 높다랗게 보이는 형체를 아는 이 없고(高見形體無人識)/ 넓고 넓은 뒷내에는 물이 가득할 뿐(汪汪後川只滿潭).’5곡 구룡판은 마을 이름이다. 문경시 산북면 약석리 마을이다. 마을 표지석에 ‘구룡판’이라고 표기돼 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 마리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려는 형상을 하고 있는 형세이고, 그 산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지세라고 하면서 산혈(山穴)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흙의 색깔도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한다.‘5곡이라 시냇가에 길이 돌아 깊고(五曲溪邊路轉深)/ 구룡판 아래는 버드나무 숲을 이루네(九龍板下柳成林)/ 숲 사이에 그윽한 흥취 누가 아는가(林間幽趣誰能會)/ 한 곡조 뱃노래에 객의 마음 상쾌하네(一曲棹歌爽客心).’6곡 반정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6곡시는 다음과 같다.‘육곡이라 반정에 물굽이 둘러 있고(六曲潘亭一帶灣)/ 흰 구름 깊은 곳에 동문이 닫혀 있네(白雲深處洞門關)/ 비파산 풀 푸르고 강가의 꽃 떨어지며(琶山草綠紅花落)/ 황새가 우니 봄뜻이 한가롭다(黃鳥綿蠻春意閒).’7곡 광탄은 두 줄기 물길이 만나 넓은 여울을 만드는 지점이라 광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광탄은 석문정에서 내려오는 대하천과 화장골에서 내려오는 동로천이 만나 넓은 여울을 이루는 지점이다. ‘칠곡이라 배를 저어 광탄에 오르며(七曲行舟上廣灘)/ 다시금 가유서숙을 되돌아 보노라(嘉猷書塾更回看)/ 안타까워라 밤비가 봉산을 지나가니(却憐夜雨蓬山過)/ 활수의 원두에 찬 물이 불어나네(活水源頭添一寒).’8곡 아천은 아천교 주변이다. ‘팔곡이라 아천은 돌길이 열리고(八曲鵝川石路開)/ 세심대 아래로 물이 돌아 흐르네(洗心臺下水回)/ 나루에서 복사꽃 줍는 일 말하지 마라(渡頭不說桃花網)/ 나들이객들 진처 찾아 물 따라 오리니(遊客尋眞逐水來).’◆채헌이 많은 시를 남긴 9곡 석문정 9곡은 석문정이다. ‘석문(石門)’은 석문정 옆의 시내 양쪽에 바위 벼랑이 솟아 있어 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문을 지나면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조금 더 올라가면 김룡사와 대승사가 나온다. 채헌은 석문 옆에 석문정을 짓고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풍류도 즐겼다. 채헌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석문정에 노닐며 한글 가사(歌辭)로 읊은 ‘석문정가(石門亭歌)’를 짓고, 12수의 한시로 된 ‘석문정십이경(石門亭十二景)’을 짓기도 했다. 지금 석문정에는 채헌이 한글로 지은 ‘석문구곡도가’를 새긴 시판과 ‘석문정기’ 기판 등이 걸려 있다.‘구곡이라 석문에 길이 확 열리며(九曲石門道豁然)/ 광풍과 제월이 청천에 가득하네(光風霽月滿晴川)/ 등한히 꽃을 찾는 길 알아내니(等閒識得尋芳路)/ 연비어약 모두 이 동천이어라(飛躍鳶魚摠是天).’채헌은 9곡을 속세를 떠난 별천지로 표현하며,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세계가 펼쳐지는 곳으로 노래하고 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연비어약은 천지 만물이 자연의 바탕에 따라 움직여 저절로 그 즐거움을 얻음을 상징한다. 이는 곧 도(道)는 천지에 가득차 있음을 뜻한다. ‘시경(詩經)’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오른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구절이 나온다.한시 ‘석문정십이경’ 중 ‘석문정’과 ‘석문’을 읊은 시다.‘일대의 십리 시내와 산이 기이하여(一帶溪山十里奇)/ 반생 동안 오고가니 기대하는 바에 합하네(半生往來契心期)/ 지금에야 머물던 자리 장식하고(于今粧點盤旋地)/ 천석정 앞에서 생각한 바를 위로하네(泉石亭前慰所思).’‘두 봉우리 높이 솟고 한 시내 달리니(兩峯嶪一川奔)/ 뾰족한 산 하늘에 닿고 돌은 문을 이루네(箭括通天石作門)/ 조물주가 조화의 도끼로 만들지 않았다면(不是天公裁化斧)/ 또한 응당 우 임금 산을 이끈 흔적이네(也應大禹導山痕).’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석문구곡 마지막 굽이 9곡인 석문. 왼쪽 숲 속에 채헌이 건립해 애용하던 정자 석문정(작은 사진)이 있다.
2018.11.15
[九曲기행 .32] 문경 석문구곡(上)...자연에 묻혀 산 선비 채헌 “경전 논하고 詩 읊조리니 헛된 날 없더라”
석문구곡(石門九曲)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에 있는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따라 9㎞에 걸쳐 있다. 근품재(近品齋) 채헌(1715~95)이 그 주인공이다. 태백산의 한 줄기가 뻗어나와 금학봉(金鷄峯)을 이루고, 맞은편에 석벽이 높이 솟은 산이 또 봉우리를 이룬다. 이 두 봉우리가 석문(石門)을 이루고 있다.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인 이곳 석문의 대하천 옆에 채헌이 정자 석문정(石門亭)을 짓고 머물면서, 대하천과 그 아래 금천의 아홉 굽이에 구곡을 정하고 ‘석문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석문정집(石門亭集)’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사는 곳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문동(石門洞)이 있는데 양쪽의 언덕이 대치하여 높이 솟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절승(絶勝)이 있는지라,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석문(石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이에 벗들을 맞이하고 손님을 초청해 샘물 소리, 바위 빛깔 사이에서 노니니 훨훨 속세를 벗어나는 듯했다. 경전을 논하고 시를 읊조리며 헛된 날이 없었으니 모두 남주(南州)의 좋은 주인이라 하였다.’ 채헌은 175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더 이상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산 선비다. 청대(淸臺) 권상일(1679~1760) 문하에서 공부했다. 만년에 석문정을 짓고 석문구곡을 경영하며 석문구곡가를 지었다. 석문구곡가는 한글 가사로 된 ‘석문정구곡도가(石門亭九曲棹歌)’와 한시로 된 ‘석문구곡차무이도가운(石門九曲次武夷棹歌韻)’이 있다.청대 권상일 문하서 공부한 채헌생원시 합격 후 벼슬길 연연 안해석문동 절경 곁 정자 짓고 머물며금천∼대하천 9㎞ 걸쳐 구곡 설정1곡 농청대, 스승이 학문 닦던 곳2곡 주암 앞 물길 끊겨 논밭으로◆채헌이 18세기에 설정한 구곡석문구곡은 1곡 농청대(弄淸臺), 2곡 주암(舟巖), 3곡 우암대(友巖臺), 4곡 벽립암(壁立巖), 5곡 구룡판(九龍板), 6곡 반정(潘亭), 7곡 광탄(廣灘), 8곡 아천(鵝川), 9곡 석문정(石門亭)이다.1곡 농청대는 문경시 산양면사무소에서 금천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간 곳이다. 지금은 정자 농청정(弄淸亭)이 자리하고 있다. 농청대는 권상일이 장수(藏修)하던 장소였다. 권상일의 ‘존도서와기’에 농청대와 존도서와(存道書窩)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존도리 동쪽으로 수백 보 지점에 대(臺)가 있는데 농청(弄淸)이라 하였다. 대체로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옛날부터 이름이 전해왔다. 농청대 아래에 맑은 내가 있는데, 그 원두가 대미산(岱眉山)에서 나와 10여 리를 흘러들어 이곳에 이르러 물이 고여 못을 이룬다. 또 남쪽으로 푸른 들판 바깥을 흘러서 낙동강에 들어간다. 농청대 위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월방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돌아 내에 이르러 멈춘다. 푸른 바위가 둘러 있는 것이 집의 담장 모양 같은데 오직 동남의 두 면은 물에 임해 두절되었다. 위는 평평하며 30여명이 함께 앉을 수 있으니 바로 농청대다. 우측 곁에 층암(層巖)이 높다랗게 우뚝 솟아 가장 웅장하고 기이하다.기미년(1739) 가을에 재료를 모아 건축을 시작해 다음해 늦은 봄에 공사를 마쳤다. 뒤 칸은 실(室)이고 앞 칸은 헌(軒)인데 합하여 삼 칸이다. 재(齋)는 졸수(拙修)라 하고, 헌은 한계(寒溪)라 하였다. 통괄해 존도서와(存道書窩)라 이름을 지었다. 날마다 그 가운데 기거하고 도서를 좌우에 배치해 정신과 심성을 기르니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만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졸수재가 높아 달을 가장 많이 들이는데, 때로 작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날씨가 맑고 밝아 달빛이 집에 가득히 비친다. 일어나 멀리 바라보면 시내의 여울이 환히 밝고 들판이 멀리 트이며 동남쪽의 이어진 산들이 안개와 이내 속에 은연히 비치니, 아득한 가운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쁘고 상쾌하며 경치와 마음이 합하는 듯했다. 그 즐거움을 말로써 형용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다.’존도서와는 1808년 화재로 소실되고 ‘존도서와’ 편액만 남았다. 후인들이 1863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농청대는 이 건물을 보수한 것이다. 보수하면서 ‘농청정’ 편액을 단 것으로 보인다.‘일곡이라 학해선으로 거슬러 오르니(一曲溯學海船)/ 청대의 수척한 대나무 앞 내에 비친다(淸臺瘦竹映前川)/ 선생이 가신 후 완상하는 이 없으니(先生去後無人弄)/ 태고암 머리에 저문 안개 드리우네(太古巖頭銷暮煙)’스승 권상일이 별세한 후 대나무 앞을 흐르는 맑은 물을 완상하는 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배모양의 바위 주암이 2곡2곡은 주암이다. 1곡에서 1.6㎞ 정도 올라가면 현리(縣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금천 한 쪽에 부벽(浮碧)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주암(舟巖)이 자리하고 있다. 채헌이 살던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부벽 앞으로 물길이 흐르고 주암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물길이 변한 것이다. 주암과 금천 사이에는 하천 둑이 가로막고 있다.부벽에는 현재 경체정(景亭)이 자리하고 있다. 경체정은 채성우를 비롯해 그 7형제를 기려 손자 부자(父子)가 지은 정자다. 1935년 현리에 처음 지었으나 197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주암은 현리에서 현리교를 건너 왼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 마을(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옆에 있다. 이름 그대로 배 모양의 바위로, 바위 위에 주암정(舟巖亭)이 세워져 있다.이 정자는 주암(舟巖) 채익하(1573~1615)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건립했다. 정자는 배 모양의 바위 위에 선실(船室)처럼 지어졌다. 후손 채홍탁이 지은 ‘주암정기’에 주암정 건립 내력이 나와 있다.‘웅연(熊淵)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형상이 배와 같은데 벼랑을 다듬어 길게 매어놓았다. 옛날에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이로 인해 주암으로 이름을 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별세하셨다. 그 후 이 바위를 지나며 노닐던 사람들 모두 갔지만 이름은 남게 되었다. 임오년 3월에 일을 시작해 9월에 공사를 마치니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취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이가 있으나 난간에 기대 바라보면 천주봉(天柱峯)이 북쪽에 솟아 있어 완연히 만 길의 베를 걸어놓은 듯하다. 금강(錦江)이 남쪽으로 흘러들며 의연히 한 세대의 금람(錦纜)을 모은다. 기타 자연의 아름다움은 안개가 드리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도를 위한 이름난 구역이 되기에 충분하다.’주암정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최근 주암정을 보수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정자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주암정은 팔작지붕에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이곡이라 동쪽에 일월봉이 솟아있고(二曲東亞日月峯)/ 두 바위 물을 베니 형제의 모습이네(雙巖枕水弟兄容)/ 정자 앞 부벽은 천년이나 되었고(亭前浮碧千年久)/ 대숲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望裏竹林翠幾重)’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석문구곡 중 2곡인 주암(배 모양 바위). 현재는 물길이 바뀌어 주암 앞으로 금천이 흐르지 않으며, 주암 위에는 1944년 주암(舟巖) 채익하를 기려 세운 주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주암 앞에는 연못이 조성돼 있다.
2018.11.01
[九曲기행 .31] 봉화 대명산구곡...“명나라 황제 신령이 닿은 곳…고사리 캐며 절의 지키는 선비 있네”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해은(海隱) 강필효(1764~1848)가 설정한 구곡이다.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의 보라골에서 시작해 운곡천을 거쳐 명호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 뒤 청량산을 지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까지 이어지는 20㎞ 정도의 물줄기에 걸쳐 있다. 대명산구곡은 상류에서부터 1곡이 시작된다. 1곡 마고(麻姑), 2곡 갈천(葛川), 3곡 조대(釣臺), 4곡 백룡담(白龍潭), 5곡 청량산(淸凉山), 6곡 광평(廣平), 7곡 고산(孤山), 8곡 월명담(月明潭), 9곡 면만우(萬隅)다. 강필효는 호가 해은(海隱)이고, 봉화 법전 출신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돼 1803년에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842년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다. 이듬해 통정대부에 승진하고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근사속록(近思續錄)’ 등이 있다. 문집 ‘해은유고’가 있다.◆강필효가 명나라를 사모하며 설정한 구곡강필효는 주자(朱子)를 존숭했다. 그는 주자를 존숭하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봉화에 은거하며 대명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구곡의 이름인 대명산은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강필효의 대명산구곡가 서시다.‘해동이 저 멀리 성황(聖皇)의 신령에 닿으니/ 크지 않은 산과 내가 대명(大明)을 숭상하네/ 그 속에 고사리 캐며 사는 선비 있으니/ 천지 가에 살며 호탕한 노래 부르네.’강필효에게 대명산구곡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이어가는 공간이었다. ‘성황의 신령’은 명나라 황제의 신령을 말한다. 조선 외진 산골의 산과 냇물도 명을 숭상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 산속에서 고사리 캐며 절의를 지키는 선비는 다름 아닌 강필효 자신이다. 서시 끝에 붙인 주석에 강필효는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온 지맥이 이곳으로 흘러 왔음을 설명한다.‘대명산이 태백에서 뻗어 나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을 추는 듯이 100리를 오르내리다가 우뚝 솟아 높은 산이 되니, 산 아래 은빛의 폭포가 뿜어내는 물이 산을 에워싼다. 돌아보니 이제 제경(帝京)은 전쟁이 일어나 조종(朝宗)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한 구역만 숭정(崇禎)의 일월(日月)을 이어가고, 이 산이 또 대명(大明)의 이름을 가지니 어찌 한 조각 깨끗한 땅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 후기 유학자 해은 강필효임란때 원군 보낸 明 사모하며봉화∼안동 20㎞ 물길에 설정1곡, 낙동강 상류 보라골 위치할머니 피란지 인연 첫 굽이로5곡 詩 주석 달아 백운암 언급퇴계 이황 道心에 경외감 표현1곡 마고는 낙동강 상류의 봉화군 명호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 정도 떨어진 도천리 ‘보라골’에 있다. 밖에서 보면 안에 사람 살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산골마을이다. 상보라, 중보라, 하보라 등에 모두 50가구쯤이 살아간다. 강필효의 할머니는 난을 피해 이곳에서 살았던 인연이 있었다. 풍광이 빼어난 곳은 아니지만 큰길에서는 이 계곡이 잘 드러나지 않고 물이 넉넉한 데다 농토도 적당히 있어 난을 피하기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으로 강필효는 이곳을 대명산구곡의 첫 굽이로 삼았다.2곡 갈천은 명호면 도천리에 위치한다. 마고동천(麻姑洞天)을 떠돌던 시냇물은 하류로 흘러 산속을 돌고 돌아 1.5㎞ 정도 내려가면 보라교에 이르러 도천과 만난다. 이 물길은 650m 정도 더 내려가 제법 큰 물줄기인 운곡천(雲谷川)으로 흘러든다. 이 합수 지점 삼거리 근처가 바로 제2곡인 갈천이다.3곡은 조대. 운곡천 물줄기는 갈천을 지나 1.5㎞를 흘러 명호면소재지를 길게 휘감고 돌면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운곡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도천교에서 오른쪽 물가에 눈길을 주면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큼직한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어 낚싯대 드리우기도 좋은 곳이다. 낙동강에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인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은어떼가 있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조대가 바로 이곳이다.4곡 백룡담은 명호면 관창리에 있다. 조대를 지난 낙동강 물줄기는 바위 병풍을 휘돌며 흘러간다. 강물의 수량도 점점 많아진다. 조대에서 6㎞ 정도 내려오면 관창2교 직전 왼쪽으로 거뭇한 바위 벼랑이 눈길을 끈다. 그 아래 못을 이루고 있는 강물이 바로 용이 살았다고 전해오는 백룡담이다.강필효는 이 부근을 이렇게 설명한다. ‘백룡담은 조대 아래에 있다. 양쪽 언덕의 산이 모두 층층의 바위로 되어 있어 강물이 깊고 푸른데, 그 안에 용이 살고 있다. 일찍이 용이 비늘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5곡은 이황의 ‘오가산(吾家山)’인 청량산5곡 청량산이다. 백룡담을 뒤로하고 낙동강 물길을 따라 3㎞ 남짓 내려가면 청량산 입구가 나온다. 이곳을 다섯째 굽이로 삼았다. 강필효는 이곳에서 청량산을 우러르며 퇴계 이황을 떠올렸다. 오가산(吾家山)은 퇴계가 청량산을 부르던 이름이었다.‘오곡이라 청량산은 땅이 더욱 깊으니(五曲淸凉境益深)/ 나열한 봉우리들 숲과 같은 형세이네(群峰羅列勢如林)/ 오가산 아래에 백운 마을이 자리하니(吾家山下白雲塢)/ 오랜 세월 거듭 찾아가 도심을 공부하리라(百載重尋講道心)’강필효는 5곡 시 뒤에 주석을 달아 ‘당나라 이발이 광려에 은거하며 이가산(李家山)이라 이름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또한 오가산이라 일컬었다. 산에 백운암이 있는데 곧 선생이 독서하던 곳이다. 오래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몇 해 전에 비로소 새로 지었다’라고 설명했다.백운은 퇴계가 머물던 백운암을 일컫는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청량산의 백운암을 찾아 퇴계가 전해 준 도심(道心)을 공부했다. 퇴계가 전해준 도심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전해온다는 경외감을 표현하고 있다.6곡 광평은 명호면 관창리에 위치한다. 5곡 청량산에서 1.3㎞ 정도 내려오면 낙동강 우측에 나오는 마을이다. 넓고 평평한 지형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7곡 고산은 광평에서 2㎞ 정도 내려가면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이른다. 마을 쪽에 있는 작은 산이 고산이다. 그 건너편 강변에 금난수(1530~1604)가 은거하던 고산정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낙동강이 산을 빙 돌아 흘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둥이 크게 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산을 두 동강냈다고 한다. 그래서 산과 산 사이로 강물이 흐르게 되고, 고산정 맞은편에 따로 고산이 형성되었다고 한다.7곡 고산은 도산구곡의 8곡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산구곡의 마지막 9곡 청량도 대명산구곡의 5곡에 해당하므로, 대명산구곡은 도산구곡과 많이 겹치는 셈이다.8곡 월명담은 고산에서 1㎞ 정도 내려가면 강물이 크게 굽이 도는 지점이다. 월명소(月明沼)·월명당(月明塘)이라고도 불렀다. 9곡 면만우는 월명담에서 강물을 따라 1.5㎞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굽이다. 도산면 가송리에 속한다. 이곳에 학소대가 높이 솟아 있다. 강필효는 이 굽이를 9곡으로 설정했다. 더 나아가면 퇴계 선생의 은거지인 도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강필효는 “월담 아래에 면만우라는 곳이 있는데 산이 깊고 물이 돌아 흘러 그윽하고 빼어나서 은거할 만하다. 이곳을 지나면 도산의 형승(形勝)이 있다”고 설명을 달았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대명산구곡 중 5곡인 ‘청량산’ 입구 낙동강 풍경. 오른쪽 산이 청량산이다. 강필효는 이황이 ‘오가산’이라 불렀던 이곳 청량산에서 이황을 떠올리며 도심(道心)을 노래했다.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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