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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미학 .19] 구층암과 모과나무 기둥...스님 거처 떠받치는 ‘護聖果 기둥’…절묘한 맞춤에 눈이 번쩍
옛 건물들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자연친화적 정서와 미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삼은 덤벙주초, 나무 원목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생긴 대로 활용한 기둥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옛 산사 건물에 이런 특징이 다양하게 잘 드러나 있다. 건물 중에서도 누각이나 종각 등에 굽은 원목 기둥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많다. 문경 김용사의 가장 오래된 건물인 곡루(곡식 창고)의 1층 기둥, 김용사 부속 암자인 대성암의 침계루 1층 기둥, 서산 개심사의 범종각 기둥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례들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산사 건물의 기둥이 있다. 구례 화엄사 부속암자인 구층암(九層庵)의 요사(寮舍) 기둥이다. 보는 순간 놀라움과 큰 감동이 몰려왔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과나무 원목 기둥이다.◆파격적 미학 보여주는 모과나무 기둥지리산의 대표적 사찰인 화엄사는 고찰이자 대찰이어서 귀중한 문화재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 사역 전체가 사적 제505호로 지정돼 있는 화엄사에는 국보가 3점(각황전, 각황전 앞 석등, 4사자삼층석탑), 보물이 4점(대웅전, 동오층석탑, 서오층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이나 된다. 초봄이 되면 매혹적인 꽃을 피우는, 수령 300년이 넘은 각황전 옆 홍매화가 전국의 탐매가와 사진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각황전과 만월당 뒤편에 늘어선 동백들이 피우는 붉은 꽃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엄사 경내만 둘러보고 떠난다. 바로 근처에 별세계가 있는데도. 대웅전 뒤쪽으로 화엄사 경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번잡하지 않은, 고요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는 별천지가 펼쳐진다. 구층암과 그 옆에 숨어있는 길상암이다.화엄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구층암은 대웅전 뒤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대숲 길이 이끄는 곳에 있다. 개울을 건너 암자 마당에 들어서면 승려들 거처인 요사 앞의 3층 석탑이 맞이한다. 온전하지 못한 데다 오래된 맛이 나는 이 탑은 삐뚠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구층암, 구례 화엄사에 딸린 요사자연목 그대로 살린 도랑주 압권천불보전 앞마당 나무 잘라서 써자연·건축 경계마저 허문 파격미탑을 지나 구층암 편액이 걸린 요사 옆을 돌아가면 구층암 전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불보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마당이 있고, 천불전 앞 좌우에 요사가 있다. 이 요사에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모과나무 기둥이 있다. 가지만 대충 제거한, 울퉁불퉁하고 기괴한 모과나무 원목을 그대로 사용했다.가지를 제거하고 껍질만 벗긴, 가공이 거의 없는 자연목 모양을 그대로 살려 만든 기둥을 ‘도랑주’라고 한다. ‘도량주’로도 불리는 도랑주는 조선 후기 살림집과 사찰 등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도랑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층암 요사의 툇간 기둥이다.구층암에는 세 개의 모과나무 기둥이 있는데, 그 압권은 구층암 편액이 걸려 있는 요사의 모과나무 기둥 두 개다. 이 건물은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일곱 칸(측면 네 칸)의 일자형 건물인데, 한쪽 면(탑이 있는 쪽)은 일곱 칸 중 가운데 다섯 칸이 툇마루로 되어 있다. 반대쪽은 세 칸이 마루이고 양 옆에 크기가 다른 방이 좌우로 있다. 가운데 방을 두고 양쪽으로 문과 마루를 낸 특이한 건물이다.이 요사의 천불전 쪽 툇마루에 두 개의 모과나무 기둥이 있다. 제멋대로 자란 모과나무를 통째로 잘라다가 윗부분을 건물 높이에 맞춰 적당히 잘라 그대로 사용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도랑주는 더 이상 없을 듯하다. 그것도 사람이 거주하는 일곱 칸 규모 건물의 중심 기둥으로는. 큰 가지를 잘라낸 모양이 그대로 있고, 골이 지고 속이 파인 곳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가지가 솟아나왔던 흔적은 물론이고, 모과나무 특유의 나뭇결과 울퉁불퉁한 옹이 등이 그대로다. 자랄 때 끼어들어간 큰 돌이 그대로 박혀 있기도 하다.두 개의 기둥 가운데 동쪽 기둥은 중간 부분에서 줄기가 나뉘어 살짝 비틀리며 솟아오른 모양인데, 둘로 갈라진 틈에 처마의 구조물을 절묘하게 끼워 맞추었다. 다른 하나도 비슷한데, 위쪽이 더 굵은 그 모습이 어느 각도에서 보면 등 받침 떠받치고 있는 영암사지 석등의 사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다른 모과나무 기둥 하나는 그 맞은편 요사 툇마루에 있다. 이 기둥은 남쪽 요사의 두 기둥만큼 굵지 않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가공만 거친 모과나무이다.◆앞마당에 자란 모과나무 사용구층암 모과나무 도랑주는 옆의 잘 다듬은 둥근기둥들과 대비되어 더욱더 파격적인 멋을 더해준다. 목재로서는 거리가 먼 모과나무를 건물 기둥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자체가 기발하고 파격적이다. 마당에 서 있는 모과나무를 그대로 처마 아래로 옮겨놓은 것 같은 기둥 덕분에 건축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하다. 평범한 건물을 누구나 다시 돌아보게 만든 안목과 통찰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이 모과나무 기둥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요사를 120년 전에 새로 지으면서 천불보전 앞마당에 있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사용된 모과나무는 아름드리 크기로 봐서 최소한 100년 이상 자란 나무인 듯하다. 1936년 태풍 때 쓰러진 모과나무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도 천불보전 앞에 두 그루의 모과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기둥으로 베어낸 나무 밑둥에서 다시 자라난 것이다. 그 아래를 파보면 지금도 나무를 베어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구층암 남쪽 요사에는 광무 원년(1897년)과 3년(1899년)의 중건기가 걸려 있다. 지금은 ‘구층암’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광무 원년의 현판에는 ‘구층연사(九層蓮社)’라고 적고 있고, 1899년의 ‘중수구층암기’에는 ‘구층난야(九層蘭若)’라고 적고 있다. 1937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구층대(九層臺)’로 기록하고 있다.한편 모과는 성인을 보호한 열매라는 의미의 ‘호성과(護聖果)’로도 불리었는데,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공덕을 많이 쌓아 사람들이 성인(聖人)처럼 받들어 모시던 스님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다리를 반쯤 넘어 건넜을 때, 바로 앞에서 스님을 노려보는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난처한 지경에 빠진 스님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갑자기 다리 옆에 자라던 모과나무에서 잘 익은 모과 열매가 툭 떨어져 구렁이의 머리를 정확히 맞혔다. 덕분에 스님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요사 마루에서 본 모과나무 기둥.구례 화엄사 부속암자인 구층암 남쪽 요사의 북쪽 면과 천불보전. 왼쪽의 요사 툇마루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이 모과나무 기둥이다. 천불보전 앞에 자라는 두 그루의 모과나무는 이 기둥을 위해 베어낸 곳에서 다시 자라난 것이다.
2019.12.12
[山寺미학 .18] 백흥암의 미학...“만추 단풍이 맑은 햇살에 빛난들, 정진하는 수행자에 비하랴”
자연과 어우러진 산사는 아름답다. 맑은 수행자들이 살고 있는 산사는 더욱 아름답다. 갑자기 가을 산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어 팔공산 은해사로 향했다. 지난 7일 은해사에 들러 여기저기 둘러본 뒤 백흥암을 찾았다. 가 보고 싶었던 곳은 백흥암이었다. 여성 승려인 비구니들의 수행도량인 백흥암은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사찰이다. 그래서 본사 사찰인 은해사의 주지 스님에게 부탁해 허락을 얻은 뒤 찾아갔다. 오후 1시40분쯤 백흥암에 도착했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암자 앞에 차량이 몇 대 있고 일반인도 보였다. 몇 사람이 무와 배추 등이 담긴 용기를 들고 백흥암 누각인 보화루 아래와 샘물이 있는 곳을 오가고 있었다. 주지 스님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보화루 아래에 있는데 곧 나올 것이라고 했다. 잠시 있다가 보화루 옆으로 들어가 보화루 위로 올라갔다. 단풍이 한창인 앞산 풍경에 잠시 눈길을 보낸 뒤, 뒤로 돌아 백흥암의 중심 전각인 극락전을 바라보았다. 엄격함과 절제미가 느껴지는 극락전이 처마로 그 앞의 심검당 및 진영각을 껴안고 있는 듯했다. 극락전은 전면 3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다.팔공산 은해사 비구니 수행도량평소 일반인 출입 제한되는 사찰스님과 보화루에 함께 올라 茶談내면의 아름다운 기운이 느껴져◆백흥암에서 만난 비구니 스님스님들 좌선 공간인 심검당 마루에 올라 맞은편 진영각 기둥에 걸린 주련을 전체적으로 촬영하려고 하는데 스님 한 분이 극락전에서 나왔다. 진영각에는 추사 글씨로 전하는 주련 6개와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이 걸려 있다. 시홀방장은 홀 10개를 이은 정도의 작은 공간을 일컫는 말로, 재가 수행자의 상징인 유마거사가 머물던 방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님을 보고 찾아온 취지를 이야기하니, 주지 스님의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극락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둘러보라고 했다.법당 안에 들어가니 불상과 불상 위의 닫집, 불상 좌대인 수미단, 탱화, 천장 등 하나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수준 높은 솜씨에다 고색창연함이 묻어났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압도했다. 영화 ‘리큐에게 물어라’에서 “아름다움 앞에만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 센노리큐도 이 법당에 들어서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수 년 전 탱화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은 후 설치했다는, 문에 덧댄 쇠창살들이 눈에 거슬려 아쉬움을 던져 주었다. 스님에게 주지 스님과 차 한잔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자, 주지 스님에게 전하겠다며 나갔다. 참배를 하고 법당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보물로 지정된 수미단의 다양한 조각들을 비롯해 닫집의 용조각, 대들보에 달린 반야용선, 탱화 등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돌아온 스님은 주지 스님이 일이 있어 급히 출타했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하고, 안 바쁘면 스님과 차 한잔 하며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백흥암에 온 지 얼마 안돼 아는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재차 이야기하자, 그러자며 무슨 차를 좋아하는지 묻고는 차를 준비해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스님이 따뜻한 차를 준비해 오자 보화루에 함께 올라갔다. 긴 의자에 같이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스님은 출가한 지는 16년, 백흥암에 온 지는 5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백흥암이 정말 좋다는 스님은 수행 환경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백흥암에서 수행하는 큰 복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개인적 수행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자, 흔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고 격려한 뒤 그 맑은 심신의 상태를 늘려가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니 특히 계(戒)를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라고 말했다. 계를 지키는 생활의 중요성과 함께 자신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산사에 살면서 ‘산사 미학’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으로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염물을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적 방식의 사찰 해우소가 어떠냐고 했다.사찰들도 최근 들어 해우소(화장실)를 편리한 수세식으로 많이 바꾸고 있는데, 백흥암은 여전히 옛날의 친환경적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바닥에 쥐가 놀고 있는 것 등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덕분에 주위 환경을, 지구촌을 오염시키는 공범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다고 강조했다. 해우소를 예로 들어 이야기했지만, 산사에는 타락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소박함을 유지하고 있는 생활 방식이 많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한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보화루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맑은 기운으로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가을 햇살이 비쳐드는, 텅 빈 보화루가 지극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백흥암을 떠나기 위해 보화루를 내려왔다. 헤어지기 전, 이런 좋은 곳에서 수행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스님은 복이 많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항상 부담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답했다. 주위의 도움으로 수행하는 만큼, 항상 조금만 수행을 게을리 해도 응당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심각하게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하자, 부담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재차 말했다.그리고 백흥암 샘물 맛이 좋다며 물을 한 바가지 떠주며 맛보라고 했다. 정말 맛이 좋았다. 감로수라 할만했다.◆맑게 정진하는 스님들, 산사 미학의 원천 백흥암에는 극락전 건물과 그 안의 수미단이나 탱화, 추사 글씨 현판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다. 이러한 문화재와 산사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도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수행에 몰두하는 스님들에게서 나오는 맑은 기운의 아름다움이 최고이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를 나눈 스님뿐만 아니라 백흥암에 살고 있는 모든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자 정진하고 있을 것이고, 이런 데서 나오는 기운이 백흥암 미학의 뿌리이고 가지이며 꽃일 것이다. 수행에 매진하는 수행자들의 내면의 힘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있을까.백흥암을 나와 중앙암까지 올라갔다. 처음 가는 길이다. 만추의 단풍이 맑은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스님과 이야기할 때 느낀 아름다움과는 다른, 기분을 들뜨게 하는 아름다움을 흠씬 누리며 가을 기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백흥암은 30여년 전 육문 스님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스님들의 수행 공간이 법당과 붙어있어 수행에 방해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일찌감치 일반인의 산문 출입을 제한했다고 한다. 결제 기간에는 이곳 스님들은 매일 12시간씩 정진한다. 오전 3시30분 입선에 들어 5시까지 정진하고, 오전 6시 발우공양을 한다. 다시 7시30분에 오전 입선에 든다. 방선 후 점심공양을 한 뒤 오후 1시부터 정진이 이어진다. 일과는 밤 10시가 되면 마무리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백흥암에서 만남 스님이 백흥암 누각인 보화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누각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2019.11.28
[山寺미학 .17] 사찰 주련...전각 벽·기둥에 내걸린 고색창연 글귀…산사가 품은 또 하나의 보물
산사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주련(柱聯)은 편액과 더불어 사찰이 품고 있는 귀중한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에 도움을 주는 소중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데다, 예술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련은 좋은 글귀를 종이에 쓰거나 판자에 새긴 것을 건물의 기둥이나 벽에 연이어 걸어 놓은 것을 말한다. 사찰의 주련은 불교 경전의 내용이나 선사들의 게송 등을 담고 있는데, 대부분 일반인이 쉽게 해득할 수 없는 한문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점이다. 이런 주련의 내용을 알고 보면 사찰 탐방이나 참배의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소중한 가르침 담긴 주련지리산 화엄사는 대찰로 전각이 많으니 주련도 많다. 최근에 지은 전각도 적지 않아 새로 제작해 단 주련도 많지만, 가장 큰 전각인 각황전이나 그 옆의 원통전, 대웅전 등은 수백 년이 지난 옛 건물에 걸맞게 고색창연한 멋진 주련이 걸려 있어 특히 눈길을 끈다. 이 주련을 중심으로 화엄사의 주련 일부를 소개한다.보기 드물게 웅장하고 멋진 각황전의 주련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위대한 경전과 논서 모두 통달하시고(偉論雄經罔不通)/ 일생 동안 널리 펴고 지킨 공덕 깊도다(一生弘護有深功)/ 걸출한 삼천 제자 법등(法燈)을 나누어 이어가니(三千義學分燈後)/ 화엄의 종풍 전국을 휩쓸었네(圓敎宗風滿海東)// 인도에서 온 하나의 등불 온 세상 밝히니(西來一燭傳三世)/ 우리나라에 천년을 전하여 다섯 갈래로 피어났도다(南國千年闡五宗)/ 이 많은 청정한 빚 노닐며 갚으려 하니(遊償此增淸淨債)/ 흰구름 머리에 감도는데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白雲回首與誰同)’ 1~4연은 대각국사 문집에 있는 ‘화엄사례연기조사영(華嚴寺禮緣起祖師影: 화엄사에서 연기 조사의 진영에 예를 표하다)’에 나오는 글이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의 공덕을 찬양하고 있다. 5~8연은 설암(雪巖) 추봉(秋鵬) 선사(1651~1706)의 문집인 ‘설암난고(雪巖亂藁)’에 나오는 ‘제화엄사장육전(題華嚴寺丈六殿)’이라는 글의 일부이다.수백년 고찰에 걸맞은 멋진 주련삶에 도움주는 가르침 담고있어대부분 한문…해석문 붙임 늘어화엄사 새 전각에는 한글 주련도대구가 낳은 서화가 서병오 작품영남지역 사찰에 많이 걸려있어각황전 앞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원통전에도 유려한 행서로 된, 각황전 주련처럼 색 바랜 주련이 4개 걸려 있다. ‘바닷속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어나(一葉紅蓮在海中)/ 푸른 파도 깊은 데서 신통을 보이시네(碧波深處現神通)/ 어젯밤엔 관자재께서 보타에 계시더니(昨夜普陀觀自在)/ 오늘은 도량 가운데 강림하셨네(今日降赴道場中)’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전이나 관음전에 거는 대표적 주련이다.다음은 대웅전 주련이다. 6개의 이 대웅전 주련은 다른 사찰의 대웅전 주련 글귀와 다른 점이 눈길을 끈다. ‘선문염송집’ ‘의상조사 법성게’ 등에서 가져와 엮은 것이다. ‘수양버들 수 없이 늘어진 마을(四五百株垂柳巷)/ 누각들 겹겹이라 화장세계로구나(樓閣重重華藏界)~’화엄사는 한문을 모르는 이들을 배려해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전각에 걸린 대부분의 주련 아래에 한글 해석문을 붙여놓고 있다. 최근 들어 이처럼 한글 해석문을 붙여놓는 사찰들이 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화엄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새로 지은 전각에 한글 주련을 달아 사찰을 찾는 이들을 배려하고 있다. 보제루 아래 만월당(滿月堂) 맞은편의 청풍당(淸風堂) 주련은 ‘문수동자게’를 한글로 풀이한 글귀 ‘성 안 내는 그 얼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를 걸고 있다.◆전각의 성격에 맞게 글귀 구성사찰 건물에는 이처럼 많은 주련이 걸려 있지만,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극락보전), 관음전(원통전), 지장전, 나한전(응진전), 종각 등 전각의 기능이나 용도에 따라 같은 글귀나 유사한 내용의 글귀가 걸린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에 걸리는 대표적 주련 글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게’인 ‘하늘 위와 아래에 부처님 같은 분 없고(天上天下無如佛)/ 온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네(十方世界亦無比)/ 세상 천지 다 찾아보아도(世間所有我盡見)/ 부처님 같은 분 어디에도 없네(一切無有如佛者)’이다.‘부처님 법신은 어느 곳에나 두루 다 있고(佛身普遍十方中)/ 삼세 부처님들도 모두 이와 한가지라네(三世如來一體同)/ 넓고 큰 원력은 언제나 다함이 없으니(廣大願雲恒不盡)/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아득하여 다함이 없네(汪洋覺海渺難窮)’라는 글귀도 대웅전 주련으로 많이 걸려 있다. 전각이 커서 주련이 더 필요하면 여기에다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을 더해 걸기도 한다.관음전의 대표적 주련으로는 앞에서 소개한 화엄사 원통전 주련 글귀와 함께 다음 구절이 많이 걸려 있다. ‘백의관음 말 없이 말씀하시고(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 들음 없이 들으시네(南巡童子不聞聞)/ 화병 위의 푸른 버들 늘 여름이요(甁上綠楊三際夏)/ 바위 앞 푸른 대나무는 온통 봄빛이네(巖前翠竹十方春)’보통 따로 걸지만, 기둥이 많으면 8개 주련이 함께 걸리기도 한다.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의 대표적 주련 글은 ‘극락당의 보름달 같은 얼굴(極樂堂前滿月容)/ 옥호의 금색광명 허공 가득 비추니(玉毫金色照虛空)/ 누구나 아미타불 일념으로 염불하면(若人一念稱名號)/ 잠깐 사이에 무량 공덕 원만하게 이루리(頃刻圓成無量功)’이다.종각 주련에는 보통 새벽 종송(鐘頌)과 저녁 종송이 주련으로 걸린다.‘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願此鐘聲遍法界)/ 철위산의 깊은 어둠 다 밝히고(鐵圍幽暗悉皆明)/ 지옥·아귀·축생의 고통 여의고 칼산 지옥도 부수어(三途離苦破刀山)/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 얻게 하소서(一切衆生成正覺)’저녁 종송은 ‘이 종소리 듣고 번뇌는 끊고(聞鐘聲煩惱斷)/ 지혜를 길러 보리의 마음 내어(智慧長菩提生)/ 지옥을 여의고 삼계의 고통 벗어나(離地獄出三界)/ 깨달음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소서(願成佛度衆生)’이다.그리고 주련에 관심을 갖다 보면 같은 글씨의 주련이 여러 사찰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편액도 그렇지만, 주련도 글씨가 좋을 경우 같은 글씨 주련이 여러 사찰에 걸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구의 걸출한 서화가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의 작품이 영남지역 사찰에 많이 걸려 있는데, 동화사 대웅전에 걸린 4개의 주련 ‘천상천하무여불~’도 석재의 글씨 작품이다. 같은 글씨의 주련이 청도 적천사 대웅전, 청송 대전사 대웅전, 창녕 관룡사 대웅전 등 여러 전각에도 걸려 있다. 또한 양산 통도사 관음전과 김천 직지사 관음전에도 서병오의 같은 글씨 주련 ‘일엽홍련재해동~’이 걸려있다.건물을 잘 지어놓고 주련이나 편액 글씨의 수준이 낮아 전각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경우를 종종 접하기도 한다. 주련을 제작할 때 글씨 쓰는 사람이나 각을 하는 작가를 잘 선택하는 스님들의 안목도 중요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에 걸린 주련. 예서체로 쓴 이 주련들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의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화엄사 청풍당에 걸린 한글 주련.
2019.11.14
[山寺미학 .16] 중국 사찰과 포대화상...불룩한 배 드러낸 채 파안대소…‘佛法 포대’ 짊어진 미륵불 화신
한국의 옛 산사에는 없지만, 중국 사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이 있다. 포대화상(布袋和尙) 불상이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에 올 미래 부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서서히 잊힌 후 도솔천에 있는 ‘미륵’이라는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나 불법을 다시 편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상이 혼탁해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미륵이 내려온다는 이 신앙을 믿으며 희망을 가졌다. 포대화상은 소면화상(笑面和尙)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미륵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포대화상 불상은 미륵불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고, 후량 때 실존인물인 계차(契此) 스님의 모습이다. 그는 뚱뚱한 몸매에 불룩 나온 배를 드러낸 채, 등에는 큰 포대를 메고 항상 껄껄 웃고 다니며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추앙하면서, 포대화상을 묘사한 불화나 불상을 만들고 복을 비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계차 스님은 항상 등에 포대를 짊어지고 다녀 ‘포대화상’이라고 불렸다. 포대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물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실존인물 계차 스님 모습 형상화대혼란기였던 5대10국시대 禪僧사람들에 희망 줘 미륵신앙으로사찰 곳곳서 불상 만나볼 수 있어항저우 영은사 석굴조각 대표작◆중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포대화상중국 사찰을 둘러보면 이 포대화상 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 역사도 오래 되고 조각 솜씨도 뛰어난 대표적 포대화상으로,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 있는 영은사의 포대화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포대화상을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았다.영은사 매표소를 거쳐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글씨 편액 ‘영은사(靈隱寺)’가 걸린 일주문을 지나 조금 가면 이공지탑(理公之塔)이라는 7층 석탑이 나온다. 이 탑은 영은사를 창건(326년)한 인도 승려 혜리(惠理) 스님을 기리는 탑이다. 탑을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작은 계곡이 흘러내린다. 계곡 오른쪽으로 난 길 옆에는 영은사가 자리하고 있고, 맞은편 계곡 건너에는 석회암으로 된 산(飛來峰·209m)의 석굴과 암벽 곳곳에 수많은 불상이 조성돼 있다. 5대(五代)부터 송·원·명에 걸쳐 470개의 불상과 보살상이 조성됐는데, 자연재해 등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380여기가 남아있다고 한다.이 중에 포대화상이 있다. 바위산을 파낸 석굴 안에 불룩한 배와 배꼽을 드러내고 파안대소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고, 한 손은 팔걸이에 얹은 채 앉아 있다. 좌우에 다양한 모습의 스님 15명이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이곳의 불상 조각 중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한 이 불상은 남송 시대에 조성됐다고 한다. 높이 3.3m, 좌우 10m 정도. 영은사 입장 티켓에도 이 포대화상 사진이 올라 있다. 15년 전에 갔을 때는 사람들이 이 불상에 직접 올라가서 불상을 만질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이 포대화상 말고 이공지탑 부근의 비래봉 절벽에 이와 비슷한 모습의 불상이 하나 더 있다. 암벽을 파낸 석굴 안에 포대화상이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원대에 조성된 상이다. 이 불상은 제공(濟公:1148~1209) 스님 상이라고도 한다. 제공 스님은 영은사에도 살면서 많은 기행을 남기며 활불(活佛)로 통한 전설적 인물이다.영은사는 중국 선종 10찰에 속하는 고찰로, 인도에서 온 혜리 스님이 이곳에 들렀다가 인도의 영취산을 닮은 산을 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던 천축국의 영취산이 어떻게 여기로 날아온 것인가’라고 감탄하며 이름을 ‘비래봉(飛來峰)’으로 짓고, 맞은편에 신성한 신령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영은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영은사는 5대10국의 오월(吳越)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당시에는 9개의 누(樓), 18개의 각(閣), 72개의 전(殿)에 모두 1천200여개의 방이 있었고, 승려 수는 3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1816년 큰 화재로 폐허가 되었고, 1823년부터 5년에 걸쳐 대웅보전과 천왕전, 약사전 등이 재건됐다. 그 후 1956년과 1975년에도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중심 불전인 대웅보전에는 높이 25m 정도의 거대한 석가모니불상이 있다. 1956년 저장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천왕전에는 ‘운림선사(雲林禪寺)’라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포대화상 불상은 근래에 들어서도 계속 조성되고 있다. 저장성 닝보(寧波)시 설두사(雪竇寺)에는 2006년 높이 54.7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대불 ‘인간미륵’(포대화상 불상)이 건립돼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설두사가 있는 설두산은 중국불교 오대명산(五大名山)으로 꼽힌다. ‘인간미륵’으로 불리는 포대화상은 닝보 출신으로, 이곳 설두사를 중심으로 자비를 베풀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그런 인연으로 이 미륵대불이 세워졌다.중국 5대 불교명산과 불교도량은 다음과 같다. 산시성(山西省) 오대산(五台山) 문수도량(文殊道場), 쓰촨성(四川省) 아미산(峨眉山) 보현도량(普賢道場), 저장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 관음도량(觀音道場), 안후이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 지장도량(地藏道場), 저장성 설두산 미륵도량(彌勒道場).저장성 우시(無錫)에 있는 영산승경구 내에도 수많은 동자들에 둘러싸인 포대화상 불상을 근래에 건립, 방문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파격적 언행을 보였던 포대화상포대화상은 중국의 대 혼란기인 5대10국 시대 후량의 선승으로 917년에 열반한 계차(契此)라는 스님이다.배가 풍선처럼 불룩했던 스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녔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먹고 어디서든 누워 잘 자면서도,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았다. 특히 어린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어울렸다.어떤 사람이 포대화상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찌하여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노는 데만 허비하고 계십니까. 스님께서 불법을 깨달으셨다면 저희들에게 그 불법을 보여주십시오.” 그는 포대를 땅바닥에다 내려놓으며 “이것이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이 그대도 메고 있는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다시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다시 포대를 짊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 일이다. 나는 짐을 짊어졌지만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포대화상은 여러 수의 게송을 남겼다. 그 중 일부다.‘발우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고(一鉢千家飯)/ 외로운 몸 만리에 노닌다(孤身萬里遊)/ 푸른 눈 알아보는 이 없으니(靑目睹人少)/ 흰구름에게 길을 묻노라(問路白雲頭)’‘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我有一布袋)/ 허공에 걸림이 없어라(虛空無罫碍)/ 열어 펼치면 우주를 두루 감싸고(展開遍宇宙)/ 오므리면 관자재로다(入時觀自在)’‘미륵 참 미륵이여(彌勒眞彌勒)/ 천백억의 몸으로 나누어(分身千百億)/ 때때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건만(時時示時人)/ 그 사람들 알지 못하더라(時人自不識)’ 포대화상은 마지막 게송을 임종게로 남기고, 출가한 악림사 옆 큰 바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했다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중국 저장성 항저우에 있는 영은사 앞 비래봉에 조성된 포대화상. 이곳의 수많은 불상 조각 중 최고 걸작인 이 불상은 남송 시대에 조성됐다고 한다. 높이 3.3m, 좌우 10m 정도.중국 저장성 우시(無錫)의 영산(靈山)승경구 내 영산대불 아래에 있는 포대화상 불상.
2019.10.31
[山寺미학 .15] 산사 편액...고색창연 명필 현판에 흥미로운 사연…고찰 탐방 즐거움 더하네
우리의 옛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이나 성현의 가르침 등을 새긴 편액과 주련 등 현판(懸板)이 많이 걸려 있다. 사찰 건물에는 특히 귀중한 현판이 많다. 이런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나 명필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따라서 현판은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 현판도 적지 않다. 이런 사찰 현판, 특히 편액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예술작품들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가 없다. 공민왕 글씨로 전하는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을 비롯한 왕의 친필 편액과 신라 명필 김생,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 당대 최고 명필 글씨의 편액들이 전국 사찰 건물 곳곳에 걸려 있다. 사찰에는 특히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 현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 현판이 유일하다. 편액 글씨는 특히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자 글씨의 특별한 서체와 서풍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체계적 분석·정리가 되지 않아 그 가치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전국 곳곳의 고찰에 즐비한 이런 편액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다면, 사찰 참배나 탐방의 즐거움을 훨씬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 사찰 현판들을 소개한다. ◆부석사 ‘무량수전’·화엄사 ‘각황전’ 편액영주 부석사의 본전(本殿)인 무량수전은 1962년에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더없이 귀중한 문화재다. 이 건물에 더욱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바로 ‘무량수전’ 편액이다.편액 틀(테두리)의 모양과 장식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편액 형식과 다르게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쓴 것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현판의 고색창연함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650여 년 전 건물을 중창하고 새로 단 당시의 현판인 것으로 생각된다.이 편액 글씨의 주인공은 고려 공민왕이다. 편액 뒤에 공민왕 친필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편액이 65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라면, 우리나라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싶다.공민왕은 어떻게 이 글씨를 남기게 되었을까.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몽진을 해야 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피란지로 결정한 곳이 순흥(영주)이었다. 공민왕 일행은 그 해 추운 겨울에 소백준령을 넘어 순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순흥의 날씨가 너무 추워 안동으로 다시 옮겨 머물다가, 홍건적을 물리친 후인 이듬해 2월 개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순흥에 머물 때 공민왕은 영주지역에 몇 점의 편액 글씨를 남기게 된다. ‘무량수전’은 그 대표적 글씨다.부석사 본전 ‘무량수전’ 글씨영주로 몽진했던 공민왕이 써은해사, 추사 친필 야외전시장세로 획 130㎝ ‘불광’ 대작도전국 곳곳 사찰에 즐비한 편액시대정신 담아낸 예술의 정수국보·보물 지정 사례 전혀없어체계적 분석·정리도 안 이뤄져구례 화엄사의 대표 전각인 각황전은 그 규모와 장엄함, 아름다움, 고색창연함 등에서 모두가 감탄할 만한 목조 건물이다. 1702년에 완공된 현재의 각황전(국보 제76호)의 위층 처마에 이 건물에 어울리는, 중후한 필치의 편액 ‘각황전(覺皇殿)’이 걸려 있다.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다. 이 장륙전은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다. 이후 1636년 대웅전이 중건되고,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년)에 중건되었다. 장륙전 완공 후 숙종 임금은 이 전각에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숙종이 전각을 중건하고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화주승(化主僧)을 맡은 계파 스님이 꿈 속 노인이 알려준 대로 절을 나서 처음 만난 사람인 걸인 할머니에게 시주를 부탁했다. 그러자 걸인은 죽어서 왕궁에서 태어나 불사를 이룩하기를 빌며 길 옆의 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스님은 그 일이 있은 후 5년 뒤 한양에서 어린 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공주가 반가워하며 스님에게 달려와 안기었다. 그리고 공주는 태어난 후 한 번도 펴지 않았던 한쪽 손을 폈고, 그 손바닥에는 ‘장륙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이 일을 전해들은 숙종은 스님을 대궐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은 후 장륙전 중건을 명했다. 그리고 전각 이름도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로 ‘각황전’으로 바꾸도록 했다. 각황전 편액 글씨는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1703년에 썼다. 이진휴는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 글씨 편액 많아불교와 인연이 깊고 선지식(善知識) 대접을 받기도 한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전국의 유명 사찰 곳곳에 편액이나 주련을 남기고 있다.봉은사에서는 당시 남호(南湖) 영기(永奇) 스님(1820~1872)이 화엄경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에 새겨 인출하는 불사를 진행했다. 이 화엄경판이 완성되자 봉은사에 안치하기 위해 법당을 건립했다. 영기 스님은 이 판전의 편액 글씨를 봉은사에 기거하던 추사에게 부탁했다. 1856년 9월의 일이다. 추사는 1856년 10월1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판전(板殿)’ 편액 글씨가 마지막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추사체의 완결판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걸작이다.팔공산 은해사는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추사 글씨 현판이 많다. 은해사에만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의 편액이 있고, 은해사 부속암자인 백흥암에는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주련 작품이 있다.은해사에 남긴 글씨는 대부분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불광’이라는 편액이다. ‘불광’은 불광각에 걸려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그 전각이 없다. 대웅전 안쪽 등에 걸려 있다가 지금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은해사는 1847년 대화재 후 1849년에 중건 불사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대웅전’ ‘보화루’ ‘불광’ 등의 편액 글씨는 추사가 이때를 전후해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추사가 1848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851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기 전까지 기간에 남겼을 것이다.이 중 ‘불광’ 글씨는 추사 글씨 중에서도 대표적 수작으로 꼽힌다. ‘불광’ 편액은 판자 4장을 세로로 이어 붙여 만든 대작이다. 세로 135㎝, 가로 155㎝ 정도 된다. ‘불’자의 가장 긴 세로획의 길이는 130㎝가량이다. 현존하는 추사의 친필 글씨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파악되고 있다.이밖에 지리산 쌍계사 금당(金堂)에 걸린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등도 추사 글씨 편액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걸린 ‘무량수전’ 편액.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전한다. 오랜 세월로 대부분 퇴색되었으나 흔적을 자세히 보면 글씨 부분은 금니로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구례 화엄사 각황전에 걸린 성재 이진휴 글씨 ‘각황전’ 편액(왼쪽)과 영천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추사 김정희 글씨 ‘불광’ 편액.
2019.10.17
[山寺미학 .14] 산사 꽃무릇...꽃 사그라든 후 잎 돋아나…이루지 못한 사랑을 닮았네
한여름의 산사(山寺) 곳곳을 붉게 수놓던 배롱나무 꽃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때, 산사 주변은 또 다른 붉은 색으로 물든다. 꽃무릇이 그렇게 만든다. 땅 위로 꽃대만 쑥 내민 뒤 그 끝에 커다란 붉은 꽃을 피우는 독특한 식물이다. 9월 중순경이 되면 이 꽃무릇으로 붉게 물드는 산사가 적지 않다. 특히 전라도 서해안 쪽에 있는 사찰들이 그렇다. 꽃무릇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사찰 주변은 보름 정도 선경 같은 별천지로 변한다. 그 중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김제 금산사 등이 유명하다. 9월 중순 꽃 피워 보름간 별천지선운사·불갑사·용천사 3大 명소꽃대 끝엔 보통 여섯개 꽃봉오리대승보살 덕목 ‘육바라밀’ 상징꽃·뿌리 이용해 그린 탱화·단청방부제 성분 덕분에 좀 슬지 않아사찰주변 많이 심겨 군락지 이뤄◆고창 선운사 꽃무릇지난 9월19일 고창 선운사를 다녀왔다. 선운사가 가까워지자 도로 변에도 심어놓은 꽃무릇이 꽃을 피우고 있어, 꽃무릇 세상으로 들어섬을 알리는 것 같았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니 길옆 숲속 곳곳에 꽃무릇 천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고 꽃대만 올라와 있는 것이 대부분인 곳도 있고,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곳도 있었다. 꽃을 거의 피우지 않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연초록 꽃대가 수없이 많이 올라와 숲속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모습도 색다른 장관이었다. 초봄 고사리 밭에 고사리가 한창 올라오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선운사 앞을 흐르는 개울인 도솔천 옆 숲속의 꽃무릇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특히 그 꽃무릇들이 개울물에 비친 모습은 각별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무리 지어 핀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꽃 이름처럼 무리를 지어 핀 꽃도 좋지만, 물가에 한두 개가 외롭게 핀 모습도 아름다웠다. 대웅보전과 영산전 뒤의 동백나무 숲속 곳곳에도 외로운 꽃무릇이 보이고, 선운사 앞의 녹차밭 주변에도 꽃무릇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돌아나와 도솔천을 따라 내려오다 일주문에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도솔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니, 왼쪽의 길옆 산비탈을 따라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꽃무릇 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단풍나무가 주종을 이르고 있는 숲속을 꽃무릇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며칠 후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풍경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무릇 군락지는 이 선운사를 비롯해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가 가장 유명하다. 선운사 꽃무릇은 사찰 주변 숲속 곳곳에 자연스럽게 피어있는, 야생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정성들여 가꾼 정원 같은 불갑사 꽃무릇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이들 산사 일대에서는 해마다 꽃무릇이 한창일 때 축제가 열린다. 올해 선운사는 9월21일에 꽃무릇시화전, 산사음악회 등이 열린 제12회 선운문화제를 개최했다. 영광군은 불갑사 관광지구 일원에서 9월18일부터 24일까지 ‘상사화, 천년사랑을 품다’를 주제로 제19회 불갑산 상사화 축제를 열었다. 불갑산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꽃무릇 군락지를 자랑한다.함평군(해보면)은 9월21~22일 용천사 앞 꽃무릇공원 일대에서 제20회 함평 꽃무릇 큰잔치를 펼쳤다. 40만 평이 넘는 땅에 조성된 꽃무릇공원에는 해마다 꽃무릇이 군락을 이뤄 피어나 장관을 연출한다. 용천사 진입 도로 등에도 꽃무릇길이 조성돼 있다. ◆사찰과 꽃무릇꽃무릇은 요즘 도심의 도로 화단이나 공원 등에도 많이 심기고 있으나, 전통적으로 사찰 주변에 그 군락지가 많았다.꽃무릇은 9월 중순경에 알뿌리에서 30~50㎝ 길이의 꽃대가 자라나 여러 송이(4~6개)가 우산 모양의 큰 꽃으로 피어난다. 꽃은 붉게 피며, 한 송이는 6장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꽃잎은 뒤로 말리며 가장자리는 주름이 잡힌다. 6개의 수술은 꽃잎보다 훨씬 길어 꽃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다. 꽃은 보름 정도 유지되다가 시든 후, 11월 초순경이면 꽃대가 사그라져 없어진다. 열매를 맺지 않으며, 12월 중순경부터 짙은 녹색 잎이 올라오면서 초록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겨울 산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꽃대만 미끈하게 뻗어 올라 고결함을 보여준 뒤 곧 화사한 모양의 꽃을 피운 후 사라지고 잎이 돋아나는, 독특한 생리의 꽃무릇은 ‘붉은 상사화(相思花)’로도 불린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花葉不相見) 생리로 인해 서로 끝없이 생각만 해야 하는(相思),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인 상사화로 불리게 된 것이다. 서로를 좋아하지만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 무한히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고 있다.꽃무릇은 석산(石蒜)·독산(獨蒜)이라고도 하며, 피안화(彼岸花)로도 불린다. 꽃무릇과 비슷한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나서 6~7월에 말라 없어지고, 8~9월에 연분홍이나 노랑색, 흰색 등의 꽃이 핀다.사찰 주변에 꽃무릇이 많은 것과 관련해 회자되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산사의 젊은 스님이 속세의 아리따운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짝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스님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고, 그 스님의 무덤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반대로 어떤 처녀가 수행하는 어느 스님을 사모하였지만 그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눈을 감고 말았는데, 어느 날 그 스님 방 앞에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의 넋이 꽃이 된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하지만 사찰 주변에 꽃무릇이 많은 현실적 이유는 이 꽃무릇에 있는 약성 때문으로 설명된다. 뿌리로 즙을 내고 꽃으로 물감을 만들어 탱화나 단청을 할 때 사용하면 방부제 성분 덕분에 좀이 슬지 않고 잘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단청을 하고 탱화를 그리는 절집 주변에 많이 심었고, 이것이 번져서 군락을 이뤘다는 것이다.독특한 생리와 특징을 지닌 꽃무릇은 여러 가지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꽃무릇을 피안화(彼岸花)라고도 부르는데, 불교에서 해탈에 이르는 것을 피안이라고 한다.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인간의 세계를 차안(此岸)이라 부르고, 이런 상태를 벗어난 깨달음(涅槃)의 세계를 피안이라 한다.꽃무릇이 잎이 무성하게 나 있는 상태는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 차안의 세계이고, 꽃대만 올라와 꽃이 핀 상태는 해탈열반의 세계인 피안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사찰 주변에 많은 꽃무릇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수행, 번뇌와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을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에 살 수 있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피안화는 대충 보면 한 꽃대에서 한 송이 꽃이 피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꽃대 끝에 보통 여섯 개의 꽃봉오리가 나와 피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여섯 개의 꽃은 대승보살의 실천수행 덕목인 육바라밀(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이 여섯 개의 꽃이 모여 한 송이의 아름다운 피안화를 이루듯이,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고창 선운사 부근 산비탈에 피어난 꽃무릇. 꽃무릇은 한 송이로 보이지만 보통 여섯 개의 꽃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여섯 개의 꽃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불교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김제 금산사 미륵전 뒤뜰의 꽃무릇.
2019.10.03
[山寺미학 .13] 반야사 배롱나무...우러러 500여년 자태에 혹하고…발아래 붉은 자취에 취하고
오래된 산사 중 배롱나무가 없는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 100~200년 정도 된 나무에서부터 500년 이상 된 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런 배롱나무는 산사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소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이런 존재이지만, 배롱나무에 대한 사찰의 관심은 부족한 듯하다.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어도 사찰이 그 수령을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안내표지도 없다. 고목 배롱나무가 있는 여러 산사를 돌아보며 확인하려 했지만, 답을 주는 이를 찾기가 어려웠다. 모든 사찰을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산사 배롱나무를 취재하며 많은 배롱나무 중 유일하게 보호수로 지정하고 수령을 추산해놓은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충북 영동의 백화산 반야사에 있는 배롱나무다. 그동안 직접 본 배롱나무 중 최고였다.극락전 앞 활짝 꽃피운 두 고목방문객들 사로잡는 사찰 주인공보기드물게 郡 보호수로 지정돼신원사 배롱나무도 많이 알려져한아름 몸통…수령 400년 추정◆산사 배롱나무 중 최고지난 8월15일 광복절에 대구를 출발, 500년이 넘은 배롱나무가 있다는 반야사를 찾아갔다. 처음 가보는 사찰이었다. 도중에 비가 내리기도 했는데, 비에 젖은 배롱이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하며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반야사가 가까워지자 수려한 산세와 하천이 눈에 들어와 더위를 잊게 했다. 그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반야사 앞으로는 백화산(지장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石川)가 휘돌아가고 있다.반야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았다. 작은 사찰이었다. 대웅전과 극락전이 있고 몇 채의 다른 건물이 있는 정도였다. 반야사 마당에 들어서자 멀리 보이는 배롱나무가 바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배롱나무는 규모도 크고 모양도 좋으며, 꽃도 풍성하게 핀 상태였다. 극락전 앞에 두 그루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한 나무로 보인다. 극락전은 대웅전이 새로 건립되기 전에는 중심 법당이었는데, 삼칸짜리 작은 법당이지만 배롱나무가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배롱나무 앞에는 작은 삼층석탑(보물)이 서 있었다. 이 배롱나무는 단연 사찰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꽃을 피우지 않을 때도 그럴 것 같았다. 이 두 그루 배롱나무는 산사 배롱나무로는 보기드물게 보호수(영동군수 지정)로 지정돼 있었다. 1994년에 지정된 것인데, 안내판에는 당시 수령은 500년이고, 나무 높이는 8m와 7m, 흉고 직경은 1.5m와 1.2m 등으로 기록돼 있다. 반야사 배롱나무는 오래전부터 반야사를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사찰 옆 산자락의 호랑이 모양 돌무더기와 함께.배롱나무로 다가가 다양한 포즈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사진작가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조금 있으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배롱나무 밑은 떨어진 꽃으로 붉은 색의 고운 비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사람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보슬비로 촉촉하게 젖으니 색깔은 더 고와졌다. 극락전 앞에 앉아 배롱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사람들이 끊이지 않아 근처 절벽 위에 자리한 문수전으로 향했다. 다녀오니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다시 이리저리 둘러보며 배롱나무를 감상했다. 한 스님이 지나가기에 잠시 배롱나무에 대해 물어봤다. 스님은 친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00년이 넘은 나무이고,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가지고 다니던 배롱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둘로 나눠져서 자라게 되었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런데 이 전설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수령이 100년은 더 늘어나야 한다. 무학대사(1327~1405)는 1405년에 별세했으니, 죽은 해에 심었다 해도 600년이 훨씬 지난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이 배롱나무는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에게 많이 알려져 여름이 되면 해마다 수많은 전화가 걸려와 전화를 받는 일이 성가실 때가 많았다고 이야기했다. 꽃이 만발했는지, 언제 절정이 되는지, 언제 가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등을 물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예전만큼은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70여년 전 관음전에 관음보살이 현신했는데, 당시 한참 동안 배롱나무 위에 머물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할머니 신자들이 들려줬다는 말도 했다. ◆신원사 배롱나무계룡산 신원사(新元寺) 배롱나무도 오래된 고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신원사는 작은 사찰이다. 651년 열반종의 개산조(開山祖) 보덕이 창건했고, 신라 말기에 도선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그 후 1298년 중건, 1394년 중창(무학대사), 1866년 중수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는 이처럼 오래되었으나 규모는 크지 않다. 대웅전, 영원전, 독성각 등 몇 채의 전각이 있을 뿐이다.이 신원사 대웅전 양 옆에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는데, 독성각과 대웅전 사이의 배롱나무가 보기 드물게 오래된 고목이다. 이 배롱나무는 지난 8월22일 찾아갔다. 붉은 꽃을 여전히 한창 피우고 있었다. 일부 가지는 말라버린 상태였지만, 전체적으로 건강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의 몸통 줄기를 가진 나무였는데, 두 팔로 안으니 한아름 되는 굵기(160㎝ 정도)였다.인터넷에 수령이 600년 정도 된 나무라는 내용이 있어 근거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도 할 겸 신원사를 찾아갔는데, 신원사 종무소 관계자나 스님들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그런데 이 배롱나무는 반야사 배롱나무와 비교하면 굵기가 좀 가늘다. 반야사 배롱나무는 한아름이 훨씬 넘는데, 이 배롱나무는 딱 한아름 굵기였다. 단순히 굵기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서원 등지의 배롱나무 고목의 경우를 참고해 추정한다면 400년 정도 되어 보였다. 산사의 배롱나무로는 반야사의 두 그루 배롱나무와 이 배롱나무를 대표적 산사 배롱나무 고목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사찰들이 산사의 배롱나무 수령을 측정하거나 추산해 기록을 남기고 잘 키워가면 좋겠다.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영동 백화산에 있는 반야사 배롱나무. 그동안 본 산사 배롱나무 중 최고다. 1994년에 수령 500년의 보호수로 지정됐다.계룡산 신원사의 대웅전과 독성각 사이에 있는 배롱나무. 이 나무도 보기 드물게 오래된 산사 배롱나무다.떨어진 꽃잎들이 붉은 수를 놓고 있는 반야사 배롱나무 아래.
2019.09.19
[山寺미학 .12] 사찰과 배롱나무
무더위 속에 짙고 무거운 녹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여름철. 배롱나무는 이런 계절에 맑고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사람들에게 기쁨과 활기를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은 꽃이 잘 보이지 않는 여름에 연꽃과 더불어 무더위로 쌓이는 답답함과 무기력을 잠시나마 날려버리는 고마운 존재로 다가온다. 근래 들어 배롱나무를 가로수나 정원수로 많이 심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원이나 고택, 정자, 선비들 무덤, 그리고 오래된 산사에 가야 붉은 꽃으로 뒤덮인 배롱나무의 풍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가면 오래전에 심은 배롱나무들이 여름철 내내 풍성하게 피워내는 붉은 꽃의 강렬한 아름다움과 멋진 자태로 보는 이를 혹하게 한다. 이런 배롱나무를 탐방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하나의 멋진 피서 방법이 될 것이다.강진 백련사에 가면 보기 드물게 크고 멋진 수형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누각인 만경루 앞에 있다. 어디서 보나 멋진 자태를 보이는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은 된 듯하다. 붉은 꽃을 수놓은 커다란 양산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서 감상하고 나무 아래 앉아서 즐기는 것도 좋지만, 만경루 위에서 보는 풍광은 더욱 멋지다. 누각 아래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 뒤돌아서면 조선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독특한 글씨 ‘만경루(萬景樓)’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이 편액을 감상한 뒤 시원한 누각 마루에 올라 강진 앞바다를 배경으로 배롱나무를 감상하는 맛은 각별하다. 이만한 풍광을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싶다. 백련사에는 이 배롱나무와 함께 대웅보전 옆, 명부전 앞에 각각 한 그루씩의 배롱나무가 더 있다. ◆대부분 산사 배롱나무 고목 몇 그루씩밀양의 표충사에도 배롱나무가 많다. 곳곳에 있는 100년 또는 2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배롱나무 10여 그루가 한여름 산사를 붉게 물들이며 별천지로 만든다. 일주문을 지나 참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누각 아래를 지나면 눈앞에 나타나는 배롱나무가 탄성을 지르게 한다. 지난 8일 다녀왔다.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려 사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 석가탑을 닮은 삼층석탑이 서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온다. 석탑 주위에 매화나무 고목 한 그루와 배롱나무 여섯 그루가 전각들 앞이나 안에서 각기 다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관음전 뒤에도 한 그루의 배롱나무가 녹음 속에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부처 꽃공양 위해 심은 선운사 등고찰 곳곳 수백년 된 배롱나무들매년 껍질벗는 나무 특징서 비롯수행자엔 번뇌 벗어버리란 의미 지난 12일에는 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를 찾았다. 선암사에도 배롱나무 고목들이 몇 그루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키가 큰 배롱나무 두 그루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고, 범종루를 통과하니 유명한 선암사 뒷간으로 가는 길 옆에 붉은 ‘꽃동산’ 두 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꽃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가장 멋진 배롱나무 앞에 다가가니 그 배롱나무는 적묵당 마당에 서 있었다. 적묵당 앞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서 있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두 그루의 배롱나무에 파묻힌 적묵당(寂默堂)의 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잠시 둘러보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삼성각 옆의 배롱나무가 또 눈에 들어왔다.송광사 역시 고찰답게 배롱나무가 많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건너는 다리인 능허교 위의 우화각을 지나니, 양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맞이했다. 다시 종고루(鐘鼓樓) 아래를 지나 대웅전 앞 넓은 마당에 올라서자 이곳저곳에 붉은 꽃을 활짝 피운 배롱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승보전 옆, 지장전 옆, 관음전 앞, 보조국사감로탑 주위 등에 고목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피워 넓은 산사 경내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특히 선원 뒤편에 있는 배롱나무가 꽃을 왕성하게 피워 기분을 흡족하게 했다. 대부분의 고찰에는 이처럼 배롱나무 고목들이 있다. 부처에 대한 꽃공양을 목적으로 대웅전 앞 양쪽에 심었다는 수령 200년(또는 300년) 정도의 고창 선운사 배롱나무를 비롯해 김제 금산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장성 백양사, 서산 개심사 등의 배롱나무도 유명하다. 계룡산 신원사에도 아주 오래된 배롱나무 고목이 있고, 영동 반야사에는 500년이 넘었다는 배롱나무가 있다. ◆산사에 배롱나무 심은 이유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리었다. ‘백일홍’이 ‘배길홍’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배기롱’을 거쳐 ‘배롱’으로 변해 배롱나무라는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한다.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으로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으로 파양수라 하고, 일본에서는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조차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루스베리(猿滑)라고 한다. 나무줄기는 매끈하고 껍질이 자주 벗겨진다. 꽃은 7~9월에 피고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꽃은 대개 붉은색이지만,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다. 중국의 당나라 현종은 배롱나무를 양귀비(楊貴妃)보다 더 사랑했다고 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한 매천 황현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천 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읊으며 이 꽃을 특히 사랑했다.이런 배롱나무를 사찰에 심는 뜻은 출가한 수행자들이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처럼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경계의 방편으로 삼으라는 것이다.배롱나무는 특히 여름철에 사찰을 붉게 수놓으며 스님뿐만 아니라 산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아름다움과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산사 곳곳의 배롱나무들은 100년 후, 500년 후가 되면 그 사찰의 어떤 스님보다 더 큰 ‘법력’을 보이며,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복을 선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승주 선암사 적묵당 앞의 두 그루 배롱나무. 이 배롱나무는 100년 전 옆에 있던 못을 메우고 건물을 지을 때 건물 터에 들어가지 않아 살아남았다고 한다.
2019.08.29
[山寺미학 .11] 조고각하(照顧脚下)...가지런한지 살펴라, 섬돌 위에 신발을 벗듯…
몇 년 전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화산(華山)을 등산한 적이 있다. 중국의 오악(五嶽: 泰山 衡山 崇山 恒山 華山) 중 하나에 속하는 명산인데, 그중 가장 험준한 바위산으로 유명하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가파른 절벽, 산줄기를 따라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과 사다리길, 잔도(棧道) 등이 이어진다. 이 길은 대부분 좁고 아찔한 낭떠러지에 있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는 곳도 많다. 물론 주변 풍경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절경이다.이런 길을 따라 화산의 다섯 주봉 중 가장 높은 남봉을 비롯해 여러 봉우리를 오르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발 디디는 곳을 잘 살펴 무사히 화산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마음 속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면 절경을 훨씬 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 화산이 얼마나 험준하고 아찔한지 잘 알게 하는 일화가 있다. ‘한퇴지투서처(韓退之投書處)’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한퇴지투서처’는 화산의 많은 등산로 중 창룡령(蒼龍嶺)에 있다. 북봉으로 가는 가파른 절벽 능선 위에 낸 길인데, 검푸른 용의 등줄기 기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창룡령’이라 불린다. 전체 길이가 1천500m 정도에 달하며, 폭1m의 돌계단 250개 정도로 이뤄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능선 위에 있는 이 길은 경사도 40도 정도로 심하다. 이 길도 걸어내려 왔는데, 누구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두려움을 느끼는 길이다.해남 달마산 미황사 세심당 섬돌양양 낙산사 홍련암 초입 팻말 등법당·선방 앞에서 종종 보는 글귀법연선사와 세 제자 일화서 유래道와 禪 수행자의 마음 요체 집약‘마음의 다리’도 잘 디디란 가르침당나라 최고 문장가였던 한유(韓愈 768~842)가 화산에 올라 하산하는 길에 이 창룡령에 이르게 되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바위 봉우리가 상하 수직으로 드리워졌고, 바위 산의 능선은 칼날과 같았다. 좌우의 낭떠러지 골짜기가 천길이나 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공포에 휩쓸린 그는 결국 방성대곡을 했다. 그리고 절망 속에 붓과 종이를 꺼내 유서와 구원요청서를 써서 절벽 아래로 던져 내렸다. 마침 약초 캐는 사람이 있어 그를 발견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유가 너무나 심한 두려움에 떨어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야 데리고 내려갈 수 있었다. 후세인들은 이 일을 기념해 암벽 한 곳에 ‘한퇴지투서처’라는 글귀를 새겼다. 지금도 이 글씨는 남아있다. ‘퇴지’는 한유의 자이다.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가 특히 험한 길을 걸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발 아래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고를 당하는 실수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사찰에 가면 만나는 글귀 ‘조고각하(照顧脚下)’‘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다리 아래를 잘 살펴라’는 의미의 이 글귀는 사찰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다. 법당과 선방 앞, 스님들의 처소나 외부인이 머무는 곳의 섬돌 위 마루 등에 이 글귀를 붙여놓고 있다. 해남 달마산 미황사의 경우, 대웅보전 옆에 있는 세심당(洗心堂) 건물의 섬돌 위 마루 몇 군데에 이 글귀를 붙여놓고 있다. 세심당은 외부 손님이 머물며 사용하는 건물이다. 동해안 절벽 위에 있는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가는 길 초입에도 이 글귀를 담은 소박한 팻말이 하나 서 있다.‘조고각하’라는 글귀가 유래된 일화는 선어록인 ‘종문무고(宗門武庫)’와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에 나온다.오조산(五祖山)에 주석한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에게는 뛰어난 제자 세 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불(三佛)이라고 불렀다. 불감 혜근(佛鑑 慧懃), 불안 청원(佛眼 淸遠), 불과 극근(佛果 克勤)이다. 극근은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고 칭송을 받는 ‘벽암록’을 지은 원오 극근 선사(1063~1135)이다.법연이 어느 날 이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어디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고 있던 등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둠을 밝혀 주던 등불이 꺼지자 칠흑같이 캄캄해서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스승인 법연이 물었다.“그대들은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말해보라.” 먼저 혜근이 대답했다.“붉은 봉황새가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에서 춤을 춥니다(彩鳳舞丹).”청원은 “쇠 뱀이 옛길에 누웠습니다(鐵蛇橫古路)”라고 대답했다.마지막으로 극근이 말했다.“다리 아래를 살피십시오(照顧脚下 또는 看脚下).”그러자 법연은 “우리 종문을 망칠 놈은 극근이다”라고 말했다. 스승인 법연 선사의 물음에 각자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세 제자는 각기 자신의 경지에서 답을 했고, 법연은 ‘조고각하’라고 답한 극근을 ‘우리 종문을 망칠 놈’이라며 특별히 칭찬한 것이다.이 일화에서 유래된 ‘조고각하’라는 글귀는 쉬우면서도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수행자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요체를 잘 담고 있다. 그래서 이후 수많은 선 수행자 사이에 회자되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다.◆항상 맑은 정신으로 살라는 가르침이 글귀는 단순히 발 아래를 살펴서 신발을 잘 신고 벗을 것을 주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유혹이 난무하는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도록 언제나 자신이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살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적인 다리만 아니라 ‘마음의 다리’도 잘 디디고 있는지 살피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은 즐거운 감정과 동일시하고, 고통은 불쾌하거나 나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의 근원이 고통이나 슬픔 자체에 있지 않고, 이 같은 일시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깨닫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은 차원이 다르다.이런 진정한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항상 ‘조고각하’의 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불이 꺼져 캄캄해졌는데, 발 아래는 잘 살피지 않고 당황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꼴이 아닌지 돌아보며 살 일이다. 글귀가 꼭 ‘조고각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선비들은 ‘경(敬)’자를 거처에 크게 써붙여놓고 마음을 챙겼다. 글귀가 아니라도 좋다. 무엇이든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을 한 가지씩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양심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조고각하’이다. 점점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이 늘고, 자신의 주장과 이념, 지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는 것도 ‘조고각하’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동해안 절벽 위에 자리한 양양 낙산사 홍련암. 이 암자로 가는 길 초입에 ‘조고각하’ 팻말이 서 있다.해남 미황사의 세심당 섬돌 위에 붙여놓은 ‘조고각하(照顧脚下)’ 글귀.
2019.08.08
[山寺미학 .10] 산사 숲길...僧·俗 잇는 대흥사 십리숲길 끝자락엔 臥佛 닮은 두륜산과 하늘이 마중…
우리나라 산사는 대부분 초입에 조성된 멋진 숲길을 자랑한다. 호젓하고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저절로 심신이 상쾌해지고 영혼이 맑아진다. ‘성역’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는 듯하다.전라도의 대표적 명찰이자 고찰인 해남 두륜산 대흥사 역시 숲길이 유명하다. 10여년 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던 초봄에 그 숲길을 걸었던 감흥이 생생하다. 이번에는 한여름인 7월에 대흥사를 찾았다.오후 늦게 승용차로 대흥사 아래에 있는, 유서 깊은 여관인 유선관(遊仙館)까지 갔다. 숙박을 예약한 뒤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는 숲길을 산책했다. 상쾌한 수목의 향기 속에 물소리를 들으며 먼저 유선관 바로 위의 피안교를 지나 대흥사로 향했다. 십리숲길 막바지 부분이다. 조금 올라가니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맞아주고, 좀 더 올라가니 부도밭이 나왔다. 보기 드물게 많은 부도가 길옆에 중첩적으로 늘어서 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초의선사 등 역대 유명 고승을 비롯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승려의 부도까지 다양한 부도가 모여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부도밭을 지나자 다시 하천을 건너는 다리 반야교가 나왔다. 이 다리를 건너 숲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니, 숲 터널이 끝나는 곳에 다시 문이 나왔다. 해탈문(解脫門)이다. 유선관에 여장 풀고 석양녘 산책삼·동백 등 아름드리로 어둑어둑숲터널 끝나니 佛國土 사찰 풍광해탈문 통과만으로도 심신 가뿐산사 입구 숲길은 한국 불교 특징양산 통도사‘무풍한송로’ 등 유명◆대흥사 십리숲길 끝에 나타나는 풍광해탈문을 지나자 말 그대로 해탈한 기분이 확 들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두륜산의 풍경이 너무나 시원하고 멋지기 때문이었다. 멀리 한눈에 들어오는, 산봉우리 서너 개가 늘어선 산 능선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여름 활엽수 숲이 물들이고 있는 푸르름과 파란 하늘의 대비가 펼쳐내는 멋진 풍광이 심신을 탁 트이게 했다. 산 능선이 만들어내는 모양이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실제 와불(臥佛)을 닮기도 했다. 십리 정도 되는 이 숲길을 처음부터 걸어왔다면 그 기분은 더 좋았을 것이다.저녁예불이 시작됐는지 법고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6시경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가니 대웅보전 앞 누각인 침계루였다. 침계루를 지나 대웅보전 앞에 서서 법고 소리를 한참 들었다. 한 스님이 법고를 치는데, 고수인지 소리가 정말 좋았다. 법고에 이어 치는 운판 소리를 듣고, 법고와 운판을 친 스님들이 대웅보전에 들어가 예불하는 것을 감상했다. 그리고 사찰 곳곳을 둘러보고 돌아나와 유선관 앞을 지나 아래쪽 숲길을 따라 대흥사주차장까지 내려가며 산책했다.대흥사 숲길은 ‘두륜산대둔사(頭輪山大芚寺)’라는 현판이 걸린 산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편액 글씨는 호남의 대표적 서예가 강암 송성용(1913~1999) 글씨다. 산문에는 주련이 두 개 걸려 있는데, ‘전쟁 등 삼재가 미치지 못하는 곳(三災不入之處)/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는 내용이다. 서산대사가 두륜산을 두고 한 말이다. 산문을 지나 해탈문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4㎞ 가까이 된다. 소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왕벚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 등 이 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들이 아름드리 굵기를 자랑하며, 한낮에도 그 안은 어둑어둑할 정도로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숲길은 침계루 앞을 지나 흘러내리는 하천을 수 차례 건너며 굽이굽이 이어진다. ‘십리숲길’로 불리는 이 숲길은 그래서 ‘구림구곡(九林九曲)’으로도 불린다. 봄이 오래 머문다는 ‘장춘(長春) 숲길’로도 불린다.이 길은 꽤 길어 차를 타고 천천히 달려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직접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차도와 별개로 보행자를 위한 길도 곳곳에 만들어 놓고 있다. 계곡 따라 낸 ‘물소리길’, 반대편 산쪽의 ‘동백숲길’ 등이 있다. 이곳의 동백숲도 보기 드물게 좋은 동백숲이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숲길을 걸으며 또다른 ‘해탈’ 기분을 만끽했다.◆곳곳에 있는 아름다운 산사 숲길산사 입구 숲길은 한국 산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입구에 긴 숲길이 조성돼 있는 우리나라 산사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 사찰에서는 이런 숲길을 잘 만날 수 없다.우리 불교는 9세기 중반 신라 도의선사에 의해 선종이 전파되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개창되는 등 전국 명산에 많은 선종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때부터 산속 사찰은 한국 불교문화의 큰 흐름이 되고, 산사 불교가 한국 불교의 한 특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인도와 중국 불교의 특징은 석굴사원이고, 일본 불교는 사찰정원이 특징이다. 그래서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의 운강 석굴과 용문 석굴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일본은 독특한 정원을 가진 교토의 료안지와 덴류지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이와 달리 산사 불교가 발달했고, 고유의 산사 불교문화 덕분에 지난해 7개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런 한국 산사의 특징 중 하나가 입구 숲길이다. 불교적 우주관에서 나온 이 숲길은 불국토(佛國土)인 사찰과 속세 간의 경계인 셈이다. 이 숲길을 통과해 불국토에 이르게 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숲길을 통과하면서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대흥사 숲길 말고도 아름다운 산사 숲길이 많다. 일주문에서부터 1㎞ 정도 이어지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길, 합천 해인사 홍류동 계곡 숲길, 순천 송광사 숲길, 승주 선암사 숲길, 의성 고운사 소나무 숲길, 청도 운문사 소나무 숲길, 양산 통도사 소나무 숲길 등.특히 통도사 숲길은 최근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다른 산사의 숲길과 달리 보행전용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매표소가 있는 통도사 ‘영축산문(靈鷲山門)’을 통과하면, 차량들은 왼쪽에 나타나는 무풍교를 건너 포장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게 된다. 차량통행을 금지한 보행로는 무풍교를 건너지 않고 바로 직진하면서 시작되는 숲길이다. 무풍교 근처에서 시작되는 무풍한송로는 1.6㎞ 정도 된다.이 길은 1960년대까지는 마차가 다니던 흙길이었다. 1970년대는 차량과 보행자가 함께 사용했으며, 아스팔트도 깔렸다. 1990년 무풍교를 만들고 새 자동차 도로를 내면서, 이 길은 보행자 전용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숲길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다.오래된 산사들은 고목들이 늘어선 멋진 숲길을 자랑하지만, 대부분 차량이 함께 이용하게 되면서 점점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없는 길로 변해버렸다. 보행자는 차량이 원망스럽고, 차량 운전자도 보행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상황이다. 무풍한송로는 원래의 숲길을 보행자 전용으로 하고 자동차 도로를 따로 내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한 대표적 사례이다.계곡 옆으로 나 있는 무풍한송로에 들어서면, 속세를 벗어나 딴 세상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수백년이 된 아름다운 노송들이 길 양 옆에 늘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온다. 노송과 계곡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 이 보행로 주변은 ‘무풍한송(舞風寒松)’이라 불리며 통도팔경의 첫 번째로 꼽힌다. ‘무풍한송’의 ‘무풍’은 이곳의 바람이 다른 지점보다 특별히 심해 ‘바람이 춤을 춘다’는 의미로 붙여졌다.아름다운 산사 숲길들이 무풍한송로처럼 차량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숲길로 거듭나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좋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터널을 이루는 십리숲길이 끝나는 해탈문(解脫門)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두륜산 대흥사 풍경. 말 그대로 심신이 해탈되는 기분이 들게 한다.대흥사 숲길의 마지막 부분. 숲길 끝에 해탈문이 보인다.
2019.07.25
[山寺미학 .9] 일본 사찰 정원
우리나라 산사와 달리, 일본 사찰은 따로 공들여 조성한 정원이 발달돼 있다. 우리 산사는 큰 사찰이라도 특별히 조성한 정원이 따로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찰 경내의 마당이나 뜰에는 매화나무나 배롱나무 등이 몇 군데 심어져 있거나, 드물게 작은 화단이나 연못이 있을 뿐이다. 승주 선암사가 그나마 두어 개 연못이 있으며, 소나무나 매화나무 등 큰 나무가 있고 다양한 꽃이 있는 화단이 비교적 많은 절에 속한다. 일본 사찰을 가보면 곳곳에 일부러 공들여 만든 정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방장(方丈) 건물 주위는 다양한 정원이 조성돼 있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교토 덴류지(天龍寺)의 정원이 특히 유명하다. 덴류지는 선종인 임제종 덴류지파의 본산 사찰이다.덴류지, 임제종 덴류지파의 본산방장 주위 정원 세계유산 등재돼종파 발전시킨 무소 국사가 설계원나라 무역으로 건립 자금 마련8차례의 큰불로 소실·재건 반복現 건물 대부분 19C후반 지어져◆일본 특별명승 제1호 덴류지 정원덴류지 정원도 방장 주위에 조성돼 있다. 입장료를 내고 정원으로 가는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법당보다 큰, 거대한 방장 건물이 있다. 그 앞에 흰 모래로 된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 펼쳐져 있다. 흰 모래가 일정하게 골을 지어 평평하게 깔려 있고, 담장 쪽에 잘 생긴 소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소나무 주위 바닥은 이끼로 덮여 있다. 꽤 넓은 정원이다. 방장 건물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이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건물 앞은 흰 모래가 깔려 있고, 그 너머로 연못이 조성돼 있다. 작은 섬이 양쪽에 있는 이 연못은 굴곡이 많은 타원형인데, 못 주변이나 안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조화롭게 박혀 있다. 연못과 접해 있는 산은 단풍나무를 위주로 다양한 수목들이 울창하다. 건물과 연못 사이의 길을 따라 연못을 지나면 ‘백화원(百花苑)’이 펼쳐지고, 마지막 부분에는 왕대숲이 펼쳐진다. 그리고 돌아서 산속에 난 길을 따라 ‘망경(望京)의 언덕’ 길을 걸으면서 경치를 감상하며 연못 주위를 돌아보도록 되어 있다. 연못 소겐치(曹源池)를 중심으로 한 이 덴류지 정원은 ‘心(마음 심)’자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큰 연못을 조성하고, 그 주변으로 산책길을 낸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이다. 한참 둘러보아야 할 정도로 큰 정원이다. 한쪽 면이 산자락에 접해 있어, 주위의 자연풍광을 그대로 연결시켜 끌어들이고 있다. 인공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정원으로, 아름다운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하다. 담장이 있는 일본의 다른 사찰의 방장 주변 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연못가에 크고 작은 돌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고, 주변의 수목과 산, 꽃동산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 정원은 약동감이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섬세한 풍취를 선사한다. 계절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이 정원은 누구나 보면 좋아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취재 당시(지난 5월) 이곳에서 만난, 부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온 40대 후반의 여성은 이 정원을 좋아해 세 번째 온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무소 국사가 1345년에 조성덴류지는 1339년에 억울하게 죽은 고다이고 일왕(1288~13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시카가 다카우지(1305~1358) 장군이 무소 소세케(1275~1351) 국사(國師)를 개산조사(開山祖師)로 창건한 사찰이다.고다이고 일왕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일왕의 큰 신임을 받고, 또 장군들의 존경을 받은 무소 국사는 아시카가 장군에게 고다이고 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선종사찰을 이곳에 건립할 것을 건의했다. 그의 건의는 장군을 통해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은 새로운 사찰 건립 허가를 내렸다.그런데 거대한 선종사찰을 건립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다이묘(大名: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렸던 영주들)의 기부금으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었다. 무소 국사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원나라에 독자적으로 무역선을 보내는 것을 제안했다.마침내 막부의 허가를 받아서 덴류지선(天龍寺船)이 파견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상인이 선장이 된 이 무역선으로 100배의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찰 건립이나 수리 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된 무역선으로, 덴류지선 이전에는 가마쿠라의 겐초지선(建長寺船) 등 전례가 있다. 당시 선승들은 이런 무역선을 타고 일본과 원나라를 왕래했으며, 이는 일본의 선종 보급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덴류지 칠당(七堂) 가람이 완성되자, 1345년 무소 국사를 도사(導師)로 한 개당(開堂)법회가 열렸다. 덴류지는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화재를 비롯해 8번 대화재의 피해를 입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현재 경내에 있는 건물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인 메이지시대에 재건된 것이다.이런 와중에서도 무소 국사가 설계한 정원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소 국사는 임제종을 발전시킨 고승이면서 뛰어난 정원 설계사였다. 다수의 정원을 설계했다. 연못 소겐치를 중심으로 조성한 덴류지 정원은 일본 정원문화에 큰 영향을 준 대표적인 정원이다. 이 정원은 일본의 사적·특별명승 제1호이고,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무소 국사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통해 선(禪)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산수(山水)에는 득실(得失)이 없다. 득실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무소 국사가 남긴 말이다. 정원을 만들고 좋아하더라도 정원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주문하고 있는 듯하다.그동안 둘러본 교토 산사는 덴류지처럼 대부분 방장 건물 주위에 다양한 정원을 조성해 놓고 있다. 료안지는 방장 주위에 석정(石庭), 이끼 바닥 위에 나무 등이 있는 이끼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지천회유식 정원인 교요치(鏡容池) 정원은 따로 조성되어 있다. 도후쿠지는 방장 건물 동서남북 사방에 석정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정원을 조성해 놓았다. 닌나지도 가레산스이 정원과 지천회유식 정원 등이 어우러져 있다.주지 처소이자 손님 접대나 회의 공간으로 사용된 방장 건물 주위에 조성된 일본의 사찰 정원은 툇마루나 회랑, 방에서 보며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원 조성에 각별히 신경 쓴 이런 일본 사찰 정원 문화는 우리 산사와는 전혀 다른 문화임을 보여준다. 수행 위주보다는 거주자나 방문자를 위한 공간으로 인위적인 정원을 조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일본의 대표적 사찰 정원인 교토 덴류지 정원 일부. 연못 소겐치를 중심으로 조성한 덴류지 정원은 일본의 사적·특별명승 제1호이고, 일본 정원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덴류지 방장 건물 옆의 가레산스이 정원.
2019.07.11
[山寺미학 .8] 일본 사찰 가레산스이(枯山水)...돌·모래·이끼로 꾸며놓은 ‘石庭’…500년전 파격 설치미술 보는 듯
일본 사찰을 둘러볼 때 매우 낯설고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 중 하나가 가레산스이(枯山水)라고 하는 정원이다. 석정(石庭)이라고도 한다. 흰 모래(굵은 모래)와 크고 작은 돌, 이끼로 만든 정원이다. 물이나 수목을 사용하지 않고 산수나 바다와 섬 등의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사에는 없는, 일본 사찰에만 있는 가레산스이 정원은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미(美)’를 상징하는 대표적 예로 떠올린다. 특히 일본 선종 사찰에서 많이 만들어지고 발달했다. 중국 선불교와 수묵산수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정원의 양식으로, 일본 정원 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일본 선종 사찰의 이 새로운 정원양식은 무로마치(室町) 시대(1338~1573) 초기에 시작돼 중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돌과 모래, 이끼로 자연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석정은 일본의 유명 산사 대부분에서 만날 수 있다. 교토의 유명 고찰인 료안지(龍安寺), 다이토쿠지(大德寺), 닌나지(仁和寺), 난젠지(南禪寺), 도후쿠지(東福寺), 겐닌지(建仁寺), 긴카쿠지(銀閣寺) 등에도 석정이 있다. 일본 선종 사찰은 삼문(三門), 법당, 방장(方丈: 주지 처소 겸 접견실), 고리(庫裏: 종무소), 선당(禪堂), 동사(東司: 화장실), 욕실을 기본 건물로 하는 7당(七堂) 체제를 갖추고 있다. 가레산스이는 방장과 그 비슷한 성격의 건물에 조성돼 있다.中 선불교·수묵산수화 영향받아물·수목 사용않고 자연풍경 표현선종사찰 방장 건물 뜰에 조성돼15세기경 완성 日 정원문화 정수대부분의 유명산사서 볼 수 있어료안지 석정 서양에 널리 알려져◆‘선(禪) 정원(Zen Garden)’으로 불리는 료안지 석정선종인 임제종 사찰 료안지의 석정이 특히 유명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가레산스이 정원이다. 역사도 매우 오래됐다. 료안지는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사찰이다.료안지 자리는 원래 귀족 도쿠다이지(德大寺) 가문의 별장이 있었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장군을 보좌하는 관령(管領) 직을 맡은 호소카와 가츠모토(細川勝元, 1430~1473)가 이 땅을 양도받아 1450년에 선사(禪寺)를 창건했다. 가츠모토는 료안지 개산조(開山祖)인 기텐겐쇼(義天玄承, 1393~1462) 선사에 깊이 귀의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북송(北宋)의 용안산(龍安山) 도설사(兜率寺)의 종열(從悅) 선사와 재상(宰相) 장상영(張商英)의 깊은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찰 이름이 료안지가 되었다.료안지는 오닌(應仁)의 난(일본 무로마치 시대 당시 1467년부터 1477년까지 계속된 내란)으로 불탔으나 1499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석정은 그 당시(1500년경) 도쿠호오 젠게츠를 중심으로 한, 뛰어난 선승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이 석정은 료안지의 방장(方丈) 건물 남쪽 툇마루 앞에 조성돼 있다. 일본 선종 사찰의 방장은 사찰의 조실(祖室) 또는 주지가 거주하는 곳이면서, 회의를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주지나 방장이 머무는 곳과는 달리 매우 규모가 크고, 주변에는 정원이 조성돼 있다. 료안지 석정은 동서 25m, 남북 10m 넓이의 평평한 장방형 마당에 흰 모래가 깔려 있고, 그 위 곳곳에 크고 작은 돌 15개가 몇 개씩(5개, 2개, 3개, 2개, 3개) 무리지어 놓여 있다. 돌 무리는 이끼 위에 놓여 있다. 흰 모래는 갈퀴 자국으로 돌 무리 주위는 둥글게, 그 외에는 직선으로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다. 잔잔한 바다에 떠있는 섬들을 연상시킨다. 15개의 돌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하나는 보이지 않는데, 심안이 열려야 보인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모래와 돌로 만든 500여년 전의 파격적 설치미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묘한 배치가 매력적이라는 이 돌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료안지 석정은 석정을 둘러싸고 있는 흙담이 또한 유명하다. 이 흙담은 유채 기름을 섞어 반죽한 흙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방수성도 향상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장은 갈색을 기본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기름이 배어 나와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얼룩이 곳곳에 있다. 이런 담이 하얀 석정과 어우러져 특별한 맛을 내고 있다.료안지 석정은 오래 전부터 개성적인 정원으로 알려져 왔지만, 일반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다. 서양의 작가나 철학자 등이 료안지 석정을 방문해 칭찬한 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대표적 일본 정원이 되었다. 특히 1975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료안지 석정을 방문해 칭찬하면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료안지 석정을 ‘선(禪) 정원(Zen Garden)’으로 부르며 선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방장 툇마루는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석정을 바라보며 감상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선종 사찰의 다양한 가레산스이일본 선종 사찰의 방장 뜰에 왜 이런, 돌과 모래로 만든 산수화 같은 석정을 조성했을까. 우리나라 산사로 치자면 대나무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놓은 주지실이나 요사채의 마당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석정은 명상을 유도하는, 삼매에 드는데 도움이 되도록 만든 정원이라고 하고, 선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료안지의 석정은 돌과 모래, 이끼로만 조성되었지만, 석정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찰별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긴카쿠지의 가레산스이는 돌은 사용하지 않고, 모래로만 산과 물결을 표현하고 있다. 달빛을 감상하기 위한 ‘향월대(向月臺)’라는 이름을 붙인 원추형 산은 후지산을 본뜬 것이라 한다. 다양한 수목들이 있는 주변의 정원과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형태다. 겐닌지나 닌나지, 덴류지, 도후쿠지의 가레산스이처럼 나무를 함께 활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찰의 석정은 보통 방장 건물의 중심 뜰에 조성돼 있다. 방장 건물 주위에는 석정뿐만 아니라 연못을 중심으로 한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 이끼정원 등 다양한 형태의 정원이 조성돼 있다. 일본 특유의 정원 형식인 석정은 들어가지 않고 마루나 방에 앉아서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각 주위에는 바로 숲이 있는 산과 계곡이 펼쳐지는데, 우리와 달리 굳이 담장 안에 모래와 돌 등으로 정원을 꾸미고 감상할 마루를 따로 만드는 것은 민족성의 차이, 문화의 차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모든 것을 초월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 수행 도장인 사찰이어도 그 문화를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일본의 가장 대표적 가레산스이 정원인 교토 료안지 석정. 료안지 방장 건물 앞에 있으며, 서양 사람들로부터‘선(禪) 정원(Zen Garden)’으로 불린다.교토 도후쿠지 석정.
2019.06.27
[山寺미학 .7] 영주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문짝 세계’…찬찬히 보는 재미가 쏠쏠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꽃살문. 직접 실물을 대하고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찰 꽃살문으로 손꼽힌다. 특히 세 짝의 통판 투조 꽃살문은 최고의 꽃살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통판 투조는 통 판자에 꽃 문양을 투조(透彫)해 완성한 것을 문살 위에 붙여 만드는 방식이다. 별도의 문살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꽃살문 자체만으로 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1553년에 세우고 1634년에 중창한 성혈사 나한전은 석조 비로자나불과 나한 16위를 모신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지붕 구조로, 작고 소박한 법당이다. 이 건물은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 멋지고 아름다운 꽃살문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한전 꽃살문은 나한전이 중창된 1634년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의 6개 문짝 모두가 꽃살문으로 되어 있다. 연(蓮)이 중심인 어간의 문짝은 전체적으로 녹색, 모란을 표현한 그 양쪽 문짝은 붉은색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다. 거의 퇴색되어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가 주는 멋이 각별하다. 색이 바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문짝은 안쪽으로 밀어 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문을 열면 꽃살문이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과 16나한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나한전을 마주할 때 왼쪽 칸 두 개 문짝은 문양화된 모란꽃을 새긴 꽃살문이다. 여섯 개의 꽃잎으로 된 꽃을 중심으로 원형의 줄기가 겹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이 반복되고 있는 구조이다. 그 조화로움과 조각 솜씨가 절묘하다. 넝쿨 모란 문양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 꽃살문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점이다. 나한전 정면에 3칸 6개의 문짝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찰 꽃살문보물 지정에도 큰역할 했을 듯개구리 등 온갖 생명체가 약동실물 직접 대하니 탄성 저절로◆연지수금(蓮池獸禽) 꽃살문가운데 두 문짝은 연꽃이 핀 연못에 여러 가지 새와 어패류들이 노니는 모양을 표현한 연지수금(蓮池獸禽) 꽃살문이다. 연지의 세계를 담아낸 이 꽃살문짝이 나한전 꽃살문의 압권이다. 각각 네 개의 세로 판자에 투조해 만든 꽃살문을 빗살 위에 붙인 형태이다.두 개의 문짝이 전체적으로 대칭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세부 내용은 다르다. 왼쪽 문짝을 보면 가장 아래쪽에는 물고기들이 연잎과 연꽃 사이에서 노닐고 있다. 그 위에는 백로 한 마리가 물속을 보며 고기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위쪽에는 다른 새 한 마리가 연잎을 쪼고 있다. 그리고 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잎과 연꽃의 모습도 다양하다. 40송이 가까이 되는 연꽃은 작은 봉오리부터 갓 피기 시작한 꽃, 만개한 꽃, 연밥을 머금은 것 등 다양하다. 연잎의 모양새도 다채롭다. 활짝 열린 것도 있고 오므린 것과 반쯤 벌린 것도 있다. 축 늘어진 연잎도 있다. 찬찬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른쪽 문짝의 세계는 더욱 역동적이고 다채롭다. 물고기와 백로에다 게 두 마리, 개구리(맹꽁이)가 있다. 위쪽에는 구름을 타고 날고 있는 용도 있다. 그 위에는 새 한 마리가 금방 잡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다. 연꽃 대궁이를 타고 놀고 있는 동자승도 묘사해놓고 있다. 이 문짝에는 백로가 한 마리 더 있는데, 맨 위에 물고기를 보고 하강하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온갖 생명체들이 약동하는 연못 세계가 펼쳐져 있다.◆통판투조 모란꽃살문그리고 오른쪽의 두 문짝은 대칭의 정형을 벗어난 파격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두 문짝 중 왼쪽 것은 가운데 어간 왼쪽 문짝과 같은 꽃살문인 반면, 오른쪽 문짝은 중복되는 모란 문양을 배경으로 중심에 큼직한 모란 한 포기를 통째로 새겨 장식하고 있다. 세 쪽의 판자로 크고 작은 꽃과 잎, 줄기가 있는 모란을 사실적으로 새겨 빗살 위에 고정해놓고 있다.10송이 꽃이 있는 모란 한 포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모란꽃살문은 원근감과 입체감도 살려내고 있다. 제일 아래쪽의 큰 모란꽃은 정면을, 그 좌우의 꽃은 작게 표현하고 옆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의 세 송이 꽃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맨 위쪽의 꽃은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상태이고, 그 아래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꽃 줄기의 가장 아랫부분은 화초임에도 나무 밑둥치처럼 굵게 표현해 안정감과 넉넉함을 주고 있다. 멋지고 흥미로운 꽃살문이다. 살아있는 특별한 모란꽃을 보는 듯하다. 모란 잎과 꽃이 하나하나 모두 생동감 넘친다. 많은 꽃 중에 왜 모란을 새겼을까. 모란은 꽃 중의 왕으로 대접받고,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다. 모란을 찬미한 대표적 시로 당나라 말기의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모란(牧丹)’이 있다. ‘다 떨어지고 남은 붉은 꽃잎에서 비로소 향기를 토해내니(落盡殘紅始吐芳)/ 아름다운 그 이름 모든 꽃 중의 왕이라 불려지네(佳名喚作百花王)/ 천하에 그 아름다움과 견줄 것이 없으니(競誇天下無雙艶)/ 그 향이야말로 오로지 인간 세상에 으뜸가는 제일이라(獨占人間第一香)’◆신라 때 창건된 성혈사성혈사는 소백산 국망봉 아래에 있는 월명봉의 동남쪽 기슭(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277)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때의 승려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성혈사라는 이름의 ‘성혈(聖穴)’은 사찰의 남쪽 근방에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옛날에 성승(聖僧)이 나왔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성혈사 나한전에 봉안된 석조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16나한은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실측조사보고서(2007)에 따르면, 부산의 모 대학 여자 교수가 근래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나한전 바로 앞에는 언제 세워졌는지 모르는 석등 2기가 서 있는데, 나한전과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성혈사 성혈에서 어떤 성승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한전 꽃살문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꽃살문. 최고의 사찰 꽃살문 중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가운데 어간의 연지수금(蓮池獸禽) 꽃살문과 오른쪽의 통판 투조 모란꽃살문이 유명하다.나한전 꽃살문 중 통판 투조 모란꽃살문 부분.
2019.06.13
[山寺미학 .6] 사찰 꽃살문...모란·국화·연꽃·매화…법당 문살에 장엄한 꽃비
산사에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은 다양하다. 그중 시각적으로 쉽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법당의 문을 꼽을 수 있다. 아름다운 문살이 많기 때문이다. 다양한 꽃살문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오래된 산사의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그 사찰의 중심 법당 문을 보면 대부분 멋진 꽃살문으로 되어 있다. 세 칸 또는 다섯 칸의 문 모두가 꽃살문으로 된 경우도 있고, 가운데의 어간(御間)만 꽃살문으로 장식하고 있는 곳도 있다. 어간의 네 짝 문 중 두 개만 꽃살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꽃살문의 문양은 보통 모란, 국화, 연(蓮), 해바라기, 매화 등이 소재로 활용된다. 꽃과 잎을 함께 표현하거나 꽃만 새기기도 한다. 대나무와 소나무, 물고기나 새 등을 새긴 경우도 있다.불교에서 꽃을 깨달음으로 상징대웅전·극락전 문 화려하게 장식당대 최고 솜씨 동원한 예술작품한국의 탁월한 미의식 잘 드러나지역에선 동화사·송림사 등 유명산사에 가면 이처럼 아름답고 정겨운 꽃살문들을 만날 수 있다. 불상이 봉안된 법당의 문을 꽃살문으로 장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연꽃을 비롯한 꽃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상징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나 설법을 마친 후 삼매에 들었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전한다. 불상이 봉안된 법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설한 자리인 영산회상(靈山會上)에 비유되고, 법당의 꽃살문은 영산회상에 내린 꽃비를 상징한다고 한다.그래서 법당의 문은 일반 한옥의 문과는 달리 단순히 문의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장식성이 두드러진 꽃살문을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런 꽃살문인 만큼 최고의 솜씨가 동원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경우가 적지 않다. 화려하고 정교하며 창의적인 조각 솜씨가 드러나는 사찰 꽃살문은 다른 나라의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특유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쌍계사(논산) 대웅전 등의 꽃살문 유명 사찰 꽃살문 중 특히 유명한 것은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이다. 정면 3칸 건물의 앞쪽 8개 문짝 모두가 꽃살문이다. 1633년에 중건된 이 대웅보전의 꽃살문은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각 솜씨와 감각이 뛰어나고 정교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청은 다 사라지고 나뭇결이 그대로 보이는 상태다. 오히려 화려한 색이 없는 그 모습이 주는 아름다움이 더 감동적이다. 모란, 국화, 연꽃, 해바라기 등이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으로 장식된 문짝들이다. 꽃송이는 잎으로 연결되어 있고, 꽃의 형태는 만개한 것과 봉오리가 조화롭게 섞여 있는 것도 있다.논산 쌍계사 대웅전은 정면이 5칸인데, 10개 문짝 모두 꽃살문이다. 대웅전이 잘 생긴 건물인 데다 문짝 모두가 아름다운 꽃살문으로 되어 있어 법당 전체가 멋진 작품으로 다가온다. 연꽃, 모란, 국화, 작약, 무궁화 등이 새겨져 있다. 단청은 좀 바랜 상태다. 대웅전 옆쪽에 있는 협문 중 하나는 외 문짝인데 위칸에 활짝 핀 꽃송이와 꽃봉오리, 그리고 줄기와 잎이 대칭으로 된 꽃송이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모란인 것 같다.이와 함께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부안 개암사 대웅전, 해남 대흥사 천불전, 부산 범어사 팔상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등의 꽃살문도 아름답다. 꽃살문의 소재는 비슷하지만 같은 꽃을 조각해도 사찰마다 조각한 사람이 다르다 보니 조금씩 다르다. 대구경북에도 꽃살문이 아름다운 사찰이 많다. 대구 동화사 대웅전, 칠곡 송림사 대웅전,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등의 꽃살문이 유명하다. 꽃살문은 살대를 기본으로 하여 만든 문이 대부분이나 꽃이 핀 식물 모양을 통째로 투조(透彫)하여 문살 위에 붙인 형식도 있다. 이런 문은 꽃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경우 문살은 문양판을 지탱하는 역할만 한다. 이런 꽃살문으로는 강화 정수사 대웅보전, 공주 동학사 대웅전, 영주 성혈사 나한전 등의 꽃살문이 대표적인 꽃살문으로 꼽힌다. 정수사 대웅보전 어간 4개의 꽃살문은 지탱하는 문살이 따로 없는 통판투조 꽃살문인데, 화병에 모란, 연꽃 등의 꽃을 꽂아 놓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불단에 올리는 공양화를 연상시키는 형태다. 동학사 대웅전 꽃살문 역시 투조기법으로 장식한 문이다. 대웅전 전면 10개 문짝 모두 화초 투조 장식의 문이다. 어간의 두 문짝에 매화, 그 양쪽에 난초, 그리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세 짝 문에 각각 송학, 대나무, 국화가 투조되어 있다.성혈사 나한전은 전면 3칸의 6개 문짝 모두가 꽃살문인데,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멋지다. 통판투조 문짝은 이 중 어간의 두 문짝과 동쪽 칸의 두 문짝 중 하나다. 어간 문은 연꽃, 동자승, 새, 개구리, 물고기 등이 투각된 장식판이 빗살 위에 부착되어 있고, 오른쪽 문짝은 10송이 꽃이 달린 모란 한 포기 전체를 묘사하고 있다.구례 천은사 약사전 통판투조 꽃살문, 순천 선암사 원통각 통판투조 모란꽃살문 등도 눈길을 끈다.꽃살문의 제작 기법은 문살 자체를 꽃모양으로 조각하여 짜 맞춘 것, 따로 조각한 꽃모양을 빗살이나 솟을빗살의 교차점마다 붙인 것, 그리고 꽃문양을 판자에 투조해 문살 위에 붙인 것 등이 있다. 살대를 45도와 135도로 빗대어 교차시켜 짠 문을 빗살문이라 하는데, 여기에 각종 꽃 모양을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인 것이 ‘빗꽃살문’이고, 빗꽃살문에 수직 살대인 장살을 첨가한 것이 ‘솟을빗꽃살문’이라 한다. 사찰 꽃살문은 빗꽃살문보다 솟을빗꽃살문이 많은 편이다. 정교하게 조각한 꽃살문의 아름다움은 한국적인 미감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꽃살문의 정교함과 화려함은 그 시대 장인들의 탁월한 미의식과 정신세계를 가늠하게 한다. 편안한 가운데 미적 쾌감을 주는 사찰 꽃살문은 부처님을 향한 종교적 열정, 한국적 미의식이 만들어낸 차원 높은 건축 장식 미술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산사에 가면 한국적 미의식이 배어난 아름답고 정겨운 꽃살문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꽃살문에 관심을 가지면 산사에서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2019.05.30
[山寺미학 .5] 산사 산책...충만한 한가함…茶 한잔 청해도 스님은 마다하지 않네
지난달 하순 평일 낮에 취재를 겸해 논산의 쌍계사를 찾아갔다. 가본 적이 없는 사찰이다. 논산에는 마침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쌍계사는 논산시 양촌면 불명산(佛明山)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인적이 없는 들길과 산속 숲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아 쌍계사 봉황루 아래에 도착했다. 봄비에 떨어진 산벚나무 연분홍 꽃잎이 땅바닥 여기저기를 수놓고 있고, 봄비를 맞아 더욱 생기 넘치는 신록이 옅은 안개 속에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봉황루에 올라 그런 풍광을 둘러보니 눈길 따라 마음이 절로 신록의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논산 쌍계사신록에 생기 넘쳐 환상적인 풍경대웅전 안에선 청아한 목탁소리죽음의 고통 덜어주는 기둥 각별마당 한쪽 ‘연리근’ 고목 한그루주지와 공양하며 이런저런 대화자신 되돌아보고 마음 가라앉혀오전 11시경이었다. 봉황루 맞은편의 대웅전 안에서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드리고 있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누각에서 내려와 넓은 대웅전 앞마당을 거닐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슬비 내리는, 조용하고 한적한 산사를 거닐며 듣는 염불 소리에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었다.쌍계사는 봉황루 아래를 지나 마당으로 올라서면 커다란 대웅전(전면 5칸 측면 3칸)만 홀로 덩그렇게 서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은 명부전과 나한전 등이 대웅전 오른쪽에 있지만. 푸른 잔디와 잡초, 이름모를 풀꽃들이 수놓고 있는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뿌리가 나중에 합쳐진 연리근(連理根) 나무라고 한다.웅장하고 잘 생긴 대웅전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우선 앞쪽 다섯 칸 문짝 모두를 장식하고 있는 꽃살문이 눈길을 끈다. 칸 별로 국화, 무궁화, 모란, 연꽃, 작약 등 각기 다른 꽃으로 되어 있다. 누구나 보면 매료될 만하다. 측면 출입구인 한쪽 협문은 외 문짝인데 위칸에 활짝 핀 꽃송이와 꽃봉오리, 줄기와 잎이 대칭으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보기 드문 꽃살문인데, 모란인 것 같다.◆봄비에 젖은 논산 쌍계사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세워진 굵은 기둥들을 보는 맛도 각별하다. 기둥은 껍질만 벗겨낸 듯 대충 다듬어 각기 굵기와 모양도 다르다. 그중 한 기둥은 칡덩굴 기둥이라고 한다. 아름드리 기둥인데, 믿기가 어려웠다. 다른 기둥과 비교해 살펴보면 나무결이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 칡덩굴 기둥인지는 알 수가 없다.이 기둥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윤달이 드는 해에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 고통없이, 오래 앓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 한 번을 안으면 하루 아프고, 세 번 안으면 사흘만 앓다가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승에 가면 저승사자가 논산 쌍계사에 갔다가 왔느냐고 물어본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쌍계사 주지 종봉 스님은 칡덩굴인지 여부는 기둥의 성분을 전문기관에 의뢰해 분석해 보면 알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싶어 분석해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기둥을 보면 칡넝쿨이 감아있었던 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는데, 그래서 칡덩굴 기둥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깨끗함이 극에 이르면 그 빛이 걸림이 없으니(淨極光通達)/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하게 비치네(寂照含虛空)/ 물러나와 세상 일을 돌아보니(却來觀世間)/ 마치 꿈 속의 일과 같구나(猶如夢中事)’ 대웅전에 걸린 주련 글귀의 내용이다. 요즘은 한자로 된 주련의 내용을 한글로 풀이해 안내하는 곳이 많다. 이런 주련의 내용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지금의 대웅전은 1738년에 건립된 건물이며, 보물 제408호로 지정돼 있다. 꽃살문과 닫집 등이 특히 유명하다.염불이 끝난 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세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 뒤로는 탱화가, 위로는 눈길을 빼앗는 멋진 닫집으로 장엄돼 있다.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게 하는 분위기다. 마침 절에 계시는 듯한 여자 분이 들어오길래 스님 계시면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잠시 후 다시 와서 종무실로 오라고 전했다.주지 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님이 지금 공양(식사)시간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식당 방으로 가니 한 스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스님이 주방을 담당하는 할머니가 대구사람이라고 이야기했고, 할머니는 반갑게 맞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밥을 먹을 만큼 담고 국 한 그릇을 떠서 스님이 식사하고 있는 밥상에 같이 앉아 셋이 식사를 했다. 김치와 나물 세 가지, 제피 잎 무침이 전부였지만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식사를 했다. 이 절에는 스님 두 분과 공양을 담당하는 할머니, 그리고 종무를 맡아보는 아주머니, 네 사람이 식구인 듯했다. 식사 후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 인사를 하고 사찰을 나섰다. 나오다가 길 옆에 부도밭(스님들의 유골을 안치한 부도를 모아둔 곳)이 보이기에 차를 세운 뒤 산자락 숲속에 있는 다양한 부도를 보며 잠시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기도 했다.쌍계사는 터는 넓은 편이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볼 것도 많고 한적해서 심신을 재충전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사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쌍계사를 나와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완주 화암사를 찾아 비안개 가득한 산사와 주위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에 흠뻑 빠져 있다 돌아왔다.◆호젓한 산사가 선사하는 힐링호젓한 산사는 이처럼 일상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심신 충전의 시간을 선사한다. 힐링의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다.산사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많은 문이 있지만 모두 문짝은 없다. 법당도 문은 있지만 열려 있다. 이런 산사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홀로 거닐다가 사라져도 상관 없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차 한 잔 하자고 해도 된다. 특별한 일 없으면 다 응해준다. 식사 때가 되어 밥을 먹고 싶으면 한 그릇 청해도 된다. 산사에 출입하는 데는 출입증이 필요하지도 않고, 불교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인간사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과 스트레스는 모두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 초래하는 것인 만큼 마음공부 전문가인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흔들리면, 활 그림자도 의심하여 뱀이 되고, 쓰러진 돌도 엎드린 범으로 보이게 된다. 이런 중에 있는 기운은 모두 죽이는 기운이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사나운 사람도 순한 갈매기로 바뀌고, 개구리 소리도 음악으로 들린다. 그러면 이르는 곳마다 참다운 기틀을 보게 된다.’‘채근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누구나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를 유지하길 바랄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아름다움과 멋이 있고, 한가함이 있는 산사. 귀한 문화재도 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도 있다. 호젓한 산사에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을 기르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호젓한 산사는 각박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심신의 활력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 앞에서 풀을 뽑고 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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