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15] 산사 편액...고색창연 명필 현판에 흥미로운 사연…고찰 탐방 즐거움 더하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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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7 08:10  |  수정 2021-07-06 10:27  |  발행일 2019-10-17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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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걸린 ‘무량수전’ 편액.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전한다. 오랜 세월로 대부분 퇴색되었으나 흔적을 자세히 보면 글씨 부분은 금니로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옛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이나 성현의 가르침 등을 새긴 편액과 주련 등 현판(懸板)이 많이 걸려 있다. 사찰 건물에는 특히 귀중한 현판이 많다. 이런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나 명필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따라서 현판은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 현판도 적지 않다.

이런 사찰 현판, 특히 편액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예술작품들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가 없다. 공민왕 글씨로 전하는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을 비롯한 왕의 친필 편액과 신라 명필 김생,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 당대 최고 명필 글씨의 편액들이 전국 사찰 건물 곳곳에 걸려 있다. 사찰에는 특히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 현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 현판이 유일하다.

편액 글씨는 특히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자 글씨의 특별한 서체와 서풍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체계적 분석·정리가 되지 않아 그 가치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국 곳곳의 고찰에 즐비한 이런 편액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다면, 사찰 참배나 탐방의 즐거움을 훨씬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 사찰 현판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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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각황전에 걸린 성재 이진휴 글씨 ‘각황전’ 편액(왼쪽)과 영천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추사 김정희 글씨 ‘불광’ 편액.

◆부석사 ‘무량수전’·화엄사 ‘각황전’ 편액

영주 부석사의 본전(本殿)인 무량수전은 1962년에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더없이 귀중한 문화재다. 이 건물에 더욱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바로 ‘무량수전’ 편액이다.

편액 틀(테두리)의 모양과 장식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편액 형식과 다르게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쓴 것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현판의 고색창연함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650여 년 전 건물을 중창하고 새로 단 당시의 현판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편액 글씨의 주인공은 고려 공민왕이다. 편액 뒤에 공민왕 친필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편액이 65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라면, 우리나라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공민왕은 어떻게 이 글씨를 남기게 되었을까.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몽진을 해야 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피란지로 결정한 곳이 순흥(영주)이었다. 공민왕 일행은 그 해 추운 겨울에 소백준령을 넘어 순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순흥의 날씨가 너무 추워 안동으로 다시 옮겨 머물다가, 홍건적을 물리친 후인 이듬해 2월 개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순흥에 머물 때 공민왕은 영주지역에 몇 점의 편액 글씨를 남기게 된다. ‘무량수전’은 그 대표적 글씨다.


부석사 본전 ‘무량수전’ 글씨
영주로 몽진했던 공민왕이 써
은해사, 추사 친필 야외전시장
세로 획 130㎝ ‘불광’ 대작도

전국 곳곳 사찰에 즐비한 편액
시대정신 담아낸 예술의 정수
국보·보물 지정 사례 전혀없어
체계적 분석·정리도 안 이뤄져



구례 화엄사의 대표 전각인 각황전은 그 규모와 장엄함, 아름다움, 고색창연함 등에서 모두가 감탄할 만한 목조 건물이다. 1702년에 완공된 현재의 각황전(국보 제76호)의 위층 처마에 이 건물에 어울리는, 중후한 필치의 편액 ‘각황전(覺皇殿)’이 걸려 있다.

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다. 이 장륙전은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다. 이후 1636년 대웅전이 중건되고,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년)에 중건되었다. 장륙전 완공 후 숙종 임금은 이 전각에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숙종이 전각을 중건하고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화주승(化主僧)을 맡은 계파 스님이 꿈 속 노인이 알려준 대로 절을 나서 처음 만난 사람인 걸인 할머니에게 시주를 부탁했다. 그러자 걸인은 죽어서 왕궁에서 태어나 불사를 이룩하기를 빌며 길 옆의 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스님은 그 일이 있은 후 5년 뒤 한양에서 어린 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공주가 반가워하며 스님에게 달려와 안기었다. 그리고 공주는 태어난 후 한 번도 펴지 않았던 한쪽 손을 폈고, 그 손바닥에는 ‘장륙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숙종은 스님을 대궐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은 후 장륙전 중건을 명했다. 그리고 전각 이름도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로 ‘각황전’으로 바꾸도록 했다.

각황전 편액 글씨는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1703년에 썼다. 이진휴는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 글씨 편액 많아

불교와 인연이 깊고 선지식(善知識) 대접을 받기도 한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전국의 유명 사찰 곳곳에 편액이나 주련을 남기고 있다.

봉은사에서는 당시 남호(南湖) 영기(永奇) 스님(1820~1872)이 화엄경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에 새겨 인출하는 불사를 진행했다. 이 화엄경판이 완성되자 봉은사에 안치하기 위해 법당을 건립했다. 영기 스님은 이 판전의 편액 글씨를 봉은사에 기거하던 추사에게 부탁했다. 1856년 9월의 일이다. 추사는 1856년 10월1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판전(板殿)’ 편액 글씨가 마지막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추사체의 완결판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걸작이다.

팔공산 은해사는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추사 글씨 현판이 많다. 은해사에만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의 편액이 있고, 은해사 부속암자인 백흥암에는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주련 작품이 있다.

은해사에 남긴 글씨는 대부분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불광’이라는 편액이다. ‘불광’은 불광각에 걸려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그 전각이 없다. 대웅전 안쪽 등에 걸려 있다가 지금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은해사는 1847년 대화재 후 1849년에 중건 불사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대웅전’ ‘보화루’ ‘불광’ 등의 편액 글씨는 추사가 이때를 전후해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추사가 1848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851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기 전까지 기간에 남겼을 것이다.

이 중 ‘불광’ 글씨는 추사 글씨 중에서도 대표적 수작으로 꼽힌다. ‘불광’ 편액은 판자 4장을 세로로 이어 붙여 만든 대작이다. 세로 135㎝, 가로 155㎝ 정도 된다. ‘불’자의 가장 긴 세로획의 길이는 130㎝가량이다. 현존하는 추사의 친필 글씨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밖에 지리산 쌍계사 금당(金堂)에 걸린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등도 추사 글씨 편액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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