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32] 문경 석문구곡(上)...자연에 묻혀 산 선비 채헌 “경전 논하고 詩 읊조리니 헛된 날 없더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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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1 07:58  |  수정 2021-07-06 14:36  |  발행일 2018-11-01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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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구곡 중 2곡인 주암(배 모양 바위). 현재는 물길이 바뀌어 주암 앞으로 금천이 흐르지 않으며, 주암 위에는 1944년 주암(舟巖) 채익하를 기려 세운 주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주암 앞에는 연못이 조성돼 있다.

석문구곡(石門九曲)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에 있는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따라 9㎞에 걸쳐 있다. 근품재(近品齋) 채헌(1715~95)이 그 주인공이다. 태백산의 한 줄기가 뻗어나와 금학봉(金鷄峯)을 이루고, 맞은편에 석벽이 높이 솟은 산이 또 봉우리를 이룬다. 이 두 봉우리가 석문(石門)을 이루고 있다.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인 이곳 석문의 대하천 옆에 채헌이 정자 석문정(石門亭)을 짓고 머물면서, 대하천과 그 아래 금천의 아홉 굽이에 구곡을 정하고 ‘석문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석문정집(石門亭集)’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사는 곳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문동(石門洞)이 있는데 양쪽의 언덕이 대치하여 높이 솟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절승(絶勝)이 있는지라,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석문(石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이에 벗들을 맞이하고 손님을 초청해 샘물 소리, 바위 빛깔 사이에서 노니니 훨훨 속세를 벗어나는 듯했다. 경전을 논하고 시를 읊조리며 헛된 날이 없었으니 모두 남주(南州)의 좋은 주인이라 하였다.’ 채헌은 175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더 이상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산 선비다. 청대(淸臺) 권상일(1679~1760) 문하에서 공부했다. 만년에 석문정을 짓고 석문구곡을 경영하며 석문구곡가를 지었다. 석문구곡가는 한글 가사로 된 ‘석문정구곡도가(石門亭九曲棹歌)’와 한시로 된 ‘석문구곡차무이도가운(石門九曲次武夷棹歌韻)’이 있다.


청대 권상일 문하서 공부한 채헌
생원시 합격 후 벼슬길 연연 안해
석문동 절경 곁 정자 짓고 머물며
금천∼대하천 9㎞ 걸쳐 구곡 설정

1곡 농청대, 스승이 학문 닦던 곳
2곡 주암 앞 물길 끊겨 논밭으로


◆채헌이 18세기에 설정한 구곡

석문구곡은 1곡 농청대(弄淸臺), 2곡 주암(舟巖), 3곡 우암대(友巖臺), 4곡 벽립암(壁立巖), 5곡 구룡판(九龍板), 6곡 반정(潘亭), 7곡 광탄(廣灘), 8곡 아천(鵝川), 9곡 석문정(石門亭)이다.

1곡 농청대는 문경시 산양면사무소에서 금천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간 곳이다. 지금은 정자 농청정(弄淸亭)이 자리하고 있다. 농청대는 권상일이 장수(藏修)하던 장소였다. 권상일의 ‘존도서와기’에 농청대와 존도서와(存道書窩)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존도리 동쪽으로 수백 보 지점에 대(臺)가 있는데 농청(弄淸)이라 하였다. 대체로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옛날부터 이름이 전해왔다. 농청대 아래에 맑은 내가 있는데, 그 원두가 대미산(岱眉山)에서 나와 10여 리를 흘러들어 이곳에 이르러 물이 고여 못을 이룬다. 또 남쪽으로 푸른 들판 바깥을 흘러서 낙동강에 들어간다. 농청대 위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월방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돌아 내에 이르러 멈춘다. 푸른 바위가 둘러 있는 것이 집의 담장 모양 같은데 오직 동남의 두 면은 물에 임해 두절되었다. 위는 평평하며 30여명이 함께 앉을 수 있으니 바로 농청대다. 우측 곁에 층암(層巖)이 높다랗게 우뚝 솟아 가장 웅장하고 기이하다.

기미년(1739) 가을에 재료를 모아 건축을 시작해 다음해 늦은 봄에 공사를 마쳤다. 뒤 칸은 실(室)이고 앞 칸은 헌(軒)인데 합하여 삼 칸이다. 재(齋)는 졸수(拙修)라 하고, 헌은 한계(寒溪)라 하였다. 통괄해 존도서와(存道書窩)라 이름을 지었다. 날마다 그 가운데 기거하고 도서를 좌우에 배치해 정신과 심성을 기르니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만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졸수재가 높아 달을 가장 많이 들이는데, 때로 작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날씨가 맑고 밝아 달빛이 집에 가득히 비친다. 일어나 멀리 바라보면 시내의 여울이 환히 밝고 들판이 멀리 트이며 동남쪽의 이어진 산들이 안개와 이내 속에 은연히 비치니, 아득한 가운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쁘고 상쾌하며 경치와 마음이 합하는 듯했다. 그 즐거움을 말로써 형용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다.’

존도서와는 1808년 화재로 소실되고 ‘존도서와’ 편액만 남았다. 후인들이 1863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농청대는 이 건물을 보수한 것이다. 보수하면서 ‘농청정’ 편액을 단 것으로 보인다.

‘일곡이라 학해선으로 거슬러 오르니(一曲溯學海船)/ 청대의 수척한 대나무 앞 내에 비친다(淸臺瘦竹映前川)/ 선생이 가신 후 완상하는 이 없으니(先生去後無人弄)/ 태고암 머리에 저문 안개 드리우네(太古巖頭銷暮煙)’

스승 권상일이 별세한 후 대나무 앞을 흐르는 맑은 물을 완상하는 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배모양의 바위 주암이 2곡

2곡은 주암이다. 1곡에서 1.6㎞ 정도 올라가면 현리(縣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금천 한 쪽에 부벽(浮碧)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주암(舟巖)이 자리하고 있다. 채헌이 살던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부벽 앞으로 물길이 흐르고 주암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물길이 변한 것이다. 주암과 금천 사이에는 하천 둑이 가로막고 있다.

부벽에는 현재 경체정(景亭)이 자리하고 있다. 경체정은 채성우를 비롯해 그 7형제를 기려 손자 부자(父子)가 지은 정자다. 1935년 현리에 처음 지었으나 197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주암은 현리에서 현리교를 건너 왼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 마을(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옆에 있다. 이름 그대로 배 모양의 바위로, 바위 위에 주암정(舟巖亭)이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주암(舟巖) 채익하(1573~1615)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건립했다. 정자는 배 모양의 바위 위에 선실(船室)처럼 지어졌다. 후손 채홍탁이 지은 ‘주암정기’에 주암정 건립 내력이 나와 있다.

‘웅연(熊淵)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형상이 배와 같은데 벼랑을 다듬어 길게 매어놓았다. 옛날에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이로 인해 주암으로 이름을 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별세하셨다. 그 후 이 바위를 지나며 노닐던 사람들 모두 갔지만 이름은 남게 되었다. 임오년 3월에 일을 시작해 9월에 공사를 마치니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취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이가 있으나 난간에 기대 바라보면 천주봉(天柱峯)이 북쪽에 솟아 있어 완연히 만 길의 베를 걸어놓은 듯하다. 금강(錦江)이 남쪽으로 흘러들며 의연히 한 세대의 금람(錦纜)을 모은다. 기타 자연의 아름다움은 안개가 드리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도를 위한 이름난 구역이 되기에 충분하다.’

주암정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최근 주암정을 보수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정자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주암정은 팔작지붕에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

‘이곡이라 동쪽에 일월봉이 솟아있고(二曲東亞日月峯)/ 두 바위 물을 베니 형제의 모습이네(雙巖枕水弟兄容)/ 정자 앞 부벽은 천년이나 되었고(亭前浮碧千年久)/ 대숲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望裏竹林翠幾重)’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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