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2] 경주 옥산서원..."학문은 오로지 仁을 구하는데 있다"…담장 겹겹이 둘러 자연마저 차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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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8   |  발행일 2021-02-08 제20면   |  수정 2021-07-0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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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門樓)인 무변루에서 바라본 옥산서원 강당 건물 구인당(求仁堂).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72년에 건립되고, 이듬해 2월에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했다. 같은 해 12월에 '옥산(玉山)'으로 사액을 받았다. 당시 사액 글씨 '옥산서원'은 아계(鵝溪) 이산해(1539~1609)가 썼으며, 1574년 5월에 편액을 걸었다.

1839년 사액 현판이 걸려있던 강당 건물(구인당)이 화재로 전부 불타버렸다. 그러자 나라에서 다시 사액 글씨를 내렸는데, 이때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썼다. 김정희는 '옥산서원' 네 글자를 네 장의 종이에 한자씩 썼다. 그 원본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 강당 건물 처마에는 김정희 글씨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 마루 위에는 후대에 다시 제작한 이산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사이에 중첩되는 지붕선
모퉁이마저 닫힌 폐쇄적 공간
묵묵히 수양…실천철학 요체

회재 이언적 덕행 기리는 곳
아계·추사의 현판 원본 간직
조선 후기 남인 구심점 역할
16~20C 방명록 170책 전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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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 이산해(위)와 추사 김정희 글씨 '옥산서원'. 네 장의 종이에 한자씩 썼다. 〈옥산서원 소장〉

◆폐쇄적 공간 구성

옥산서원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가 멋진 자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참나무를 비롯한 고목들과 넓은 반석이 어우러진 자계천이 서원 앞으로 휘돌아가고, 서원 앞으로는 자옥산이 펼쳐진다. 바로 뒤쪽은 화개산이 둘러싸고 있다.

옥산서원은 이런 계곡 옆에 자리하고 있지만, 건물들은 매우 폐쇄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 문루인 무변루(無邊樓) 아래를 지나 마당에 오르면, 주변 자연경관과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을 맞이하게 된다. 정방형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무변루와 그 맞은편의 강당 건물 구인당, 좌우의 동·서재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사방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퉁이 부분이 서로 겹쳐지게 해 마당의 모퉁이마저도 닫혀 있다.

여느 서원들과 다른 구성이다. 예를 들면 병산서원이 낙동강과 병산의 경관을 끌어들이는 건축 구성인 데 비해 외부 자연과 차단되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런 공간 구성을 위해 무변루를 특별한 구조로 만든 듯하다. 다른 서원들의 누각이 벽면을 개방한 것과 달리 무변루는 바깥벽을 모두 막아서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앞을 틔우고, 그 양쪽 한 칸씩은 방을 만들어 강당 쪽을 벽으로 만들었다. 방 옆으로 한 칸씩 누마루를 달아서 외부로 향하게 했다.

옥산서원은 특히 담장이 많다. 서원 영역 전체를 담장으로 막아 차단함은 물론 서원 건물 사이에도 영역별로 담장과 벽으로 차단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 이름은 처음에는 '납청루(納淸樓)'라 지었으나 나중에 소재(蘇齋) 노수신(1515~1590)이 '무변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뜻을 취해 무변루로 고쳤다. 누각 대청에 걸려있는 무변루 편액 글씨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작품이다.

강당 건물 이름인 구인당(求仁堂)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편액 글씨는 한호가 썼다.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3칸의 대청마루와 대청 양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방 앞에는 명(明)과 성(誠)을 뜻하는 '양진재(兩進齋)', 경(敬)과 의(義)를 뜻하는 '해립재(偕立齋)' 현판이 걸려 있다. 다른 서원의 강당과 달리 온돌방 앞에 툇간이 없다.

'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오로지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이언적의 핵심사상이다. 구인당 대청마루에 앉으면 무변루 지붕 너머로 자옥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언적은 "천만 권 경전과 서적들이 오로지 '인(仁)'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개탄했다.

강당 앞의 학생들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성인은 날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옛 진리를 구해 그것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암수재(闇修齋)'는 남몰래 묵묵히 수양한다는 의미다.

구인당 뒤에 사당인 체인묘(體仁廟)가 있는데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체인'은 어질고 착한 마음인 인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언적이 행한 실천철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사당 담장 밖 왼쪽에는 1577년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옥산서원 방문객이 자필로 이름과 날짜 등을 간단하게 적어놓은 책자 '심원록(尋院錄)'이 전하는데, 이것을 보면 류성룡, 권율, 이항복, 차천로, 이현일, 이형상 등 서울과 남인계의 명망 높은 인사들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조선 후기 남인계 입장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구심적 역할을 한 서원임을 알 수 있다. 심원록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모두 170책이 전한다.

◆회재 이언적은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이언적은 조선 역사상 정치적 파란이 가장 심했던 16세기 사화기에 일생을 보냈다.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 월성손씨 대종가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1531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했다가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532년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은둔했다.

자계옹(紫溪翁)·자옥산인(紫玉山人)이라 자처했던 이언적은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도덕산(道德山), 무학산(舞鶴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자계(紫溪)로 불린 계곡의 다섯 군데 바위는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로 이름 짓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면서 성리학에 몰두했다. 옥산서원은 세심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심대 암반에는 이황 글씨 '세심대'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1538년에는 청백리에 올랐다. 그러나 1546년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고, 1547년에는 훈구파가 사림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오지인 강계로 유배됐다. 6년 후 1553년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언적은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을 남겼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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