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8] 장성 필암서원(상)...'호남 성리학 초석' 김인후 기린 곳… '경장각' 편액은 정조의 친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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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21   |  발행일 2020-12-21 제20면   |  수정 2021-07-06 15:37
퇴계 이황과 쌍벽 이룬 성리학자…정조 "동방의 주자" 칭송
인종에 대한 그리움·백성들 애환 등 담은 詩 1600여수 남겨
김인후 고향 맥동마을 입구 '붓 닮은 바위' 서 서원 이름 유래
강당과 동·서재가 사당 바라보도록 만든 독특한 구성 눈길

필암서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필암서원의 문루인 확연루와 주변 풍경. 평지에 자리한 필암서원은 입구에 홍살문과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고 확연루 뒤로 강당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

필암서원(筆巖書院·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은 호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를 기리고 있다. 퇴계 이황을 기리는 안동 도산서원이 영남사림의 본거지라면, 필암서원은 호남 학맥의 본산이다. 이 필암서원의 주인공이 김인후다. 그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성리학자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시인이고 문장가이며, 절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필암서원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루인 확연루와 담장, 그 너머 기와지붕들만 보인다. 확연루 앞으로는 작은 하천인 문필천이 흐르고, 그 너머 멀리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뒤쪽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처음에는 황룡강과 문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기산리에 건립됐다. 1590년의 일이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1624년 그곳에서 500m 떨어진 필암리 증산(甑山)에 다시 건립됐다. 1662년 유생들의 건의로 '필암서원' 사액을 받았다. 하지만 이곳이 지대가 낮아 서원이 물에 잠겨 수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1672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필암(筆巖)'은 김인후의 고향인 황룡면 맥동마을 입구에 자리한 바위 필암에서 유래한다. 이 바위는 마치 모양이 붓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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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가 생전에 사용하던 옥필(玉筆)과 벼루. 붓자루가 옥으로 되어 있다.

◆임금(인종)과 각별한 인연의 김인후

김인후는 1540년 대과에 급제했다. 3년 뒤 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을 맡았다. 세자는 1544년 조선의 제12대 임금(인종)이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신뢰하며 군신 간의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인종은 임금 자리에 올라 어진 정치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1545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김인후는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을 세상과 단절한 채 인종을 그리워하며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5년 후 인종이 승하한 이후의 벼슬은 묘비에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인종과 김인후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후대에 전해지면서 군신관계의 표본이 됐다.

김인후는 인종 승하 이후 곧바로 낙향해 고향에서 서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호남 성리학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수준을 높이면서, 율곡학파의 학설이 정립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송시열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다 갖춘 사람은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했다. 1796년(정조 20년) 문묘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는데, 이때 정조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했다.

김인후는 1천600여 수에 이르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인종 사후에 쓴 사모곡이나 소쇄원 48영 등 유명한 시가 많이 있다. 백성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에서는 보리 베기, 콩 심기, 풀 베기 등을 통해 피폐해진 농촌 실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라는 시조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일화도 전한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인후가 50세에 별세한 뒤 그와 친분이 있는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죽어 어떤 천부(天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우뚝한 누각에 난(鸞)새(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다. 흘긋 보니 바로 이웃에 살던 김인후였다. 그런데 저승에서 김인후가 판관을 맡고 있었다. 김인후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라며 이승으로 돌려보내는 길에 다음의 시를 지어 주었다.

'세억은 그 이름이고, 자는 대년(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 신선 뵈었구려(排門來謁紫微仙)/ 일흔일곱이 된 뒤에 다시 만나세(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시길(歸去人間莫浪傳)'

다시 살아난 오세억은 이 사연을 소재상공(蘇齋相公: 노수신)에게 알렸다. 소재 노수신은 김인후와 막역한 사이였다. 오씨는 시에 적힌 대로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문루 이름은 '확연루'

서원 앞에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홍살문 뒤로 보이는 서원 정문인 문루는 '확연루(廓然樓)'다.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이는 모든 일에 사심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기(廓然樓記)'는 '확연'이라 이름 지은 연유에 대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해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 송시열이 특별히 두 글자를 차용했다'고 적고 있다.

확연루를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 건물이 나온다. '청절당(淸節堂)'인 이 강당은 다른 서원과 달리 입구의 문루 쪽이 아니라 반대편 사당을 향하고 있다. 사당 쪽 처마에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가 쓴 '필암서원'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 위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이 쓴 '청절당' 편액이 걸려 있다. 청절당 좌우에는 수학하는 원생들이 거처하는 서재(崇義齋)와 동재(進德齋)가 배치돼 있다. 필암서원은 이처럼 강당과 동·서재가 사당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독특한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 경장각(敬藏閣)이 세워져 있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에 직접 그려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장각' 편액은 이 건물을 짓도록 한 정조 임금의 친필 글씨다. 묵죽도의 대나무 그림은 인종이 그렸고,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지어 쓴 시가 담겨 있다.

경장각 뒤쪽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 우동사(佑東祠)가 있다. 우동사에는 중앙의 북쪽 벽에 김인후 위패가, 동쪽 벽에 그의 학맥을 이은 고암(鼓巖) 양자징(1523~1694)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송시열이 지은 김인후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천우아동(天佑我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조선)에 태어난 인물이 김인후 선생'이라는 의미다. '우동사' 편액 글씨는 회암(悔庵) 주희(1130~1200)의 글씨에서 골라 모아 새긴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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