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4]안동 도산서원(상)...퇴계가 꿈꾼 유교적 이상향, 건물·주변공간 직접 작명하고 친필 새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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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6 08:02  |  수정 2021-07-06 15:39  |  발행일 2020-10-26 제20면
4년간 심혈 기울여 1561년 완공
건물 방향·세세한 수치까지 기록
서원 앞 천광운영대·천연대 지어
호연지기 기르며 천지자연 탐구
전교당의 '도산서원' 사액 현판
당대 최고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

도산서당(2)
도산서원 중 도산서당 주변 모습.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만년에 심혈을 기울여 지어 학문을 탐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 별세한 곳이다.

청명한 가을 나날. 야외 어디로 나가든 좋을 때다. 구름 한 점 없던 지난 6일 찾은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도 정말 좋았다.

도산서원은 여러 번 탐방했지만 이번이 가장 좋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광을 감상했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와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길은 물론 무엇보다 오른쪽으로 푸른 물이 가득한 안동호가 펼쳐져 최고의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 풍광에 마음껏 젖어 들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심신이 청명해지는 가운데 10분 정도 걸으니 도산서원 앞마당에 이르렀다. 서원 앞 호숫가에 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 명명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주변 풍광을 둘러보니 마음이 더욱 깨끗하고 상쾌해졌다. 이곳에 도산서당을 짓고 만년을 보내며 느꼈던 퇴계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황은 낙동강 변 도산(陶山)에 지은 도산서당에 기거하면서 느낀 마음 등을 읊은 시를 모아 엮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남겼다. 그 서문에 해당하는 '도산잡영병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어떤 때는 바위에 앉아 샘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 물가에서 고기를 살펴보기도 하며, 배를 타고 갈매기를 가까이하기도 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서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눈 닿는 곳마다 흥이 인다.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일어나는데 흥이 극에 달해 돌아온다.

그러면 온 집이 고요하고 도서는 벽에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고 사색하여, 왕왕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의 가르침에 힘입고, 그래도 얻지 못하면 분발하면서도 감히 억지로 통하려 하지는 않았다. 잠시 한쪽에 놔두었다가 때때로 끄집어내어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고 풀어보면서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늘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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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거처하며 자연을 완상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암서헌 마루. 앞에는 연못 정우당이, 옆에는 매화와 국화 등을 심은 절우사가 있다.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이황이 이곳에 터를 잡고 1557년에 착공, 4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1561년 완공한 서당이다. 이황의 편지에는 건물의 방향이나 세세한 수치까지 있어 얼마나 세심하게 서당을 계획하고 추진했는지 알 수 있다. 세 칸 반짜리 이 서당 건물과 함께 그 서편에 제자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농운정사도 함께 지었다. 이 건물들에는 '도산서당' '암서헌(巖栖軒)' '완락재(玩樂齋)' '농운정사' '시습재(時習齋)' '관란헌(觀瀾軒)' 등 건물과 마루 등의 이름을 적은 현판이 많이 걸려 있는데, 모두 이황이 직접 작명하고 친필로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이황 글씨의 멋과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황의 글씨에 대해 제자 성재(惺齋) 금난수(1530~1604)는 '필법은 단정하고 굳세고 아름답고 중후하여, 다른 명가에서 기이하고 괴상함을 숭상할 뿐인 것과는 다르다'고 평했다.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은 '따뜻하고 편안하며 화목한 의중이 필묵에 드러나 있다. 옛사람들의 덕성을 어떻게 언행과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

이황은 또 서당 주변에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각기 이름을 붙임으로써 성리학적 가치관과 이상을 담아 구현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서당 앞의 낙동강 변 좌우에 만든 천광운영대와 천연대는 그 대표적 공간으로, 이황은 이곳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천지자연의 이치를 탐구했다. 서당 건물 근처의 연못 '정우당(淨友塘)',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은 '절우사(節友社)', 샘 '몽천(蒙泉)' 등도 마찬가지다.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다 1570년에 별세했다. 이황이 기거하던 도산서당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금난수는 '고서 천여 권을 좌우 서가에 나누어 꽂아 두시고 화분 하나, 책상 하나, 벼루 집 하나, 안석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 삿자리, 향로, 혼천의가 있었다. 그리고 남쪽 벽 윗면 뒤에 가로 선반을 설치하고 옷상자와 서류함을 비치했다. 이외 다른 물건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토대로 그 뒤쪽에 누각 형태의 장서각인 광명실, 강당인 전교당, 사당인 상덕사 등을 건립해 1574년 서원을 개원했다. 이듬해에 사액을 받았다. 전교당 처마에 걸린 '도산서원' 사액 현판은 선조 임금이 각별하게 아낀 당대 최고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하고 있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복제본이다.

강당 뒤에 있는 사당 상덕사에는 이황의 위패와 함께 이황의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1524~1826)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15세 때 이황의 제자가 된 조목은 봉화현감,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학문에만 전념한 대학자였다. 이황 사후에는 스승을 대신해 서당에서 원생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문집 발간과 서원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도산서원과 그 주변 자연환경은 안동댐(1976년 준공)이 건설되면서 일부 계곡이 수몰되고 메워지며 석축이 쌓이는 등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황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그의 학풍은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의 대표적 학파인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조선을 넘어 일본 유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들로부터도 크게 존숭을 받았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중일 동양 3국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황이 별세하자 선조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610년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모셔졌다.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황을 기리는 서원은 전국 40군데 정도에 이르고, 도산서원은 제3공화국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비 보조로 대대적으로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곽종석은 "이황은 동방 도학의 근본이고,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으뜸"이라고 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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