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1] 함양 남계서원...'동방오현' 정여창의 참선비 정신 서린 곳…'전학후묘' 건물배치 시초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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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25   |  발행일 2021-01-25 제20면   |  수정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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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오현 중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을 기리는 남계서원. 앞쪽에 교육을 위한 건물을, 뒤쪽에 선현을 기리는 사당을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한 서원이다.

경남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문헌공 최충을 기리는 황해도 해주 문헌서원(1549년 '수양서원' 건립·1550년 '문헌서원' 사액)을 포함하면 세 번째다. 남계는 서원 앞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다.

동방오현 중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이 중심 제향 인물이다. 우리나라 서원 건축 및 배치의 전형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이면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이후 건립되는 서원의 전범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닌 남계서원은 '선비의 고장' 함양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함양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되어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로 통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서울을 기준으로 좌는 낙동강 왼쪽 땅을, 우는 낙동강 오른쪽 땅을 말한다. 이 '우 함양'의 학문적 자부심을 세운 인물이 정여창이다. 동방오현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을 일컫는다.

◆함양 유림이 주도해 건립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영주) 건립 후 9년 뒤인 1552년 함양 유림의 주도로 건립됐다. 개암(介菴) 강익(1523~1567)이 중심이 되어 박승임, 노관, 정복현, 임희무 등 30여 명이 정여창을 위한 서원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우선 지역 유림이 쌀을 비롯한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 여론을 환기하고, 당시 군수 서구연이 강당 건립을 위한 물자 등을 지원했다. 하지만 강당을 조성하던 중 서구연이 군수에서 물러난 후 흉년과 지방관의 무관심 등으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은 상태에서 중단되었다.

1559년 함양군수 윤확의 도움으로 다시 공사를 시작, 1561년에 강당과 사당을 완성하고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했다. 1562년부터 강학활동을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남명 조식이 강론하기도 했다. 1564년에는 김우홍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동재와 서재를 세우고 작은 연못을 만든 후 담장을 둘러 서원이 전체적으로 완성되었다. 건립 시작 후 12년 만이다.


1552년 국내 세번째로 세운 서원
소수·임고·수양이어 네번째 사액
경사지형 이용 공간 위계 드러내
정문인 풍영루선 토론·詩會 열려

정유재란때 위패 묻어 화 피해
"2년 동안이나 흙 속에 있었어도
한 군데도 상한 부분이 없으니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 아니런가"



초대 원장을 맡은 강익은 강학에 힘쓰면서 규칙을 정하고 재정적 뒷받침을 위한 조치도 강구하는 등 서원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1566년 강익을 중심으로 한 함양 선비들이 사액을 청하자 임금이 '남계'로 사액했다. '소수' '임고' '수양'서원에 이어 네 번째로 받은 사액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함양 일대를 습격하자, 서원 원임(院任)들은 서책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정여창의 위패는 땅속에 묻었다. 서원은 일본군에 의해 불탔으나 덕분에 위패는 난을 피할 수 있었다. 1599년 3월15일 정경운은 관련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서원에 가서 위판을 감춘 곳은 헤쳐 보니, 2년 동안이나 흙 속에 있었어도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 분칠한 면이 새로 만든 것과 같았고, 자획도 깎인 곳이 없었다. 흉적의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참으로 하늘의 도움과 귀신의 꾸짖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정경운은 위판을 찾아낸 후 작은 움막을 지어 그 위판을 봉안했으며, 1603년 나촌(羅村)으로 서원을 옮겨 건립했다가 1612년 원래 터인 현재의 장소로 다시 옮겼다. 1677년에 강익이, 1689년에 동계 정온(1569~1641)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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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와 '서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남계서원 현판.

◆한국 서원의 전범 '전학후묘'

남계서원은 한국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세운 서원이다. 앞쪽에 교육을 위한 건물을, 뒤쪽에 선현(先賢)을 기리는 묘당을 배치하는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했다.

남계서원이 들어선 터는 앞이 낮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경사지다. 유식·강학 공간은 낮은 곳에, 제향공간은 높은 곳에 배치해 각 공간이 가진 위계를 지형의 고저를 이용해 드러내고 있다.

문루인 풍영루(風영樓) 아래를 지나 들어서면 기단 위 높은 곳에 자리한 강당 명성당(明誠堂)이 정면에 보인다. 명성당 왼쪽(동쪽) 방에는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방에는 '집의재(集義齋)' 현판이 걸려 있다. 거경재는 서원 원장이 거처하면서 원생들의 수업을 감독하던 곳이고, 집의재는 교수 및 유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다. 강당이 네 칸 규모 건물로 가운데 두 칸이 대청이라서 그런지, 처마에 걸린 현판(1566년 사액)이 '남계'와 '서원'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1569∼1641)과 강익(姜翼·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강당인 명성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한 칸의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는 '애련헌'과 '영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연꽃과 매화는 모두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다.

동·서재 아래 문루 양쪽에는 각각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에 핀 연꽃과 연못에 비친 주변의 매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탁한 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찬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에 서려 있는 기상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남계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풍영루의 2층 누각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무엇을 논의하고 토론하거나 시회(詩會)를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성을 도야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풍영루에 올라보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두 정여창

정여창은 1450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공부하다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문하생이 됐다. 한훤당 김굉필도 함께 김종직의 가르침을 받았다. 149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어 동궁(연산군)을 가르쳤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펼쳤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1498년 연산군 때 조의제문 사초사건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그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가게 됐다. 1504년 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그해 가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당했다. 1610년(광해군 2년) 문묘에 배향됐다.

정여창은 스스로 '한 마리의 좀'이란 뜻의 '일두(一蠹)'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어서 불렀다. 이 말은 정이천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여창이 박언계의 편지에 대한 답서에서 '오직 학문을 지향하면서 성(誠)으로써 몸을 단속하면서 경(敬)으로써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나 같이 용렬한 중에 시들고 게으름이 더하니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간에 한 마리 좀 벌레라는 나무람을 진실로 면하기 어려우니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고 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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