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6] 논산 돈암서원(상)...사계 김장생의 예학정신 깃든 곳…호서 서인계 학맥 거점 역할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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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23   |  발행일 2020-11-23 제20면   |  수정 2021-07-0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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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사당인 숭례사. 앞 담장에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등 김장생의 예학정신을 담은 전서체 글귀가 기와로 수놓아져 있다.

김장생이 제자 가르치던 장소
평지에 전학후묘 형태로 구성
양성당 앞에 그의 업적 등 기록

전서체 한문 글귀 새긴 숭례사
모두 포용하라는 가르침 담겨
장판각엔 목판본·서적들 소장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계(沙溪) 김장생(1548~1631)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처음 건립됐다. 그의 제자들이 김장생의 학덕을 잇기 위해 1634년에 건립했다.

현재의 위치에서 1.7㎞ 정도 떨어진 곳에 건립됐는데, 하천에 가까운 저지대여서 자주 침수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수해 우려를 피해 188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 평지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고, 뒤로는 낮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다.

돈암서원은 호서 서인계 학맥의 거점으로, 당대 정계와 학계에서 큰 활약을 한 송준길·송시열·이유태·윤원거·윤문거·윤선거 등이 강학하고 모임을 갖던 곳이다.

김장생이 별세한 이듬해인 1632년 그의 아들 김집을 비롯한 김장생의 문인들은 충청도 20개 군현 유림과 함께 창건을 발의했다.

당시 현직 관료 중에는 천안군수, 니산현감이 포함되었으며, 전직 관료로는 윤전·송준길·송시열·이유태 등이 참가했다. 당시 송준길이 작성해 돌린 통문(遯巖書院創建通文)의 일부다.

'우리가 선생과 같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또 같은 고장에 함께 살면서 명성을 듣고 기뻐하고, 덕을 보고는 심취한 지가 모두 몇 년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비록 우리나라 전역에서 모두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한다 하더라도 한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더욱 깊다 하겠다. 이제 기린의 덕과 봉황의 자태를 지닌 선생께서 서거하셨으나 선생을 잊을 수 없으니, 신주를 모시고 마음을 붙일 사당이 없다면 장차 후학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며, 거의 끊어져 가는 사도(斯道:유학의 도)를 어떻게 보위하겠는가.'


◆예학의 종장 김장생이 주인공

돈암서원의 중심 제향인물인 김장생은 성리학의 실천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인물이다. 후에 김집(1658년)·송준길(1688년)·송시열(1695년)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들 4명은 모두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예학의 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장생은 송익필(1534~1599년)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했고, 20세 무렵에는 율곡 이이(1536~1584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송익필은 당시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 등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성리학과 예학에도 밝았다. 이이의 학맥을 이은 김장생의 학문은 훗날 아들 신독재 김집에게 계승되고,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일찍부터 과거시험은 생각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김장생은 학행으로 천거돼 1578년 창릉참봉이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연산으로의 낙향을 거듭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연루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뒤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해 은거할 때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니 정자로다/ 백운(白雲) 덮인 데 날 있는 줄 뉘 알리/ 정반(庭畔)에 학 배회하니 그 사람 벗인가 하노라'

84세 때 연산에서 생을 마친 그는 후손에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다.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誼:우애)를 두터이 지낼 것'이다.

'가례집람(家禮輯覽)' '경서변의(經書辨疑)' '의례문해(疑禮問解)'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저서를 남겼다.

돈암서원은 1660년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돈암'에서는 '돈'으로 발음하지만, 보통 숨는다 피한다는 의미의 '둔'자로 읽는다. 돈암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서원이 처음 건립된 마을인 숲말의 산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돈암'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주역의 돈괘(遯卦)의 의미와 관련이 있고,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호인 '돈옹(遯翁)'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한다.

◆김장생의 양성당을 기반으로 건립

돈암서원은 거의 평지에 전학후묘형태로 구성돼 있다. 입구에 산앙루(山仰樓)라는 누각이 있다. 산앙루는 1880년 이건 당시 건립할 계획을 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2006년에야 건립하게 되었다. 담장 밖에 따로 있는 이 누각 뒤로 담장을 끼고 있는 입덕문을 지나면 전면에 강학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의 동·서재다. 양성당 앞에 특이하게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인 연산현돈암서원비기(蓮山縣遯巖書院碑記)가 세워져 있다. 돈암서원의 건립 내력과 김장생·김집의 업적, 서원의 건립 배경 및 구조를 기록한 비석이다. 1669년에 건립됐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 글씨는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만기(金萬基)가 쓴 것이다.

양성당은 김장생이 1601년 영의정 이항복의 천거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가 이듬해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집권하자 낙향한 후 지은 서당이다. '양성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이곳에서 30여 년 동안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옛 돈암서원은 이 양성당과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강학하던 정회당(靜會堂)을 기반으로 건립됐다.

돈암서원에는 창건 당시 사당 앞에 건립한 강당인 응도당(凝道堂)이 있었으나, 규모가 너무 크고 비용이 많이 들어 1880년 이건 당시 함께 옮기지 못하고 1971년에야 옮겨졌다. 그래서 응도당이 들어설 자리에 양성당이 자리하게 되었다. 응도당은 양성당의 동남쪽에 별도로 배치됐다. 정회당은 양성당 옆에 있다.

양성당 뒤쪽 한 단 위에 사당인 숭례사(崇禮祠)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칠해진 이 사당을 둘러싼 꽃담 앞면에 기와 편을 활용한 상감기법의 전서체 한문 글귀가 눈길을 끈다. '지부함해(地負海涵: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넓게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온화한 바람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이다. 이를 실천해 나간다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김장생의 인품과 예학정신이 담겨 있다.

양성당과 정회당 사이에 있는 장판각에는 김장생의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비요' '가례집람' 등의 서적들이 목판본과 함께 소장돼 있다.

한편 입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마당 한쪽에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난 8월에 갔을 때 붉은 꽃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서원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문화해설사도 이 배롱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배롱나무를 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서원에는 배롱나무 고목이 있는 경우가 많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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