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6 끝] 대구 도동서원(下)...정몽주 이후 끊어진 '의리'의 학문 계승, 김굉필의 정신 고스란히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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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9   |  발행일 2021-04-19 제20면   |  수정 2021-07-06 15:39
무오사화때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생활…조광조 등 제자 양성
갑자사화로 처형됐다가 중종반정 후 명예 회복해 문묘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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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사당.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서원 사당은 이 사당처럼 당호가 따로 없는 경우도 많다.

김굉필은 동방오현(東方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다. 그는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 말 삼은(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었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사림파는 성리학의 도덕적 명분론에 입각해 훈구대신들과 대립했는데, 훈구세력이 정치적 보복으로 일으킨 사건이 사화(士禍)다. 사림파는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으킨 무오사화, 1504년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사건을 구실로 일으킨 갑자사화로 큰 재앙을 입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는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그때 아버지의 벼슬길에 따라온 조광조를 제자로 맞아 학문을 전수했다. 다시 순천으로 옮겨져 유배생활을 하던 중 갑자사화 때 무참히 처형당했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고 1610년 문묘에 배향됐다.


김굉필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시문 중심의 학문을 버리고, 정몽주 이후에 끊어진 의리의 학문을 다시 열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의리 학문은 '소학(小學)' 공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스로를 '소학동자'로 자처한 그의 공적은 후학들에게 성현의 학문을 가르치며 일상생활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도학으로 숭상한 점이다.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받는 김굉필은 어떤 인물일까.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도동서원' 편액 글씨를 쓴 배대유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김굉필 제사를 위해 지은 제문과 김굉필의 제자 이적이 지은 김굉필 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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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사당 내 벽화 2점 중 하나인 '설로장송(雪路長松)'.


◆도동서원 제문(祭文)

<만력 경술(1610년)에 도사(都事) 배대유(裵大維)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제사를 봉행했을 때의 제문>

우리 선생이 동쪽 나라에서 일어났도다. 천품이 본시 굳세고 바르며, 덕은 순수하고 온후했다. 일찍이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발 디딜 곳을 정했으며, 정(精)하게 연구하며 힘써 실천했고, 검소함을 지키어 잡되지 않았다. 충신(忠信)은 건(乾)이요, 경의(敬義)는 곤(坤)이었다. 참다운 성(誠)을 이미 쌓았으며, 시일이 오랠수록 더 철저했다.

없어진 학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용기를 내어, 멀리 복희씨(伏羲氏)와 헌원씨(軒轅氏)로부터 노추(魯趨)의 큰 교훈과 염락(濂洛)의 미묘한 학설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동떨어지고 지역이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직접 대면하며 강론을 들은 듯했다. 의리(義理)의 실상이며 성명(性命)의 근원이 흩어지면 만 가지로 다른 형태가 되는데, 이것을 한 근원으로 모아 큰 근본의 공부를 이루고 번잡한 지엽을 잘라 버렸다. 맥락이 분명하니 바로 옛 성현의 연원(淵源)을 이었다. 다른 학설을 힘써 배격해 발붙일 곳을 끊어버렸다. 후학을 인도해 방향을 지시하는 지남철이 되었고, 어두운 거리의 촛불이 되었다. 교육하기를 즐겨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훌륭한 인재가 문하에 가득했다. 제창하여 도를 밝히고 바로잡아 세웠으니, 높은 공과 두터운 은혜였다. 도가 동방으로 찾아왔으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위대한 이름이 전하는 곳에 산이 닳고 바다가 뒤집히도록 영원할 것이다. 대니산은 드높고 낙동강은 철철 흐른다. 그 가운데 깨끗한 집이 있으니 사당의 모습 우뚝하다. 우러러보며 공경하는 마음 일으키니 정령(精靈)이 계신 듯하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높이니 은총이 자주 내렸다. 서원의 사액(賜額)이 거듭 내려 유림에 광채가 빛나는구나.

좋은 날을 가려 영령(英靈)을 봉안하니 선비들이 달려서 모여들었다. 아름다운 명령이 대궐에서 내리니, 깨끗한 제물은 제기에 놓여있고 맑은 술은 병에 있네. 한결같은 정성이 매우 전일(專一)하여 밝기가 아침 햇빛 같도다. 길이 편안하여 끝이 없으소서. 해마다 제물을 드리오리다.

◆김굉필 행장

<문인(門人) 이적(李積)이 지은 글>

우리나라 기자(箕子) 때부터 비로소 문자가 있었고, 삼국과 고려를 지나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찬란했으나 도학(道學)에 대하여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도학을 처음으로 제창한 분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

공의 이름은 굉필이요, 자는 대유(大猷)이며, 본관은 서흥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어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크게 분발하여 문장가에 대한 공부에 힘썼다. 소학(小學)을 읽다가 깨닫고 시를 짓기를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라고 하니, 점필재가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근기(根基)다.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또 없으랴' 하였다. 공은 개연(慨然)히 성현의 취지와 다른 여러 학자의 학설을 배척하고, 날마다 소학과 대학을 읽어 이로써 규모(規模)로 삼았다. 육경을 탐구하고 성(誠)과 경(敬)을 힘써 주장해 존양(存養)하고 성찰함으로써 체(體)를 삼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써 용(用)을 삼아 대성(大聖)의 경계에 이를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평상시에 첫닭이 울면 반드시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며, 먼저 가묘(家廟)에 절했다. 다음에 어버이께 문안드리고, 서재에 가서 꿇어앉아 있기를 소상(塑像)처럼 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을 강론함에 있어서, 어린 사람에게는 기초적인 공부를 말해 주고,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심오한 의리(義理)를 말해 차근차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어버이에게 잠자리 보아 드리기를 예절대로 하고, 학문을 강론하여 밤이 깊을 때까지 이르렀다. 30여 년 동안이나 정밀히 한 공부가 쌓이고 힘써 실천함이 오래니, 학식이 넓으면서도 거칠지 않으며, 정통하면서도 흐르지 않고, 견확(堅確)하고 독실하여 오히려 미처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정미년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해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모두 가례대로 행하여 효성이 지극하니 향리가 감화하였다.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고, 또 추천되어 특별히 군자감 주부(主簿)로 발탁되었다. 사헌부 감찰에 전임(轉任)되어 형옥(刑獄)을 판결하면서 모든 것을 성의껏 처리하니 모두 공정함에 감복했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니 공이 점필재의 문하에 다녔다 하여 죄로 몰아 희천으로 귀양 보냈다가 조금 후에 순천으로 옮겼다. 이때 화기(禍機)가 급박했으나 이에 대처하기를 태연히 하여 평소의 지조를 변하지 않았다. 갑자년에 이르러 사화가 다시 일어나서 10월 초하루에 귀양 간 곳에서 화를 당하니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아아! 공의 학문이 오랫동안 전하지 못하던 학문을 얻어서 뚜렷이 홀로 섰다. 한 시대의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높이 우러러보았으며, 문하에 직접 다니지 못하고도 사숙(私淑)하며 선인(善人)이 된 사람도 또한 많았으니 그의 베푼 바가 널리 미치었다. 병인년에 나라가 바로잡혀 예(例)에 의해 통정대부승지를 증직(贈職)하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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