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언택트 관광명소 .12·끝] (식도락 스토리) 포항물회와 전통시장의 수산물, 새콤달콤 시원한 맛…어부들 즐기던 음식이 사시사철 국민별미로
아직 별이 총총할 무렵 까만 바다를 헤치며 고깃배가 나아간다. 온갖 것들이 나는 이 너른 바다는 뱃사람들의 고스란한 일터. 정신없이 바다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동해의 태양이 밝아오고, 한숨을 돌리고 나면 허기와 갈증이 몰려온다. 그러면 갓 잡아 올린 생선 중 이런저런 잡어들을 골라 채 썰 듯 썰고 그때그때 준비된 채소들을 넣어 고추장에 쓱쓱 비비고는 시원한 물을 부어 후루룩 들이켜듯 먹었다. 신선하고 푸짐하고 풍부한 영양과 청량감까지 지닌 이 한 그릇의 음식은, 바쁘고 고된 뱃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이 든든한 별미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항물회'다.갓 잡은 생선 채로 썰고 채소도 듬뿍고추장·시원한 물 함께 넣어 후루룩1960년대 해장음식으로 식당에 등장'설머리물회지구' 맛집 전국 입소문영일대북부시장 등푸른막회도 명성#1. 포항물회소고기, 돼지고기가 만만하지 않던 시절 뱃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물회로 원기를 보충했다. 물회는 해안마을의 일상식이 되었고, 막소주 한잔에 곁들인 안주가 되었다가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해장음식으로까지 널리 소용되게 되었다. 포항사람들은 물회를 '찬 술국' 또는 '생선 냉국'으로 부르기도 하고 가장 이상적인 해장국으로 꼽는다. 그래서 옛날에는 물회를 '먹는다'고 하지 않고 '후루룩 마신다'고 했단다. 포항물회는 소박한 선상식이자 가정식이었다. 포항물회가 선상과 가정의 밥상에서 식당의 메뉴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쯤이다. 외식 물회 집의 원조 격으로 꼽히는 곳은 '포항물회 식당'으로 이미 1950년대에 문을 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잇따라 '영남물회식당'과 '부산물회식당'이 생겼다. 이들은 회를 뜨고 남은 생선 뼈를 푹 고아 낸 이른바 '뼈가지 국'을 함께 내놓았다. 별미였고, 아침 일찍 식당을 찾은 술꾼들의 속풀이에 그만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포항의 3대 물회 횟집으로 사랑받았다. 포항물회의 횟감은 보통 살이 부드럽고 도톰하며 비린내가 적은 싱싱한 생선이 주를 이룬다. 도다리, 한치, 오징어, 가자미, 넙치, 우럭, 광어 등 주로 흰 살 생선들이다. 지느러미를 치고 껍질을 벗기고 등뼈를 발라낸다. 깨끗이 손질한 재료는 가는 칼을 이용해 국수 가락처럼 잘게 채로 썰어낸다. 살아 있는 작은 생선을 이렇게 썰면 씹는 맛이 좋아진다. 채 썬 생선을 오목한 그릇에 담고 배와 오이, 양파나 실파, 당근, 상추, 김 등을 소복이 얹는다. 여기에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고소함을 더하고 고추장을 듬뿍 얹어주거나 취향에 따라 조절할 수 있도록 따로 고추장 그릇을 곁들인다. 고추장은 매실, 엿기름, 찹쌀, 메줏가루 등을 섞어 1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 제격이다. 3년 이상 곰삭은 고추장을 고집하는 집이 있을 만큼 저마다의 특제 고추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제 쓱쓱 야무지게 비빈다. 이 상태의 비빔회를 먼저 맛보는 것도 좋다. 그러는 동안 양념은 생선살에 더욱 깊이 밴다.그리고 차가운 물을 자박하게 붓는다. 물을 넉넉하게 붓기도 하고 얼음을 더하기도 한다. 쫄깃하고 아삭하다. 새콤하고 달콤하고 고소하고 시원하다. 칼칼한 감칠맛이 혀를 감싸더니 목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차갑게 퍼진다. 담백하고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으로 온갖 맛이 어우러진 차가운 국물에 따끈한 밥을 만다. 밥알은 오돌오돌 매끄러워지고 뒷맛은 달착지근하게 살아난다. 처음부터 뜨거운 밥을 넣고 비빔밥처럼 비비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회가 금방 익어버린다. 양념이 가미된 회를 먹고 난 뒤 고추장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게 정석이다. 지금도 포항물회에는 국이 따라 나온다. 생선뼈로 곰국처럼 끓인 구수하고 뽀얀 국도 있지만 생선 머리와 뼈로 끓인 매운탕이 좀 더 흔하다. 2000년대를 전후해 포항물회는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대중화됐다. 전통 고추장과 물 대신 외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새콤달콤한 슬러시 형태의 붉은 육수가 개발되었다. 먹는 방법에서도 비빔회로 1차, 국수사리를 넣고 회국수로 2차, 시원한 생수를 넣어서 물회로 3차, 밥을 말아서 마무리를 하는 4차의 대장정이 이어진다. 재료에서는 놀래기, 쥐치, 꽁치, 멸치, 고둥, 개불, 멍게, 해삼, 날치알, 전복 등으로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과메기로 대변되는 포항의 맛을 알리기 위해 꽁치만을 횟감으로 쓰거나 전복 물회만을 고집하는 집도 생겨났다. 전복, 날치알, 성게, 해삼, 개불, 멍게 등을 버무린 웰빙 모둠물회도 있다. 물회 도시락이 등장했고 냉동포장 등을 통해 원거리 배달까지 가능해졌다. #2. 설머리물회지구와 영일대북부시장, 죽도시장 포항에서 물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지천이다. 죽도시장과 영일대북부시장은 물론 구룡포항에도 40년 내외의 오래된 맛집들이 적지 않다. 포항을 찾는 관광객들이 물회를 맛보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영일대해수욕장 인근의 '설머리물회지구'다. 약 5년 전만 하더라도 포항 시민들만 아는 횟집 거리였지만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한 우수 외식업지구대상에 선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어부들의 음식이었던 포항물회는 사시사철 관광음식이 됐고 여름이면 전국 어느 횟집에서도 볼 수 있는 특선 메뉴다. 이제 물회 하면 포항이다. '포항물회'는 보통명사에 가깝다.영일대북부시장은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포항물회를 상업화시킨 발상지와도 같은 곳이다. 1955년 즈음 자연스럽게 생겨나 처음에는 막회를 썰어 팔던 반 평 남짓한 난전들이 성업을 했다. 1980년대에는 활어와 고추장, 물만으로 맛을 낸 물회집이 번창했다. 2000년대 들어 포항시청이 남구 대잠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은 점점 쇠락해 갔지만 지금도 '오대양물회' '경아횟집' 등 물회 전문점과 30~40년간 막회를 썰어 팔던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일대북부시장은 막회 중에서도 특히 '등푸른막회'의 원조 격이다. 등푸른막회는 청어, 꽁치, 전어, 방어, 멸치 등 '등 푸른 생선'을 활용한 무침회다. 다른 지역에서는 여간해서는 보기 드문 음식인데 조금만 신선도가 떨어져도 금방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산지가 아니면 회로 즐기기가 매우 어렵다. 영일만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는 한류성 등 푸른 생선이 많이 난다. 게다가 영일대북부시장의 등푸른막회 가게들은 주로 줄낚시로 잡은 생선을 고집한다. 그물로 잡은 것에 비해 생선의 몸에 상처가 거의 없어 막회를 하든 물회를 하든 당연히 식감과 신선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특히 계절 따라 다양한 '등푸른막회'가 제공된다. 겨울에는 주로 청어로 막회를 낸다. 막회 위에 양파나 쪽파를 고명으로 올리기도 하고 미역 등 해초류를 얹은 등 조금씩 차별화를 두고 있다. 여기에 초고추장을 빙빙 두르고 버무려 먹는다. 밥과 매운탕도 함께 제공된다. 막회에 물만 부으면 물회다. 무침회는 술안주로도 좋지만 찬밥이나 국수를 훌훌 말거나 비비면 한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영일대북부시장 정문 간판에는 '등푸른막회 특화거리'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골목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외식업 선도지구 경진대회'에서 2019년과 2020년 연속 장려상을 수상했다.죽도시장은 동해안 최대 규모의 어시장이다. 단순한 어시장이 아니다. 경북과 강원 일대의 농수산물이 집결해 유통되는 요충지다. 농산물, 식품, 청과는 물론 떡집과 방앗간, 의류, 신발, 한복, 이불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대형 전통시장이다. 시장 사람들은 '여기에 없으면 아무 데도 없다'며 으쓱한다. 오전 5시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죽도어시장에는 횟집만 무려 200여개. 명실공히 수산물의 천국이다. 좌판에는 막회를 썰어주는 여인들이 줄지어 앉아서 부지런히 칼을 놀린다. 새벽 경매를 통해 들어온 청어, 병어, 가자미, 학꽁치, 성대 등 그때그때 많이 잡히는 생선들이 주류다. 골목에는 각종 해조류부터 개복치, 상어 고기, 고래 고기까지 동서남의 수산물이 빼곡하고 대게골목, 물회골목 등 먹거리도 넘쳐난다. 과메기 철이면 손이란 손은 모두 과메기를 손질하고 있다. 과메기를 먹을까, 회를 먹을까, 물회를 먹을까. 시원하고 칼칼한 물회는 시장 상인들이 가장 자주 먹는 음식이다. 포장한 과메기를 달랑달랑 흔들며 활어골목으로 향한다. 고민할 것 없이 회로 시작해 물회 양념을 추가하면 그만이다. 바다의 날것과 들의 풋풋한 것들이 온몸에 퍼진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포항시포항 죽도시장은 횟집만 무려 200여개로 명실공히 수산물 천국이다. 해조류부터 개복치, 상어 고기, 고래 고기까지 각종 수산물이 넘쳐나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돋는다.영일대해수욕장 인근의 '설머리물회지구'(위쪽). 포항을 찾는 관광객이 물회를 맛보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한 우수 외식업지구대상에 선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오른쪽은 새콤달콤한 슬러시 형태의 붉은 육수가 일품인 포항물회.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