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7·(끝)] 천년고찰 용문사를 창건한 두운선사...龍이 인도한 곳에 사찰 짓고…후삼국 싸울때 龍이 데리고 온 왕건 도와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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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1   |  발행일 2021-12-21 제12면   |  수정 2021-12-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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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에 위치한 용문사.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 들어가 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두운선사가 870년 예천 용문산 기슭에 처음 세운 절로, 훗날 고려태조 왕건이 두운선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절을 크게 중창했다.

천년고찰 용문사를 창건한 두운선사는 예천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통일신라시대 범일국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법을 공부하고 돌아 온 두운선사는 용문산 기슭에 가시와 덤불을 베어내고 두운암을 짓고 오랫동안 정근했다. 이후 왕건이 남쪽을 지나다가 두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왕건이 두운암 입구에 이르자 홀연히 용이 나타나 어가(御駕)를 반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때부터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하고 암자는 용문사라 칭했다고 한다. 훗날 왕건은 두운선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절을 크게 중창했고,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왕실의 보호는 이어졌다.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마지막 편은 두운선사와 용문사 이야기를 다룬다.

#1. 초암에 거하는 대선사

성품이 어질기로 알려진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 조. 범일국사(泛日國師)와 함께 당나라에 공부하러 갔던 두운선사(杜雲禪師)가 귀국했다.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시기에 떠났으니 세월이 이만저만 흐른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밟은 고국 땅을 느꺼워하며 두운선사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백두대간을 지나 다다른 곳은 예천에 우뚝 선 용문산(당시는 용문산이 아니었다)이었다.

"이곳이 100여 년 전까지 수주(水酒)로 불리던 예천이로다."

꼿꼿하게 서서 산세를 살피던 그때였다. 상서로운 기운이 사방을 뒤덮더니 용이 나타났다. 그것도 두 마리였다. 현실인지 환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담대하게 응시할 뿐인 두운선사를 두고 용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따라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움직임이었다.

"오냐, 가 보자."

거친 수풀을 헤치며 얼마나 따라갔을까. 어느 지점에 이르자 용이 홀연히 사라졌다.

"바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뜻이로다."

두운선사는 지체없이 어지러이 덮여있던 가시덩굴과 잡초덤불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여러 날에 걸친 고된 노동 끝에 땅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두운선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하기만 한 땅을 평평하게 골라야 했다. 그러기를 또 한참 여, 드디어 땅이 정리되었다. 두운선사는 빠른 손놀림으로 풀을 엮어 작은 암자를 지었다.

"두운이 머무는 곳이니 두운암으로 해야겠다."

그 때가 870년, 경문왕 재위 10년째였다. 두운선사는 그곳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이 날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용문산이 자리한 예천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동쪽의 친고려 세력과 서쪽의 친후백제 세력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아무리 산속 초암에 거하고 있다 해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운선사는 오래전 용을 맞닥뜨렸을 때의 기운을 다시 느꼈다. 무언가를 깨달은 두운선사가 두운암을 나섰다. 그리고 수풀을 응시하며 용이 데려올 누군가를 기다렸다.


신라 경문왕때 당에서 유학후 귀국
龍을 만난 용문산서 암자짓고 수행

후삼국 통일할 때 고려 왕건 편들어
훗날 두운선사 입적후 사찰에 보답
용문사로 불리면서 왕실 지원 받아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태실 안치
불교배척하던 조선시대에도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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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용문여의헌이 있는 자리는 두운선사의 두운암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2. 왕건을 만나다

얼마 뒤 수런수런한 기운을 몰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두운선사가 속으로 과연 누구인지를 가늠하는데 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왕건이라 하오.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소."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길이 험했을 텐데 고생은 아니하셨습니까?"

"안내를 받았소."

안내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바로 그 용일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내 초암 안에 마주앉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왕건이었다.

"천하를 평정 중에 있소."

"알고 있습니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물이었다. 왕건이 말을 이었다.

"현재 이곳에서 전쟁 중이기도 하오."

그 또한 두운선사도 아는 내용이었다. 예천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백제 세력이 용주(용궁면)에서 문경으로 연결된 예천군 서쪽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까닭이었다.

왕건이 형형한 눈빛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갈라진 민심이 우리에게 향해야 하오."

"그 민심을 제게서 구하십니까?"

"선사께서 나와 뜻을 같이한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심이 내게 향할 것이오."

아닌 게 아니라 예천은 지역에 따라 정치 동향이 달랐다. 4개 영현(領縣) 가운데 가유현(嘉猷縣)과 안인현(安仁縣)은 고려에 비우호적이었고, 영안현(永安縣)은 혼란지경이었다. 적아현(赤牙縣) 일대만 고려에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백성이 존경하는 두운선사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왕건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운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기운이 왕건에게 흐르고 있음을 아는 그였다. 내놓을 답은 하나였다.

"힘을 보태겠습니다."

왕건이 반색했다. 그리고 천하를 아우른 뒤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이제 이 산은 용문산(龍門山)이 될 것이며, 이 초암은 용문사(龍門寺)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훗날 약속을 지켰다. 두운선사는 이미 입적한 후였지만 적극적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용문사를 30여 칸의 기와집으로 증축했다. 그 과정에서 신비로운 일이 발생했다. 기단을 쌓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꾼들이 옛 들보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내려 확인하니 무게가 16냥(약 600g)쯤 되는 은병(銀甁)이었다.

"돌아가신 선사께서 주시는 선물인 듯하오."

"귀히 써야 할 터. 곡식으로 바꿔 일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소."

두운암에서 용문사로 거듭나면서 유지에 드는 비용문제가 대두됐다. 하지만 이 또한 왕건이 해결했다. 해마다 주현(州縣)으로부터 조세 150석을 거둬 공양에 충당할 수 있도록 정해준 것이다. 자연스럽게 예천도 대우를 받았다. 읍호 승격 차원에서 큰 고을이라는 뜻의 보주(甫州·조선시대에 다시 예천으로 바뀌었다)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후 용문사는 제18대 왕 의종이 보위에 있던 1165년에 법당 세 칸과 승방, 주고(廚庫·절의 부엌) 등 93소를 새로 건립해 규모를 확장했다. 이어서 1171년(명종 원년)에는 일주문 밖 산봉우리 꼭대기에 태자의 태(胎)를 묻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여는 등 왕실과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창성할 창(昌)과 기약할 기(期)를 써 창기사(昌期寺)로 개칭되었다.

이태 뒤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용문사는 법회를 열었다. 승려가 3만이 넘게 모여 7일 동안 진행한 대법회였다. 이때 대장전(大藏殿·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전각)을 새로 짓고 윤장대(輪藏臺·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를 2좌 설치했다. 다행히 난은 수습되었고 용문사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던 10년 뒤인 1183년(명종 13) 명종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지명(李知命)에게 명했다.

"용문사에 중수비를 세우라."

태자의 장태지인 용문사를 지원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이지명이 찬술하였으니 바로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였다. 당연히 두운선사의 이야기가 앞에 놓였다.

중수기는 "신라의 두운선사와 범일국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들어가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왔다. 이어 이 땅을 점쳐 가시와 덤불을 베어 평평하게 하고 처음에 초암을 짓고 오랫동안 정근하였다"고 적었다.

#3. 묵은 벽에는 불등(佛燈)

용문사에 대한 왕실의 보호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어졌다. 척불숭유, 즉 불교 배척이 주요 정책으로 시행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그럼에도 용문사는 굳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전략적 위치였다. 바로 그 때문에 왕건이 두운선사를 찾았으니 세월이 흘렀어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태실이 안치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본디 태실이란 왕가에서 출생한 자녀의 태를 안치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가(私家)에서 출생한 왕비의 태실이 봉해진 것이다. 유일무이한 왕비의 태실을 품은 만큼 그에 맞는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1783년(정조7)에는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의 태까지 용문사에 안장되었다.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에 자리한 용문사는 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제684호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989-1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989-2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등이 그것이다.

용문사를 두고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장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이렇게 읊었다.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스러움 끊겼어라. 승탑은 고요한데 묵은 벽엔 불등(佛燈)이 타오르고, 가녀린 외줄기 샘물소리 사이로 첩첩 산봉우리가 달빛을 나누는구나. 우두커니 앉아 깊이 돌이켜보니 내 여기 있음조차 잊게 되누나."

반 천년 전 공부로 밤을 지새운 두운선사가 새벽녘에 초암 문을 열었을 때 마주쳤을 풍경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참고='중수용문사기에 나타난 예천 용문사의 사격 변화', 2008, 서성희·권영오. '예천 중수용문사기 비문으로 본 고려중기 선종계의 동향', 2005,한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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