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 조문국으로 떠나는 의성 여행 .1] 의성의 옛 나라, 조문국

  • 류혜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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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7   |  발행일 2022-06-07 제11면   |  수정 2022-06-07 14:53
2천년 전 찬란했던 고대왕국, 이젠 고분 사잇길 작약 향기로 남아…
천기 점쳤다는 석탑엔 타임캡슐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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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시대 경북 의성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조문국의 고분군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옛 무덤들 사이 완만한 비탈에 작약 꽃밭이 넓게 펼쳐져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1천800여 년 전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경북 의성군 일대에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조문국(召文國). 조문국은 현재 남아 있는 370여 기의 고분을 통해 존재가 알려졌으며, 신라처럼 큰 국가는 아니었지만 왕권이 존재한 국가였던 것을 고분군 출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문국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2천년 전 고대국가의 도읍지는 어떤 땅이었을까'라는 물음표를 달고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늘고 있다. 영남일보는 조문국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금성면 일대와 인근 지역 명소를 기획시리즈 '고대국가 조문국으로 떠나는 의성 여행'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금성산 아래 크고작은 370여기 고분
당시 강력했던 정치집단 존재 증거
상업·양잠 발달…독자적 양식 토기도
신라복속 후에도 일정 세력기반 유지

잊혔던 경덕왕릉 조선중기부터 향사
2013년 흩어진 유물 모아 박물관 건립


의성의 동남쪽 금성산 아래 옛 무덤들이 무리 지어 누워 있다. 북동부 산지에서 흘러온 하천과 남동쪽 경계를 넘어온 하천이 합류해 만든 비옥한 삼각형의 땅, 금성면의 대리리·탑리리·학미리 일대다.

높고 낮고 크고 작은 고분들은 370기가 넘는다. 한때 이 땅에 살았으나 어느 날 숨이 다하여 묻힌 사람들의 집.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나라를 기억하기 위해 이 집들을 지었을 것이다. 오래된 기록은 초기 국가시대 이곳에 조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말해준다. 이제는 잃어버린 고대왕국이라 불리는 옛 나라, 조문국.

◆금성산 고분군

푸르고 넓다. 푸른 잔디, 푸른 봉분, 경계 없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 푸른 것들이 하늘과 땅을 이룬다. 봉분들 사이를 흐르는 산책로는 '고분 거님길'이라는 다정한 이름을 가졌다. 흙내를 머금은 풀내가 따뜻하다. 조문국. 아스라한 이름이다. 많은 기록은 없다. 대동지지와 읍지에 '현재의 경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금이 많았다 한다. 초전에는 거대한 궁궐이 있었고 상업이 발달한 큰 마을은 대리라 하였으며 양잠을 권장해 뽕나무밭을 일구고 상리라 했다 한다.

28개의 농사짓는 연못이 있었고 기와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와문이 유행했다고 한다. 비봉곡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조문금이라는 12현 악기가 있었으며 신라미인·고려미인과 같이 삼한미인 중 하나였던 조문미인이 많은 나라였다 한다. 금성산에는 조문국 시대의 산성이 남아 있다. 그 아래 탑리에는 조문국 시대에 천기를 점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석탑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신라 벌휴왕 2년인 185년 2월,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조문국을 벌(伐)하였다'는 짧은 기록이 있다.

이 무덤들은 5∼6세기쯤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탑리의 고분군은 4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며 다양한 크기의 분묘가 고루 밀집되어 있다. 봉토를 이루고 있는 저 엄청난 양의 흙은 이 지역의 흙색과 다른 순수한 점토라 한다. 다른 지역에서 운반해 왔으리라 판단되는데, 그에 따르는 막대한 노동력은 통치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고분의 발굴조사는 1960년부터였다. 금동관·금동관장식품·금동제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 무기류·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초기 국가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봉분들 사이에 봉분 모양의 '고분 전시관'이 자리한다. 내부에는 2009년 발굴한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유구와 출토 유물·순장문화를 통해 당시의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는데, 무덤의 구조는 신라 마립간 시기 왕족의 무덤과 흡사하며 금동 제품과 순장의 존재는 지배층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특히 굽다리 접시·목 항아리·항아리 뚜껑 등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의성양식토기'라 불릴 만큼 독자적이고 특별한 것이다. 조문국은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완전히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으며 최소한 5세기까지 일정한 세력 기반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통일 후 조문국은 문소군이 되었고 고려 초 의성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옛 무덤들 사이 완만한 비탈에 작약 꽃밭이 넓다. 절정으로 붉었던 꽃들은 하나둘 지고 빼곡한 줄기들만 서로 허리를 맞댄다. 무덤들은 시간의 영속성을 말해주고 꽃들은 순간을 이야기한다.

◆1호 고분, 조문국 경덕왕릉

고분들에는 묘석이 없다. 2호·3호라는 숫자가 묘석을 대신한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 묘석을 가지고 있다. 1호 고분, 그것은 조문국 경덕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경덕왕릉의 발견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지방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이야기다. 지금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이밭이었다 한다. 어느 날 밭을 지키던 농부의 꿈에 금관을 쓴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나는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명하고는 농부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농부는 등의 글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놀라 현령에게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 숙종 시대의 학자 미수 허목의 문집에 나타난다. 한 농부가 오이밭을 갈다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는데, 구멍으로 들어가자 금칠을 한 석실 한가운데에서 금관을 쓴 금소상(金塑像)을 보게 된다. 욕심이 난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금관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군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말했고 이후 봉분을 쌓고 관리하였다는 이야기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이후 영조 원년인 1725년에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했는데, 하마비를 세우고 능지기 1인을 두고 지키게 했으며 가문 해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1895년에 편찬된 영남읍지에는 경덕왕릉 소나무 심은 곳을 사들여 경계를 정하고 능지기 2인을 정해 지키게 했으며 매년 향청에서 살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성종 때인 1470년부터 왕릉 제사를 지내왔다는 주장도 있다. 시작점은 분분하나 왕릉 향사는 1909년까지 지속되었고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기 때 중단되었다.

일제에 의해 중단된 조문국 향사를 다시 시작한 사람은 금성면 대리동의 박규환이다. 그는 1910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백 년간 봉행하던 향사를 전폐할 수 없다'고 하며 향사를 재개했다. 1914년 의성경찰서가 설치되자 그는 끌려가 고문을 받았지만 향사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박규환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관한 조문교회 사건에 연루되고 고종이 승하했을 때 곡을 하였다는 이유로 다시 소환되었고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1921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하기 전 지역 유지인 신명환에게 향사를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 신명환은 왕릉향사계를 조직하여 향사를 체계화했다. 그 당시 경덕왕릉비가 세워졌고 고분군 초입에 자리한 문익점면작기념비도 건립되었다. 이후 향사는 문익점 면작기념행사와 함께 지속되었다고 한다. 신명환의 사후에는 박규환의 차자인 박재을이 향사를 주관했다. 현재는 경덕왕릉보존회가 향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조문국 박물관

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금성면 초전리에는 '의성조문국박물관'이 있다. 옛 조문초등 자리에 2013년에 지은 지상 3층·지하 1층 규모의 건물이다. 박물관 초입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국보 77호인 탑리 5층 석탑의 실물 모형으로 조문국 시대 천기를 점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로 그 석탑이다. 석탑 속에는 현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품 250여 점과 의성군지 등이 타임캡슐에 담겨 있다. 개봉은 500년 뒤다. 주변에는 모형석실고분과 민속유물전시관·미로정원·공룡정원·고인돌정원·공룡놀이터·거울연못·야외공연장 등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는 상설전시실·기획전시실·열린수장고·의성상상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그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문국 관련 유물과 의성지역에서 출토되었던 유물들이 모여 있다. 박물관은 특히 어린이가 있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에게 만족도가 높다.

옥상 정원에 오르면 철의 성벽처럼 솟은 금성산과 그 아래에 펼쳐진 고분군이 한눈에 조망된다.

'천 년 전 조문국이 빈터만 처량하다/ 번화했던 그 모습 다시 볼 수 없고/ 거친 풀 들꽃만이 향기롭구나/ 다닥다닥한 옛 무덤엔/ 민둥민둥 백양 한 그루 없도다/ 둔덕 위에 밭 가는 농부는/ 아직도 경덕왕을 이야기하고 있네.'

허목의 시는 당시 이곳의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옛 무덤의 영속화된 영화와 더 오래된 산의 영구한 힘을 바라본다. 그리고 여전히 조문국 경덕왕을 이야기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의성군지. 의성문화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상현, 의성 조문국 향사의 전통창출과 지역정체성 형성, 안동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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