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6] 고려시대 반란을 진압한 임지한 장군..."호랑이 타고 신출귀몰"…고려때 경주 반란 싸우지 않고 진압한 충신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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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13   |  발행일 2021-12-13 제11면   |  수정 2021-12-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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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 의충사 유적지. 의충사는 고려시대 반란군을 진압한 임지한 장군을 제향했던 곳이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898년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지만 1978년에 집중호우로 다시 붕괴되고 현재는 터만 남았다. 작은 사진은 의충사유적지비.

#1.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사내

고려 제24대 왕 원종(1219~1274, 재위 1259~1274) 조, 예천 관아에 새로운 수령이 부임했다. 수령을 지근에서 수행하고 보필해야 하는 아전들은 동분서주했다. 정신없기는 수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지역을 파악하고 인계받은 업무를 확인하느라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령이 기겁했다. 부친의 생일이 바로 다음날이었던 것이다.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고 자책하며 서둘러 귀한 먹거리를 장만했다. 그리고 아전들을 불러 모았다.

"예천에서 가장 발 빠른 자가 누구냐?"

"어인 일로 그리하십니까?"

"도성에 다녀올 일이 있다."

"기한을 얼마나 주십니까?"

"내일 도착해야 한다."

하루 만에 예천에서 개경을 가라는 소리에 다들 기절초풍하는데 한 사내가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공방(工房) 임지한(林支漢)이었다. 예천에서 태어나 근면성실한 데다 늘 병법서를 읽어 좋게 보던 차였기에 수령은 반색했다. 하지만 수령 생각에도 무리는 무리였다.

"만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찌하겠느냐?"

임지한이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목을 바치겠습니다."

안도한 수령은 바로 먹거리를 내주며 반드시 시간을 맞춰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른 아전들이 "그 먼 길을 무슨 수로" 하며 걱정을 쏟아내는 가운데 임지한만 혼자서 천하태평이었다. 바로 채비해 떠나도 시간이 부족할 판에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칠순 노모를 챙기고 집안일을 마무리한 후 한숨 돌리기까지 했다. 외려 수령의 명으로 임지한의 뒤를 밟은 나졸이 애가 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밤이 이슥해졌다. 그제야 임지한이 노모에게 다정하게 고했다.

"어머니. 소자,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 밤에 어디를 간다고 그러느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주무시고 계시면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오냐. 오죽 알아서 잘할까."

집을 나온 임지한은 범우리로 향했다. 범우리는 본포리(本浦里)와 원곡리(原谷里) 사이에 자리한 우거진 숲이었다. '범 호(虎)'와 '울 명(鳴)'을 써서 호명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숲에 다다른 임지한이 어둠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나타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덩치가 산만 한 호랑이였다. 기실 임지한은 호랑이를 길들여 말처럼 타고 다녔다. 곧장 임지한이 말을 타듯 등에 오르자 호랑이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진 임지한은 다음날 수령의 부친에게서 서찰까지 받아 돌아왔다. 이 일로 임지한이 여산대호(如山大虎)를 부린다는 소문이 널리 파다하게 퍼졌다.

범우리 숲 호랑이 길들여 타고 다녀
수령 부탁 받고 이틀만에 개경 왕래
대마초씨로 빚은 술 먹여 반란군 평정
임금이 상주 다인현 예천 귀속 허락

"대장군 신령 깃든 고을 조심하라"
임란때 왜군 장수 제 올리고 물러나
사당 의충사 1978년 호우로 사라져


#2. 반란을 진압하다

원종이 근심어린 한숨을 흘렸다.

"반란이라?"

"예, 최종(崔宗), 최적(崔積), 최사(崔思) 무리가 난을 일으켰다 합니다."

100여 년에 걸친 무신정권 기간 경상도·전라도·양광도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193년(명종23) 가을에 청도 사람 김사미(金沙彌)가 일으킨 난은 후유증이 컸다. 초전(草田·울산) 사람 효심(孝心)과 연합해 국토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반란이었다. 보고가 이어졌다.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종, 최적, 최사 무리가 청송 주왕산에 1만여 명의 병력을 모아놓고는 이웃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곡식을 약탈하는 등 패악이 크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종 목적지가 도성이라 합니다."

"결국 게까지 중앙군을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

"그보다는 그곳 지세에 밝은 장수에게 일단 맡겨보심이 효율적이라 사료됩니다."

"마땅한 인물이 있는가?"

"예천 관아에 임지한이라고 병법에 능한 관리가 있습니다."

원종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임지한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임명한다. 그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라."

지엄한 어명이 예천에서 맡은 업무에 여념이 없던 임지한에게 전해졌다. 임지한은 뜻을 받잡고 그동안 갈고닦은 병법을 동원해 계책을 세웠다.

"병법의 가장 상책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임지한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다.

"내 곧 적진으로 들어갈 터이다. 너희는 안동으로 가 그곳에서 기다려라."

말을 마친 임지한은 홀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반란군에게 자신을 '고려에서 도망친 장수'라고 속인 후 투항했다. 임지한의 눈에 비친 반란군은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굶주림에 사기가 바닥을 쳤다.

그때 임지한이 나서 적장에게 제안했다.

"내가 안동에 가서 먹을 양식을 구해 놓겠소. 보름 후에 안동으로 집결하시오."

반란군은 의심하지 않고 임지한을 보내주었다. 안동에 도착한 임지한은 먼저 도착해 있던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누룩과 대마초 씨로 술을 빚고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했다. 약속한 날에 반란군은 안동에 도착했다. 그들은 경계를 풀고 음식과 술을 마음껏 마셨다. 시간이 흘러 반란군들이 술에 취해 쓰러지자 임지한과 그의 군사는 싸우지 않고 반란군 무리를 평정했다.

이 소식에 원종이 임지한을 불러 올렸다.

"그대의 공이 실로 크다. 삼중대광 벽상공신에 봉한다."

삼중대광(三重大匡)은 정1품의 품계이고 벽상공신(壁上功臣)은 초상화가 조정의 벽에 걸린다는 뜻이었다. 어마어마한 명예였다.

하지만 임지한은 벼슬을 사양했다. 대신 군세를 확장할 수 있도록 상주 관내의 다인현(多仁縣)을 예천에 귀속시켜 달라고 청했다. 원종은 감동해 바로 허락했다.

이후 임지한은 장군의 신분으로 예천과 다인을 수시로 왕래했다. 그때마다 범우리를 지나야 했는데 임지한이 탄 호랑이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원래도 포효했지만 그 소리가 더 커진 것이다. 그럼 산에 있는 모든 호랑이들이 산이 흔들릴 정도의 울림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호랑이들이 너도나도 포효하는 날이면 마을에선 "우리 임 장군님이 지나시나보다"고 짐작하며 마음을 놓았다. '범우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3. 죽어서도 예천을 지킨 장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이 부산에서부터 물밀 듯 북상하는 가운데 장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예천을 치고 들어왔다. 묵을 장소로 향교를 지목한 뒤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빠르게 어두워지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켰다. 두려움에 빠진 우키타 히데이에가 서둘러 향교를 벗어나 주민에게 물었다.

"혹 이 근처에 명장의 사당이 있소?"

주민들이 한 입으로 답했다.

"노상리(路上里) 객사 동쪽에 의충사(毅忠祠)라고 해서 임지한 장군님의 사당이 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바로 의충사로 향했다. 가보니 사당 벽에 아주 오래돼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노송(老松)과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였다.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에게서 안광이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상서로운 기운에 압도당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즉시로 향을 피우고 축문을 지어 제를 올렸다. 그리고 주민에게 사과한 후 병사들에게도 일렀다.

"이 고을은 대장군의 신령이 깃든 곳으로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날뛰어선 안 되며 살인이나 방화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경거망동했다가는 화가 우리 군 전체에 임할 것이다."

이로써 예천에서는 왜란으로 인한 큰 피해를 겪지 않았다.

영험한 일은 숙종 조에도 벌어졌다. 1717년(숙종43) 2월24일 왕에게 장계가 올라왔다.

"평안도 각 고을 백성으로 전염병을 앓는 자가 313명에 죽은 자가 10명이며, 전라도에서는 920여 명에 110명입니다."

하루 뒤인 25일에도 보고는 이어졌다.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 전염병을 앓는 자가 930여 명에 죽은 자가 150여 명이며, 충청도에서는 360명에 100여 명입니다."

이때부터 약 이태 동안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가 전국에서 무려 3만5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인구가 약 1천400만여 명이었으니 엄청난 피해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예천의 주민들은 임지한의 사당을 찾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장군을 향해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그 덕분인지 예천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의충사는 1868년(고종5)에 전국을 뒤흔든 서원철폐령 와중에 헐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랬다가 30년 뒤인 1898년(고종35)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1978년에 집중호우로 다시 붕괴되고 터만 남았다. 그 세월을 나무들이 지켜보았다. 사당 오른편에 서있던 감나무 두 그루와 왼편에 서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그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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