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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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0   |  발행일 2014-10-10 제40면   |  수정 2014-10-10
올드 트래퍼드의 벽시계가 1958년 2월6일에 멈춰 있는 까닭은?
[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올드 트래퍼드 구장 벽면에 붙은 시계. 바늘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시계판 위아래로 ‘1958.2.6. 뮌헨’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스토리는 평범한 팀을 위대하게 만든다.
[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우리 가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1958년 뮌헨 참사 직전 맨유의 선수들. 이 중 8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올드 트래퍼드의 기념품점 ‘메가 스토어’에 걸려 있는 선수 유니폼. “이건 단순한 옷이 아니라 맨유의 상징이야!”라는 말로도 정희의 지갑을 열 수 없었다.
[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18막 - 12번째 축구선수
축구공이 무척 갖고 싶은 정호.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축구공은 사지 못했지만 맨유를 사랑하는 정호의 열정이 귀하다.


#1 2013년 3월. 콜롬비아 산골마을 부에나비스타의 작은 운동장. 따스한 햇살아래 축구를 하던 정호와 동네 친구들이 잠시 잔디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니콜라스 야, 너희 어제 유럽 챔피언스 리그 2차전 봤어? 레알이 맨유를 1대 0으로 이겼잖아. (티셔츠 가슴에 펜으로 그려넣은 레알 엠블럼을 가리키며) 역시 축구의 명가는 레알 마드리드지.

르레르 (같이 낄낄대며)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 16강에서 다 떨어지고 꼴 좋다.

정호 아니, 중간에 나니가 퇴장만 안 당했어도…

니콜라스 (우쭐대며) 호세(정호의 스페인 이름)! 맨유는 이제 레알의 상대가 안 된다니까. 까불지 마. 하하하.

정호 (독백) 치~ 박지성만 있었어도 레알은 다 죽었…



그때 멀리서 동네 아이 한 명이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온다. 아이가 가까워질수록 허세 가득했던 니콜라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르레르 우와, 이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 맞지? 만져봐도 돼?

호르헤 (손 탁 쳐내며) 안 돼, 이거 귀한 거야. 손 씻고 만져.

니콜라스 (살짝 정색) 야, 호르헤. 그거 어디서 났어?

호르헤 우리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주셨어. 완전 폼 나지? 그지?

정호 (독백) 뭐지… 지난주에 시장에서 이 유니폼 본 것 같은데. 아빠가 가짜니까 폼 안 난다고 안 사주셨는데.

르레르 (부러워 어쩔 줄 모르며) 등 번호 11번이면?

호르헤 그래, 인마. 맨유의 레전드, 라이언 긱스라고. 이런 유니폼 정도는 입어줘야 진정한 팬이라고 할 수 있…

정호 (호르헤의 말을 자르며) 얘들아! 나 이번 여름에 영국 간다!

호르헤 (언짢은 듯) 뭐야, 호세. 진짜냐?

정호 그러엄! 맨유 홈구장 가서 경기도 직접 보고 축구공도 사올 거야.

니콜라스 (애써 무시하고는 공을 차며 자리를 뜬다)

르레르 우와! 짱이다, 호세! 내 것도 사다주면 안 되냐?

아이들 (앞 다투어) 내 것도, 내 것도!!

#2 세계 최초의 공업도시이자 영국 북부의 수도로 일컬어지는 맨체스터. 특히 100년 역사를 가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는 관광명소로도 유명해서 관객 7만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국 최대 규모의 축구장 중 하나다. 올드 트래퍼드 앞에 모인 수많은 관광객 사이로 재선 가족이 보인다.



정희 경기도 없는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재선 꼭 경기가 있어야 축구장 오나? 진정한 축구 팬이라면 이 유서 깊은 축구의 성지에 아니 올 수 없는 기라.

소영 아빠, 이 동상들은 뭐야? The United Trinity…

재선 이분들로 말할 거 같으면 맨유의 황금기를 이끈 골든 트리오지.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보비 찰튼!

정호 완전 멋있어요! 저기 있는 동상은 이 선수들의 스승, 버스비 감독 맞죠?

정희 축구 감독 이름 외울 열정을 학교 공부에 반만 쏟아도…

재선 너거 엄마는 여기까지 와서 또 공부 타령이다. (답답한 듯) 아~ 피 끓는 축구팬들의 맘을 니가 우째 알겠노.

정호 (앞서 달려가 바닥에 깔린 붉은 벽돌을 살핀다) 아빠! 여기 무슨 글씨가 쓰여 있어요.

재선 그거 다 맨유 선수 이름이다. 베컴도 있고, 박지성도 어디 있겠지?

정희 (못마땅한 듯) 리버풀에서 가까우니 오긴 왔는데… 난 여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경기도 없는데.

재선 카마 닌 비틀스도 없는데 리버풀은 와 갔노?



재선의 말에 발끈해 맞받아치려는 정희의 살벌한 표정을 보고는 소영이 황급히 말을 돌린다.



소영 근데, 아빠 왜 축구팀 이름에 유나이티드가 붙었어?

재선 일단 ‘유나이티드(United)’는 ‘연합, 결합’이란 뜻이지? 힘을 모아 합친다. 여기서 문제, ‘누가’ 힘을 모았다는 걸까?

정호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재선 맞아, 축구를 좋아하는 ‘노동자’들이었어. 예부터 맨체스터는 면직 산업과 철도의 요지로 유명했는데, 이 철도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짬짬이 공을 차다가 축구팀을 만들었고, 이 팀을 중심으로 1902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란 이름으로 재창단했지.

정호 그럼, 아빠, 레알 마드리드는요? 레알이 무슨 뜻이에요?

정희 (장난스럽게) 마드리드에서 ‘레알’ 잘 한다는 뜻 아니야?

재선 그런 수준 낮은 농담, 나중에 우리 애들이 배울까 겁난다. 야들아, 그게 아니고 영어로 ‘Royal’ 알지? 왕실이 인정한 축구 팀이란 거지. 옛날엔 왕실이 축구 팀을 후원했거든.

정호 아, 그래서 구단 엠블럼에 왕관 그림이 있구나.

소영 아, 니콜라스가 티셔츠에 왕관 그린 게 그거 때문이었네.

재선 왕실의 후원을 받은 레알 마드리드와는 달리 FC바르셀로나는 완전한 시민구단인데…

정희 (절레절레) 남자들 얘기 중에 제일 지겨운 게 군대 이야기, 그보다 더 지겨운 게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어마무시한 콤보지!

재선 아이고 누구는 비틀스가 알바하던 카페 이름까지 줄줄 꿰더니 스포츠는 이리도 무심하실까. 서로의 취향은 좀 ‘리스펙트’ 해줍시데이.



경기장 밖을 둘러보던 재선 가족, 경기장 벽면에 붙은 시계 조형물에 발길을 멈춘다.



소영 아빠, 저 시계 위에 날짜가 이상해.

정희 그러네. 1958년 2월6일, 뮌헨이라고 적혀 있는데?

재선 스토리가 평범한 축구팀을 명문으로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시간을 거슬러 때는 1958년 2월6일. 맨유 선수단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유러피언컵 준결승행을 확정짓고 돌아오던 길이었어. 잠시 중간에 독일 뮌헨에서 연료공급을 받고 다시 떠나려는데, 며칠 전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두 번이나 이륙에 실패한 거지.

소영 그랬는데도 계속 이륙 시도를 해요?

재선 옛날엔 그랬어. 잠시 내렸던 선수단이 다시 비행기에 탄 게 화근이었지. 비행기는 이륙하다가 공항 벽에 충돌했고, 선수와 코칭스태프까지 15명이 죽었어.

정희 어머…. 너무 안됐다.

재선 그런 아픔이 있었지만 맨유는 그해 FA컵 결승까지 올라갔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선수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저 시계는 시간은 정상적으로 가지만, 날짜만큼은 사고 당일인 1958년 2월6일에 멈춰 있는 거야.

정호 (벽시계 보고) 아빠, 이제 경기장 투어할 시간인데요? 빨리 가요! (독백) 그래, 경기는 못 봐도 경기장엔 들어갈 절호의 기회야.

정희 근데, 가격이 너무 비싸. 한 명당 18파운드나 하더라고.

소영 선수도 없는 텅 빈 경기장에서 뭘 보는데?

정호 (독백) 이 눈치 없는 누나! 축구의 ‘축’자도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

재선 뭐…. 박물관도 보고 또 축구장도 구경하고…. 어! 그래, 선수들 라커룸도 보고!

정호 (독백) 아버지 나이스 샷! 좀만 더 힘내줘요. 이제 조금만 더!

정희 경기 없어도 라커룸에 선수들이 있나?

재선 경기 없으니… 선수들도 없지.

정호 (독백) 어머니, 선수들은 없지만 축구 영웅들의 혼이 있을 겁니다. 그들의 정신. 맨유의 혼 말입니다.

정희 (재선의 말에 대뜸) 그럼 안 봐도 되겠네.

소영 자, 그럼 기념품점 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올드 트래퍼드’는 끝!

재선 우리 집 여자들 스포츠를 너무 이해 못해. (멍하니 서있는 정호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올드 트래퍼드의 기념품 가게 ‘메가 스토어’로 들어간 재선 가족, 비싼 가격에 축구공조차 사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정호 옆에 재선이 다가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재선 정호야, 저기 경기장 보이지? 귀 잠깐 막고… 상상해 봐.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의 열정, 관객들의 뜨거운 함성…! 그게 들린다면 이정호 니는 진정한 축구의 12번째 선수, 자랑스러운 맨유의 서포터다!



#3 2013년 9월, 콜롬비아의 부에나비스타 운동장. 동네 아이들과 섞여 축구를 하던 정호 앞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팬인 니콜라스가 뛰어온다.



니콜라스 헤이, 호세! 축구공 샀어? 경기 봤어? 맨유 유니폼은?

정호 쉿. 얘들아! (아이들과 함께 귀를 막고 경기장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니콜라스 (어리둥절) 너네 뭐하는 거냐?

정호 (엄숙하게) 제군들, 들리는가. 이 뜨거운 함성이…

아이들 (엄숙하게 고개만 끄덕인다)

니콜라스 (정호와 아이들 얼굴을 번갈아보다 자기도 귀를 막고 운동장을 바라본다. 무슨 영문인지 여전히 모른 채)

문화점조직 이공컬처 대표 20cultu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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