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포 물길 돌아… 삼강주막 술길 따라…

  • 이춘호
  • |
  • 입력 2018-08-17   |  발행일 2018-08-17 제33면   |  수정 2018-08-17
예천 ‘醴’단술 뜻…신라때 지명은 물·술의 ‘수주현’
대표적 노포 용궁양조장 반세기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용궁막걸리·순대, 방송 예능프로그램 소개후 유명세
삼강리부녀회 나서 주모役 ‘삼강주막’ 관광객 몰이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예천
20180817
내성천의 물길이 350도로 휘감아 도는 예천의 대표적 관광상품 회룡포. 안동 하회마을, 영주 무섬마을과 함께 경북을 대표하는 물돌이마을로 유명하다. 회룡포의 저 구불거림은 석송령과 금당실마을 송림의 기운에 합쳐지고 맑은 물은 용궁막걸리·삼강막걸리와 소통을 한다.
20180817
2006년 ‘낙동강 마지막 주모’로 불렸던 유옥연 할매가 작고하면서 방치된 것을 삼강리 부녀회가 앞장서 살려내 현재 문화단지로 격상된 삼강주막. 200년된 회화나무가 그 시절 보부상과 소금배 사공의 사연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주당들은 삼강막걸리 최고 안주로 배추전을 꼽는다.

‘풍토(風土)’란 말이 있다. 특정한 공간에 들어선 대지는 자신을 닮은 풍물(風物)을 토해낸다는 의미다. 예천을 대표하는 풍물은 뭘까? 단연 물이 아닐까. 예천(醴泉)의 ‘예(醴)’는 ‘단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천이라는 지명은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주현(水酒縣)이 예천군으로 바뀌면서 처음 생겨났다. 오죽 물이 좋았으면 신라 때 지명에까지 술 ‘주(酒)’ 자가 들어갔겠는가. 그래서 예천푸드로드의 첫머리를 예천의 술 얘기로 해본다.

이젠 예천의 대표적 노포가 된 ‘용궁양조장’. 용궁면의 랜드마크로 아직도 반세기 전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근대화 과정에 술도가는 정미소와 함께 행세깨나 하던 돈벌이였다. 다들 부자가 됐다. 하지만 호시절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고만고만한 규모의 시골 양조장은 대다수 전국구 맥주와 지역구 소주, 유명 전통주, 심지어 토종와인 등의 등장으로 맥도 못 추고 쓰러졌다. 용궁양조장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예전에는 토박이들이 애향심에서 그 바닥 막걸리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광고와 판촉마케팅 등을 등에 업고 전국을 호령하는 별별 민속주에 고개를 돌린다. 용궁탁주도 이제 겨우 명맥만 이을 정도다.

이 양조장은 술보다 1958년에 준공된 적벽돌조 공장 건물이 더 유명하다. 벽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도 폭염 탓인지 고사 직전인 것 같다. 2층 같은 1층짜리 건물이지만 예전에는 용궁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최근 해묵은 이 건물의 가치가 뒤늦게 인정돼 경북산업유산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새로운 간판도 지자체에서 달아주었다.

15세 때 용궁양조장에 들어와 술 배달로 막걸리 양조업계에 들어온 권순만 대표(72). 기자가 찾은 날 그는 더위에 파김치가 돼 있었다. 아내와 함께 고요하기만 한 작업장 한편에서 폭염의 8월을 견디고 있다. 1960~70년대는 묻지마 용궁막걸리였다. 교통 때문에 다른 고장 술이 거기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다들 자기 동네 막걸리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동네 막걸리는 김치와 마찬가지로 그 바닥의 고유한 풍미를 갖고 있다. 그것에 맛을 들이면 다른 것에는 거부감이 느껴진다.

좋은 시절에는 하루 400말 정도 팔렸다. 지금은 턱없이 덜 나간다. 예전 용궁면에는 술도가가 3곳(용궁, 덕개, 대은) 있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막걸리 공장이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된다. 용궁도 6인의 사장이 지분을 가진 합동양조장으로 탈바꿈된다. 숨져가던 용궁양조장이 유명해진 계기는 예능프로그램 ‘1박2일’. 그렇게 해서 용궁막걸리는 근처 용궁시장의 명물 용궁순대와 함께 조금씩 알려지게 된다. 찾는 사람이 늘면서 술도가가 버텨낼 힘을 갖게 됐다. 밀가루로 만들던 막걸리도 쌀막걸리로 변신하게 된다. 지금도 용궁면의 인심은 푸짐해 방문자에겐 막걸리 한 잔을 시식용으로 건넨다. 안주는 왕소금 한 꼬집.

이제 발길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마지막 주모 고(故)유옥연이 2006년까지 앙상하게 지키고 있었던 ‘삼강주막’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이 주막을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이라고 부른다. 낙동강 1천300리에 주렴처럼 박혀있던 수많은 주막은 온갖 매머드 교량이 들어서는 바람에 1960년대로 접어들면 거의 무용지물이 된다. 문경새재를 넘기 전 거기서 한숨을 돌렸던 그 시절 보부상과 조운선 뱃사공, 그리고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 하루 30여차례 나룻배가 왕래했던 시절 잘나가던 삼강주막. 하지만 바로 옆에 삼강교가 생기면서 주막은 조용히 임종에 든다. 경북도가 2005년 주요민속자료로 지정해준다. 바로 옆 삼강리 부녀회도 집단으로 주모가 돼준다. 그 바람에 삼강주막은 전국구 문화단지로 몸집이 커진다. 1900년 주막이 생길 때는 낙동강이 주막 툇마루에서도 보였는데 이젠 보이지 않는다. 1934년 대홍수 때 많은 가옥이 유실된다. 그때 주막 한 채와 수령 200년이 넘는 회화나무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이젠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삼강리 마을에서 만든 삼강막걸리와 궁합이 딱 맞는 명물 안주인 배추전과 메밀·도토리묵이 잘 팔려 나간다. 덕분에 봉놋방 같은 부속건물이 여러 채 생겨났다. 글을 몰랐던 유옥연 주모의 손길이 닿아 있는 ‘외상장부벽’은 보호를 위해 아크릴판으로 덮어 씌워 놓았다.

구불구불한 삼강의 물길. 그 물길의 기세는 예천을 대표하는 여러 낙락장송을 잉태하게 한다. 그 장송의 유장함은 회룡포와 무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세금을 내고 적잖은 막걸리까지 제주로 받아먹는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석송령(石松靈)은 별난 팔자를 갖고 있다. 솔잎만큼이나 정정한 그 소나무를 만나러 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