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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2018·맨 위 큰사진), 작은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순례 감독, ‘세 친구’(1996)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날아라 펭귄’(2009)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 ‘남쪽으로 튀어’(2012) ‘제보자’(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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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이 데뷔하던 1990년대 초는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이 감독을 꿈꾸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임순례 역시 영화 연출의 꿈을 접고 영문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시절 프랑스문화원을 통해 색다른 영화들을 접하면서 점점 영화에 대한 갈증은 커져갔다. 결국 프랑스 파리8대학으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충무로에 입성한다. 그 시기 임순례는 변두리 3류 극장에서 근무하는 매표직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우중산책’(1994)을 만들어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된다. 마침 삼성영상사업단을 통해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에 유입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충무로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영화제 수상으로 비교적 빠르게 장편 연출의 기회를 얻는다.
‘세 친구’(1996)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3명의 친구가 입영 통지서를 받고 군 면제를 받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야기를 담담하고 과장없이 그렸다. 배우 김현성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연출 뿐 아니라 제작과 기획, 각본까지 맡은 임순례는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받으며 아쉬운 흥행 성적을 달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는 학창시절 최고의 록 밴드를 꿈꿨던 청년들이 중년이 되어 고달픈 현실 속에서 밤무대 밴드로 활동하며 생활에 치여 허덕이는 이야기를 쓸쓸하게 담아냈다. 배우 황정민, 박해일, 류승범, 박원상, 오지혜가 나온다. 제작사 명필름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 ‘제3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작품상을 수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작품성에 비해 흥행이 저조했던 ‘나비’ ‘라이방’ ‘고양이를 부탁해’와 함께 4편을 모아 상영하는 ‘와나라고를 부탁해’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울 단편영화제 최우수상…장편 연출 기회
데뷔·차기작은 부진, ‘우생순’으로 도약 발판
인권문제 따뜻한 응원으로 담은 ‘날아라 펭귄’
소확행 이야기로 젊은층 지지 ‘리틀 포레스트’
프로듀서·제작자 참여 다양한 작품 무한 애정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은 데뷔작과 차기작에서 흥행에 실패했던 여성감독이 30대 여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핸드볼 영화였다. 한국영화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던 이 영화는 2008년 개봉 당시 400만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AP통신이 선정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10대 명승부전’에 올랐던 핸드볼 경기에서 세계최강 덴마크에 맞서 명승부를 펼쳤던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실화를 담았다. 배우 문소리, 김정은, 김지영이 출연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함께한 명필름과 다시 작업한 작품으로 6년 만의 복귀작이었다.
‘날아라 펭귄’(2009)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7번째 인권영화로 사교육과 직장 내 차별, 기러기 아빠, 황혼 이혼 같은 문제들을 4개의 에피소드에 담아 보여준다. ‘우생순’에서 함께했던 배우 문소리와 박원상, 박인환, 정혜선이 출연했다. 신랄한 비판보다 따뜻한 응원으로 세상을 달래는 영화다. “인권문제를 가볍게 풀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영화는 캐릭터들의 사연을 통해 공감을 끌어내며 신랄한 비판보다 따뜻한 응원으로 세상을 달랜다. ‘워낭소리’와 ‘똥파리’를 제작, 투자했던 ‘스튜디오 느림보’가 첫 번째로 배급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은 소설가 김도연이 쓴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우시장에 몰래 소를 팔러 갔다가 소와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는 한 남자의 내적 성장을 그린 로드 무비다. 배우 공효진과 김영필과 작업했다. 전작들과 달리 주인공의 불교적 깨달음을 묘사하는 판타지가 이채롭다.
‘남쪽으로 튀어’(2012)는 나오키상 수상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배우지도 가지지도 말자’를 가훈으로 삼아 국가로부터 자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아나키하고 괴팍스러운 남자가 벌이는 모험기를 그렸다. 배우 김윤석, 오연수, 한예리가 주연을 맡았다. 제작 당시 연출권 침해 논란으로 임순례는 적잖이 상처를 받기도 했다.
‘제보자’(2014)는 MBC ‘PD수첩’에서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황우석 박사 사건을 취재한 담당 프로듀서였던 한학수 PD의 책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를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를 임순례가 제작자에게 받아 작업에 들어간 작품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함께한 배우 박해일과 유연석, 이경영과 작업했다. 실존했던 사건 자체보다는 언론인의 집요한 취재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고.
‘리틀 포레스트’(2018)는 일본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고단한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온 주인공이 사계절의 자연 속에서 오랜 친구들과 다시 만나 직접 만든 음식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로 데뷔한 배우 김태리와 유준열, 진기주, 문소리가 나왔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문 한국영화계에서 젊은 관객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흥행에도 성공한다.
임순례가 언급한 장편영화만이 아니라 단편영화들과 연출이 아닌 프로듀서와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들 역시 주목해볼 만하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처음이었던 ‘여섯 개의 시선’(2003) 속의 ‘그녀의 무게’와 임순례가 제작 총괄을 맡기도 한 ‘미안해, 고마워’(2011) 속의 ‘고양이 키스’는 작품성도 그렇지만 감독의 삶과 철학이 깃든 작품이라 반짝인다. 박경희 감독의 ‘미소’, 이광국 감독의 ‘로맨스 조’, 최정열 감독의 ‘글로리데이’ 같은 작은 영화들에 대한 애정도 잊지 않는다.
지난해 9월28일부터 12월5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후대의 여성감독들에게 선구자적인 존재로 평가 받는 6명의 여성감독을 조명한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가 전시되었다. 대학 영화과 학생의 남녀 성비가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메인 스트림에 진출하는 여성 감독의 수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현실 앞에서 임순례 감독의 존재는 소중하기만 하다. 나는 지금 더 많은 ‘임순례’가 보고 싶다.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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