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제자리

  • 서정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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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16  |  수정 2024-05-16 09:06  |  발행일 2024-05-16 제19면

[문화산책] 제자리
서정길<수필가>

큰댁 종형이 문자를 보내왔다. 묘에 잡초를 제거하러 가잔다. 해마다 두어 차례 산소를 찾아 제초 작업을 하지만, 예년에 비해 늦은 소집령이다. 아까시나무를 제거할 톱과 곡괭이에다 제초제까지 짊어져야 할 무게가 만만찮다. 해가 갈수록 산소 관리가 힘에 부치건만, 일할 젊은이가 없으니 올해도 두 사람의 몫이 되고 말았다.

산소까지는 경사가 심해 쉼터에서 잠시 쉬던 중 그곳에서 등산하던 지인을 만났다. 그는 우리의 사정을 듣고는 대뜸 요즘 어떤 시대인데 묘역을 가꾸는 데 시간을 허비하느냐며 면박하는 게 아닌가. 말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는데 함부로 내뱉는 말 같아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듣고 있던 종형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제야 슬며시 자리를 떴다.

묘역에는 민들레, 쑥, 씀바귀와 이름 모를 잡초들이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엄동설한을 용케 이겨낸 끈질긴 삶이 경이롭긴 하지만, 오늘은 매의 눈으로 그것들이 숨은 곳을 샅샅이 뒤진다. 잡초도 원래 고유의 이름이 있겠지만, 그 이름을 불러주지는 않는다.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앙증맞게 핀 제비꽃이 제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묘역에 뿌리를 내렸으니 가차 없이 제거할 잡초일 뿐이다.

풀은 목질 없는 가녀린 식물을 일컫는다. 초본 식물인 풀도 도처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지구에 정착한 이래 풀은 억겁의 세월 동안 사람과 상호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존 터인 경작지에 뿌리를 내리는 한 관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야생화라 해도 잡초일 뿐이다. 사실 풀과 잡초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대상이 아니라 어느 장소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부추밭에 자라는 쑥갓이 농부의 눈에는 잡초로 보이듯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자라면 잡초로 취급당하게 된다.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제자리에 있어야 진가가 드러난다. 설령 세상에 한 점뿐인 세한도라 해도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제 몫을 한다. 하지만 어느 산골 외딴집에 걸어 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 사이에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행동해야 한다. 상대를 생각해서 하는 말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만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다.

지인 눈에는 산소를 돌보는 일이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이자 제자리를 지키는 일인 것임을.
서정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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